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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카드, IQ포럼과 제휴..청소년 무료상담
- [edaily] 국민카드는 26일부터 사회봉사단체인 IQ포럼과 제휴해 업계 최초로 아동, 청소년 및 부모 등을 대상으로 온라인 무료상담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익 전문사이트 패스포럼(www.passforum.co.kr)을 오픈한다고 24일 밝혔다.
패스포럼을 이용하면 ▲부적응 아동, 문제아동 등 아동관련 상담, ▲부모상담, 성상담, 약물상담 등 청소년 관련 상담, ▲소아정신과 진단, 한방진단 등 의료 관련 상담, ▲아동학대, 입양 등 법률관련 상담, ▲장애인, 여성, 노인문제 등 기타상담으로 분류, 영역별 전문가 20명을 통해 무료로 상담할 수 있다.
패스포럼에서는 온라인 상담과 온라인에서 전화예약을 하면 분야별 전문상담자가 회원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해 주는 전화상담 등 본인이 원하는 방법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아울러 상담신청자에게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상담내용을 공개상담, 비공개상담 등으로 구분해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무료 상담사이트인 패스포럼은 국민카드 고객이 아니어도 이용이 가능하며 회원, 비회원 모두 국민카드 홈페이지(www.kmcard.co.kr)에서 사이버 회원으로 가입하기만 하면 즉시 이용할 수 있다.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⑪이동진 HSBC 부지점장(상)
- [edaily] 우리나라 채권시장에 ‘딜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다. 그 전까지 기관투자가들은 채권이 발행되면 적당한 수익률에 사서 만기까지 보유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투자전략이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인 HSBC의 이동진 부지점장은 80년대 중반부터 채권 딜링을 시도한 몇사람중 한명이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 용어조차 없었던 ‘데이트레이딩’이나 금리선물 투자까지 시도하면서 채권시장을 주도한 큰 손이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면서 선진금융시장에서 활용되는 금융기법들을 한국 시장에 도입한 개척자인 셈이다.
채권시장의 많은 사람들은 93년 금융실명제 당시 채권수익률의 방향을 돌려놓는데 외국계 은행인 BTC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 이 부지점장이 BTC에서 채권딜링을 담당했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스스로 “다소 과장됐다”고 말했지만 시장에 쇼크가 왔을 때 대처하는 원리로서 ‘역발상’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후배 채권딜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부지점장이 원래 채권딜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 분야에 흥미가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BTC에 입사해서 13년이상 채권시장에 몸담게 됐다. 지금은 직접 딜링을 하기보다는 딜러들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장에 대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고비때마다 매매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채권시장 입문 초기에는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거래방법을 도입해 하나하나 실행해보는 것이 재미였다면 지금은 경험과 경륜으로 시장 방향을 예측해보는 즐거움이 있는 듯했다.
그는 채권딜러라는 직업이 시간을 다투며 수백억원짜리 채권을 사고 파는 긴장도가 높은 일이지만 여유를 잃지 않고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롱런하는 길이라고 충고한다.
그는 동로마사와 관련된 역사서를 번역할 만큼 역사학에 대해 아마추어 이상의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앞서 행하기 위해서 과거의 역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채권시장이 지금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이전부터 지금과 같은 시장을 꿈꾸고 먼저 행동했던 이 부지점장의 ‘채권인생’을 들어봤다.(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79학번이시네요. 미시간에서 MBA를 하시구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월에 입학해서 2~3달 가량 다녔을까.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갔어요. 대학 4학년 때 시험을 보고 미국 여러 군데 대학에 입학신청을 했는데 허가서가 딱 한 통 날라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미시간이었죠.(웃음) 운이 좋았던 것이 그 무렵 처음으로 군 미필자가 유학을 갈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습니다. 83년에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85년 6월에 귀국했죠.
