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렬
  • 영역
  • 기간
  • 기자명
  • 단어포함
  • 단어제외

뉴스 검색결과 3,087건

  • (CEO탐방)"생활정보신문에서 인터넷까지"-가로수 이의범사장
  • [edaily] 생활정보신문 가로수닷컴의 이의범사장에게는 항상 "노동운동가에서 경영자로의 변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80년대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웠던 학생운동가중 벤처기업 창업에 성공한 몇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왠지 이런 표현은 식상하다는 느낌이다. 그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던 젊은 시절의 꿈을 포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정확한 현주소가 운동가가 아닌 주목받는 벤처기업의 경영자라는 점이라는 게 그 이유다. "운동가에서 벤처기업가로의 변신 계기는 무엇이냐"는 상투적인 그러나 빼먹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부터 할 줄 알았습니다. 저의 과거사를 조금이나마 하는 분이면 항상 물어보는 단골 메뉴니까요. 지난 89년 독일의 통일과 소비에트연합의 붕괴가 결정적인 계기였지만 여러가지가 겹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장이 생활정보신문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지난 88년 수배를 받으며 고향인 대전을 비롯해 광주 등을 떠돌아 다니던 때였다. 그 당시는 생활정보신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교차로"가 카이스트(KAIST)를 중심으로 대전지역으로 퍼지고 있었고 광주 "사랑방" 등 각 지역 정보신문이 하나 둘씩 생겨나는 초기시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베를린장벽의 붕괴,소비에트연합의 해체,이어진 독일 통일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은 이 사장의 세계관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탈이데올로기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시기로 정하고 3D 업종이 아닌 기간산업 노동운동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사장은 이런 생각을 갖고 지난 90년 한국통신에 입사했다. 하지만 한국통신과 맺은 인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장에게 기간산업 노조활동 보다는 정보통신쪽으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사장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목적은 기간산업의 노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기업조직의 관료주의가 종전에 머리로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덤으로 하이텔 단말기가 앞으로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큰 재산이었습니다" 이 사장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대학교(서울대 계산통계학과 82학번)를 중퇴하고 노동현장에서 혁명가를 꿈꾸던 한 젊은 청년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꿔버린 사건이 2~3년 사이에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이 사장이 노동운동가의 때를 어느정도 벗고 경영자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은 지난 91년. 이 사장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생활정보신문이 유독 서울에서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 친구 5명과 서울 양재동에 "가로수"라는 생활정보신문업체를 설립했다. 대전에서 눈여겨 보았던 생활정보신문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첫 출발은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에피소드지만, 신문을 찍어놓은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배포를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등의 앞뒤가 뒤바뀐 토론으로 밤을 샐 때가 많았어요. 운동하던 사람들이 사업가로 변신하는 한계점에 부딪힌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사장은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경영자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광고영업에 배포, 인쇄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노동자"에서 "경영자"로 위치가 정반대로 바뀐 것도 어려움이었다. 한국통신 재직시 마음에 두었던 정보통신과 생활정보의 접목도 차근차근 실현해 나갔다. 98년 PC통신과 인터넷 생활정보(www.garosu.co.kr)에 이어 99년에는 쇼핑몰( www.garosushop.co.kr)서비스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사장은 아직 온라인으로 무게중심을 완전히 옮길 때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해 시너지를 높여 나가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은 오프라인에 초점을 맞춰야 할 때"라며 "앞으로 시의적절하게 비중을 조절하는 문제만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안정성(오프라인)을 바탕으로 성장성(온라인)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이라는 논리다. 이 사장은 또 "기회가 오면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시대의 변화에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벌일 생각은 없다"며 "핵심사업을 중심으로 남들보다 반걸음만 앞서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사장의 경영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준비론과 반보론" 이런 경영관은 창업 10년을 넘어선 가로수닷컴의 행보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현재도 활발한 다각화를 추진중이지만 자신없는 분야엔 아예 눈을 돌리지 않는다. 생활정보신문이라는 핵심사업을 중심으로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관련 다각화가 중심이다. 이 사장은 "홈쇼핑도 아직 주력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원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차원이죠. 방대한 정보가 담겨있는 생활정보신문과 전국에 점조직 처럼 퍼져있는 배포망을 이용해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전략입니다. 현재 추진중인 부동산투자신탁(리츠)사업도 이런 맥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색 등 쌍방향성이 강조되는 디지털 방송시대에는 생활정보방송이 또다른 홈쇼핑사업의 형태를 띨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나타났다. 