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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한 여자가 카페에 앉아 있다. 잘 차려입고 예쁜 모자까지 머리에 얹었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우울한 표정이다. 그녀는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 남자 옆에 나란히 앉았지만 이들은 함께 있지 않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테이블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허공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다. 파이프를 문 남성의 시선은 아예 화면 밖을 향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앞에는 입도 대지 않은 술잔이 놓여 있다. 이 중 여자의 술잔 속 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유명한 압생트다.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해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술. 녹색의 악마라고 불리며 허브향이 깃들어 마시고 나면 환각을 보게 된다는 그 술.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압생트를 마시지 않은 이 여자에게는 환각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환상에 빠져 있다면 이렇게 우울한 표정이 나올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가 ‘카페에서’란 제목으로 처음 발표했던 ‘압생트’(1875∼1876)는 1876년 파리 첫 전시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역겹고 추한 그림’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 탓인지 계속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하다가 ‘압생트’로 이름을 바꾼 뒤 1893년 영국에서 다시 전시했지만, 작품은 여기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조지 무어와 같은 영국 비평가들은 인생 파탄자와 같은 여자와 주정뱅이를 가리키며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며 에두르기도 했는데, 그조차 그림이 풍기는 우울하고 나른하며 부정적인 느낌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처럼 보였던 거다.
드가의 ‘카페에서’가 ‘압생트’가 된 까닭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강대국 사이에 전쟁도 없던 빅토리아시대를 살던 문화인들에게는 그림 전체를 덮는 음울한 분위기가 영 탐탁지 않았던 듯하다. 그 시대는 식민지에서 갖가지 향신료가 쏟아져 들어오고 과학과 기술이 마술처럼 발전하던 때였지만, 동시에 보수적인 도덕주의와 엄숙주의, 또 이를 굳게 믿는 위선이 공존하던 때이기도 했다. 지식과 예술과 과학이 더 나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계몽주의, 산업혁명을 맞은 제국을 떠받치기 위해 다수의 이익을 좇는 공리주의 사이에, 밑도 끝도 없는 외로움과 비관적 우울이 설 자리는 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가의 ‘압생트’는 순간의 표정과 느낌을 포착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구도는 마치 카메라가 좁은 카페 테이블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인물들의 내면을 파헤친 듯한 착각이 들게 짰다. 앞쪽으로 과감하게 잘린 흰 테이블을 놨고, 그 긴 테이블을 따라 좁은 간격 너머로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혔다. 카페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슬쩍 비친 여자의 뒷모습은 모델만큼이나 쓸쓸하고 일그러져 있다. 남자는 그림 앞쪽의 테이블처럼 잘렸는데, 하필이면 입에 문 파이프가 잘려 한 인물로 완성한 초상이 아니라 테이블처럼 우연한 배경으로 보이게 한다.
20세기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그린 작가가 있다. 대공황에 휩싸인 도시의 외로움과 고독을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다. 호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토매트’(1927)에는 점원 없이 자동판매기로 음식과 음료를 팔던 밤의 식당에 홀로 앉은 여인이 등장한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은 여인 역시 시선을 내린 채 다른 세상을 더듬고 있다. 외투를 벗지 않고 한손에 여전히 장갑을 낀 차림으로 짐작컨대, 여인은 아마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떠날 것이다. 생각에 빠져 있긴 하지만 결코 편한 장소는 아닌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작품의 묘미가 있다. 곧 떠나야 하는 곳에서의 불안감, 아무도 없는 밤식당의 외로움과 막막함이 어우러져 감상자를 숨 막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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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매트’에서 여인과 감상자의 위치는 ‘압생트’처럼 가깝지 않다. 몸의 일부는 테이블에 가려져 있고, 주인공임에도 가운데에서 벗어나 거리감을 만들고 있다. 주인공이 비켜간 그 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뜻밖에도 창문이다. 여인 등 뒤의 넓은 창은 ‘압생트’에서 거울의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마주한 현실의 뒤편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여인의 쓸쓸한 그림자를 비추는 대신 식당 천장의 전등을 비춘다. 나란히 매달린 전등은 밝고 도회적이어야 마땅하지만 그저 여인의 외로움을 강조하기만 한다. 카페 내부를 비추는 전등과 검은 유리를 통해 지금 그녀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또 이 카페를 제외한 도시의 불빛은 모두 꺼져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어찌 보면 창문에 비친 어둠은 그녀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순간 여인과 함께 있지 않았던 우리는 실제 바깥 거리와 카페 내부를 알 수 없지만, 빈 의자는 물론 아무도 열지 않은 왼쪽 출입문에까지 깃든 외로움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임’ 지, 스트레스 주제 다루며 ‘오토매트’ 커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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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올 수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덫을, 세기를 뛰어넘으며 담담한 거리두기로 그려낸 이 걸작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수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 ‘비트윈 더 바스’(Between the Bars·1997)의 가사가 떠오른다. 밤새 술을 마시며 당신이 살 수도 있던 인생과 할 수 있었던 일을 곱씹으라고 했고, 머릿속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이미지들과 매일의 고민을 잠재우고 허공을 헤매는 당신의 손을 잡아줄 거라고 속삭였다. 우울하지만 시대의 상징이 됐던 두 걸작처럼, 이 노래 역시 영화 ‘굿 윌 헌팅’(1998)의 OST로 쓰이며 예민한 시절에 상처받는 이들을 위로했다.
결국 19세기의 우울이 20세기의 시작에서도 또 20세기의 끝에서도 공감을 받은 셈이다. 21세기라고 좀 달라졌을까. 도시의 밤거리, 카페와 술집에서 외로움을 마셔버리고 싶은 이들이 있는 한 ‘압생트’와 ‘오토매트’는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되고 있지 않을까.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