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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직장인 입장에서 보면 음악회는 퇴근 후 저녁식사를 하기도 빠듯하게 허겁지겁 달려 찾게 되는 기꺼운 예술적 사치이다. 몸을 일으키기도 버거운 주말에조차 떨쳐 일어나 그래도 괜찮은 옷을 갖춰 입고 오늘을 달리 살 수 있는 시간을 기대하며 찾게 되는 곳이 공연장인 것이다. 첨단 음향기술과 영상의 발전으로 굳이 직접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온몸이 음악에 휘감기는 경험을 하기에는 콘서트홀만한 곳이 없다. 피곤을 못 이겨 몇초 살짝 졸았다 깨도 여전히 연주가 끝나지 않아 기분이 좋은 곳은 역시 음악회뿐이다.
둥근 형태의 공연장, 특히 음악회를 여는 극장식 음악당의 건축은 런던·비엔나·파리 등 유럽 전역에서 17~19세기를 거치며 모양을 갖춰갔다. 고급예술로 여겨지는 여러 공연이 시야와 음향을 잘 배려해 지은 공연장에서 이뤄지고, 왕족이나 귀족뿐 아니라 시간과 자금에서 여유가 생긴 신흥 부르주아가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된 때는 19세기에 이르러서다. 이즈음 남성이든 여성이든 좋은 옷을 차려입고 무대를 가까이 볼 수 있는 망원경인 오페라글라스와 부채 등을 챙겨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은 매우 인기 있는 여가생활이었다.
새로운 현대식 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특히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특별석(la loge)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겨 그렸다. 특별석은 무대의 아래가 아닌 무대의 위쪽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작은 방처럼 만들어져 함께 온 이들과 좀더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둥글게 배치된 ‘특별석’, 시선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워
프랑스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그린 ‘특별석’(1874)에는 한쌍의 남녀가 공연의 막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백해 보이도록 얼굴에 하얗게 화장한 여인은 희고 검은 줄무늬 의상을 입고 흰 장갑을 낀 한 손에 오페라글라스를, 다른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오페라글라스로 아래쪽 무대를 바라보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르누아르를 정면에서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이 여인의 그림은 실제 공연장의 특별석 대신 르누아르의 작업실에서 그려졌으리라 추정한다.
그림 뒤쪽의 남성은 몸을 젖히면서까지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옆자리 여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원형극장 저편에서 발견한 더 아름다운 여성이었을까. 다른 관객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은 혹시 실례가 아닐지. 여러 의문이 한꺼번에 떠오를 정도로, 남성의 시선은 갖가지 상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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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이지만 미국의 미술교육에 답답함을 느끼고 파리에 유학을 왔던 여성작가 메리 카사트(1845∼1926)가 그린 ‘특별석’(1878)을 보면, 공연장에서 관객들끼리 이런 방식으로 시선이 오가는 것은 당시에 매우 흔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고층 공연장의 특별석은 둥글게 휘어지는 곡선을 따라 배치돼 있다. 따라서 모두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불만 밝혀져 있다면 옆·위·아래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카사트의 그림 속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여성은 르누아르의 그림에서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성은 오페라글라스를 든 다른 남성의 시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물론 르누아르 작업실에서 그가 원하는 포즈로 그려졌기에 그렇겠지만, 르누아르는 자신이 언젠가 공연장에서 봤던 장면을 재현했을 것이기에,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남성은 적극적으로 시선을 던지는 모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카사트의 그림 속에서도 저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머리를 올린 화려한 복색의 여인들은 대개 무대 쪽을 쳐다보고 있는 데 반해 한 남성은 눈에 띄게 몸을 난간에 기대고 바로 이쪽, 그림의 주인공인 여성 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도 만만치 않다. 몸을 앞으로 굽히고 한쪽 팔을 난간에 척 올린 채 앞쪽을 응시하고 있다. 오페라글라스의 방향이 무대인지 다른 볼거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랜만의 외출에서 이 여성은 만만하고 얌전하게 남의 볼거리가 돼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건너편 난간에서 정말 부자연스러운 포즈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성의 시선은 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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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대의 이면…발레리나와 검은 후원자
발레 공연장의 무대를 즐겨 그린 화가 중 에드가 드가(1834∼1917)는 다른 화가들보다 더 특수한 응시의 각도를 자주 보여줬다. 발레 무대를 즐겨 그렸던 드가는 발레공연단으로부터 발레리나의 연습 장면이나 리허설, 또 무대 뒤편을 보고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발레는 대단히 전문적인 기량을 요구하는 데다가 훌륭한 발레리나가 되려면 재능을 보이는 어린 시절부터 특수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대개 가난했던 발레리나 지망생은 상류층의 후원을 받아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무대에 서게 되더라도 특별 제작한 의상 등을 후원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후원자는 성장하는 발레리나의 교육과정을 지켜볼 수도, 리허설이나 무대 뒤편에서 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순수하게 발레예술을 돕기 위한 목적의 후원자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음흉한 목적을 가진 이들도 분명히 있었고, 오직 그것만이 목적인 후원자도 많았다는 게 이 시대의 기록이다.
드가의 ‘발레, 스타’(1878)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기량을 펼치고 있는 무대 위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양팔을 우아하게 뻗고 한 다리로 서 있는 발레리나는 공연에 완전히 몰입해 있지만 무대 뒷배경 쪽에는 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드가의 시선으로 볼 때 무대 뒤쪽에는 적어도 네 사람의 다리가 더 보인다. 나무숲을 표현한 듯한 칸칸의 무대장치 사이에 대기 중인 발레리나의 흰 치마와 다리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중 유독 한 남성이 눈에 띄는 것이다. 바지에 손을 찌르고 우뚝 서서 무대를 바라보는 검은 슈트 차림의 남성은 발레리나의 후원자로 해석된다. 무대 뒤편에서 발레리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덕분에 그의 시선은 무대의 앞이든 위든 뒤든 얼마든지 ‘자유롭게’ 위치할 수 있다. 이렇듯 누가 보여지는 대상이 되고 누가 볼 수 있는 주체가 되는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시선은 일종의 권력인 것이다.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