특히 국내에서 4가지 특허를 취득한 1시간 배송시스템은 가로수닷컴의 홈쇼핑사업에 든든한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로수닷컴은 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CATV 추가 홈쇼핑사업자로 선정된 한 업체와 배송 관련 협의를 진행중이다. 가로수닷컴이 최근 비비시모(Vivisimo)를 통해 인터넷 검색 포털사업에 진출한 것도 역시 기존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가로수닷컴이 벤처기업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소 의아해 합니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생활정보신문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희가 인터넷 비즈니스를 위해 연구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로수닷컴이 인터넷에서 구현하는 대부분의 기술이 이 연구소에서 개발됐다는 것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99년 설립된 가로수닷컴연구소는 지난 3월 무선통신망을 이용한 신용카드 승인 및 결제시스템과 관련한 특허를 출원하는 등 정보통신 관련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미국 비비시모의 검색엔진은 현지에서 강력한 검색 엔진(이사장은 더욱 정확히 말하면 검색엔진이 아니라 클러스터링 기법이라고 설명하곤 했다)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비시모의 검색엔진에 대한 한국내 독점판매권과 상표권 사용, 1억원 출자의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도 가로수 연구소의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사장의 설명이다. 가로수닷컴연구소는 비비시모 엔진을 적용할 수 있는 한글화 개발을 완료했으며 현재는 일본어와 중국어 버전도 개발중이다.가로수는 비비시모 포털사업을 첫 해외 진출 사업으로 설정하고 일본 홍콩 필리핀 지역 등으로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 가로수닷컴은 최근 일본 미디어랩업체인 CA(사이버에이전트)사로부터 3자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45억원을 투자받아 웹광고사업에도 진출했다. 투자자금중 11억원 가량은 CA코리아에 투자, 자회사로 편입시켰으며 올 하반기중 주간지 발행을 계획중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미디어랩 업무를 맡기로 했다. 가로수닷컴은 현재 오마이뉴스의 주요주주다. 가로수닷컴이 항상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지난 98년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등 주요 일간신문이 생활정보신문업계에 뛰어들었을 때 가장 긴장했다고 이사장은 회고했다. 그러나 주요 신문의 진출과 이후 실패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가로수 등 생활정보신문의 입지를 더욱 굳혔다. 탁월한 브랜드 인지도와 전국적인 배포망을 갖춘 일간신문조차 생활정보신문사업에서 실패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생활정보신문의 "진입장벽"을 한단계 높여놓았기 때문이다. 가로수닷컴은 이제 수도권을 중심으로 1개의 직영점과 25개의 프랜차이즈를 보유한 국내 3대 생활정보신문업체로 발돋움했다. 올해 매출과 순이익은 전년대비 각각 45%와 77% 증가한 320억원과 3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사장은 "기업의 가치는 장기적으로 내재가치에 수렴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해 나가면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데 주력해 안정적인 배당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경영자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생활정보를 바탕으로 반걸음씩 앞서나가려는 가로수닷컴의 행보가 주목된다. <이의범사장 이력> 64년 대전 출생 82년 대전고등학교 졸업 82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입학 84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중퇴 91년 가로수 대표이사
2001.07.09 I 김기성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④백경호 주은투신 사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 주인공은 백경호 주은투신운용 사장입니다.(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이게 비즈니스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언제입니까? ▲90년 한때 금리가 20% 가까이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금리가 천장을 치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돈이 되겠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많은 증권사들이 채권중개팀을 앞다투어 만들었죠.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채권시장이 열리게 된 겁니다. 브로커들을 앞에 서너명 앉혀두고 매일 전화하면서 사고 팔고…호가개념을 도입한거죠.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시장을 지배할 것이다” -동원에서 SK증권으로 옮기고나서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드물었던 채권분석을 시도하고 정보모임도 주최하셨다면서요. ▲처음 동원증권에 입사했을 때 동원증권 최고의 채권전문가는 상고를 나온 모 대리였습니다. 그 분이 채권단가계산을 주판으로 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최고의 기술이었죠. 입사초년병이던 저와 동기들이 매매내역을 정리해서 그 분 책상 위에 올리면 주판을 탁탁탁 두들긴 다음 “음 그래 맞다” 고 한 마디 하고 도장을 쾅 찍어주시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계산기라고는 ‘카시오’ 밖에 없었는데, 한빛증권의 이 모이사께서 그걸 이용, 채권계산하는 것을 보고 모두 따라했었죠. 그런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면서 제 스스로 채권에 눈을 떠가던 시절이었구요. 그러니 당시에 채권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계산을 잘하는 사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채권을 통해 돈을 벌겠다기보다는 업무처리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뤘다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저는 “이것보다는 금리를 예측, 분석하는 일이 훨씬 부가가치가 높겠다” 라는 고민을 했어요. 그 다음엔 “금리예측의 시대가 지나가면 그 후에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시장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구요. 