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꾸고 싶은가 '마담의 살롱'으로 오라[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6>

▲오스타더, 르모니에가 들여다본 '거실'
지성인 초청해 예술·철학 논한 프랑스 살롱문화
르모니에 '마담 조프린의 살롱'서 시작·주도해가
사회진출 제약된 여성, 거실 개방해 새시대 열어
식당·일터와 한 공간…오스타더 '서민층 거실'도
  • 등록 2021-10-16 오전 12:01:00

    수정 2021-10-16 오전 12:01:00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가 1812년 그린 ‘1755년 마담 조프린의 살롱’.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후원자 마담 조프린이 자신의 거실 ‘살롱’에서 연 어느 날의 회합 장면을 그렸다. 당대 철학자와 사상가, 예술가 등 지성인을 초청한 이 ‘마담의 살롱’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정신이 나왔고 담론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날 살롱에선 볼테르의 ‘중국 고아’를 한 연극배우가 실감나게 읽어주는 이른바 ‘낭독 공연’을 펼쳤다. 캔버스에 유채, 125.9×196㎝, 프랑스 샤토 드 말메종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학예연구관이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저녁을 먹고 거실의 소파에 퍼져 앉아 TV를 본다. 요즘 보지 않으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보면서 사과도 한 입 베어 문다. 굳이 마주 보지 않고도 식구들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의견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쟤는 왜 저러나” 이러쿵 저러쿵….

현대 한국인의 거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리라. 비슷비슷한 집의 구조,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방들이 배치된 게 보통이다. 물론 가용자금의 여력에 따라, 생활패턴에 따라 다른 모양의 집을 짓고 살기도 하겠지만, 대개 서민들은 이처럼 유사한 공간에 머문다. 각자 방문을 열면 나오는 큰 공간인 거실에는 테이블과 소파, 안락의자 등을 두고 공동으로 이용케 하고 있다.

우리가 거실이라고 부르는 그 공간에서는 대체로 무엇을 하는가. 식당이 따로 있다면 거실은 주로 혼자 혹은 가족이 모여 앉아 쉬는 공간이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아닌 다수 서민계층의 집은 거실이 따로 구분돼 있지 않았다. 특히 집에서 가내수공업을 하는 경우라면 일하는 자리와 식사하는 자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소가 뒤섞여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1610∼1685)의 ‘식사 후 농가의 가족’(1661)에는 그런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식당·일터와 구분 없던 서민층 거실

창에선 빛이 들어오고, 창 밖을 구경하는 큰 아이, 큰 아이처럼 밖을 내다보려 창가 의자로 올라서려 애쓰는 작은 아이가 정겹게 보인다. 그 옆의 아기식탁에는 아직은 혼자 서 있기 힘든 아기가 딸랑이를 쥐고 있으며, 식사를 마친 부부는 화덕 근처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다. 둥근 식탁에는 거칠어 보이는 빵조각이 남아 있고, 바닥은 어지럽다. 눈에 띄는 것은 이들 가운데 놓인 실감개 틀이다. 이 가족은 실을 이용한 직조가 돈벌이 수단인 것이다. 식후 한때 현대인들이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이들의 식후 한때도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식당과 거실과 일터의 구분 없이 작고 보잘것없지만 이들의 집에서는 제일 넓은 공간이다. 지금도 이런 생활 양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어, 신분이나 재력이 인간의 가옥과 정신적·육체적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우울한 지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의 ‘식사 후 농가의 가족’(1661).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로 활동한 오스타더는 농민과 서민층의 일상을 꾸밈없이 그렸다. 대부분 활기 넘치는 화풍이었으나 후기에는 렘브란트의 명암법을 받아들여 온화한 실내 정경을 묘사하기도 했다. 작품은 그 시기의 그림 중 한 점으로 17세기 네덜란드 서민 가정의 일터이자 식당이자 거실이던 공간을 엿보게 한다. 패널에 유채, 35.5×31.3㎝, 개인 소장.


침실이나 식당과 구분된 ‘거실’은 왕궁, 또 귀족과 부르주아의 가옥에서 보였다. 특히 프랑스에서 손님을 초대해 문화예술 행사를 갖는 상류계층의 거실을 ‘살롱’(salon)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우리가 ‘살롱’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 ‘룸살롱’ ‘헤어살롱’ 등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던 공간이다. 살롱에서의 회합은 그 집의 안주인 ‘마담’(Madame)이 주관했는데, 단지 모임을 준비하고 식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문화적·철학적 담론의 좌장 같은 역할이었다. 상류층 여성들 가운데 문화예술을 후원하며, 철학적 담론을 중재하며 토론으로 이끈 대단히 지적인 이들이 살롱의 주인 ‘마담’이었던 것이다. 물론 마담이란 말은 결혼한 여성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명칭이기는 하나, ‘살롱의 마담’이라면 음악회나 미술전시회, 혹은 학술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이끌던 인물을 지칭했던 것이다.

