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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수의 월가 키워드)Workaholic①
- [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사람 얘기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 특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성공`이 뭘까.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라디오 방송국 광고 세일즈맨으로 시작, 미국 최고 미디어 그룹 사장에 올랐다. 다른 한 사람은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 미디어 시장에 뛰어들어, 일흔에 `제국`을 건설했다.
일에 미친(workaholic) 두 사람이 만났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월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바이아컴 얘기다. 멜 카마진 사장과 섬너 레드스톤 회장의 `뉴욕판 성공시대`다.
◇굴러온 돌
미국 3위의 미디어 그룹 바이아컴은 카마진 사장 겸 최고운영자(COO)가 사임한다고 1일 전격 발표했다. 바이아컴의 회장 레드스톤은 MTV의 톰 프레스톤(58)과 CBS의 레슬리 문비스(54)를 공동 사장 겸 공동 COO로 선임했다.
레드스톤은 올해 81세, 카마진 사장은 60세다. 레드스톤은 경영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3년내에 자신도 CEO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덧붙였다.
바이아컴은 CBS(공중파), MTV(케이블), 파라마운트(영화) 등 미디어의 전 영역을 커버하고 있는 제국이다. 제국의 황제는 레드스톤이고, 황태자는 카마진이다. 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카마진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카마진이 어떤 사람인가. 일때문에 결혼생활마저 파탄난 일중독자가 아닌가. 월가는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카마진이 디즈니로 옮겨가는 것이 아닐까. 카마진이 그냥 물러날리가 없지. 뭔가 계획이 있을거야."
카마진은 원래 TV 쪽 사람이 아니다. 그는 라디오 광고 세일즈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전공이 라디오인 셈이다. 라디오 명예의 전당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나중에 CBS의 최고 경영자가 되고, 회사를 부흥시키자, 월가는 그를 IBM의 루 거스트너, GE의 잭 웰치, 바이아컴의 섬너 레드스톤,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스너에 버금가는 CEO로 추겨세웠다.
카마진은 뉴욕 퀸즈 롱아일랜드시티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고, 어머니는 커튼 공장에 다녔다. 고등학교때부터 광고회사의 우편실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페이스 칼리지 야간 학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라디오 광고 세일즈일을 시작, 연봉 7만달러를 벌어들였다. 1970년 WNEW-AM으로 옮겨 라디오 광고 시장을 평정했다. 그가 광고 수당을 너무 많이 받아갔기 때문에 회사에서 그를 견제할 정도였다. 1981년 카마진이 38살때 12만5000달러 연봉을 받고 인피니티 방송국에 스카웃된다. 그는 매일 아침 6시30분에 출근했다. 인피니티는 카마진의 지휘하에 위치가 좋은 라디오 스테이션을 하나 둘 인수하기 시작했다. 카마진은 스포츠와 성인방송으로 미국 라디오 업계를 통일한다. 1985년 NBC가 내쫓은 하워드 스턴을 받아들여, 악명 높은(?) 성인 방송을 시작했고, 농구, 야구, 아이스하키 등 프로 스포츠 중계권도 사들였다. 인피니티는 전국적으로 44개 스테이션을 보유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라디오 방송사가 됐다.
카마진의 진정한 전성기는 1996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CBS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로 유명한 웨스팅하우스일렉트릭의 소유였다. 웨스팅하우스는 1995년 CBS를 사들인 후 그룹 명칭도 CBS로 바꾸고, 제조업 부문을 매각하는 등 미디어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카마진은 당시 CBS의 CEO였던 마이클 조단(시카고 불스의 조단과 동명이인)에 접근, CBS 소유의 라디오 스테이션을 인수하고 싶다고 말한다. 조단은 어쩐 일인지 역으로 인피니티를 CBS가 사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인피니티 주가는 1992년 기업공개 당시 주당 17.50달러였다. 카마진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알 수 없지만, CBS는 인피니티를 주당 170달러에 인수한다. 카마진은 피인수 기업의 CEO였지만, CBS 라디오 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카마진은 여기에 만족할 사나이가 아니었다. CBS와 인피니티가 합병한지 5개월만에, 카마진은 20년간 TV 부문에서 일해온 피터 런드 시장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월가는 카마진이 `머니 메이커, 딜 메이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마진이 CBS의 사장이 됐다는 소식에 CBS 주가는 급등세를 나타낸다. 한 칼럼리스트는 "마이클 조단 회장에게 드리는 메모: 만약 멜이 당신을 밀어내면 웨스팅하우스 주가가 얼마나 급등할 지 상상해 보셨나요?"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칼럼은 나중에 빈 말이 아닌게 됐다.