<자동차와 마케팅의 꿈을 접고, BTC에 입사>
-귀국해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귀국 후 바로 BTC(Bankers Trust Company) 서울지점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저랑 MBA를 같이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저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 취업하려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자동차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동차 회사도 면접을 봤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들을 알아봤죠. 하지만 군대문제 등이 겹쳐서 그런지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일단 귀국했죠.
돌아와서 몇 군데 원서를 냈는데 모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그 기업의 이사께서 “이 친구 일하도록 해”라고 말씀까지 하셨는데도 정식 공채기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락이 늦어지더라구요. 그 때 제가 원서를 넣은 외국계 은행 중 BTC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를 한 번 보더니 흔쾌히 “좋다. 내일부터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은행에서 일할 마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개를 같이 쓰고 있는 사람과 그 당시 한참 연애중이었어요. 돈도 많이 필요했던 때라 오라는 곳을 망설일만한 여유가 없었죠.(웃음) 그래서 출근했습니다.
BTC에서 몇 달 근무하고 6개월짜리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 시절 저를 물먹인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부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연락이 늦었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제와서 연락을 주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 일단 군대를 마치고나서 얘기해보자” 이상하게 대기업은 의사결정속도가 상당히 늦더라구요. 제가 “나는 MBA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대우를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당시 저는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통 MBA 코스를 이수하면 파이낸스와 관련된 공부를 많이 하는데 저는 학창시절부터 마케팅과목을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겪어보려고 일부러 외국인 친구들와 어울리고 접시도 닦았습니다.
사실 군 복무를 마치고 BTC로 복귀하고 나서도 한두 군데 정도 면접을 더 봤습니다.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둔 상태였고 외국계 은행의 보수가 낮은 편도 아니라 직장을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13년 넘게 근무하게 됐습니다.
BTC에서 맨 처음 기업금융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자금부를 새로 개편하면서 팀이 만들어졌고 그 때 새 팀장으로 오신 분이 현 JP모건-체이스의 CEO이신 홍기명 대표입니다. 그 분께서 같이 일해보자고 말씀하셔서 외환, 채권 딜러로 일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계은행은 이동이 잦습니다. 제 윗분들이 여러 곳으로 움직이시면서 빨리 책임업무를 맡게 된 겁니다.
-BTC를 첫 직장으로 잡은 건 원래 계획과는 다른 일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채권시장에 입문하다>
-자금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맨 처음 제 보스는 강정원 현 서울은행장이셨어요. 그 분 도와드리는 일을 했죠. 그 외 크레딧 분석 같은 일도 했구요. 창피한 말이지만 적어도 은행에 다닌다면 대출관계, L/C, 예금, 환전을 어느 수준이상으로는 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저는 입행 후 곧바로 자금부에 들어왔고 딜링업무만 계속해서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친구나 친척들이 사업한다고 L/C가 뭐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도 못해줬죠.(웃음) 개인적으로는 베팅을 좋아한다거나 노름에 관심있는 편은 아닌데 십년 넘게 딜링을 하게 된 것이 참 묘하다고 생각해요.
-본격적으로 “채권만 한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입사 초기에야 누구나 그렇듯 분야에 관계없이 업무보조를 많이했죠. 외국계은행이라고 해서 채권은 채권만 외환은 외환만 하는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제 기억으로는 88년 초 제 사수가 BTC를 그만뒀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전담해서 업무를 추진했으니까 88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MBA를 마치고 외국계 은행에 입사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동기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남았죠. 공부를 계속하지 않은 친구들은 증권사로 가기 시작하더군요. 85년 무렵이 증권사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주식이 뭔지 채권이 뭔지 가르쳐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외국계 은행도 제가 처음일 겁니다.
-학부전공이 경제학이신데 전공결정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다른 전공에는 관심이 없으셨나요?
