감추거나 까발리거나…젊은 '형벌'이 본 다른 세상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 & 라이즈호텔
좌혜선, 개인전 '가장 보통의 이야기'서
100호크기 20m 목탄드로잉 15점 연결
쓸쓸한 '일의 보통 삶' 관조하듯 풀어
아시아4인작가그룹전 '시차적응법'선
부조리·불안·강박 등에 4색 해법 찾아
  • 등록 2018-07-30 오전 12:12:01

    수정 2018-07-30 오전 1:32:57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점에 내건 좌혜선의 목탄드로잉 연작 ‘가장 보통의 이야기’(2017∼2018) 중 4번째(왼쪽)와 라이즈호텔점에 전시한 중국작가 주시앙민의 ‘싸움’(2016). 좌혜선이 일상의 보통삶을 ‘감추듯’ 드러냈다면 주시앙민은 꿈틀대는 거친삶을 ‘까발리듯’ 표현했다(사진=아라리오갤러리·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처음부터 혼자였던 세상이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숯검정을 잔뜩 묻힌 거리는 쓸쓸한 외로움을 얹은 사람 하나둘이 스칠 뿐이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 길가 벤치에 앉은 사람, 다리 난간에서 물 위 도시를 바라보는 사람, 건널목 신호등 불빛을 세는 사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은 고작 뒷모습이나 옆모습으로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맞다. 이들은 기다리는 중이다. 도심의 온갖 소음까지 먹어버린 지독한 정적이 자신들 ‘보통의 삶’을 어서 뱉어내길.

좌혜선의 ‘귀가 2’(2018). 장지에 분채로 채색했다. 작가는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얼굴 감춘 사람의 일상’을 관조하듯 내다본다(사진=아라리오갤러리).


#2. 규칙적인 파열음이 신경을 자극한다. 소리를 좇아간 그곳에는 어깨헬멧과 홀로 움직이는 장갑, 불 밝힌 헤드라이트가 매달려 있을 뿐. 바닥에 널브러진 운동화는 몸체 잃은 오토바이족 대열의 비장한 출발선에 대신 섰다. 그 뒤로 돌아선 공간에는 격정의 장면이 차례로 이어진다. 짧고 길고 동그랗게 잘라낸 캔버스에 몽치듯 얹은 물감·사물의 어지러운 배치가 보이고, 여러 장 겹쳐 그려낸 복서들의 격한 싸움판도 보인다. 매직과 스프레이로 구현한 영적 세상은 불안한 주문을 외워대고.

인도네시아작가 좀펫 쿠스위다난토의 ‘파워풀 유니트’(2018). 거죽뿐인 오토바이족 대열의 무의미한 동작을 꺼내 정체성을 잃은 영혼의 행렬을 표현했다. 인도네시아의 부조리한 사회역사적 구조를 은유했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중견화랑 아라리오갤러리가 젊은 작가들을 내세워 여름 전시장을 후끈 달구는 중이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 삼청점에선 한국화가 좌혜선(34)이 개인전 ‘가장 보통의 이야기’를 열고 있다. 마포구 양화로 라이즈호텔점에선 아시아작가그룹전 ‘시차적응법’을 펼쳤다. 좀펫 쿠스위다난토(42·인도네시아), 주시앙민(29·중국), 백경호(34·한국), 심래정(35·한국) 등이 함께 꾸린 4인4색전이다.

평균나이 35세.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내용을 채우며 형태를 다듬는 빛나는 시절이 아니던가. 하지만 젊음이란 축복 아닌 형벌인 때가 적잖은 법. 관건은 그 형벌을 어떻게 풀어내느냐 일 텐데. 전시는 이들 작가들이 제각각 헤쳐놓은 세상이야기고 형벌이야기다. 덕분에 두 전시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고, 또 비슷하다. 세상을 꿰뚫는 시선, 그 시선을 드러내는 방식은 영 딴판. 그럼에도 묵직한 감성·생각을 품어내는 진지한 자세는 다를 게 없다. 예상할 수 있듯 상이한 색감, 특별한 형체로 ‘감추거나’ ‘까발린’ 두 전경의 대치가 묘하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극적인

전시장 벽면을 통째 휘감은 20여m의 ‘가장 보통의 이야기’(2017∼2018). 별개의 풍경을 목탄드로잉으로 이어붙인 대작이다. 100호(161×131㎝) 크기의 연작 15점을 연결해 거대한 파노라마로 완성했다. 봄날 한적한 공원에서 시작한 화면은 여름밤 가로등 불빛을 지나, 가을비 내리는 거리를 스치고, 눈발 흩날리는 도심 한복판에 던진 무심한 시선으로 끝난다. 반복해 선을 긋고 손으로 문질러 완성한, 좌혜선 작가가 뽑은 ‘사계절 삶의 연작’이다.

좌혜선의 ‘가장 보통의 이야기’(2017∼2018) 연작 중 부분. 100호 크기의 목탄드로잉 15점을 연결해 20여m 대작으로 완성한 ‘사계절 삶의 연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장면 하나하나는 예의 그 ‘쓸쓸한 외로움’을 채웠다.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군가와 말을 섞는 법이 없다. 그저 걷다가 멈추고 서 있거나 앉아 있다.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자처한 그들. 좌 작가는 “일상에서 어떤 삶의 모습이 가장 보통인가”를 생각해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극적인 형태가 잡히더란 건데. 그래서 ‘누군가 살아가는 이야기’에 늘 관심을 가져왔단다. ‘부엌’ ‘여성’ ‘조명’ 등 집 안에 머물던 시선을 밖으로 빼낸 게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라고 할까.

