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외로움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이수연의 아트버스]<13>

▲에드가 드가 & 에드워드 호퍼 '우울을 그리다'
술잔 앞 멍한 표정 남녀 그린 '압생트'
비평가 "역겹고 추한 그림"이라 비난
19세기 기술발전 틈새에 얹어낸 우울
밤식당 홀로앉은 여인 그린 '오토매트'
20세기 도시그늘 담아 막막한 삶 위로
  • 등록 2022-07-15 오전 12:01:00

    수정 2022-07-15 오전 12:01:00

에드가 드가의 ‘압생트’(1875∼1876). 원래 ‘카페에서’였던 작품은 1876년 프랑스 파리에서 물의를 빚은 뒤 ‘압생트’로 개명해 1893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반응은 더욱 싸늘했다. 당시에는 그저 뒷골목생활을 보여주는 하찮은 그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사실 드가의 능숙한 기교를 입은 초상화며 생생한 근대의 르포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한 술 ‘압생트’는 도수가 매우 높은 술과 이 술을 마시는 사람을 통칭하기도 한다. 그림 속 남녀는 실존인물로 여자는 배우 엘렌 앙드레, 남자는 자유분방한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마르셀랭 데부탱이다. 캔버스에 유채, 92×68㎝,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까마득히 오래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린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기원’이란 것을 말입니다. 문자를 대신한 소통이 예술의 목적, 그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예술은, 또 미술은 다른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달고, 휴머니즘을 달고, 상상력을 달았습니다. 20세기쯤 오자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딛고 서서 인간의 꿈이 도달할 그 너머를 꿈꿨던 겁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영역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NFT에다가 메타버스에까지 닿아 있지 않습니까. 오랜시간 현대미술의 진격을 지켜봐온 이수연 학예연구사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비로소 가능했던, 예술의 창조적인 경계의 확장을 가져온 미술거장의 삶과 작품 읽기를 통해 예술로 꾸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그 드넓은 ‘아트버스’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한 여자가 카페에 앉아 있다. 잘 차려입고 예쁜 모자까지 머리에 얹었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우울한 표정이다. 그녀는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 남자 옆에 나란히 앉았지만 이들은 함께 있지 않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테이블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허공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다. 파이프를 문 남성의 시선은 아예 화면 밖을 향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앞에는 입도 대지 않은 술잔이 놓여 있다. 이 중 여자의 술잔 속 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유명한 압생트다.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해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술. 녹색의 악마라고 불리며 허브향이 깃들어 마시고 나면 환각을 보게 된다는 그 술.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압생트를 마시지 않은 이 여자에게는 환각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환상에 빠져 있다면 이렇게 우울한 표정이 나올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가 ‘카페에서’란 제목으로 처음 발표했던 ‘압생트’(1875∼1876)는 1876년 파리 첫 전시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역겹고 추한 그림’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 탓인지 계속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하다가 ‘압생트’로 이름을 바꾼 뒤 1893년 영국에서 다시 전시했지만, 작품은 여기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조지 무어와 같은 영국 비평가들은 인생 파탄자와 같은 여자와 주정뱅이를 가리키며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며 에두르기도 했는데, 그조차 그림이 풍기는 우울하고 나른하며 부정적인 느낌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처럼 보였던 거다.

드가의 ‘카페에서’가 ‘압생트’가 된 까닭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강대국 사이에 전쟁도 없던 빅토리아시대를 살던 문화인들에게는 그림 전체를 덮는 음울한 분위기가 영 탐탁지 않았던 듯하다. 그 시대는 식민지에서 갖가지 향신료가 쏟아져 들어오고 과학과 기술이 마술처럼 발전하던 때였지만, 동시에 보수적인 도덕주의와 엄숙주의, 또 이를 굳게 믿는 위선이 공존하던 때이기도 했다. 지식과 예술과 과학이 더 나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계몽주의, 산업혁명을 맞은 제국을 떠받치기 위해 다수의 이익을 좇는 공리주의 사이에, 밑도 끝도 없는 외로움과 비관적 우울이 설 자리는 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가의 ‘압생트’는 순간의 표정과 느낌을 포착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구도는 마치 카메라가 좁은 카페 테이블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인물들의 내면을 파헤친 듯한 착각이 들게 짰다. 앞쪽으로 과감하게 잘린 흰 테이블을 놨고, 그 긴 테이블을 따라 좁은 간격 너머로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혔다. 카페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슬쩍 비친 여자의 뒷모습은 모델만큼이나 쓸쓸하고 일그러져 있다. 남자는 그림 앞쪽의 테이블처럼 잘렸는데, 하필이면 입에 문 파이프가 잘려 한 인물로 완성한 초상이 아니라 테이블처럼 우연한 배경으로 보이게 한다.

