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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가난 속에서 이룬 샐러리맨의 신화
- [조선일보 제공] “이명박(李明博)의 삶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닮았다”고 이명박 캠프의 박형준 대변인은 말한다. 일제 때 일본에서 태어나 6·25 때는 폭격에 형제를 잃었고, 찢어지는 가난 속에 공부로 일어서서 ‘샐러리맨의 신화’가 된 이명박의 삶이 한국의 발전과정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난…가난…가난 이명박은 노동을 했던 이충우씨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이명박은 “네 살 때인 1945년에 가족 전체가 일본에서 귀국하는데 배가 침몰해 그나마 남은 재산도 바다에 빠뜨리고 알몸으로 시작해야 했다”고 말한다. 다른 형제는 이름이 상(相)자 돌림인데 본인만 ‘명박’인 이유에 대해선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다. 족보엔 상정(相定)으로 돼 있다”고 했다. 고향인 경북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가 터졌는데 미군의 폭격에 바로 위의 누나와 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살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워야 했다. 그 때문에 학교선 “술 냄새 풍긴다”며 구박을 받기도 했다. 살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러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동창생 박이득씨는 “명박이는 그런 생활에서도 구김이 없었다”고 했다. ▲ 이 전 시장의 고려대 재학 시절(오른쪽에서 두 번째).◆끈질긴 학업에의 꿈 이명박은 “중학교 때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로 쓰러져 넉 달간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성적은 전교 2등을 했다”고 했다. 집에서는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하게 했지만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를 다녔다. 끝까지 1등을 했다. 동지상고 동기인 강원구씨는 “명박이가 친구들이 놀릴까봐 밀짚모자 눌러쓰고 행상을 했지만 공부는 정말 잘했다. 동급생들이 대부분 서너 살씩 많은 직장인들이었는데 ‘저놈 나중에 한 자리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당시 친구 김칠복씨는 “학교 배구선수들이 시험거부를 주동하며 명박이에게도 시험을 못 보게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시험 안 보면 장학금 안 준다’고 명박이를 다그쳤지만 명박이는 용감하게 시험거부에 동참했다”고 했다. ▲ 이 전 시장이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64년 6·3 운동 법정에서 국가내란죄로 6개월형을 선고받기 전, 죄수복을 입고 시위 주동자들과 함께 선고를 기다리는 모습(오른쪽에서 두 번째). 주요 신문에 게재됐다.◆꿈을 안고 상경(上京) 형 상득(현 국회부의장)씨를 공부시키기 위해 가족들은 서울 이태원으로 이사했고, 이명박도 서울로 왔다. 돈을 벌기 위해 기말시험만 치고 올라와 고교 1등상과 졸업장도 친구가 대신 전해줬다.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꿨던 당시 그의 꿈은 “매일 출근하고 월급 받을 수 있는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함께 상경했던 친구 김창대씨는 “집이 좁아서 내 하숙방과 노동자 합숙소를 전전했다”며 “하지만 노동하고 와서 늦게 자고 피곤해도 새벽이면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책도 읽고 했다. 늦게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그때 붙은 거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명박은 “돈이 없어 중퇴하더라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지 않겠느냐”며 청계천 헌책방에서 수험서를 사서 대학에 도전, 고려대 상대에 붙었다. 그의 합격 소식을 들은 이웃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새벽에 쓰레기 넝마주이 일을 맡겨준 덕에 학비를 벌 수 있었다. ▲ 이명박 전 시장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인 1981년(40세), 정주영 회장(왼쪽)과 함께 강원도 신입사원 수련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학생회장에서 현대 신화까지 고려대 친구였던 천신일(현 교우회장)씨는 “명박이는 말수가 적고 건강도 늘 안 좋아 보여서 넝마주이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줄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이명박은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뽑혀 4학년 때 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6·3 데모를 주동했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살기도 했다. 당시 죄목은 국가내란선동이었다. 이명박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김도현 강서구청장은 “이 전 시장은 감옥에서도 쾌활했다. 말도 많았지만 시국 얘기보다는 ‘누가 면회 왔느냐’, ‘아침밥 어땠냐’는 신변 얘기를 많이 나눴다”고 기억했다. 이로 인해 대학 졸업 후 중앙정보부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취직을 못 하다가 현대건설에 입사할 당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취업의 벽을 뚫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건설에 입사해서는 1년차 때 태국 현장에서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회사 금고를 지킨 일부터 청와대의 부당한 지시에 불도저로 맞서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했던 일 등의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다.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사장이 됐다. 이명박의 정치 스타일도 현대에서 형성된 측면이 크다. 그를 잘 아는 한 작가는 “이 전 시장은 마치 사람 영혼을 빼먹을 듯이 쥐어짜는 스타일”이라며 “밑에서 일하는 입장에선 정말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했다. 현대건설 이사가 된 뒤인 1970년 부인 김윤옥씨를 만나 마포의 14평 새서울아파트에서 사글세로 신혼을 시작했다. 이명박은 부인 김씨와 결혼할 때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공동묘지에서 프러포즈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전 시장은 “집사람을 묘지 아래 두고 혼자 어머니 묘소에서 ‘결혼을 하려 한다’고 보고를 드리고 있는데, 집사람이 무섭다며 뒤따라 올라왔다가 들은 것”이라고 했다. ▲ 이명박 전 시장의 셋째딸 수연(32)씨의 결혼식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아들 시형, 둘째딸 승연, 수연씨 부부, 큰딸 주연씨 부부다.