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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던 중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거나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진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뒤통수를 얻어맞는가 하면 무심히 지나가던 타인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 때, 인생은 계획이고 뭐고 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의 결정이 내일 어떤 얼굴로 드러날지 알 수 없기에 막연한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일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점쟁이들은 이러저런 형태로 불안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연애운이 어떤지, 재물운이 어떤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 수정구슬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손금도 보고, 카드를 뽑아 뒤집기도 하고, 접신을 하기도 하고, 태어난 날짜와 시간으로 규칙을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는 ‘점쟁이’(1630s)에서 매우 정밀한 필치로 점쟁이가 점을 보는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라 투르의 ‘점쟁이’는 두 점이 있는데,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 외에도 다른 한 점은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두 점 모두에서 라 투르는 기본적으로 점을 본다는 것은 속고 속이는 과정이라고 봤다. 메트로폴리탄의 ‘점쟁이’는 20세기 중반 뒤늦게 발견돼 진위논란이 있었지만, 미술사학자와 큐레이터, 감정가들이 10여년간 지상논쟁을 거쳐 1980년대에는 진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림 속 인물들이 입은 옷의 직조패턴부터 남성의 머리길이까지, 온갖 사료가 동원된 이 논쟁은 미술사 전문지에 다달이 논박을 주고받았던 재미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라 투르 “점은 속고 속이는 과정”
그림 속 잘 차려입은 젊은 남성이 손바닥을 보여주며 점을 보고 있다. 이 남성을 둘러싼 이들이 유랑하는 집시의 차림을 하고 있기에 이 장소는 거리일 것이다. 네 명이나 되는 집시여성을 집안에까지 들여 손금을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단박에 시선을 끄는 것은 인물들의 눈초리다. 특히 남성 바로 곁에 있는 얼굴이 희고 스카프를 쓴 여인의 눈초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한 손을 허리에 걸치고 다른 손을 보여주는 남성이 노파를 향해 보내는 눈빛도 반신반의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남성의 동태를 옆눈으로 살피는 스카프 여인만큼 차갑지는 않다. 점을 다 보고 나면 이 남성은 가진 것을 모두 이 점쟁이 일행에게 도둑맞을 예정이다.
동전 한 닢을 받아들고 노파는 남성의 눈을 쳐다보며 강한 어조로 말을 건네고 있다. 인생의 경험이 많지 않은 20대 젊은 남성은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자세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 인들은 남성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털 것인지 판단이 끝났다. 매서운 눈의 스카프 여인은 남성이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금으로 만든 메달을 가위로 자르고 있고 곧이어 이 메달은 검은 머리 여성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화면 가장 왼쪽에 있는 여인은 남성의 바지춤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지만 노파의 말에 집중하는 남성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남성은 자기 인생에 대한 어떤 뜻있는 조언도 얻지 못한 채, 시간과 돈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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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점쟁이’(1756)에 등장하는 검은 망토에 모자를 쓴 남녀는 귀족이다. 점쟁이는 테이블 위 의자에 앉아 호객을 하다가 손님이 오면 긴 튜브형 막대기를 귀에 대고 손님이 궁금해 하는 일이나 걱정거리를 들은 뒤 손금을 보고 운세를 말해줬다. 때로는 의자를 내려 테이블에 카드를 펼치고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흰 드레스에 검은 망토를 둘러쓴, 여인의 뒤에 있는 남성은 흰 가면에 장갑까지 끼고 있어 누구인지 전혀 식별할 수가 없다. 가면 아래 눈빛으로 아주 젊지는 않구나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성을 에스코트해 나왔지만 신분 밝히기를 극도로 꺼리는 이 남성은 젊은 부인, 혹은 애인의 운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 손을 내민 여성보다 더 몰두해 점쟁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롱기는 인물들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성을 부여하진 않았지만 주변 정황을 묘사해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암시하고 있다. 인물들이 배치된 아케이드의 기둥에는 베네치아의 총독 선출에 관한 내용이, 뒤쪽 벽에는 교회의 고위급 사제 선출에 대한 글이 보일 듯 안 보일 듯 숨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검은 망토의 인물들은 정치적 승부수를 어디에 던져야 할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지, 그래서 얼마나 잘살 수 있을 것인지 점쳐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권력 풍자화를 즐겨 그린 단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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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우저는 권력에 대한 풍자화를 즐겨 그렸다. 그의 풍자는 종교와 정치를 가리지 않고 이른바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의 이면을 낱낱이 드러냈다. 그런 그에게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나폴레옹이 점쟁이에게 의지했다는 사실은 아주 좋은 소재거리였을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나폴레옹은 나쁜 예언을 듣고 가슴을 졸이는 키 작은 남자일 뿐이다. 그 유명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나폴레옹’에서 말을 타고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힘차게 달려나가는 모습에 익숙한 관람자는 단하우저의 그림 속 인물이 같은 나폴레옹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나폴레옹의 저택에 불려온 점쟁이 르노르망도 이 점괘는 놀랄 만한 일이었는지 테이블에 깔아놨던 카드를 수습할 정신도 없어 보이고, 조세핀은 아예 가슴을 부여잡고 정신을 잃었다. 단하우저는 이 광경이 황제와 황후로 불리던 이들의 진짜 모습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셋 중 주인공도 되지 못할 만큼 조그맣게 나폴레옹을 그려놓은 것 역시 그런 의도를 뒷받침한다.
이런 미래를 듣고 싶은 이가 있을까. 미리 안다고 한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정황에 대한 불안으로 매시간 더 초조해지지 않았을까. 상대에 대한 의심으로 서로의 사랑이 더 메마르지 않았을까. 세계를 호령하던 지도자까지 점쟁이의 말에 일희일비해서야 되겠는가. 단하우저는 많은 생각을 쏟아내는 듯하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