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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천국, 낙원, 극락….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면, 그곳은 적어도 초고층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장소는 아닐 것 같다. 가장 세련된 도시도, 가장 멋들어진 건물도, 호화찬란한 인테리어가 있는 방도, 잠깐은 좋을 수 있겠으나 근본적이고 영원한 행복의 이미지가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지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장소는 아무래도 자연이다. 물론 행복한 상상 속 자연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컴컴한 밀림이거나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로 꼼짝도 못하게 하는 곳이 아니라, 꽃이 피고 물이 맑고 그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닐 수 있는, 말하자면 창세기의 에덴동산 같은 곳이 아니겠는가.
밥벌이를 찾아 도시의 좁은 공간에 구겨져 살더라도 우리가 화분에 식물을 키우고 거기서 꽃이 피면 즐거워하는 이유도, 자연의 일부를 내 공간에 들여 숨 쉴 구석을 만들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도시를 떠나면 간단해지는 문제인가 생각해보면, 물론 도시인의 환상을 자극하는 농촌이라고 해도, 어디서나 삶의 방식은 마찬가지라는 것, 이상은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저 삶의 터전이 어디든 가능하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싶은 것이다.
고대부터 이어진 정원을 향한 갈망
정원에 대한 갈망은 고대인에게도 있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화산재에 덮여버린 폼페이는 로마 귀족들의 별장이 있던 고급스러운 도시였지만, 건축물의 실내는 어두컴컴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벽의 두께와 기둥으로 천장을 지탱해야 하는 건축구조라, 창을 뚫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래서 그들은 벽에 그림을 그려 창밖으로 보고 싶은 풍경을 대신했다. 고스란히 묻혀 있다가 1700년대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발굴된 폼페이의 가옥들에 그려진 벽화에는 여러 가지 소재가 있었지만, 그중 정원을 표현한 벽화, 일명 ‘플로라’라고 불린 ‘플로라 혹은 봄’(서기 79년 이전)이 그 하나다.
회벽에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린 ‘플로라’는 맨발로 사뿐히 걸어 다니며 꽃을 꺾어 모으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다가 지나친 꽃을 돌아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여인의 뒷모습은, 살랑거리는 바람 한 자락을 보여주는 옷깃과 더불어 조용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처음 그려졌을 때는 지금보다 더 선명했을 이 그림의 주인공을 두곤 여러 추정을 했지만, 실제 인물인지 아니면 신화 속 꽃의 요정 플로라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근거가 없다. 다만 그림에서 우리는 적어도 고대 로마 사람들이 벽 너머 무엇을 보고 싶어 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들도 현대의 우리처럼, 정원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이며 그리운 풍경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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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내면 담은 ‘천국의 작은 정원’
이 모든 풍요와 깨끗함은 성모 마리아의 미덕을 상징하는 것이라, 이 정원의 주인공은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마리아다. 한 손으로는 책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책의 내용에 푹 빠져든 듯 마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다. 손에 든 책은 성경일 것이다. 실제 마리아의 삶에서 이렇게 평화로운 날은 결코 없었으리라. 영아 살해를 피해 임신한 채 이집트로 가서 남의 집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고, 범상치 않은 아들의 치다꺼리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며,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해야 했는데, 꽃피는 정원에서 책장을 넘길 여유가 언제 있었을 것인가. 하지만 중세의 모든 그림은 상징의 총체다. 마리아의 삶이 고난의 여정이었을지라도 그 정신은 누구보다 온화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답다는 의미를 담아 ‘풍요로운 정원’ 속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는 성모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다른 한편 귀족들에게 정원은 자신이 가진 권세와 부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저택의 정원을 배경으로 한 단독 초상화나 가족 초상화를 당대 유명화가에게 주문·제작했으며, 인기 있는 작가에게는 줄을 서서라도 아름다운 정원의 풍경화 겸 초상화를 받아내 자랑삼아 걸어두곤 했다. 앙겔리카 카우프만(1741∼1807)이 그린 ‘나폴리공국의 왕 페르디난도 4세와 그의 가족’(1783) 초상이 바로 정원을 배경으로 한 가족 초상화의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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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영향…자연스러움 중시한 18세기 정원
그림의 배경은 얼핏 보면 사람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자연처럼 보이지만,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한 인공 정원이다. 당시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이 이탈리아에도 영향을 미쳐, 정원을 인공적으로 꾸미지 않는 게 유행이었던 것이다. 대신 커다란 석조 좌대와 그 위에 함께 조각한 항아리가 이 정원의 품격을 인증하고 있다. 이 가족 초상화는 동일한 그림으로 몇 개의 버전을 더 제작했고, 어떤 작품에는 왕과 왕비, 여섯 명의 왕자와 공주 외에, 이즈음 사망한 요셉 왕자까지 포함해 그렸다. 정원을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당시 유행이기도 했지만, 프랑스혁명 소식에 민감한 나폴리 시민들의 눈을 의식해 그린 이 초상화는 위엄있는 왕가보다는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가족으로 그려졌다. 울타리조차 보이지 않는 꾸밈없는 정원은 이 초상화의 의도를 한층 북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자연스럽든 질서정연하든, 담을 높게 치든 담이 없든, 사람이 만든 정원은 자연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곁에 두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정원에 담아내고자 하는 이상은, 실제로는 더 먼 곳으로 나아가야 맞닥뜨릴 수 있는 자연의 어떤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 사람은 정원을 가꾼다. 자랑할 정원이든 비밀의 정원이든, 광대하든 손바닥만 하든, 예나 지금이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서민의 삶에서는 만만히 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정원이 있다면 그것을 현세의 작은 낙원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을까.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