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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동시대 미술에서 ‘잘 그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 사진기가 고도로 발달해 ‘똑같이 그리는 것’에 대한 필요나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 설치미술이나 영상매체가 미술계의 주요 문법이 돼 회화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 미술대학 입시에서조차 실기평가 항목이 사라지는 판국에 계속 미술가에게 ‘손의 기술’을 기대해도 될까.
시대의 흐름이 어떻든지 간에 여전히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잘’ 그리는 그림을 고수하는 ‘화가’가 있다. 중국 미술가 류샤오둥(劉小東·60)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말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며 “일은 제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보자. 과연 그는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싼샤대이민’(2003)은 류샤오둥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림 속에서 여섯 남자는 일렬로 서서 기다란 철근 같은 것을 함께 메고 운반하고 있다. 제목을 통해 이들이 쌴샤댐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인물의 묘사는 완벽하다. 인체의 비례는 물론 골격·근육 등이 정확하고, 각 사람의 자세, 얼굴의 인상을 통해 성격까지 표현됐다. 배경 또한 허투루 그리지 않았다. 왼편의 깎인 산과 너저분한 자재로부터 시작해 파란 지붕의 건설 현장을 거쳐 오른쪽 후방의 넓은 강과 푸른 산까지.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 사진, 또는 옛 두루마리 산수화 같다.
여기까지만 보고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는데’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 아직 류샤오둥의 실력이 미심쩍다면, 그림의 크기를 봐주시라. 무려 가로길이 8m, 세로길이 2m다. 그림 속 인물들이 실제 사람 크기보다도 살짝 웃돈다는 얘기다. 이렇게 큰 화면에 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서 묘사하고, 멀리서 전체적인 균형을 잡는 과정을 쉬지 않고 반복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다. 세부와 전체를 한번에 조망하는 시각과 화면에 대한 경영능력이 있어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림인 거다. 커다란 캔버스를 채우는 붓놀림은 또 어찌나 맛깔난지 모른다. 물컹거리는 물감이 캔버스 표면을 만지며 지나간 흔적들이 꿈틀댄다. 요즘에도 이런 크기의 캔버스에 이렇게 물감을 직접 발라가며 작업하는 작가가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탁월하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찬양·미화는 없다…눈앞의 현실 똑바로 보고 똑같이 그려
중국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꼽히는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한 류샤오둥은 특히 인물화에 능하다. 여전히 모델을 세워 두고 사실주의적인 방식을 가르치던 1980년대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고, 졸업 후에도 구상회화를 놓지 않았기에 점점 더 솜씨가 무르익기도 했던 터다. 그 좋은 솜씨로 류샤오둥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주변 인물들을 그린다. ‘훨씬 더 멋진 것을 그리고도 남을 실력에 왜 고작 일상 따위를 그리는 걸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선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1989년 톈안먼사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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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반전이 있다. 평범한 일상을 가감 없이 그렸다는 것이 중국 미술사에서는 의미를 갖는다. 이전의 중국, 그러니까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 미술을 떠올려 보자. 예를 들어 군인을 그릴 때면 무조건 이상화시켰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신체, 나라에 충성하는 심각한 얼굴. 현실이 어떻든 그림은 마땅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류샤오둥이 그린 군인은? 껄렁껄렁하다. 패기 없는 얼굴에 대충 입은 군복, 짝다리 짚은 자세까지. 군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현실 그 자체다.
여섯 남자를 줄지어 세운 ‘싼샤대이민’도 마찬가지다. 싼샤댐 건설은 국가주도의 사업이었다. 예전이라면 댐 건설 프로젝트를 찬양하는 그림만 존재했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대신 허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영웅 노동자로 도배됐을 터. 그러나 류샤오둥은 그런 ‘뻥’은 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피곤할 뿐이다. 눈앞의 현실을 똑바로 보고 똑같이 그렸기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현실기록화라 할 법하다. 미술사에 길이 남은 역사화에 버금가게 크게 그린 것 또한 ‘동시대 역사화’를 남기고자 하는 패기가 아니겠는가 싶다.
그러나 미술가의 목적이 단지 ‘기록’일 리 없다. 그건 보도사진이 더 잘하는 일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안다. 화가라면, 그것도 세계적인 미술가로 꼽힌다면, 그림에는 분명 또 다른 의미가 있을 터. 류샤오둥의 작품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갖는다. 예를 들어 ‘싼샤신이민’(2004)은 정부가 마음대로 사람들의 주거지를 제한하고 이동시킨 데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담아낸다.
중국 이슈 넘어 환경위기·경제격변 등 국제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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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둥은 정부의 이런 폭력적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림 왼쪽의 아이들부터 오른쪽의 돼지들까지, 화면 속 모든 존재는 류샤오둥이 각기 따로 찍은 이런저런 사진에서 발췌한 것이다. 중국 정부가 멋대로 주민을 이주시킨 것과 똑같이 각기 다른 시공간에 속한 인물·동물을 작가 마음대로 한 화면에 조합한 거다. 그렇게 낯선 곳으로 옮겨간 그림 속 인물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생경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류샤오둥의 그림이 어딘지 불편하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와 잘 그렸다!” 터져나오는 감탄 뒤에 숨은 날카로운 비판. 노골적이진 않아도 분명히 느껴지는 메시지. 류샤오둥이 그저 잘 그리기만 하는 화가가 아닌 이유다.
미술계에도 유행이란 것이 있으며, 그 유행은 그 어느 분야보다 빠르게 변한다. 반면 그림을 보는 대중의 눈, 그림을 향한 기대는 그만큼 빠르게 변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는 여전히 미술가라면 응당 잘 그리겠거니 기대하고, 화가의 기가 막힌 손맛을 보고 싶어 한다. 이런 대중의 기대를 가뿐히 충족시키면서도 의미심장한 의미를 품은 새 시대, 아니 동시대 역사화를 그리는 사람이 바로 류샤오둥이다.
최근 류샤오둥은 중국의 이슈를 넘어 환경위기나 경제격변 등 굵직한 세계적 주제를 다룬다. 나날이 어렵고 복잡해지는 시대에 류샤오둥이 앞으로 그려나갈 새로운 역사화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면서도 두려운 마음도 든다. 과연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