◆순탄치 않았던 정치… 군사정권과의 악연은 그가 현대 사장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1980년대 신군부는 현대그룹에 “3김씨에게 준 정치자금을 대라”며 추궁했다. 현대자동차를 포기하라는 압력도 넣었다. 정주영 회장은 포기 각서에 도장 찍는 일을 이명박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는 “내 손으로 넘겨줄 수 없다”며 끝내 버텼다. “그날 밤 회사로 돌아와 정 회장을 만나니 말로만 듣던 피눈물이 정말로 눈에서 나더라”고 했다. 그러나 현대 관계자들 중에는 현대를 그만둔 이명박 얘기를 좋게 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로 나뉜다.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동지상고 시절 학생기록부.그는 이처럼 악연이 있던 정치판에 19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문했다. “고르바초프라는 한 인물로 인해 세계에 생긴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도 뭔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정치입문 출사표였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대통령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인 이명박의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95년 지방선거 때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의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다. 96년 총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물리치고 정치1번지 종로에서 당선됐지만 선거비용 초과 지출 혐의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서울시장 출마의 꿈도 16대 국회의원 출마도 접어야 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미국에서 공부하며 몸을 추스른 이 전 시장은 2002년 서울시장에 선출되면서 정치에서도 ‘성공신화’를 다시 꿈꾸고 있다. 그러나 여론지지율 1위를 질주하던 이 전 시장은 11일 국회에서 384억원 횡령사건 관계회사인 BBK와의 관련설(說) 때문에 여당의원들의 집중타를 맞는 등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명박 프로필 1941.12.19 일본 오사카 출생 54 2 포항 영흥국민학교 졸업 57.2 포항중학교 졸업 60.2 동지상고(야간) 졸업 65.2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65 현대건설 입사 70.12.19 김윤옥씨와 결혼 77~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78 인천제철 대표이사·한국도시개발 사장 겸임 88~92 현대건설 회장 92~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전국구) 92~94 6·3 동지회 회장 96~98 15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종로) 2000~현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02~06 32대 서울시장 07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장 아호: 일송(一松) 별명: 컴도저(컴퓨터+불도저), 훈남(훈훈한 남자) 본적: 경북 포항시 북구 홍해읍 의창면 덕성동 537 본관: 경주 병역: 면제(입소 후 기관지 확장증으로 의병 퇴소) 혈액형: B형 신장: 173㎝ 체중: 70㎏(허리 32인치) 시력: 좌1.0 우1.0 신체비밀: 남보다 손바닥 길이만큼 팔이 길다 종교: 기독교(장로) 주량: 맥주 1병 흡연: 안 피움 취미: 테니스·수영·조깅·고전음악 가족: 부인 김윤옥씨와 1남3녀 존경인물: 안창호, 간디 좌우명: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가훈: 정직 첫사랑: 초등학교 5학년 때 짝 감명 깊은 책: 슈바이처 전기, 무소유(법정 스님) 좋아하는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함석헌) 감명 깊은 영화: 오아시스, 집으로 선호음식: 순두부, 비빔밥, 스파게티 애창곡: 사랑이여(유심초) 아침이슬(양희은) 이거야 정말(윤항기)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보아, 비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 장동건, 송강호 스트레스 해소법: 운동, 친구와 전화통화 살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 어머니 학교 때 가장 못했던 등수: 3등 가장 창피했던 때: 고교 시절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할 때 몇 살까지 살고 싶나: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나의 패션: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가 챙겨주는 대로 입는다 어린 시절 꿈: 선생님, 소방관 잊을 수 없는 친구: 어려운 시절 달걀을 매일 갖다 주었던 양계장 집 친구 잃고 싶지 않은 것 세 가지: 가족·건강·친구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어머니 살아계실 때 새 옷 한 벌 못해드린 것 내 일생 3대 사건: 좋은 어머니를 만난 것, 중학교 선생님의 야간고 입학 권유,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것 은퇴 후 나의 모습: 초등학교 선생님(명예직으로라도) 외국어 구사: 영어(상) 저서: 신화는 없다(96)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02),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05), 온몸으로 부딪쳐라(07), 어머니(07) 학위: 고려대 경영학사, 서강대 명예경영학박사,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 명예박사, 몽골국립대 명예경제학박사, 목포대 명예경제학박사 상훈: 체육훈장 백마장(82) 민족훈장 석류장(84) 금탑산업훈장(85) 50년을 만든 50대 인물(98 조선일보) 세계의 인물 대상(05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몽골정부 우정훈장(05) 코리아베스트드레서(05 모델라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05 한국언론인연합) 대한민국 뉴스위크 아시아판 차세대 리더(05) 정책인대상(06 고려대) 한국관광진흥대상(07 한국관광학회)
- `엔화 빠져나간다`..BOJ, 금리인상 압력 직면