좌혜선의 ‘강변’(2018). 장지에 분채로 채색한 회화다. 검은 배경에 조명을 비추듯 한두 색만 씌운 작품은 목탄드로잉의 거리를 클로즈업한 형태처럼도 보인다(사진=아라리오갤러리).


이번 전시는 한마디로 ‘얼굴 감춘 사람들의 집 밖 일상’인 거다. ‘강변’(2018), ‘귀가’(2018), ‘출근길’(2018) 등 장지에 분채로 두텁게 덧칠한 회화 7점도 다르지 않다. 검은 배경에 조명을 비추듯 하늘·달·창·꽃 등에 한두 색을 씌운 작품들은 목탄드로잉의 거리를 클로즈업한 형태처럼도 보인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사람들, 작가는 어둠 속에 박힌 그들을 관조하듯 내다보고 있는 거다.

특이한 건 좌 작가가 직접 썼다는 짧은 소설 15편. 각각 다른 필체를 빌려 손으로 쓴 글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었는데. 4∼5년 전 ‘방문미술교사’를 하던 때 얻어들은 ‘사연’이 모티브가 됐단다. 결국 소설 속 사람들이 뚜벅 걸어 나와 그림으로 들어선 건 아닐지. 그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한동안 이어질 모양이다. 전시는 19일까지.

작가 좌혜선이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점에 건 목탄드로잉 연작 ‘가장 보통의 이야기’(2018) 앞에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일방적인 세상시차에 적응하는 4가지 방법

한 명의 인도네시아작가와 한 명의 중국작가, 또 두 명의 한국작가가 고민하는 건 하나다. 세상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시차에 어찌 적응할 것인가. 전시 ‘시차적응법’은 이들 4인이 제시한 그 좌표고 해법인 셈이다.

좀펫 작가를 내리누른 건 인도네시아의 부조리한 사회역사적 구조란다. 오랜 식민지배와 독재가 무너뜨린 건 생존문제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거죽뿐인 오토바이족 대열의 무의미한 동작을 꺼내놓은 ‘파워 유니트’(2015)처럼 세계는 정체성을 잃은 영혼의 행렬과 다를 게 없었던 것. 그렇다면 식민통치의 상징이라 할 샹들리에 아래 혼자 울리는 북을 설치한 ‘파라다이스에서’(2018)가 해결책이 될까. 공허한 메아리가 될지언정 세상을 깨울 북소리는 계속 울려 퍼져야 한다는.

인도네시아작가 좀펫 쿠스위다난토의 ‘파라다이스에서’(2018). 식민통치의 상징이라 할 샹들리에 아래 혼자 울리는 북을 배치한 설치작품을 내놓고 부조리한 사회역사적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해법을 모색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중국사회는 여전한 희망이자 불안이란다. 권투선수의 과격한 경기에 주목한 주시앙민 작가는 ‘싸움’(2016)과 ‘복서’(2016)로 거친 시대상을 표현했다. 태국여행 중 본 전단지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작품에는 1차원적으로 꿈틀대는 인간형상이 가득하다. 특이한 건 장면을 중첩하는 방식. 레이어를 덧대 마치 추상처럼 보이는 구상, 그것이 그가 보는 세상이다.

백경호 작가는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빠져 있다. 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상을 그린다는데. 이를 위한 실험도 거침없다. 잘라낸 사각 캔버스 중심에 동그란 캔버스를 넣어 ‘스마일 피겨’를 만든다든지, 원색의 선과 면 사이에 티셔츠를 걸어 물감과 섞이게 한다든지.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환상이란 ‘천사’ 시리즈(2018), 복잡한 인간세계의 층위를 밀집해낸 ‘꽃무덤’ 시리즈(2018)가 그렇게 나왔다.

백경호의 ‘천사’(2018). 사각 캔버스를 잘라낸 공간에 동그란 캔버스를 넣어 ‘스마일 피겨’를 만들어냈다. 원색의 강렬한 선과 면 사이에 티셔츠를 걸어 조화를 꾀하는 등 회화적 실험이 거침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극한의 강박과 집착도 젊음에선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아닌가. 그 지점에선 단연 심래정 작가다. 지난 3년간 ‘식인왕국’ 시리즈를 이어온 그이는 인육통조림에 쓰였다는 희생자 모넬라에 대한 이야기를 비로소 완결했다. 한 팩트에서 시작한 서사구조를 그간 심령으로 유령으로 거침없이 확대해왔는데. 원초적 외로움·두려움도 결국 소통 없는 관계에서 나왔다는 주제를 때론 으스스하게 때론 코믹하게 풀어낸다. ‘식인왕국’(2018) 연작을 비롯해 ‘모넬라’(2018) 연작, 이들을 수백장 중첩한 ‘애니메이션 식인왕국’(2018)까지, 검은 매직과 검은 스프레이만으로 건져낸 세상에 홀로 섰다. 전시는 10월 7일까지.

심래정의 ‘식인왕국’(2018) 연작. 인육통조림에 쓰였다는 희생자 모넬라에 대한 이야기를 3년여에 걸쳐 비로소 완결했다. 원초적 외로움·두려움도 결국 소통 없는 관계에서 나왔다는 주제를 확대한 형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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