개인적으로 지금 현 상황이 바로 그 과학적, 수학적인 단계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실천해보셨나요. ▲우선 채권시황을 정기적으로 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채권본질에 대해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지금이야 듀레이션이라는 용어를 일반독자들도 잘 알지만 그런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거든요. 미국의 유명한 채권전문가의 책자들도 전혀 소개가 안돼 있었어요. -호가를 집중하는 문제, 시장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같은 것도 시도하신 적이 있죠. ▲채권시장의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된 계기는 94년 7월에 2주간 미국, 일본 출장을 간 것이었습니다. SK증권에서 근무하는 동안 제가 재경부에서 주관하는 채권시장 태스크포스 활동을 3번 정도 했습니다. ‘채권시장 선진화 방안에 관한 태스크포스’ 이런 타이틀하에 이루어진 활동들이었죠. “국채시장 선진화에 관한 조사연구”를 목적으로 해서 국고과 사무관, 증권거래소 부장, 저 등등이 미국, 일본을 돌았습니다. 그 때 비로소 선진화된 시장에 관해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정부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기때무에 일반인들이 가기 힘든 미 재무성, FRB, 뉴욕연방은행, SEC, 일본 대장성, 일본은행등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어요. 경제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관리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과정을 제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채권시장에 관해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든 좋은 계기였습니다. 2주간의 출장기간을 상당히 빡빡하게 보냈습니다. 현재 국내 국채시장의 입찰과 발행제도 전반은 그 당시 저희 팀에서 출장보고서로 제출한 리포트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 당시 미국 채권시장이 장외시장일 때인데 IDB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관행이 쌓이고 깨지면서 채권시장은 발전하는 것” -IDB를 직접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는데. ▲거의 유사한 형태를 만들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시장에 진입한다는 것이 욕심만 가지고 되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미국의 채권시장이 지금처럼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오랜 기간동안 관행화된 여러 관습들이 제도화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시장이 존립하는 것이거든요. 현재 미국시장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제도들이 많습니다. 일년을 360, 한달을 30일로 규정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누가 봐도 이것이 불합리하지만 시장참가자들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까 자연스레 정착이 된 겁니다. 우리도 시간이 좀더 지나서 이러한 관행이 정착되면 IDB역시 진정한 제도로서 뿌리내릴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든 금융시장이 정부에서 틀을 만들어놓고 “여기 들어와라” 하는 식으로 이뤄졌어요. 그러다보니 정부가 만들어준 시스템이 민간에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도 전혀 없었죠. 정부의 생각은 단지 ‘선진시장에서 이런 식으로 하니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안 됐던 거구요. IDB에 관해서도 시장에서 논란이 많았었습니다. 도대체 이걸 증권사로 봐야하느냐 거래소로 봐야하느냐는 것.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민간에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어떤 시스템을 만들면 그 주체는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하면서 이리저리 운용하면서 시장의 평가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깨져가며 운영하다 보면 그것이 좋을 경우 시장에 관행으로 정착되고 반대의 경우 자연히 퇴출당하지 않겠습니까. 전적으로 시장이 판단할 문제란 말입니다. -SK증권을 그만두시고 별도로 회사를 만들어 운용하신적이 있으시죠. 그 얘기 좀 자세히 해주세요. ▲SK증권을 그만둔 건 제 나름대로는 채권쪽의 일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여건 조성이 안됐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회사를 차린 겁니다. 우리 금융시장에 혁신적인 상품들을 새로 개발해서 내놓고 싶었어요. 그 당시 김상석씨(현 edaily 뉴욕특파원)와 매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많이 했죠. 그걸 빨리 접은 이유는 주택은행이라는 좋은 금융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도 있지만, 금융이라는 것이 크레딧에 근거한 비즈니스지 개인의 아이디어로 상품화를 한다고 해서 돌파하기 쉬운 시장이 아니라는 것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쉽게 말해 벽을 느낀 거죠. -그 회사를 접은 것이 97년이었는데 IMF에 진입하던 시점입니다. 그 다음 98년엔 채권이 대박상품이었는데. ▲그 때 매매해서 대박 낸 사람들이 많았죠. 그런데 저야 그 시기에 회사를 접었으니 뭐. 허허 “금융의 속성은 자본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 -백사장께서 회사를 접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티끄”니 뭐니해서 기존금융기관을 박차고 나오던 시점이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백사장께서 너무 일찍 증권회사를 나오는 바람에 그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사업의 성공유무를 떠나서 저는 기존 기업의 경직된 관행을 탈피하고 창의적, 아기자기한 비즈니스를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금융의 속성이라는 것이 자본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어려웠던 거죠. 저희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하여간 개인역량으로 하기엔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택은행에 입사했는데…김정태 주택은행장과는 동원증권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나요. ▲제가 동원에 입사했을 때는 김 행장님께서는 동원증권 전무셨습니다. 제가 그 당시 증권회사 직원들의 모임인 “청년중역회의”란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일종의 아이디어 뱅크인데 그걸 빌미로 몇 번 얼굴을 뵌 적은 있죠.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증권회사의 일개사원과 증권사 전무와의 관계가 지속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격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요. 