▲허허. 그러면 또 지나간 얘기가 나와야하는데. 당시 학제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문과생의 경우 법대, 경영대, 인문대, 사회과학대 등등의 단과대를 선택하는 거에요. 사회과학대로 입학했더니 그 안에 십여 개 정도의 전공과목이 있더군요. 정치, 외교, 사회, 신문 등등. 솔직히 경제에 관심이 있어서 간 건 아닌데 같이 입학한 고등학교 친구들이 경제학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제일 좋은 과라고 하더군요.(웃음)
-중동고를 졸업하셨군요. 당시에도 주먹으로 유명하던 시기였습니까.
▲저희 때는 아직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이었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명했죠. 하하.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뭐 더 엄청나더군요.
-그럼 ‘싸움’에도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모범생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학업성적과 상관없이 “하고싶은 일은 한다”는 생각을 하신 듯 한데요.
▲싸움요? 전혀 아닙니다. 하하. 보면 아시겠지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랑만 어울리지는 않았고요. 물론 고3 때는 공부에 파묻혀 있었지만 얌전한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한달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보는 스타일은 아니었죠. 고2 때까지는 성적에 그다지 많이 신경쓰지 않았어요.
<”채권딜링”이라는 새로운 거래기법을 도입>
-학부전공은 경제학이었는데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학과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전공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그 때 저보고 경제학과를 권유한 친구들은 다 경제학 교수가 돼 있어요. 어떻게보면 저는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에이 고등학교 때처럼 좀 놀다가 3~4학년 돼서 공부하지 뭐’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가진 편은 아니었거든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군요. MBA때도 마케팅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셨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네. 저는 학교에 남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가서 뭔가 일을 하고, 특히 무역업 같은 것 말이죠. 꼭 장사를 하지않더라도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흥미가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도 무역업에 종사하셨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거죠.
-딜링 룸에 있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고 비즈니스활동을 펼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인데요. 숫자들을 바라보면서 고민해야 되는 정적인 일이잖습니까. 활동적인 업무를 좋아하는 분이 딜링을 십년 먼게 해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언뜻 조화가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마케팅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손님을 따라나가는 일도 드물었으니까요. 그래서 곰곰 따져보면 ‘아 나는 마케팅체질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업무에 따라 제 성격이 바뀌어왔는지도 모르겠어요. 학창시절에는 분명 지금보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택한 걸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왜냐구요? 제가 원래부터 외국계 은행을 목표로 하고 BTC에 입사한 건 아니지만 들어와서 보니 외국계 은행의 채권 트레이딩은 저 혼자 하고 있더라구요. 당시 채권을 사고 판다는 딜링 개념에서의 트레이딩을 하는 곳은 외국계에서는 BTC뿐이었습니다. 그건 달리 말해 강 행장을 포함한 BTC 경영진들이 향후 트렌드를 예측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딜링을 하지않으면 어떻게 딜링이 가능한가요?
▲물론 혼자라는 것은 약간 틀린 표현이구요. 88년 무렵만 해도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죠. 저는 91년부터 채권거래 규모를 크게 늘렸습니다. 물론 지금 규모랑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겠지만 하여간 그 무렵에 채권을 크게하는 곳은 저희와 장기신용은행 정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해주시죠.
▲3000억~4000억원 정도 됐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은 팀을 갖추고 저희보다 좀 더 큰 규모로 했구요. 그 당시 연금, 보험, 투신 등 다른 기관들은 오직 한 가지 전략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만기까지 보유하는 “buy & hold” 죠.
-그 때 딜링용으로 사용했던 주요 채권은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회사채가 최고였습니다. 시장의 벤치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장기채권은 회사채 3년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지금이야 국채도 있고 예보채도 있고 장기채권의 종류와 수가 다양하지만 그 무렵 어디 그런 것이 있습니까. 회사채가 샀다 팔았다하기 가장 쉬운 채권이었고 채권이 나오기만 하면 투신사가 채권을 싹쓸이해갔죠. 물론 채권발행이 매일매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서 며칠 후에도 살 수는 있었습니다.
