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큰소리로 서로를 불러대는 모습이 요즘처럼 그리울 때가 있을까. 영원히 변치 않을 풍경인 줄 알았는데, 전쟁도 천재지변도 아닌 지나가는 역병에 그 풍경은 너무 쉽게 바뀌었다. 하지만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인간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멈춰 본 적이 없다. 오래전부터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더 어린 이들을 모아 가르쳐 왔고, 1000년 전부터 공적인 교육시스템을 만들어 왔으며, 지금은 학교를 다니는 일이 당연한 삶의 과정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 반드시 학교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 믿는다.
학교의 교실 풍경은 이전 시대에도 오늘날과 매우 비슷했다는 것을 옛 그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세기 전반기, 그러니까 중세 후반기에 양피지에 그린 이탈리아 화가 라우렌티우스 데 볼토리나의 ‘헨리쿠스 데 알레마니아의 윤리학 수업’(1300s)에는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학생들이 보인다. 어려운 화가의 이름이나 교수의 이름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또 수염을 기르거나 중후한 모자를 쓴 나이 지긋한 학생들이란 사실을 뒤로 하고 그림을 바라보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학창시절의 장면이 떠오르게 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셋째 줄 맨 앞에 보이는 학생이다.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 없는지 팔을 베고 그만 잠들어버렸다. 너그럽게 봐주자면 전날 밤을 새우면서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눈이 초롱초롱한 학생들은 앞줄에 앉는 법, 펼친 책을 똑바로 쥐고 교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배움의 기쁨에 뭔가 질문을 쏟아낼 것 같은 학생들은 앞줄과 둘째 줄에 모여 있다. 하지만 둘째 줄 끝으로 보이는 학생부터 턱을 괸 자세 등 상태가 좀 달라지기 시작해, 세 번째 줄에서의 산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 학생은 아예 잠들었고, 가운데 두 학생은 교수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 중이다. 마지막 줄에도 아예 일어나 수업을 빼먹으려는 학생과 멍하니 딴 곳을 쳐다보는 학생, 또 ‘나는 누구며 여기는 어디인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은 얼굴도 보인다. 헨리쿠스 데 알레마니아 교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수업이 어떤 내용인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우나, 중세의 대학이란 특수하게 허락된 공간에서도 공부하는 학생은 하고, 노는 학생은 놀고, 조는 학생은 졸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들의 교실이라도 말이다.
|
18세기 서민에게도 교육 길 열렸지만…
교실 천장에 학습용으로 매달아 놓은 지구본에 기어코 한 아이가 올라탔고, 다른 한 아이는 지구본을 밀고, 또 다른 아이는 잡아당기는 중이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줄을 단단히 잡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지구본에 두 다리를 단단히 붙인 이 아이는 보나마나 이 학급에서 최고의 말성꾸러기일 것이다. 그림에는 일곱 명의 아이가 등장하는데, 가장 멀리 보이는 아이는 이 신나는 일탈의 놀이보다 야단맞을 일이 더 걱정인지 교실 문을 열고 황급히 뛰어들어오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다. 거의 일어서듯이 지구본을 탄 아이를 바라보는 붉은 옷의 아이는 이 광경을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혼날 것을 각오하고 지구본에 올라탄 친구가 부러워서일 수도 있고, 저 동그란 구에 붙어 있는 이국의 세계에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용기가 샘솟는 중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교단에 앉아 얌전하게 책을 펼친 아이도 이 시끄러운 놀이에서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 사태를 진정시키러 들어오는 선생님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줄을 서서 이 ‘세계여행’을 한 번씩 즐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
이 교실 풍경에서 여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중반인 이 시기에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 비해 교육의 수혜를 덜 받았다. 학교를 다니더라도 여자아이에게는 세계여행을 꿈꾸게 하기보다 기존의 좁은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게 성장하는 게 목표였다. 물론 글자와 숫자를 익히고 책도 읽겠지만, 양재 같은 실용적인 과목을 배워 장차 현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장려했던 것이다. 물론 이 중에서도 특출난 재능으로 모든 방해물을 스스로 제치고 어떻게든 공부할 길을 찾아 후에 노벨상을 받게 된 마리 퀴리 같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교육에 깔린 성별의 차등 외에 각 분야의 전문영역에서는 뭐가 좀 달랐을까. 미술 분야만을 보자면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미술대학의 전신인 유럽의 미술아카데미들, 특히 왕립으로 운영하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여성의 참여가 아예 허락되지 않거나 소수 인원으로 한정해 기회가 주어졌다. 영국의 로열아카데미는 처음 설립한 1768년에 34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40명까지 허락됐는데, 여성회원으로 스물네 살이던 메리 모저와 스물일곱 살이던 앙겔리카 카우프만이 창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초상화로 자리한 모저·카우프만의 비운
|
두 명의 여성 회원 중 모저는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였고, 카우프만은 영국 귀족의 가족초상화를 그려 이미 명성이 높은 화가였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초상화에 만족하지 않고 역사화에 지속적으로 도전해 역사화가로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야심찬 화가였다. 따라서 역사화에 필수적인 인체 탐구를 반드시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남성의 누드를 관찰한다거나 위대한 장르인 역사화에 도전하는 것은 여성의 미덕에 해를 끼치는 일이란 판단에 의해, 두 명의 여성 회원은 이 수업에서 배제당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기 로열아카데미 회원의 초상화를 전부 그려야 했던 초파니는 고민 끝에 이들의 얼굴을 벽에 걸린 초상화로 넣어준 것이다.
미술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여성과 남성이 균등한 교육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자아이도 교실에서 지구본을 망가뜨리고 대학 강의에서 전날의 숙취로 정신을 못 차리는 세상이 됐다. 눈을 반짝이거나 졸거나 떠드는 교실의 오래된 풍경 속에 여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것, 이는 과거의 그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