물론 그분이 저를 기억해주시긴 했지만 교류를 한 건 아닙니다. -김 행장께서 백 사장님을 발탁하신 이유는. ▲김정태 행장께서 행장취임후 주택은행이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 있는 걸 보고 ‘저 자산을 좀 더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라는 고민을 하신 것 같아요. 그 자산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거죠. 그런 사람을 찾다가 저를 부르시게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업을 할때도 거의 안면이 없었고. 김 행장께 저를 적극 천거하신 다른 분이 계시긴 합니다. 그 분과는 오래전부터 지속적인 관계가 있었죠. 김 행장님과의 기본인연은 동원증권에서 맺어졌지만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결국 주택은행에 입사하고 나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인 스스로 평가할 때 상사의 신임을 얻게 된 이유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행장님이 저를 “촌놈”이라고 부르셨는데… 촌놈들이 자랑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일이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열심히 하는거죠. 오직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상사없이 많은 부하를 거느린 입장이시죠. 부하직원을 평가하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면을 중시하나요. ▲주은투신은 운용자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조그마한 조직입니다. 저는 작은 조직에서 의 힘의 근원은 “모든 것의 파괴”에 있다고 생각해요. 능력만 출중하면 있으면 비록 나이가 어려도 얼마든지 진급도 빨리하고 돈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딜링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 인성보다는 능력을 중시한다는 의미인가요. ▲그 문제가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인성도 좋고 능력도 좋다면 금상첨화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기가 힘드니까 둘 중에 뭘 택하느냐고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드리자면 “그래도 인성이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일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인성이라는 것에 너무 많이 매달리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우선 고려하는 것이 인성이지만 과거보다 능력이라는 요소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점수를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에서 완벽하게 이기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주택은행에서 재직하면서 고생한 경험은 없습니까. 딜을 하는데 방향을 잘못 읽어서 애를 먹었다든지. ▲머리가 나빠서 기억이 안나는데요(웃음) -“백전백승이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럼 완벽하게 이겼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시장에서 완벽하게 이기고 지고 하는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저는 순리에 따른 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시장을 완벽하게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한국 채권시장에서 딜을 하면서 자신의 포지션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잘 아시겠지만 ‘이번 한 번 왕창 먹고 그 다음부터는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겠다’ 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노출은 불가피해요. 우선은 이기고 진다는 그런 개념 자체를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주택은행에 재직시절 예보채로 딜링을 시도한 최초의 분이 아닌가요. ▲처음은 아닙니다. 그당시 예보채 스프레드가 상당히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최초의 예보채가 나왔을 때 국고5년물과의 스프레드가 무려 120bp였습니다. 시장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니 다들 적정 스프레드가 20-30bp라고 하더군요. 채권가격을 결정하는 여러 요소 중 시장에서 흔히 말하는 유동성 프리미엄 때문에 그렇게 벌어진 거에요. 그래서 속으로 ‘저건 너무 저평가됐다’ 고 생각하고 그 부분을 주목한 겁니다. 어차피 정부보증이 되면 위험가중치가 제로(zero)가 되니까 우리가 충분히 들어갈 만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 당시 운용을 상당히 공격적으로 하셨죠.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시장에서 예보채 가격을 보면 그 당시 가격이 매우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당시에 “채권시장을 지키는 독수리5형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손”들의 역할이 컸는데요. ‘아 이 정도면 싸움이 된다. 우리랑 겨뤄볼 만하다’ 고 느낀 기관이 있었습니까. ▲마치 삼국지 같은 얘기군요.(웃음) 제가 은행에 있을 때만 해도 투신사들은 지속적으로 수탁 규모가 줄어 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못할 무렵이었습니다. 결국 대형은행이 시장을 이끌어나갈 수 밖에 없었죠. 특히 농협 같은 기관이 마켓 메이커로서 일단 앞에 나서고 그 뒤를 시중은행들이 따라가는 구조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마 주택은행이 채권딜러들에게 성과급제도를 도입한 최초의 은행일 겁니다. 나름대로 그런 시스템을 조기에 도입하다보니까 딜러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던 것 같고 농협, 국민은행, 한미은행 등도 적극적으로 했죠. -채권과는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주택은행을 은행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지금도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주택은행을 얘기하면 “거기가 원래부터 우량은행이냐. 기업금융 안하다가 우량은행 된 거 아니냐” 고 비판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허허. 일견은 타당성이 있는 얘기라고 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입사할 무렵과 지금의 주택은행은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은행 직원들 자체가 과거처럼 500만원, 천만원짜리 대출만 하는 은행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조직의 유연성부분은 어느 은행보다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전산투자도 대규모로 해서 시스템자체도 잘 갖춰진 편입니다. -한 때 채권이 한 방향으로만 간 적이 있었죠. 대우문제가 터지기 전 말입니다. 