-현재는 회사채등급이 무척 세분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은행보증/비은행보증 두 가지 분류 정도였죠. 무보증채권이 있긴 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80년대에는 은행들간의 차이가 없었으니까 증권사 브로커들에게도 “은행보증 채권 얼마얼마 있습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됐어요. 그것이 어떤 은행인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채권을 샀다가 팔 수 있는 유동성만 담보되면 어느 회사냐, 어느 은행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때니까요.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③국민연금 한승양 팀장(상)
- [edaily] 국민연금은 채권시장의 “큰 손”중에서도 가장 큰 손이다. 국민연금의 채권투자 규모는 23조5000억원. 우리나라 전체 채권시장 규모를 300조원이라고 할 때 7.7%에 달하는 규모다.
국민연금의 위력은 현재보다 미래에 있다. 국민연금 펀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국민연금에서 채권투자를 담당하는 한승양 팀장이다. 그는 증권사 애널리스트 시절 채권을 알게 된 이후 운용역을 거쳐 채권팀장까지 채권시장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이다. 국내 최대의 펀드인 국민연금 채권운용을 맡으면서 시장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투명한 원칙”과 “새로운 투자기법”을 부르짖는 정통 채권맨이다.
국민연금의 존재는 채권시장이 좋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해 채권수익률이 급락, 대부분의 채권펀드가 “이보다 좋을 순 없다”며 호황을 구가할 때 국민연금은 예보채 입찰에도 참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연금에 들어오는 자금의 성격상 예보채를 투자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만기가 1년인 투신권 펀드에서도 5년짜리 예보채를 겁없이 사들였지만 국민연금은 수익률이 맞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나갔다.
올들어 채권수익률이 급등락을 반복하면서 예보채 입찰이 어려워지자 국민연금이 움직였다. 적정 수익률이 됐다는 생각이 든 것. 국민연금의 “예보채 입찰에 관심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예보채는 “유찰”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승양 팀장은 “시장에서 은근히 국민연금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라지만 연기금이 해야할 일은 따로있다”며 “외국 유수의 연기금 펀드처럼 훌륭한 연기금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익성과 투명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팀장은 교보증권 채권팀장 자리를 그만두고 98년 국민연금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금운용 담당자를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한 것인데 12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월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한 팀장은 “펀드다운 펀드를 운용해보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민간인으로서 준공무원 조직에 들어가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의 펀드, 최고의 펀드매니저”라는 꿈을 이뤄가는 재미로 버텨나갔다.
“토요일, 일요일이 가장 힘든 날입니다. 할 일이 없거든요.” 주말 여유시간마저 “일”을 하고 싶어하는 한 팀장의 채권철학을 들어봤다.(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에 약력참조)
-격동의 80년에 대학에 들어가셨군요
▲제가 좀 늦게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원래는 자연계열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학자이신데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사정권 등 암울한 시절들을 거치시면서 자식들은 정치나 사회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과, 특히 의대를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 적성과는 상관없이 고2때 이과를 선택하고 서울대 치대에 지원했었습니다.
그러다 “난 도저히 자연계열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 문과로 다시 시험을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시험을 봤죠. 그리고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합격한 후 2학년 전공결정 때 국제경제학과를 선택한 겁니다.
격동의 80학번, 자본주의의 최첨단 증권시장에 입문
-80학번이시면 공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렇죠. 그 때 지금 한창 잘 나가시는 유시민씨, 심재철 의원등의 주도 하에 데모도 많이 했어요. 학교입학 후 두 달만에 5.18이 발생해서 10월까지 놀았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으니까요.
-공부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있습니까.
▲당시 제가 다니던 국제경제학과(당시 무역학과)는 학교 내에서 데모를 제일 많이 하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운동권 활동을 열성적으로 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쪽 관련책을 곁눈질해서 많이 보게 됐어요. 지금 부총리이신 한완상 교수, 이영희 교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신 분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시장에 입문한 것이 독특하다면 독특한데요.