- [이데일리 김국헌기자] 일본내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금이 봇물 터지듯 늘어나면서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일본의 가계는 물론이고 올해 풀리는 단카이 세대의 퇴직금으로 `엔화 엑소더스` 흐름은 더 심화될 전망이다. BOJ는 일본을 빠져나가는 자금 흐름을 막기 위해 금리인상 압력에 직면해 있다. 수출기업과 엔 캐리 트레이드 투자자들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엔화 가치를 올리지 않으면, 일본 경제의 금융 불안정성이 더 커질 것은 자명하다. 당초 올 가을에 BOJ가 금리인상에 나설 것이라던 시장 전문가들도 슬슬 여름 금리인상설 쪽으로 갈아타고 있다. BOJ가 빠르면 다음달에 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기록적 엔화 엑소더스..`단카이 퇴직금 풀린다` 일본의 0.5% 저금리를 견디지 못한 일본인들이 기관의 엔 캐리 트레이드에 동참하면서, 엔화로 고금리의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일본 가계도 엔 캐리 트레이드에 동참하고 있고, 곧 퇴직금을 손에 쥘 단카이 세대도 해외 고수익 자산 투자에 나설 전망이다. 일본 가계의 지난해 해외 자산 비중은 전년 대비 25% 증가한 46조 엔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10%에 달하는 규모다. 또 지난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 700만명 가운데 첫 세대가 올해 정년을 맞는다. 약 50조 엔(약 383조 원)에 달하는 퇴직금 가운데 일부가 올해부터 풀릴 예정이어서, 엔화 자금의 엑소더스 흐름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엔캐리 리스크 불감증 확산..`금리차 해소 어려워` 기관 투자자들의 대규모 엔 캐리 트레이드도 일본 경제에 부담이지만, 일본 가계의 엔 캐리 트레이드 동참은 더 큰 위험이 되고 있다. 이들은 엔화 가치가 오를 경우 해외 투자가 얼마나 큰 손실을 볼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해 BOJ의 불안감을 높이고 있다. 삿포로시의 가정주부 다케다 미치코(46)는 지난해 오스트레일리아 은행에 약 200만엔(1만6500달러)을 예금했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 은행이 연 7%의 이자를 지급하는데 반해 일본 최대은행인 미쓰비시 UFJ 은행의 이자율은 0.35%에 불과하다며 "엔화가 상승하는 위험이 있다고 해도 더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다. 후지쯔 연구소의 마틴 슐츠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BOJ는 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될 때 가계가 타격을 입을까봐 우려하고 있다"며 "가계는 (엔화 가치가 상승할 수 있다는) 리스크를 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개인들까지 너도 나도 엔 캐리에 뛰어들면서 일본인들의 엔 캐리 리스크 불감증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당분간 금리차를 해소하기는 어려워 개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는 계속될 것이란 점도 문제다. ASB은행의 닉 터플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금리는 오를 것이 자명하지만 예금 금리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며 "나라면 계속해서 해외에 투자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BOJ 다음달 금리 올릴까..`엔 상승 미룰 수 없어` BOJ는 `엔화 엑소더스`를 막기 위해 엔화 가치를 빨리 높여야만 하는 상황. 시장 전문가들은 BOJ가 빠르면 다음달에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BOJ 출신의 시라카와 히로미치 크레디트 스위스 이코노미스트는 "BOJ가 금리 행동을 취해야만 할 지점에 도달하고 있다"며 "일본 밖으로 자본이 너무 빨리 흘러나가고 있어, 일본 경제를 환율 변동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회생하는 일본 경제에 엔화 가치 상승은 디플레이션보다 더 위험한 덫이 될 수 있다. 지난 1998년 러시아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에 엔화 가치는 약 두 달 만에 20%나 폭등한 것처럼, 일본 경제는 엔 캐리 트레이드로 외부 충격에 취약해진 상황이다. 엔화의 급등으로 일본이 다시 경기 침체에 빠질 위험도 있다. 금리인상으로 엔화 가치를 서서히 올리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수출 경기를 해칠 수 있고, 자칫하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부를 수도 있어 BOJ는 금리인상 속도를 고심하고 있다. 리먼브러더스의 시라이시 히로시 이코노미스트는 "엔 상승은 수출부터 시작해 경제의 전체 사이클을 해칠 수 있어, 큰 혼란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은 엔화 가치를 바닥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확정치를 비롯해 각종 지표들이 호조를 보이면서, 여름 금리인상설이 시장에서 점차 힘을 받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최근 단기 금리에 비춰 볼 때 대부분의 시장 참가자들은 BOJ가 7월 참의원 선거 뒤인 8월이나 9월에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 [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下)
- [이데일리 SPN 고남욱 명예기자] 양상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46, 현 LG 트윈스 코치)의 재임기간이던 2004년, 2005년 호세의 영입을 그토록 바랐지만, 롯데의 문제는 호세의 가세가 아니었다. 호세만 바라보고 있었지 국내 타자들로 구성된 타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은 이때부터 날아들었다. 호세가 없어도 되는 타선, 호세 한명으로 끝나는 타선이 아닌, 결속력 있는 타선은 반드시 필요했다. 호세는 매년 나이를 먹지 않는, 아니 나이를 먹어도 노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즐 맞추기는 다시 시작되었다.2006년 라이온 잭슨(36)과 킷 펠로우(34)와의 재계약에 대한 부분에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다른 프런트의 의견을 떠나 두명을 새로 뽑느니, 기존의 펠로우와 새로운 한명으로 가자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결과는 ‘라선배’로 불리던 라이온과 펠로우 모두 재계약에 실패. 팬들로서는 어떤 선수를 데려오기에 그럴까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걱정은 나날이 늘어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하지 못한 선수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결과에 팬들을 포함한 야구 관계자들도 술렁거렸다. ‘펠릭스 호세’. 호세가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펠릭스 호세’는 한국에 다시 오기 전 이중 계약 문제 등으로 시끄러웠다. 롯데 구단은 2001년 김명성 감독의 갑작스런 타계와 호세의 돌출 행동으로 엄청난 홍역을 앓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그의 인터뷰는 립 서비스라고 받아 들였고, 많은 팀들은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한국 프로야구를 우습게 본다’는 이유와 ‘호세가 존재하는 롯데에 대한 철저한 견제’가 호세 재입성의 걸림돌이었다. 롯데 팬들은 호세가 다시 한국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2002년 일부 구단의 반대로 징계를 풀지 못했지만 2003년 열린 회의에서는 별 다른 이견 없이 호세의 복귀를 허용했다.)호세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 맥시칸리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팬들 중 일부는 호세에 대한 반감을 가졌을 수 있지만 대부분 예전의 아쉬운 감정은 걷어내고 그를 반겼다. 