그때는 채권을 들고 있기만 해도 수익을 내는 시절이었는데요. 아까 언급하신 인덱스를 비트하면서 수익을 내보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으셨나요. 나름대로 초과수익을 내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도입한 전략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시 은행 포트폴리오는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은행의 속성이 위험자산을 취득하지 않기 때문에 무위험자산에 집중하게 되죠. 그런데 무위험자산으로 이익을 낸다는 것은 결국 듀레이션 베팅에 의해서 수익을 얻는 거란 말입니다. 듀레이션을 적절히 조정해서 차익을 남기면 간단해요. 지금 시장의 많은 스트레티지스트들을 보면 기술적 분석에 의지하죠. 물론 기술적 분석이 시장을 파악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긴 하지만. 우리시장의 근본적인 한계랄까 문제점은 바로 이겁니다. 사실 한국 채권시장에서는 브로커들과 친하면 아주 쉽게 이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저는 은행에 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저희 매니저들에게 브로커들에게 돈 쓰는 거 절대 아까워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브로커는 일차적 정보를 생성하는 사람이자 시장을 쥐고 있는 주체니까요. 예를 들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 브로커를 한 명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 시장에서 절대 질 수가 없어요. 채안기금 시절 “작은 금액으로도 흐름을 바꾸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인적으로는 백사장께서 채안기금 운용하실 때가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채안기금 조성도 김정태 행장이 주도하셨고. 김 행장이 채안기금으로 가라고 했을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 행장께서 저를 불러 “10조” 라는 금액을 얘기하며 그 쪽으로 가라고 하시길래 우선 “금액이 너무 작다”는 말씀을 드렸죠. 하지만 유연하게 접근하면 해 볼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은 했어요. 당시 금융시장이 문제가 됐던 것은 투신권이 대우채권에 대규모로 물려있었기 때문입니다.투신권 전체가 가지고있는 총 채권규모가 170조-180조원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채안기금 규모는 사실 미미했습니다. 하지만 물리학의 최소량의 법칙에서 볼 수 있듯 작은 금액만을 가지고도 흐름을 바꾸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또 김정태 행장께서 일 시키는 스타일 자체가 믿고 맡기면 최대한 여건을 조성해주시는 편이라서 별 고민없이 승낙했습니다. 물론 저도 조건을 내걸었어요. “펀드매니저만은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파견해달라” 고. 매니저는 저에게 정확한 정보를 가르쳐줘야 하는 사람인데 서로의 신뢰가 없으면 안되잖아요. 그 조건 하나가 다른 행장들에게 전달됐고 오케이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었죠.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3.30 I 정명수 기자
  • (초점) 삼성 이재용 상무보는 누구인가
  • [edaily]삼성전자가 이건희 그룹회장의 장남인 이재용씨를 상무보로 선임함으로써 삼성그룹의 3세 후계 체제가 공식화됐다. 이재용씨는 68년 서울생으로 현재 33세다. 이 상무보는 경복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후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98년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의 맏딸인 세령씨와 결혼해 지난해 12월 첫아들을 얻었다. 이재용 상무보는 삼성의 후계자라는 "특성" 때문에 개인적인 생활 등은 그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를 접해본 사람들은 대체로 "겸손하고 예의바른 청년"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대인 접촉을 꺼리는 부친과는 달리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게 중평이다. 그러나 일에 대한 집착이나 집중력은 상당하다고 그를 만나본 재계 관계자들은 귀뜸한다.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은 "외가로부터", 일에 대한 집중력이나 비즈니스 감각은 "친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제금융 컴퓨터 산업 등 관심분야에 대한 지식은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용 상무보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던 학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의 장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특별나게 굴지 않았다"며 "엄격한 가정에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재용 상무보는 유학시절 전통산업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이 상무보의 석사논문은 "일본 제조업 산업공동화에 대한 고찰"(95년)로 일본의 제조업이 엔고 등으로 비용구조가 높아지자 해외진출이 늘어난 데 대한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박사과정에서 이 상무보는 컴퓨터 산업을 주된 연구분야로 선정했다. 이는 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의 사업구조가 반도체 LCD 모니터 등 컴퓨터 관련 분야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었다는 게 삼성그룹의 설명이다. 이재용 상무보는 미국 유학시절 월 스트리트에서 메릴린치의 데이비드 코만스키 회장 등 유명 인사들과 의견을 나누는 등 금융부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용 상무보를 가까이서 접했었던 황영기 삼성투신운용 사장은 "국제금융부문에 관심이 많고 이해도 빨랐다"며 "그룹의 고위임원들과 만날때도 총수의 아들이란 느낌을 주지 않을 정도로 행동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하바드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이승현 AT커니 이사는 "이재용 상무보는 통학시간을 아끼기 위해 기숙사 생활을 할 정도로 검소하고 성실했었다"며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주로 많이 듣는 편이었다"고 평했다. 이재용씨의 상무보 선임으로 삼성은 본격적인 3세 후계체제에 시동을 걸었다. 따라서 이재용 상무보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경영능력을 검증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와 "삼성전자"를 통해 삼성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히며 화려하게 삼성의 총수로 데뷔했다. 이재용 상무보는 과연 어떤 사업부문을 통해 삼성의 차기 총수로서의 입지를 굳힐까. 이재용 상무보에 대한 관심은 그런 점에서 단순히 삼성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 이상이다.