▲당시에는 채권이 뭔지도 몰랐어요. 80년대 중반이후 주식시장이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가끔 80년대의 비극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때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증권회사가 좋다니까 무작정 몰렸습니다. 그 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사람도 참 많았거든요.
-증권회사를 택한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일단은 그곳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고 또 금융의 증권화가 도래하는 시기였으니까요. 막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시대로 넘어가려는 시대였지만 그때 한국의 직접금융이 너무 초기 단계라서 이 분야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쌍용투자증권 부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2년 반 정도 근무했습니다.
-애널리스트로 말입니까.
▲네. 그런데 그 때는 애널리스트와 이코노미스트 등에 대해 뚜렷한 개념이 없었어요. 저는 증권연구실에서 금융시장 전반에 관한 연구, 경제분석 같은 업무를 담당했죠.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스트레티지스트였죠. 거기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한 2년 반 하다보니 지겹더라구요. 마침 그 무렵 채권에 눈을 떴어요. 이거다 생각하고 연구소장님께 채권팀으로 보내달라고 한달 정도 계속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채권계에 발을 내딛은 겁니다.
”채권시장처럼 가능성이 큰 시장에 몸을 바치고 싶었다”
-채권팀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채권시장은 주식시장과 더불어 자본시장을 이끄는 수레바퀴중 하나이면서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큽니다. 그런데 주식시장에 비하여 너무 낙후되어 있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시장을 보니 채권시장이나 채권매니저들의 위력이 대단하더라구요. 이 낙후된 분야에 몸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럼 교보증권으로 옮기면서 채권을 시작한 겁니까.
▲아닙니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쌍용투자증권 채권부로 옮겨 3년 정도 근무했죠. 거기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3개월 정도 미국 월스트리트에 OJT를 다녀왔는데 그걸 계기로 정말 여러 가지를 배웠고 채권시장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하게 됐어요. 채권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회사방침이 근무순환 방침이어서 영업부로 발령이 난 게 계기가 되어 교보로 옮겼고 거기에서 채권팀장을 맡았죠.
-채권시장 경력이 한 11년은 되시는 군요. 듣기로는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운용전문인력을 공채할 때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입사하셨다는데.
▲IMF 외환위기가 막 발생한 직후인 98년 2월에 공고가 났습니다. 그 때는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서 국민연금에서 기금운용전문가 채용공고를 낸 거죠.
-경쟁률은 어땠습니까? 운용팀장을 뽑는 것이었나요?
▲120명정도 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용팀장이 아니라 매니저, 즉 운용역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채권시장의 2세대로서 진정한 펀드운용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국민연금으로 옮기시면서 월급도 많이 줄었을 텐데. 자리를 옮기신 이유는.
▲급여는 정확히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증권회사에서는 운용의 한계를 느꼈어요. 증권회사에서는 운용이라는 것이 단기 트레이딩이 전부였는데 이게 진정한 의미의 운용은 아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증권회사 사람들의 꿈은 진정한 운용을 해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처럼 자신의 펀드를 가지고 전략과 포트폴리오를 짜서 운용하는 것 말이죠. 또한가지는 그동안 나름대로 갈고 닦았던 채권관련지식을 공익을 위하여 바치고 싶었어요 .
제가 채권을 시작하기 전에 그 분야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바로 한국 채권시장의 1세대시죠. 저는 2세대쯤 되겠죠. 그 당시 운용은 주먹구구식이었어요. 운용이라고 해야 호가, 매매단가계산, 가격체결 그 정도가 전부여서 단가계산하는 것이 커다란 노하우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단가계산하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죠.
-계산법을 안 가르쳐준다?
▲네. 채권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계산프로그램이 생겼죠. 샤프계산기인가? 그 계산기에 수식을 입력해서 마음대로 계산하는 선배들이 정말 부럽더군요.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80년대 후반입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증권시장이 펀더멘털을 중시하지도 않았고, 금리를 예측해서 채권을 사고 판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국고채도 없었고 그나마 회사채가 거래됐지만 대개 발행시장에서 소화된 게 대부분이었어요. 무보증사채도 없어서 회사채종류가 은행보증/기타보증 두 종류만 있어서 발행사의 신용도와 관계없이 호가가 두가지 밖에 없었어요.