가장 특별한 것은 여자와 압생트의 거리다. 지그재그한 구도를 통해 그녀의 표정과 상황에 집중케 만든 것인데, 그 교묘한 거리감이 주는 쓸쓸함에 더해 좌우를 랜덤하게 잘라버린 화면은 이 우울한 분위기가 찰나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순간이 지나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웃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20세기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그린 작가가 있다. 대공황에 휩싸인 도시의 외로움과 고독을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다. 호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토매트’(1927)에는 점원 없이 자동판매기로 음식과 음료를 팔던 밤의 식당에 홀로 앉은 여인이 등장한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은 여인 역시 시선을 내린 채 다른 세상을 더듬고 있다. 외투를 벗지 않고 한손에 여전히 장갑을 낀 차림으로 짐작컨대, 여인은 아마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떠날 것이다. 생각에 빠져 있긴 하지만 결코 편한 장소는 아닌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작품의 묘미가 있다. 곧 떠나야 하는 곳에서의 불안감, 아무도 없는 밤식당의 외로움과 막막함이 어우러져 감상자를 숨 막히게 만든다.

에드워드 호퍼의 ‘오토매트’(1927). ‘미국적인 화풍’이란 평을 받는 호퍼는 고독한 분위기를 담은 건물, 그만큼이나 적적해 보이는 사람들을 즐겨 그렸다. 작업의 키워드를 뽑자면 ‘빛과 그림자’. 어둠과 밝음을 강하게 대비시켜 미국인 삶 속에 감춰진 외로움을 부각했다. ‘오토매트’는 자동판매기로만 음식과 음료를 팔던 식당을 부르던 말이다. 바로 작품 속 여인이 홀로 앉아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스토리보다 외롭고 쓸쓸한 순간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91.4×71.4㎝, 미국 아이오와 디모인미술관 소장.


‘오토매트’에서 여인과 감상자의 위치는 ‘압생트’처럼 가깝지 않다. 몸의 일부는 테이블에 가려져 있고, 주인공임에도 가운데에서 벗어나 거리감을 만들고 있다. 주인공이 비켜간 그 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뜻밖에도 창문이다. 여인 등 뒤의 넓은 창은 ‘압생트’에서 거울의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마주한 현실의 뒤편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여인의 쓸쓸한 그림자를 비추는 대신 식당 천장의 전등을 비춘다. 나란히 매달린 전등은 밝고 도회적이어야 마땅하지만 그저 여인의 외로움을 강조하기만 한다. 카페 내부를 비추는 전등과 검은 유리를 통해 지금 그녀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또 이 카페를 제외한 도시의 불빛은 모두 꺼져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어찌 보면 창문에 비친 어둠은 그녀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순간 여인과 함께 있지 않았던 우리는 실제 바깥 거리와 카페 내부를 알 수 없지만, 빈 의자는 물론 아무도 열지 않은 왼쪽 출입문에까지 깃든 외로움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임’ 지, 스트레스 주제 다루며 ‘오토매트’ 커버에

19세기 평론가조차 꺼리던 음울한 분위기의 ‘압생트’와 20세기 미국 도시에 드리운 그늘을 그려낸 ‘오토매트’는 시대의 상징이 돼 남았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는 ‘압생트’에서 영감을 받아 파리 뒷골목의 주정뱅이와 가난뱅이의 고달픈 삶을 묘사한 ‘목로주점’(1877)을 썼으며, ‘타임’ 지는 20세기 스트레스와 우울에 관한 특집(1995)을 실으며 ‘오토매트’를 커버 이미지로 내보내기도 했다.

‘타임’ 지 1995년 8월 28일자. 호퍼의 ‘오토매트’를 표지 삼아 ‘20세기 우울’을 다뤘다.


빠져나올 수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덫을, 세기를 뛰어넘으며 담담한 거리두기로 그려낸 이 걸작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수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 ‘비트윈 더 바스’(Between the Bars·1997)의 가사가 떠오른다. 밤새 술을 마시며 당신이 살 수도 있던 인생과 할 수 있었던 일을 곱씹으라고 했고, 머릿속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이미지들과 매일의 고민을 잠재우고 허공을 헤매는 당신의 손을 잡아줄 거라고 속삭였다. 우울하지만 시대의 상징이 됐던 두 걸작처럼, 이 노래 역시 영화 ‘굿 윌 헌팅’(1998)의 OST로 쓰이며 예민한 시절에 상처받는 이들을 위로했다.

결국 19세기의 우울이 20세기의 시작에서도 또 20세기의 끝에서도 공감을 받은 셈이다. 21세기라고 좀 달라졌을까. 도시의 밤거리, 카페와 술집에서 외로움을 마셔버리고 싶은 이들이 있는 한 ‘압생트’와 ‘오토매트’는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되고 있지 않을까.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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