2001.03.11 I 이의철 기자
  • 김 대통령 노벨 평화상 받기까지
  • 노벨상이 제정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김대중 대통령에 영광의 상이 주어졌다. 김 대통령의 수상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선물이자 보답이기도 하다. 노벨상이 제정될 무렵부터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속에 질곡의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전통과 문화를 지켰고, 세계평화를 위해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식민지의 고통과 해방을 위한 투쟁, 전쟁과 배고픔, 냉전과 분단, 혁명과 쿠데타, 독재와 민주화, 경제위기와 극복을 경험한 100년의 역사는 세계사적 사변의 압축판이다. 또 100년의 역사중 상당부분은 김 대통령의 인생 역정이 함축한다. 그는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전쟁을 경험했다. 분단의 비극인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핍박받았다. 민주화의 중심에 늘 서 있었다. 경제위기로 시련에 빠진 국민의 지도자이자 분단의 장벽을 뛰어넘어 정상회담으로 평화의 돌파구를 연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노벨평화상은 마지막 냉전지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인권신장과 민주화를 위해 겪은 고난의 역정을 평가한 것이다. 김 대통령에 대해선 국내정치적 비판과 견제, 오랜 탄압의 세월이 각인한 그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시각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자를 용서하는 화해의 정신을 발휘하고 끊어진 남북한을 잇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그는 국내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전쟁과 배고픔이 더 지배적인 세계에서 더 돋보이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직 끊나지 않은 민족분단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 대통령에게 주어진 짐이 될 듯하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공인하는 "평화의 전도사"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는 청와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면 상세한 자료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홈페이지 내용중 일부. 민주주의와 인간을 향한 긴여정 꿈을 가진 소년 김대통령은 1925년 12월 3일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 작은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이다. 일본인 지주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곳에서 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하여 1939년 졸업했다. 이어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43년 졸업했다. 이처럼 어린 시절 그는 농부의 아들로 자라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서러움을 체험했다. 그가 작문시간에 일제 식민 통치를 비난하는 글을 지어 급장자리를 빼앗긴 것이 한 보기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와 정치, 예능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치에 눈을 뜨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는 해운사업에 주력하여 사업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극심한 고난을 가져온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당시 점차 독재화되어 가던 이승만 정권때문이었다. 친일파를 우대하며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정권에 맞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역정은 시작부터 불운했다. 1961년 그는 두 번의 실패 끝에 세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당선 3일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이 무효된다. 그리고 정치규제에 묶이는 비운을 맞게 된다.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마침내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으로 촉망받게 된다. 1965년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듬해에는 정책위의장을 역임한데 이어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해온 그는 철저한 준비로 국회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전체적인 윤곽에서부터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비판과 동시에 항상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국회의 각종 위원회와 재무,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의 상임위원회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꿈꾸면서 그는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장충단공원 집회가 바로 이를 입증하게 된다. 그는 이 날 연설을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야권의 결속과 민주주의 회복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1971년 그는 드디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씨와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다. 관권과 금권, 온갖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서도 그는 46%의 지지를 얻게 된다. 비록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국민속에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고비길에서 1971년 박정희의 철권통치에 대한 정면 도전은 그에게 30년에 가까운 고난과 시련의 서곡이 되었다. 부정선거로 간신히 승리한 박정희씨는 마침내 민주선거를 포기하게 된다. 1972년 10월 소위 종신 대통령을 꿈꾸며 유신헌법을 날치기 처리하여 현대판 집정관 독재체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민주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혹독한 억압이 시작된다.