은행이나 투신 같은 운용기관은 바이 앤 홀드(buy and hold:만기보유) 전략만 사용했구요. 채권을 매집해서 편입하기만 해놓는 시스템말입니다. 그런 것만 보고 배우다가 미국에 갔더니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단했죠. 운용툴이 좍 펼쳐져 있고 프로그램이 저절로 움직이는데다 포지션을 가지고 매매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포지션을 가지고 운용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의 트레이딩이라고 하는 기법은 증권회사에서 맨 먼저 도입한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이후 채권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시가평가제도입, 인터넷기법의 활용등으로…
-국민연금에 입사하고는 몇 분이서 같이 운용을 했나요.
▲1년간은 저 혼자 했습니다. 그 후 반년간 둘이 하다가 99년 11월에 기금운용본부가 생겨 자산운용조직으로 면모를 갖추었고. 지금은 채권운용팀에 5명이 있습니다.(미들, 백오피스 제외) 상반기중 4-5명을 충원할 계획입니다.
국민연금 입사 초기, 인프라 구축에 주력
-초기 홀로 운용할 때는 지금처럼 딜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는 채권운용에 배정된 자금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실제 딜보다는 운용관련 인프라 구축에 힘을 많이 쏟았어요. 무보증회사채 매입근거를 마련하고 선진운용기법도 도입하고 그전에는 매입만 있었어요. 제가 운용을 맡으면서 처음 매도를 한 거죠. 결제방식도 개선하고 운용관련 규정도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운용을 하게 된 것은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입니다.
- 그 당시 채권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에 제가 맡았을 때는 3조5000억이었고 본부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6조5000억이었습니다. 지금이 23조5000억이니까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익성, 안정성, 직접투자의 원칙
-기금운용이 운용본부로 통합되면서 많은 부분이 채권으로 바뀐거군요.
▲본부를 설립하면서 내건 운용방침은 수익성, 안정성이었습니다. 같은 fixed income 이라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한 방법을 하겠다는 거죠. 그러면 예금을 들 이유가 없습니다. 요즘 국고채 금리가 떨어져서 좀 그렇지만 당시에는 예금과 채권의 금리차가 엄청났어요.
또 우리는 채권의 경우 간접투자는 안하고 직접투자만 합니다. 공사채형 수익증권과 은행금전신탁을 안하는 이유는 시가평가제하에서 시장위험을 무릅쓰면서 굳이 수수료를 줘가면서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건 저희 뿐 아니라 캘퍼스(CalPERS) 같은 해외유명 팬션(연금)펀드들이 동일합니다.
사족이지만 지난 2년간 국민연금의 채권운용수익률이 국내에서 제일 높습니다. 부실채권도 전혀 없구요
국민연금 포트폴리오 “국고채 55%, 회사채 45%” 우량 ABS에 투자
-채권운용규모가 23조나 되는데 그 포트폴리오가 어떤지 좀 알려주시죠
▲절대치로 봐서 현재의 23조는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닙니다. 보험료수입과 운용수익이 급증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예탁되던 자금이 없어져 국민연금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돼 있어요. 국민연금의 성격상 그중 상당부분은 채권에 투자할 수밖에 없고 현재는 국공채에 55%를, 회사채에 45%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회사채중 절반이상이 우량ABS이구요.
-회사채의 투자등급은 어디까지입니까?
▲실질적으로 A등급이상에만 투자합니다. 규정상으로는 BBB등급에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내부기금운용규정에 의하면 예외투자로 투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사장님의 승인을 받으면 BBB등급 회사채 투자가 가능합니다. 저희가 보수적으로 A급 이상에만 투자한 결과 부실채권이 전혀 없게 된거죠
“가장 중요한 투자전략은 저평가 채권을 발굴하고 고평가 채권을 매도하는 것”
-그런 거대규모의 자금을 움직이면서 생각하신 큰 밑그림은 뭡니까.