1997년말까지 CBS 주가는 17달러에서 30달러로 상승했다. 시가 총액도 91억달러로 늘어난다.
그는 일중독 때문에 이혼까지 했다.(장성한 그의 아들은 3개의 라디오 스테이션을 운영하고 있고, 딸은 연예오락 채널 이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고 있다.) 500달러 이상 지출 결제는 자신이 직접 했다. 비용절감을 위해서라면 단 돈 1센트도 쓰지 못하게 했다. 대신 광고 인센티브는 파격적으로 배정했다.
카마진은 CBS를 최고의 방송국으로 키우기 위해 인피니티 라디오의 흥행기법을 그대로 동원했다. 하워드 스턴을 시켜서 NBC의 세터데이 나이트 라이브같은 심야 성인방송을 프로모션하도록 했고, NFL 중계권 등을 사들였다.
카마진은 1998년 조단을 밀어내고 CBS그룹의 CEO가 된다. 그해 CBS는 1994년 이후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선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렸다.
카마진에게 고민이 있었다. 경쟁사인 ABC나 폭스TV는 컨텐츠를 생산하는 헐리우드 스튜디오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NBC는 GE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다. "TV 방송사가 홀로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마진은 70년대 한몸이었던 바이아컴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부도옹(不倒翁)
바이아컴의 늙은 맹주 섬너 레드스톤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즐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바이아컴은 나다. 나는 곧 바이아컴이다. 이 결혼은 영원할 것이다.(Viacom is me. I"m Viacom. That marriage is eternal, forever.)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내 나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I know I don"t look my age and I don"t act my age and therefore I will not accept that age.)고도 말했다. 올해 그는 81세다. 건강 비결을 묻자, "고단백 다이어트를 한다. 문제는 지방이 아니라, 당분이다. 나는 영양학에 있어서도 박사다"라고 말했다.
레드스톤도 카마진처럼 원래 방송미디어가 본업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같으면 은퇴할 나이인 63세때 바이아컴을 인수했다.
경쟁사의 CEO들이 전후의 풍족함을 누리며 성장했지만, 그에게는 대공항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다. 2차 세계대전때는 일본군 암호 해독 작전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워싱턴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고향인 보스턴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었다. 레드스톤의 아버지 막스 로스테인(아버지가 후에 성을 바꿨다.)은 자수성가해서 조그마한 나이트 클럽을 경영했다. 수완이 좋았던 아버지는 사업을 확장, 보스톤 등 뉴잉글랜드 일대 극장 체인점을 구축했다. 이것이 가업이 됐다. 어린 레드스톤은 쇼비즈니스가 뭔지 배웠다. 어머니도 엄격했다. 피아노 연습시간을 정확하게 체크하곤 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미디어 세계에서는 레드스톤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극장에 내걸 영화 판권을 사기 위해 헐리우드를 드나들었지만, 그가 이바닥에서 본격적으로 명성을 날린 것은 바이아컴 인수 이후부터다.
바이아컴은 그가 미디어 제국을 만드는 발판이었다. 음악전문 채널 MTV와 어린이 채널 니컬로우디언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1994년 USA네트워크의 배리 딜러와 피튀기는 인수전 끝에 파라마운트를 손에 넣는다. 바이아컴은 어린이부터 청장년, 중년층을 아우르는 엔터테인먼트 컨텐츠를 모두 구비하게 됐다.