나이가 들어 이전부터 부족하다고 느꼈던 외야수비가 더욱 허술해진 모습이었지만, 호세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프로야구 흥행의 한 키워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롯데 팬들은 과거 마해영, 조경환이 그랬던 것처럼 이대호가 호세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길 바랬다. 그리고 결과는 팬들의 예상을 뒤집었다. 아수라 백작호세는 항상 '사건의 현장'에 서 있곤 했다. 팀에서도 다혈질적인 부분을 보여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2001년에 이어 2006년에는 SK 와이번스 투수 신승현(24)과 그라운드가 아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난투극을 벌였다. 2006년 호세의 헬멧은(그의 평소 모습을 어느정도 반영하는)‘아수라 백작’의 그것이었다. 팀 동료들의 실수로 답답해 하던 호세는 어느날 바닥에 헬멧을 집어 던져 깨트렸다. 그러나 그 헬멧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오른쪽 부분을 테이프로 붙인 뒤 검은색 매직펜으로 색칠을 했다. 구단 직원들이 새 헬멧을 권유해도 막무가내였다. 타격이 좋을 때 착용했던 헬멧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헬멧은 미국 현지 에이전트가 직접 구입해 전달해준 것이었다.이런 면들만 본다면, 호세는 '트러블 메이커'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도 있다. 다른 일화로 방향을 돌려본다. 2006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자신이 예전에 달던 34번 유니폼이었다. 그러나 34번 유니폼을 찾았을 때, 그 유니폼의 주인공이 바로 이용훈(30)이라는 것을 알았고, 통역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한번 웃으며 말했다. “그 번호는 행운이 깃든 번호다. 내가 예전에 그 배번을 달고 그라운드에 있으면 항상 컨디션이 좋았다. 난 그 컨디션을 간직한 채 99년의 기억을 갖고, 99번을 달겠다.”(겨울 전지훈련때) 호세는 자신의 예전 34번 배번을 달고 뛰는 선수가 좋았다. 전지훈련 장소에서도 34번의 이용훈에게, “우리 팀의 1선발이냐. 아주 공이 좋다. 힘내라.”라고 말해주며, 호탕함으로 남자답게 챙기던 이가 바로 호세였다. 호세는 롯데 팬들이 두려워 한다는 소위 ‘로나쌩’에게 홈런을 뽑아냈기에 롯데 팬들에게 더 크게 사랑받던 선수였다. 랜들(30, 두산 베어스)을 비롯한 배영수(26, 삼성 라이온즈), 박명환(30, 엘지 트윈스) 모두 호세에게 홈런의 추억을 선사한 주인공 들이다. 2006년 두산과의 잠실 경기에서 3대 0으로 지고 있을 당시, 멧 랜들을 상대로 만루 홈런을 만들기도 했던 호세. 배영수, 박명환 등에게 홈런을 치고, 덕아웃에 들어가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며, 팀 내 파이팅과 근성 그 이상을 불어 넣었다. 붉은 피는 그에게 항상 존재하던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승부사 기질과 터프함이 배어났다. ‘우리 팀’ 선수가 절대 당하는 것은 참지 않았고, 자신을 포함한 롯데 팬들에게 자부심을 넣어주려고 항상 노력하던 선수가 호세였다. 그리고 이 친구는 더불어 따뜻한 마음마저 있었다. 호세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성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훈련이 끝난 뒤 잠을 설쳐가면서 싸인볼 한 박스에 사인을 마치고 잠을 청했고, 야구하기 힘든 여건의 어린 친구들에게 배트와 글러브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것이 ‘부산 사나이’ 호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호세는 누가 뭐래도 젠틀맨의 이미지도 지니고 있었다. 호세에게 2006년 개막전을 앞두고 우리가 그리던 어느 순간처럼 루상을 휘저으려는 모션을 취하기에 기자들이 물었던 적이 있다. 당신은 왜 1999년에도 투수가 셋 포지션 자세에서, 안 좋은 무릎으로 도루를 하려 했는데, 지금은 더 악화 되었음에도 시도를 하느냐고 말이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나는 프로이자 자이언츠의 일원이다. 그리고 나는 펠릭스 호세이다, 롯데를 응원하는 사직의 팬들은 우리가 승리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 대답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롯데 자이언츠가 하위권에 익숙한 팀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입기 편하다고 인터뷰에서는 밝혔던) 명문 뉴욕 양키즈 유니폼 하의를 입던 호세. 팬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디비디비딥을 하는 것도 흥미로워 했고, 푸른 올드유니폼을 받고, 아이처럼 기분 좋아했던 선수가 바로 펠릭스 호세였다. 아이들이 사인 해달라고 하면, 직접 무릎을 구부리면서 눈을 마주치고, 사인을 해 주는 멋진 모습을 보이던 구도의 영웅이었다. 타석에서 스윙을 한번 하면 호세는 까마득히 솟은 타구를 한참이나 지켜보는 세리머니를 한번씩 보여주었고, 하얀 점으로 변한 공이 외야 담장을 훌쩍 넘어 구장의 별이 된 뒤에야 호세는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돌고는 했다. “사실 출루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타 하나, 타점 하나를 올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저절로 따라왔다. 내가 세운 기록은 다른 한국 선수가 또 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승리하는 게임을 누가 깨지는 못할 것이다. 팀의 승리가 우선이다.” 2007년,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호세는 자신의 치료와 재활 과정을 거치면서 인터뷰를 했다. 우선 2007년부터 마운드 높이가 13인치에서 10인치로 낮아지는 것을 무척이나 반겼다.그리고 올해 롯데에서 안 된다면,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인터뷰 내용은 그의 비장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그만큼 롯데가 자신의 마지막 팀이기를 바랐고, 재활 훈련 및 모든 훈련에 열심히 임했다. 그러나 삼국지에 나오는 황충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 없었듯이, 호세 또한 한국에서 자신의 마지막에 부딪혔다. 살 빼고 마운드 높이의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호세를 더 이상 선수로서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까봐 팬들은 걱정했다. 그리고 호세 자신도 이때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6년 브라이언 마이로우(31, 전 롯데 자이언츠)와 동반 퇴출 설이 나왔을 때보다 호세에게 밀려오는 긴장감은 팬들이 느끼는 그것보다 더 했을 것이라는 평이 흘러나왔다. 언론들은 그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심지어 존 갈(29, 전 롯데 자이언츠)과 띠동갑이 아니라, 마이로우와 띠동갑인 호세이기에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된다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그를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선수로 볼 수 있었던 2007년 호세는 예전만큼 우리가 도망가면 감춰줄 수 있는 용기는 있지만, 예전의 향수를 느낄 만큼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다. 타격에서 야구할 때도 힘 보다는 자신의 경험이 쌓인 요령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구안을 믿었다. 