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던 김대중씨는 당연히 그 탄압의 최종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973년 8월 일본 도쿄호텔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당하게 된다. 그를 살해하여 한국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의 강력한 경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1주일만에 서울의 자택에 돌아오게 되고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단행, 꺼져 가던 민주화의 불씨를 다시 지핀다. 이로 인해 5년형을 받고 수감되어 1978년 12월 석방되었으나 또다시 연금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된다. 이어 두 달뒤에 그는 가택연금이 해제되고 사면 및 복권조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서울의 봄"도 잠시뿐이었다. 1980년 5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내란음모혐의로 체포된다. 그 해 11월 계엄군법회의에서 날조된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고 1982년 12월 석방되어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과 탄압, 그리고 온갖 유혹에도 굽히지 않았으며, 미국 망명중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1985년 귀국한 뒤에도 그를 둘러싸고 가택연금과 해제는 반복되었다. 승리의 길 한국 민주화의 돌파구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열렸다. 이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었고 그는 실형면제와 복권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여러번 실패를 경험했다. 1987년과 1992년 선거에서 그는 패배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준비된 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네번째로 도전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드디어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취임 했다.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진정한 민주화의 새 날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온갖 고난의 역정을 이겨온 한 정치인의 승리일 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가 함께 승리한 민주주의의 큰 성취였다. [기본사항] 성명 김대중(金大中) Kim Dae-jung 본관 金海 생년월일 1925년 12월 3일 출생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호 후광(後廣), 토마스 모어 본적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원적 전남 무안군 종교 천주교 자녀수 3남 생활신조 행동하는 양심 주량 포도주 2잔, 소주 2잔 기호품 설렁탕, 녹차, 김치찌개 취미 영화감상, 연극관람, 독서 신장/체중 173cm/73kg 흡연량 안 피움 시력 좌우 0.5 혈액형 A형 [학력사항] -1943 목포상업고등학교 22회 졸업 -1964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학 -1967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1970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과정 수료 -1983 미국 에모리대 명예법학박사 -1992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1992 미국 가톨릭대 명예법학박사 -1994 원광대 명예정치학박사 -1995 미국 포트랜드 주립대 명예인문학박사 [경력사항] 1948-1950 목포일보 사장 1951- 흥국해운 사장 1951.9-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 1957.10-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1960.10-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 1961 제5대 민의원(민주, 인제) 1963- 제6대 국회의원(민주, 전남 목포) 1965- 민중당(민정-민주 통합야당) 대변인 1966-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겸 정무위원 1967.2- 민중당(민정-민주 통합야당) 대변인 겸 정무위원 1967.6- 제7대 국회의원(신민, 전남 목포) 1970- 신민당 대통령후보 1971.4- 제7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71-1972 제8대 국회의원(신민, 전국) 1974.11- 민족회복 국민회의 참여 1976-1978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주도로 구속됨(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혐의) 1979.3-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1983-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설 1983.5- 미국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1983- 미국.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 1983- 미국, 하바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5-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됨 1987.4-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1987.10- 평화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 1987-1991 평화민주당 총재 1987 평화민주당 대통령후보선출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평민,전국) 1991- 신민주연합과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총재 당선 1991-1992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대표최고위원 1992 제14대 국회의원(민주,전국) 1992.6-12 민주당 당무위원 1992 제14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93.12-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 1993 