그러나 그가 인수한 바이아컴과 파라마운트는 빚더미 위에 올라 있었다. 그는 무자비하게 비용을 줄이고, 자산을 매각했다. 뉴욕 맨해튼 한 가운데 위치한 매디슨 스쿼어 가든과 프로 스포츠 팀들도 팔아버렸다. 라디오 스테이션과 비디오게임 회사도 주저없이 팔았다. 그는 파라마운트의 부채를 110억달러에서 40억달러로 줄이는데 성공한다.
그는 늘 "컨텐츠가 왕이다(Content is king)"라고 말했다. 채권 은행들은 부채 정리를 위해 MTV 등을 매각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컨텐츠 제조 능력이 있는 이들 채널을 팔 수는 없었다. 그는 컨텐츠 대신 케이블 시스템을 팔아버렸다.
이렇게 구조조정을 한 덕에 바이아컴은 빠르게 회생할 수 있었다. 월가를 열광시키는 저력만큼은 &51211;이 경영자들을 능가한다. 1987년 바이아컴에 100달러를 투자한 주주는 현재 926달러를 회수할 수 있다. 타임워너에 같은 액수를 투자했다면, 771달러, 디즈니라면 770달러, 뉴스콥이라면 543달러가 된다.
그는 일중독자 이상이다. 그와 회사는 한몸이다. 가끔 테니스를 치는 것 외에 특별한 취미도 없다. 레드스톤은 바이아컴 의결권의 68%를 컨트롤하고 발행주식의 13%를 소유하고 있다. 그에게 바이아컴은 회사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회사는 그의 인생이고, 취미이고, 그의 모든 것이다. 일과 휴식, 주중과 주말, 사람과 회사 사이에 경계가 없다.
파라마운트 인수전이 한창 진행중일 때다. 그는 인수에 필요한 사항을 점검하느라 주말에도 새벽 5시에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곤했다. 견디다 못한 부하는 "아내가 새벽잠을 자꾸 설친다"면서 "아침 7시까지는 전화를 받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레드스톤은 부하에게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다음날 정확하게 아침 7시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금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개봉 영화의 전날 관람객 현황을 체크한다.
레드스톤은 돈에 욕심이 있거나, 사치스러운 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뉴욕에서 일을 보지 않을 때는 보스턴 인근의 4만3000달러 짜리 허름한 집에서 회사 일을 챙긴다. 헐리우드에 가서는 아침에 산책을 한 후 테니스장에 들렀다가 자신의 스튜디오를 둘러보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아침이라고 말한다.
그는 낙관론자다. "낙관이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레드스톤은 스스로 운명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
레드스톤은 1979년 유명한 보스턴 코플리 플자 호텔 화재로 오른 손을 쓸 수 없게 됐다. 당시 그는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의사는 생명을 건지더라도 걷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른 팔도 잃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지금도 그는 테니스 라켓을 오른손에 가죽끈으로 묶고 플레이를 한다.
"코스에서 이탈하지 않는거야. 끝까지 버티는 거지. 낙오되는 것을 거부하는 거야. 나는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의사는 안된다고 했지만, `나는 걸을 수 있다`고 말했지. 지금은 이렇게 테니스 코트에서 뛰어다니고 있지."
이런 내공을 가진 레드스톤이 2인자의 부상을 달가와할 리 없다. 그는 1995년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프랭크 비온디를 쫓아낸다. 프랭크가 바이아컴의 성공을 자기 공인양 으스대는 것에 진노한 것.
일밖에 모르는 부도옹 레드스톤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 그때 마침 야심만만한 젊은 카마진이 다가온 것이다.