만루 찬스에서 조금씩 커트하고 타임을 부르면서 밀어내기로 점수를 내기도 하고, 자신이 선두타자일 때도, 예전처럼 과도하게 스윙을 돌리지 않았다. 기다렸다. 우리가 보고 느끼던 그런 모습은 아니지만, 호세는 팬들에게 마지막까지 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상대팀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장면일 수 있지만, 코칭 스태프들이나 팬들에게는 호세가 이 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2007년 힘겹게 재계약을 하고, 롯데 자이언츠에 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주루가 안 된다는 지적을 듣고 싶지 않아서, 누더기가 된 다리를 이끌고, 러닝을 했고, 자신의 체중을 내릴 수 있는데 까지 내렸다. 그가 2루에서 안타로 홈으로 못 들어온다고 지적하는 팬들이 없었지만, 그는 그게 항상 아쉬웠고, 팬들에게 미안했다. 파워는 나이가 들 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 메이저리그의 강타자 데이비드 오티스(보스턴)와 함께 겨울내내 개인 트레이너의 지도로 합동 훈련을 했다. 사직에서 3만의 부산갈매기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혹여나 부상이라도 당할까봐 윈터리그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항상 자신의 제 2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말하던 펠릭스 호세. “시프트가 있으면, 다른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도 되지 않나요. 당신은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재질을 지닌 선수 아니었나요.” 라는 물음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나를 위해서 시프트를 취한 선수가 있다면 내 마지막 힘을 다해 넘기는 타구를 날리는 것 일뿐이다. 지금 나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 자신이 지금 안 된다고 하는 것에 승복을 하는 것이니까. 내 몸의 한계를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2007년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 직전에) 2007년 5월 10일...시간이 멈추길 바랬다.SK 와이번스와의 문학 구장에서, SK 와이번스의 야수들은 자리를 이미 잡았다. 호세의 타구가 갈 길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운드에는 김성근 감독이 내세운 이영욱. 롯데는 '생소한 투수'에게 약하다는 지적을 또 한번 받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롯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0-1로 스코어 보드는 반짝거렸다. 그리고 롯데의 3회 초 공격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공격다운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는 줄 알았고, 관중들은 호세가 나오자 예전처럼 '기대'가 아닌, '걱정'으로 바라 보았다. 1사 1루에서 .253이라고 전광판에 새겨진 자신의 예전 같지 않은 타율을 바라보는 호세가 타석에 들어섰다. 볼카운트 0-1에서 던진 이영욱의 139km 직구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호세의 눈높이에 맞게 형성됐다. 호세의 당시 스윙이라면, 헛스윙이 나올 법한 스윙이었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 공은 마운드에서 전광판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현수막이 보였다. '호세,제발 한개만 쳐줘', '홈런 쳐 어서!!!'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플래카드와 현수막이 보였다. 비거리 125m짜리 우중월 홈런. 올 시즌 23경기만의 첫 홈런이었다. 마수걸이 홈런에 팬들은 울었다. 문학 구장을 찾은 롯데 팬들, TV로 시청하던 팬들, 모두 하나가 되어 울었다. 이 홈런을 친 선수가 그렇게 대단했다. 최동원이 마운드에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을 때만큼이나 대단했는지 모르지만, 팬들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호세가 부활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가 고전하지 않을 줄 알았다.그러나 이 홈런은 그의 마지막 타석에서의 홈런이었다. 마수걸이 홈런이 작별 홈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들어섰던 타석은 바로 그가 즐겨찾던 4번타석. 호세는 바로 다음날, 퇴출 통보를 받았다. 타율 0.256·1홈런·12타점. 어찌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퇴출 성적이었고, 그 선수가 호세이기에 넘어 갈 수 있었던 성적표이기도 했다. 이날 호세가 인천 밤하늘에 쏘아 올린 홈런포는 역대 최고령 홈런(42세 8일)으로 남았으며, 호세의 최고령 출장기록도 이날로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렇게 호세의 한국시계는 멈췄고 출장기록도 이제는 명이 다했다. 문학에서의 그 날 승리는 기분 좋았지만, 호세가 그렇게 떠날 줄도 몰랐다.2007년 5월 11일...울었다.급하게 롯데 팬들은 호세의 웨이버 공시 소식을 듣고, 2007년 5월 11일 잠실 구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호세의 자리는 없었다. 호세와 연관된 지인들에게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 또한 짐을 꾸리면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앞에서는 "야구는 비즈니스이다. 내 성적에 불만이 많아서, 구단에 서운한 감정이 없다. 그리고 최고의 팬들을 만날 수 있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라고 말했지만, 부산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자신에 대해서 화도 내면서, 사직을 떠나는 그것에 따른 자책성 눈물과 팬들을 떠나는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이제 당신이 주로 이름을 올리던 4번과 5번 자리에는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지만,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그 자리가 이 날 내린 비에 젖을까봐 주황색 비닐봉투로 테두리를 감싸 안을 것이다. 당신의 발걸음을 보고 싶어, 공항까지 가서, 당신에게 울음으로밖에 하소연 하지 못하는 팬들이지만, 호세 당신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할 것이다. 팬들은 호세가 기록의 사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록으로만 답해주던 선수를 찾는다면 호세는 그 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팬들의 아픔‘을 다독여줄 수 있던 선수를 찾는다면, 호세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회자된다. 그와 팬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비즈니스가 아닌 가족이었다고. “호세를 보면, 절대 자신이 쓰러질 정도로 아파보여도, 내색을 안 한다. 오기가 생겨서, 다시 한번 쳐 보라고 공을 뿌리면, 호세는 그 공을 걷어 내곤 했다. 