살롱문화 부흥시킨 ‘마담’의 거실

프랑스 화가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1743∼1824)가 그린 ‘1755년 마담 조프린의 살롱’(1812)은 그러한 대규모 회합이 이뤄지던 살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높은 천장과 넓은 벽이 꽉 차도록 그림들이 걸린 살롱. 앉아 있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은 모두 프랑스 학계와 문화계의 저명인사들이다. 앞줄 왼쪽 테이블 앞에 앉아 종이뭉치를 들고 있는 사람은 이 화면에서 가장 격렬한 눈빛과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연극배우 르캥이다. 그가 감정을 섞어 읽으면서 음성연기를 하고 있는 글은 볼테르의 ‘중국 고아’란 작품으로, 때마침 살롱의 중앙 벽에는 볼테르의 석조 흉상이 놓여 있다. 청중들은 르캥의 음성연기를 집중해서 듣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이들 가운데는 드니 디드로(1713∼1784), 장 자크 루소(1712∼1778) 등 잘 알려진 백과사전파 계몽주의 사상가의 얼굴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 살롱의 마담 조프린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던 계몽주의의 후원자였던 것이다. 그림 속에서 조프린은 첫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로 보이는, 수수한 청회색 옷을 입은 여성이다. 조프린은 이후 프랑스 사회문화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을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초청해 서로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는 장인 살롱을 마련하고, 다음 회합을 어떤 내용으로 이끌어갈지 기획한 사람이었다. 그림 속에서 연극배우가 읽고 있는 작품의 저자 볼테르도 대표적인 계몽주의 작가였다.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가 1812년 그린 ‘1755년 마담 조프린의 살롱’의 부분들. 이날 살롱에 참석한 주요인사들을 클로즈업했다. 왼쪽부터 철학자 장 자크 루소, 연극배우 르캥, 작가 겸 사상가 볼테르의 흉상, 철학자 드니 디드로, ‘살롱’을 열고 회합을 주도해간 마담 조프린.


마담 조프린의 살롱은 때로는 음악가를 초청해 연주를 감상하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화가를 초청해 그림을 감상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으며, 철학과 문학을 논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외국 원수와 고위인사도 이 자리에 초청돼 국제적인 정세와 사회사상을 논할 수 있었으니, 당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그녀의 살롱에 얼마나 초대받고 싶어 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마담 조프린의 영향력은 18세기로 그치지만 19세기까지도 여러 가문의 여성이 살롱을 열어 문화예술과 사상을 품고 키워내는 장소를 제공했으니, 거실이 이처럼 크나큰 역할을 할 수 있던 시기가 이전이나 이후에 또 있었을까 싶다.

사상·문화예술 교류·회합 주선한 여성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제약이 어느 정도 사라진 것은 그후로도 한참 뒤다. 프랑스든 혹은 다른 어느 나라든 여성의 영향력이란 것은, 대부분 권력 있는 남편이나 연인, 아들이 남성으로서 얻을 수 있는 지위를 교묘히 이용하고 조종하는 것으로 그려져 왔다. 그런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것 또한 별로 본 적이 없다. 요즘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도 여성은 노인과 더불어 최약체라, 남성에게 섹스어필해 도움을 받고 살아나갈 방법을 강구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논란거리인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역사 속에 여성은 한때 자신의 거실을 열어 예술가·사상가를 초청했고, 초청인사들에 대한 보증인으로, 문화예술을 교류하고 지원한 후원자이자, 새로운 사상에 필요한 회합을 주선해 이를 발전시키는 독특한 매개자로 활약했다. 단지 한가하고 돈 많은 귀족이나 부르주아 부인의 여가생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역할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했다.

물론 마담 조프린을 비롯해 자신의 거실을 열어뒀던 여성들은 어디까지나 배후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고, 문화예술과 사상의 공급자이기보다는 그것을 펼칠 장을 마련하는 역할에 그쳤다. 또한 그것이 자신의 재력과 지위를 이용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흔히 역사물에서 그리는 것처럼 시기와 질투, 암투와 의존으로 얼룩진 여성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들은 마땅히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던 여성으로 다시 기록돼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롱의 마담’이라고 할 때 지칭하는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이다.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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