- 후세인이 선택한 CBS의 댄 래더
- [edaily 정명수기자] "후세인에게 해야할 질문을 2000번도 넘게 외우고 또 외웠다"
지난 25일 미국의 공중파 방송인 CBS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보도했다. 이 인터뷰를 성사시킨 CBS의 댄 래더는 자신의 보도가 이라크 정권의 홍보물이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했다고 말했다.
후세인 인터뷰는 미국의 2차 유엔 결의안이 제출된 이후에 이뤄진 것이어서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댄 래더의 위상도 그만큼 올라간 것은 당연하다.
댄 래더는 올해 72세로 ABC의 피터 제닝스, NBC의 톰 브로커와 함께 미국의 3대 앵커로 통한다. 경쟁자인 제닝스와 브로커는 댄 래더의 특종을 "대단한 일"이라 치켜세웠다.
댄 래더는 걸프전 직전에도 후세인과 단독 인터뷰를 했었다. 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의 전언론이 후세인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해 8월 바그다드 호텔에서 노심초사 인터뷰를 기다리던 댄 래더는 대통령궁으로부터 전갈을 받는다. 그는 꾸껴진 셔츠 차림으로 단숨에 달려가 후세인을 만나는데 성공한다.
13년후 후세인은 다시 댄 래더를 선택했다. 이번에 댄 래더는 정장을 입고 그를 만났다. 댄 래더는 후세인에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운을 뗐다. 후세인은 "13년 전에도 당신은 그런 질문을 했다"며 받아넘겼다.
후세인이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는 것은 한스 블릭스가 요구한 알사무드 미사일 폐기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후세인은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안했다.
댄 래더는 "후세인이 생존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후세인은 왜 댄 래더를 다시 선택했을까. 한번 만났으니 다시 만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댄 래더의 경력을 보면, 그가 후세인 단독 인터뷰를 따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평가했다.
댄 래더는 1950년 기자 생활을 시작, 1962년 CBS로 옮겨온다.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저격사건, 아이젠아워 이후 역대 대통령 인터뷰,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장례식, 테레사 수녀 장례식, 보스니아 내전 등 수많은 특종 보도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의 뒤를 이어 CBS 이브닝 뉴스의 메인 앵커가 된다. 처음에 그는 방송이 끝날 때마다 "용기를 주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1년후 CBS가 그의 뉴스 시간에 테니스 중계를 임시 편성키로 하자 방송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 6분간 뉴스 방송이 중단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댄 래더는 미국이 이라크 공격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할 때부터 부시 행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그는 싸구려 애국주의에 휘둘려 언론이 객관성을 저버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댄 래더는 "애국심이라는 감정에서 시작하는 자기 검열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수행한 전쟁은 크건 작건, 가리지 않고 접근이 제한됐고, 정보도 제한적이었다"며 "언론이 전쟁의 배경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 기아차,말련 도로사이클대회 후원
- [edaily 김기성기자] 기아자동차(00270)는 31일부터 내달 9일까지 열흘간 말레이시아 랑카위섬에서 열리는 도로사이클 대회(Le Tour de Langkawi 2003)를 공식 후원한다고 29일 밝혔다.
기아차는 이번 대회에 카니발 5대를 운영차량으로 제공, 대회 공식 에스코트차량(Official Escort Vehicle)의 자격을 획득했으며 기자회견장 배경 보드, 출발 및 결승점, 대회 개최장소 및 대회안내 배너, 지휘차량,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회사 로고를 노출, 상당한 홍보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대회는 말레이시아 RTM 방송, ESPN-스타 스포츠 아시아, 싱가포르 TV, 중동의 폭스 스포츠 등 아시아권 방송을 비롯해 영국의 채널 4와 스카이 스포츠, 미국의 아웃도어 라이프, 질레트 월드 스포츠, 트랜스 월드 스포츠 등 전세계 유수 방송사에서 중계 방송함에 따라 100여개국 6억여명이 시청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앞서 기아차는 후원하고 있는 국가대표 스키점프팀의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금메달 획득과 최근 끝난 2003년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에 메인스폰서로 스포츠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거둔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