지치는 것은 투수이고, 그라운드에는 호세만 남더라. 개인적으로 호세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다.”-2007년 현대 유니콘즈 투수들, 현대 유니콘즈 투수 좌완 이현승이 롯데와의 경기 직전에- “호세가 1루에 나가면, 나 또한 흥분이 된다. 그가 어떤 사고를 칠지에 대한 흥분보다는, 그의 열정이 내 몸에 녹아드는 흥분일 것이다. 야구를 하면서, 항상 구단 내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던 선수가 바로 호세였다. 호세는 정말 자이언트가 아닌 자이언츠였다.”-그의 동료인 롯데의 에이스 손민한(32)- 2007년 전지훈련 도중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4월 13일에야 겨우 1군에 올라왔고 홈런 1개와 타율 2할5푼6리, 타점 12개가 마지막으로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성적표이다. 다른 선수라면,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는 성적이지만, 호세에게는 ‘그것에 그쳤다’라는 표현이 붙는 것도 팬들은 아쉽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5관왕을 노리기도 했었던 롯데 ‘용병 영웅’ 펠릭스 호세를 두고 팬들은 말한다. 호세가 떠남은 선수로서의 은퇴이자 잠시 동안의 이별이라고. 당신을 사랑했던 이 들에게 이 하얀 여백에 내 글이 부족함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야구를 본 시간은 짧지만, 정말 그를 야구인이 아닌, 형님, 영웅으로써 모두가 사랑했고, 사랑 받기에 충분했다. 당신이 ‘검은 갈매기’로 한때 불렸던 것은 특이해서가 아니라, 특별했음을 이제야 팬들은 말한다. 그리고 나 또한 호세 당신이 떠났을 때 누구보다 많이 눈물을 머금던 당신의 열렬한 팬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박정태가 부상으로 신음하다 돌아온 공백만큼 당신이 없던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롯데에게는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5월 11일 당신을 보기 위해서 잠실 구장 앞을 서성이면서 눈물을 보이던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당신이 아려나...아마, 지금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지금쯤 쉼터에서 울고 있는 롯데 팬들에게 예전처럼 말하지 않을까라고 팬들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롯데 팬들을 오른 손으로 감싸안고 뒤로 숨기며, “내가 당신들 가슴에 영원히 있으니 괜찮다.”라고... 나 또한 지금 그를 만나면, 호세 당신을 좋아하는 열성팬 처럼 이성적인 대화가 아닌, 영어도 아닌, 그가 종종 사용하는 스페인어도 아닌 한국말로, “어디 아픈데 없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어렸을 적 나를 감싸주며, 뒤로 숨겨주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금은 행복하다. "내가 게으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끊임없이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은 호세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2001년 박정태(38, 롯데 자이언츠 코치) 시즌을 마치고- 경이적인 0.503이라는 출루율. 많은 타자들이 루상에 나가는 것보다 돌아오는 것이 많았을 때, 호세는 다른 이보다 루상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2001년 6월 17일부터 9월 18일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62경기 연속 출루. 최고 연장자로서의 각종 무수한 기록들. 현재는 모두 호세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당신은 우리를 항상 웃게만 해주었다. 그리고 단 한번 울게 해주었다. 그 날이 바로 당신이 떠나던 날이었다. 2007년 5월 12일 LA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출국장의 인파속에 한명의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 도밍고 펠릭스 호세였다. 지금쯤이면 운동장에 도착해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구장 대신 공항에, 유니폼 대신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배트가 아닌 도미니카 행 비행기 표가 쥐어져 있었다. 호세는 창가에 서서 비가 오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뉴스를 통해 호세의 퇴출 소식을 전해들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 몇명이 헐레벌떡 공항으로 뛰어들어왔다. 팬들은 고향 도미니카로 가는 비행기표를 손에 쥐고 있는 호세의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날 내리는 비는 롯데 팬들의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아직 (나의) 팬서비스는 끝나지 않았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공항 직원에게 2007년 한국에서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뒤로 한채 출국장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팬들이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한국을 떠나기 전, 내게 전해준 마지막 싸인볼, 당신은 손으로 건냈지만, 나는 가슴으로 받은 그 싸인볼을... Hatsa la vista Felix Jose...<사진-장원석>▶ 관련기사 ◀☞[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中)☞[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上)
- [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中)
- [이데일리 SPN 고남욱 명예기자]이런 호세의 모습은 팬들은 물론 야구 전문가들에게도 로또복권의 맨 뒷자리를 확인하는 것만큼 설레는 기대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호세는 ‘언제나’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팬들의 기대에 보답했다. "지금쯤 장타가 하나 나와야 롯데가 게임을 수월하게 이끌어 갈 수 있을 텐데요" 라는 야구 캐스터의 멘트가 나오면, 여지없이 홈런으로 답해주던 호세. 그는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을 것 같던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산타클로스에게 전하는 편지 내용을 바꿔준 친구였다.그런 까다로움이 있기에 좌타자 호세를 상대하기 위해서 마운드로 걸어 나오는 상대팀 투수코치의 계산기는 항상 바빴다. 몸을 풀고 있던 좌완 투수가 투수 코치의 부름에 마운드에 올라와서 기다릴 타임이면 호세는 상대 투수를 한번 쳐다 보고, 자세를 가다듬고는 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내 표정 변화 없이 우타석에 다시 들어서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총탄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호세는 타 팀이 싫어하던 ‘균형’을 갖추려는 스위치 타자였다. 