영국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1994-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 아태평화재단으로 변경 1995-1998/2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1995-현재 국민회의 총재 1995-1997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공동의장 1997.12.18 제15대 대통령 당선 1998.2.25 제15대 대통령 취임 [수상 및 명예직] 1966 미국 Memphis시 명예시민 1981 Bruno-Kerisky 인권상 1983 미국 Nashville시 명예시민 1983-현재 미국 Robert Kennedy 인권상위원회 고문 1983-현재 국제고문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 1983-현재 미국 Pittsburgh La Roche 대학교 이사 1987 미국 George Meany 인권상 수상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수상 1993 미국 Atlanta시 명예시민 1993 제3회 애서가상(한국애서가클럽) 수상 1994 미국 New York Union 신학대학교 Union Medal 수령 1994 Russia 국제생태학협회 정회원 1995. 5 미국 휴스턴 명예시민 1998. 2 무궁화대훈장 1998. 4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 1998. 6 미국 조지타운대 명예교수 1998. 6 미국 San Francisco 명예시민 1998. 6 미국 Los Angeles 명예시민 1998 UN 인권협회 인권상 1999. 7 Philadelphia 자유메달
2000.10.13 I 허귀식 기자
  • 팍스넷, 日에 14억규모 증권정보솔루션 수출
  • 인터넷 증권정보 제공업체 팍스넷(www.paxnet.co.kr)이 일본 미디어 기업 임프레스사 (impress Group)에 130만달러(한화 약 14억 7천만원)규모의 온라인 증권정보 솔루션을 수출계약을 맺었다고 24일 밝혔다. 팍스넷은 이에따라 임프레스사에 팍스넷과 같은 사이트 구축을 위한 종합적 툴(Tool)과 팍스 차트, 하이 팍스, 팍스 포트폴리오, 시스템 트레이딩 시그널 등과 같은 프로그램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게 된다. 기술 솔루션 이전에는 약 2개월 가량이 소요, 현지에서 10월에 서비스가 시작될 예정이며, 팍스넷은 향후 개발하는 프로그램도 추가로 공급하게 된다. 박창기 팍스넷 사장은 또 "이와는 별도로 임프레스측이 1주당 4만 5천원에 총 1억엔 (한화 10억 5천만원)을 팍스넷에 투자키로 했다"고 밝혔다. 팍스넷은 소프트웨어 전문 개발업체가 아닌 콘텐츠 제공업체가 자사웹사이트 운영과 관련된 기술 솔루션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설명했다. 임프레스는 일본에서 컴퓨터와 정보통신 관련 전문 단행본 및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며, 10여개의 관련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온라인-오프라인 미디어 재벌기업으로 청소년과 20~30대 청년층이 주고객이다. 임프레스 웹사이트는 일본 공인 인터넷 기업 평가 지수 JAR (Japan Access Rating) 종합 부문 7위, 인터넷 미디어 부문 1위에 올라 있다. 한편 팍스넷은 지난 5월 팍스넷 타이완 설립시 자체 부담키로 한 100만 달러 가운데 50만러만 현금으로 내고, 프로그램이나 운영 노하우 제공 등으로 나머지 50만달러를 충당키로 합의, 이미 자사의 웹사이트 운영과 관련된 솔루션을 해외시장에 수출한 바 있다.
2000.07.24 I 김윤경 기자
  • 4.13총선서 IT전문가 대거 입성
  • 4.13총선에서 정보통신 전문가들이 대거 원내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16대 국회는 IT전문가 풀이 대폭 확대되면서 정보화 및 정보통신산업 활성화를 위한 국회의 정책 지원기능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4.13 총선으로 국회 금배지를 달게 된 IT전문가는 남궁석 전 정보통신부장관(경기 용인 갑, 민주), 김효석 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전남 담양·장성·곡성, 민주), 곽치영 전 데이콤사장(경기고양덕양 갑, 민주), 교육정보화 권위자인 허운나 한양대 교수(비례대표, 민주) 등 4인. 우연찮게도 산·학·연·관 출신 인사들이 한명씩 원내에 진출, 이들이 정보통신 각 분야를 대변하며 정책경쟁을 벌일 수 있는 틀이 짜여진 것으로 풀이된다. 386세대이면서 정보화 마인드로 무장한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임종석(서울 성동, 민주)씨도 당선돼 네티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창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 국회 신인 외에 15대 국회에서 1세대 원내 정보통신 전문가로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김영환(민주), 강창희(자민련), 김형오, 이상희의원(이상 한나라) 등도 16대 국회 재 진입에 성공, 새로 진입한 2세대 의원들과의 조화를 이뤄 의회 내 IT인재풀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정보통신 전문가들은 16대 국회 상임위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등의 활동을 통해 전문적 식견을 발휘, 정보통신 산업발전과 국가정보화를 앞당기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어 그간비인기 상임위로 분류되던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역할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남궁석 당선자는 "장관 재임시절 추진하던 "사이버코리아21"에 대한 법적 지원을 강화, 국가정보화를 앞당기는데 주력하겠다"면서 "전국 초등학교에 모두 컴퓨터 교실을 설치하고 교사 1인당 1PC를 지급해 컴퓨터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당선소감을 말했다. 김효석 당선자는 "농·어촌 정보화를 핵심 원내활동 목표로 세우고 있다"며 "농·어촌의 정보화를 통해 1차 생산물의 유통·판매 선진화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곽치영 당선자는 "정보통신 분야 핵심기술 개발과 판로 개척을 위한 정책지원을 강화, 국산 기술의 세계화를 이루겠다"는 의정활동 포부를 설명했다.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 입성이 확실시되는 허운나 한양대 교수는 "정보화 교육과 건전한사이버 문화 창달에 앞장서고 싶다"며 "특히 노인,장애인,여성 등 이른바 정보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들 당선자들은 16대 국회에서 정보통신 전문의원들이 참석하는 의원포럼등을 구성, 업계와 정부의 산업발전 노력을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2000.04.14 I INEWS24 기자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