▲기본적인 운용방침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운용수익을 올리는 겁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원칙은 디폴트 프리(default free)이구요. 그 원칙 하에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짜서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죠. 그 중 가장 중요한 전략은 저평가채권을 발굴하여 매입하고 고평가채권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다른 금융기관의 운용전략과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단순한 의미의 딜링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는 금리의 변동에 따른 단기트레이딩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터닝포인트에는 과감히 매매도 합니다. 지난 2월의 금리 급락기에는 많이 팔았어요.
ABS 6조원 보유, 수익성 측면에서 주목하는 채권
-국민연금에서 주목하고 있는 채권은 어떤 것인가요?
▲저희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채권은 ABS 입니다. 우리나라 채권 중 ABS가 안정성과 수익성이 가장 높아요. 하지만 유동성이 낮아서 거래가 잘 안되니까 그동안 우리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죠. 기금의 성격상 장기보유전략을 지향하는 국민연금으로서는 ABS가 가장 좋은 상품이지요.
기억에 남는 게 99년말부터 우리나라 시장에서 ABS가 본격적으로 발행되면서 여러분들을 설득하여 99년 12월에 규정을 바꾸고 그달에 처음으로 5000억을 투자한 것입니다. 초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 낮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약 6조원 정도의 ABS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 (분석)미국, 경기및 연말 랠리 시각차-모건/메릴린치
- 주초를 맞아 미국 증권사들이 일제히 미국 경기 및 증시 전망 자료를 내놓았지만 증권사별, 애널리스트별로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어 주목된다.
◆ 미국 경제 경착륙 가능성
월가의 대표적 약세론자이며 모건스탠리의 수석전략가인 바톤 빅스는 최근 글로벌 투자가 컨퍼런스에서 미국 경제의 경착륙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이에대해 대다수의 대형 기관투자가들과 헤지펀드들이 동의했다고 전했다. 그는 설비투자 및 첨단기술 주도의 붐이 꺼지고 있고 세계 경제가 고유가, 나스닥 하락, 금리인상으로 학대를 받고 있다며 경착륙 가능성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메릴린치의 스테인버그 전략가는 내년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없으며 미국 경제역시 3.7%의 비교적 견조한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하며 빅스와 큰 대조를 보였다. 또 S&P500 기업들의 EPS가 약 10%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모건의 바이런 위엔과 스테판 로치 분석가는 미국 경제 전망에 대해 그다지 좋게 보지 않으면서도 경착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며 빅스의 하드랜딩관과는 약간의 시각차를 드러냈다.
모건의 미국전문 전략가인 위엔은 미국 경제가 내년에 문제를 경험할 것 수 있으며 경착륙 가능성은 50% 미만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동안 달러를 부양했던 여러 요인들이 감소하면서 대부분의 투자가들이 달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 미국 증시 연말 랠리 가능한가 ?
메릴린치의 맥커비 분석가는 나스닥이 추가 하락할 위험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나스닥이 중장기적으로 과매도 상태인데다 과거 시장이 10월에 바닥을 치고 이후 3개월동안 반등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때 나스닥이 현재 바닥을 다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시장이 지속적인 반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심리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기 투자가들은 약세장에서 매수에 나서야 한다고 권고하고 보험, 의약, 일부 제약, 컴퓨터 서비스, 항공/국방 등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메릴린치의 리처드 번스타인 분석가는 최근 매도쪽 지표가 16년만에 가장 높은 62.3%로 나타났다며 지금이 주식 매수 타이밍임을 시사하며 연말 랠리에 무게를 실었다.