롯데 팬들이 그동안 갖지 못한 괴물 같은 이 선수에게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타석에서 자신이 조금 부진하다 싶으면, 밤새도록 좌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땀으로 운동복을 흠뻑 적셨고, 결국 1999년 5월29일 쌍방울 전에서 국내 처음으로 한경기 좌우타석 홈런을 날려 한국 야구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2경기 연속 만루 홈런의 대기록, 프로야구 통산 10000호째 홈런은 그의 많은 기록의 부록이었다. 당시 백넘버 34번의 선수는 그렇게 그라운드의 베이스를 팬들의 기립 박수 속에 돌았다. 끊어진 테잎...호세는 1999년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지만,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에 대한 미련때문에 고민에 휩싸이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직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서, 혹독한 훈련의 끝을 맛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좌절감뿐이었다. 그 결과 자신의 크고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으며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자신이 겪은 혹독한 훈련의 대가를 상대팀에게 베풀기 시작했다. 2001년은 1999년의 끊어진 테잎 이라고 생각했었고, 롯데 팬들에게는 하나의 아쉬움이 아닌, 2000년의 아쉬움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2001년 호세를 영입하기 전까지 당시 롯데 타선은 4번 타자 자리가 공석이었다. 1995년 데뷔 이래 줄곧 4번을 맡아왔던 마해영(37, LG 트윈스)이 고교 최고 타자 중에 한명으로 평가받던 김주찬(26, 롯데 자이언츠), 타격의 달인 장효조(54, 삼성 스카우트)가 선택한 남자 이계성(30, 롯데 자이언츠)과의 트레이드로 삼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리그 최고수준의 4번 타자가 유망주 2명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이 트레이드가 이뤄진 것은 명백히 구단입장에서 ‘암세포’로 여긴 선수협에 그가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호세와 계약하지 못했다는 팬들의 거센 항의 속에 롯데 구단은 마해영을 대신할 선수로 아지 칸세코(43)를 염두에 두었고, 그의 인터뷰 내용은 기대감을 갖는 팬들에게 약물 투여와도 같았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칸세코의 기량은 그의 체중만큼 실망스러웠고 결국 2001시즌 개막을 불과 나흘 앞둔 4월 1일 용병 교체를 단행하게 된다. 롯데 구단 프런트진은 이렇게 되자 당연히 호세의 전화번호를 찾기에 바빴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삼성을 침몰시킨 주인공 펠릭스 호세는 한국에 다시 오게 되었다. 롯데는 호세의 가세로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우여곡절 끝에 타선 정비를 끝마쳤다. 팀은 호세와 새로 뽑은 멕시칸 리그출신의 장거리 타자로 평가받던 훌리안 얀(41, 前 롯데 자이언츠)으로 마해영의 공백을 메워 줄 것이라 생각했다. 깡마른 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얀은 어느 정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호세는 혼자서 여러 명의 투수를 넉 다운 시킬만한 유능한 형님이자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Jose effect2001년 호세의 우산을 같이 쓰게 된 중심타선의 기대주는 조경환(34, 현 KIA 타이거즈)이었다. 단순히 당겨치는 스윙에 크게 의존하던 스윙에서 전지훈련 때 밀어치는 스윙으로 타격을 교정했다. 그런 타격에 김명성 감독이 흡족함을 표시하고, 호세를 한번 바라보면서, 조경환을 4번, 호세를 5번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투수들은 무조건 호세와 승부를 피해야 하니, 조경환과 상대를 했어야만 했다. 조경환과 호세의 방망이가 불기둥으로 바뀌었을 때 투수들은 꺼려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이 둘을 거르자니 커리어 최초 3할을 기록한 선수들인 최기문(34, 롯데 자이언츠)과 김민재(34, 한화 이글스)등이 버티고 있었다. 마해영이 99년 호세의 앞자리에서 .372라는 엄청난 타율과 35개의 홈런을 양산해냈던 것처럼 김명성 감독은 호세에게 주문을 했다. 그리고 조경환(타율 .303, 홈런 26개, 102 타점, 장타율 0.559)과 호세의 효과는 팬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호세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여전히 배달만 할 뿐이었다.another Jose effect호세를 데려오기까지 프런트 진들이 수소문 한 것은 타선의 보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호세는 이른바 ‘호세 효과’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엄청난 팬 흡인력이 있었다. 구단 관계자들도 “만약 호세가 오면 관중이 몇 천명은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었고 호세 관련 루머는 항상 스포츠 뉴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2001년 잠시 사직을 비웠던 그가 돌아왔을 때, 좌석을 꽉 채운 모든 팬들은 일어나서 ‘호세’를 연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런 광경에 타석에 들어서는 호세 또한 흥분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물끄러미 관중석을 쳐다보았다. 이 장면은 클로즈업 되어 팬들의 뇌리에 새겨지기에 충분했다. 항상 외국인 선수 영입 1순위에 호세보다 좋은 기록을 가진 선수들도 존재했지만, 사직을 자주 찾는 이들은 호세를 가장 맨 윗줄에 기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에 대한 믿음과, 그가 롯데 팬들에게 보여준 신뢰는 비즈니스가 아니었다.거인, 정글에서 라이언 킹을 만나다.2001년에는 호세에게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다. 2001년 6월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3연전이 펼쳐진 대구구장. 경기 전 삼성 이승엽(31, 당시 삼성 라이온즈)은 뜬금없이 롯데 자이언츠의 호세를 찾아가 사인 한 장을 받아서 돌아왔다. 주변에서는 이런 대선수가 왜 외국인선수인 호세에게 사인을 받는지 의아해 했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그러자 이승엽은 아무렇지도 않게 “호세라면 어느 누구든지 인정할 만큼 대단한 선수 아닌가. 내 자신에게 다짐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기념으로 꼭 한 장 받고 싶었다. 평소 야구에 대한 철학이 대단한 선수에게 사인을 받는 다는 것은 나 또한 영광이다.”며 웃었다. 호세의 아쉬운 점을 묻는 질문에 그는 “흠잡을 데가 없다”라고 인터뷰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승엽 같은 슈퍼스타가 사인을 요청할 만한 선수가 바로 펠릭스 호세(37)였다.많은 야구인들은 98년 외국인 선수제도 도입 이후 가장 뛰어난 타자로 호세를 꼽는다. 2001년 고인이 된 김명성 前 롯데 감독은 평소 “(호세가) 내 선수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즈(38, 당시 두산 베어스, 現 주니치 드래곤즈)나 데이비스(38, 당시 한화 이글스)도 좋은 선수지만 방망이 하나만 놓고 보면 호세를 능가할 타자가 없다. 