반면 모건의 바톤 빅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과 연말 사이에 첨단기술을 비롯한 증시 전반이 반등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심각한 실적 둔화 가능성, 금융사고 및 유동성 부족 가능성, 내년초 증시 추가 하락 전망에 대해서는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며 자기는 연말 증시 반등에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식시장, 특히 나스닥 시장이 지금부터 연말까지 하락할 것이며 우량 채권은 상승할 것이라며 우울한 전망을 제시했다.
- 벤트리,생약 간경화치료제 효능실험 성공적(상보)
- 벤트리(www.ventree.co.kr)가 원광대학교 자연과학대 유병수 교수팀과 공동으로 생약에서 추출한 간경화 치료제(VWK001)를 개발, 동물실험과 초기효능 실험을 마쳤다고 25일 발표했다.
벤트리는 이같은 연구결과를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HEPATOLOGY”지에 기고했다.의학전문지에 연구결과가 실린다는 것 자체가 치료제의 기능과 기제가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고 벤트리는 덧붙였다.
벤트리는 이 간경화치료제를 전문의료기관인 미래의료재단에서 100여명 이상의 간경화 환자를 대상으로 지난 3개월동안 치료한 결과 부작용이 없었으며 간경화 진행을 억제하는 효능이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또한,상당한 효과를 본 환자와 약간 효과를 본 환자들 중 간경화 환자 분류별(B형 간염, 술, 담배(알코올성), 선천성(유전적))로 치료 효능을 분석 연구하고 있다.
간질환 치료제의 세계시장 규모는 1990년도 기준으로 약 18억불 정도로 추산된다.이중 간질환용 제제가 5억불(27.8%), 이담제가 10억불(55.6%) 및 해독제 종류가 3억불(16.7%) 정도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올해 간질환 시장규모는 2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벤트리 최교설이사는 "이번에 개발한 간경화치료제를 세계시장에 선보이기 위해 준비중이며 앞으로 본격적인 임상치료를 미래의료재단 산하 병원에서 진행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VWK001" 간경화 치료제는 생약에서 추출한 물질로 실험동물에서 일반적인 관찰,혈청 생화학적 검사, 간조직 검사, 프로콜라겐타입Ⅲ (PNIIIP) 정량,총 콜라겐양 측정 등의 연구결과 항섬유화 효과와 치료 효능이 확인됐다고 벤트리는 밝혔다.
- 제일제당-내츄로 바이오텍 전략적 제휴
- 제일제당이 서울대 벤처기업인 "내츄로 바이오텍"과 19일 전략적 사업 제휴를 체결했다.
내츄로 바이오텍은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 안용준 교수가 설립했으며 식물,곤충,미생물등으로부터 천연물질을 추출, 개발하는 실험실 벤처기업으로 자본금은 4억 4000만원규모다.
제일제당은 1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번 제휴에 따라 내츄로 바이오텍은 기술개발, 제일제당은 마케팅 및 상업화 분야에서 상호 협력하게 된다.
특히 제일제당은 내츄로가 개발하고 있는 식품,사료,제약,농약 등의 부문에서 국내외 판매망 및 제휴선을 다수 확보하고 있어 제품 양산 및 판매에 있어 최적의 파트너로 평가 받는다.
내추로 바이오텍은 현재 동충하초를 이용한 "코디세핀 (CORDYCEPIN)"과 곡물 훈증제로 사용되는 "메칠브로마이드"대체물질의 시장 상품화를 앞두고 있다.
코디세핀의 경우 결핵, 천식, 항암 작용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실험결과 나타나고 있으며, 항암제로 출시될 경우 수출을 통한 막대한 이익실현이 예상된다.
한편 제일제당은 발효기술을 기반으로 한 라이신,핵산, MSG등 고부가가치 발효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향후 생물공학, 아미노산 제품 외에 조인트 벤처사업 등에 2004년까지 약 3억불을 투자하는 등 바이오 산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제일제당의 바이오 본부는 3천억원의 매출에 500억원의 이익을 올렸고 올해는 4천억원의 매출에 800억원의 이익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