배팅능력뿐 아니라 찬스에서의 해결능력이나 투수와의 수읽기를 보면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투수들이 왜 호세를 피하는지는 다들 알지 않는가.”라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그만큼 팀 내외에서 호세는 특별한 존재였다.그러나 그가 무너지는 롯데에 ‘자이언트’가 아닌 ‘자이언츠’인 것이 문제이기는 하였다.“나는 언제나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다. 어느 투수의 공이나 때려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 기술적으로는 볼을 끝까지 제대로 보고 ‘반응(React)’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에 평소 연습할 때 날아오는 공에 내 몸이 얼마나 빨리 반응하느냐 하는 걸 많이 훈련한다. 상대투수의 직구나 변화구 등 특정구질을 노려 치지는 않는다. 노려 치기를 하면 제대로 맞혀낼 확률이 떨어진다.”2001년 더워지는 어느 여름 날 그늘을 뒤로 한 인터뷰에서도 호세는 자신만의 야구에 대한 철학을 짤막하게 표현했다. 단순히 잘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만족할만한 플레이를 펼칠 때까지 노력했기에 호세는 최고의 위치에 존재했다. 그러나 멋지게 대답한 그의 인터뷰와는 달리, 팀의 시즌 성적은 결국 바닥을 쳤다. 2000년에 이은 또 한 번의 추락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호세가 오게 됨으로 인해서, 롯데의 타선이 강화됐단 점은 무시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다시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 중 하나인 뉴욕 양키즈에 입단하겠다고 한 2000년 그리고 이어진 2001년에도 팀의 약점은 눈에 띄게 드러났다. 호세가 없으면 타선이 휑해지는 것도 숨겨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부분은 호세가 2001년 9월 18일 마산구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상대팀 투수 삼성 배영수(26, 삼성 라이온즈)를 경기 중 폭행한 사건으로 인해 출장정지를 받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롯데는 2001년 팀타율에서 1위를 차지했던 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이 터진 후, 핵 타선은 거짓말처럼 위력이 사라져 버렸다. 어찌 보면 그런 상황 속에서 8위로 곤두박질 친 성적표가 책상 위에 도착해 있는 것은 당연했다. 막판에 힘 한번 못써보고 끝났다라고 사직의 팬들은 탄식하기에 바빴던 시간이었다. 호세의 매직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2001년에도 홈런과 관련된 호세의 각종 기록 분석에서 잘 나타나듯 호세는 슬럼프와 담을 쌓았었다. 월별 홈런 분포만 눈 여겨 보아도 허벅지 부상으로 컨디션이 조금 하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이 그를 막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세는 2001년 출장정지의 ‘족쇄’에 걸리기 직전까지 62경기 연속출루 신기록 행진 중 이었고, 한 시즌 최다기록인 128개의 사사구를 얻었다. 호세의 사사구기록은 1999년 이승엽의 124개를 뛰어넘은 것으로 그 가운데는 무려 28개의 고의사구가 포함돼 있다. 다른 팀 투수들이 그만큼 호세와의 맞겨룸을 피했다는 증거다. 2001년 홈런(36개) 2위, 타점(102개) 3위, 출루율(0.503) 1위, 장타율(0.695) 1위, 타율(0.335) 4위, 미궁에 빠지기 전까지는 손에 이제 쥐기만 하면 된다고들 여겼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이 끝날 무렵 호세의 화려한 기록상 수치는 ‘가을의 성적’이 제외된 ‘과거의 기록’으로만 되어버렸다.“모든 팀들이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힘든 경쟁을 하고 있다. 팀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를 견제할 필요도 있다. 긴장상태에서 던지는 투수들이 불리한 입장이고 나는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공격을 할 수 있다. 나는 정면 승부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면승부를 피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팀이 승리한다면, 나는 그 다음을 기다리면 된다. 내가 4번 타자이고 또 홈런도 많다 보니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은 앞 타석에서 두 차례 범타로 물러났더니 투수가 정면 승부를 해 줬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흐름이 이어질 것이다.“포스트 시즌을 앞둔 그의 포부가 새겨진 인터뷰 또한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1999년의 감동이 다시 오길 바랬지만, 고무팔 ‘에밀리아노 기론(34, 당시 롯데 자이언츠)’이 여전히 롯데 유니폼을 입은 것 말고는 롯데는 2001년 아쉬움이 가득한 한해였다.2001년은 호세의 우산 효과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해준 것은 사실이다. 롯데의 혼(魂)으로 불리던 박정태(38,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비롯 최기문, 조경환, 김민재, 김대익(35, 현 삼성 라이온즈)등 많은 타자들은 호세의 우산 안에서 더욱 큰 빛을 비추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감독님이라기보다는 형님 같았던 김명성 감독이 성적에 대한 부담으로 타계한다. 배영수와 안타까운 일이 있었을 때도, 호세를 원망하기 보다는, 다독여주시던 분이 돌아가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로 호세 자신이 답답해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찾아오곤 하던 김무관 코치(43 , 롯데 자이언츠 코치)도 더 이상 그에게 짧은 스페인어로 그와 대화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2001년 팬들이 사랑했던 김명성 사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런 팬들의 사랑이 때로는 지나쳤음을 알려주듯이 롯데의 암흑기는 호세가 다시 떠남과 동시에 지속되었다. 팀 내 에이스 손민한(32, 롯데 자이언츠)이 트레이드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이대호(25, 롯데 자이언츠) 최준석(24, 현 두산베어스) 입단과 동시에 시련을 맞기도 한다. 모든 선수들이 방황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2년간은 단순한 8위가 아닌, 완벽한 8위로 주저 앉아버렸다. 그 가운데에는 흔들리던 투박한 큰 손의 사내가 있었다.<사진-장원석>▶ 관련기사 ◀☞[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上)
- 37개 서울언론사 기자, 청와대에 항의 방문…성명 발표
- [이데일리 문주용기자] 한국기자협회 소속 37개 서울 언론사 지회는 오늘(31일) 오전 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KBS 박상범 지회장과 MBN, 조선일보, 한국일보, 문화일보 지회장 등 5명은 이날 오전 11시 청와대 춘추관을 방문, 춘추관 기사송고실에서 항의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 대통령 비서실장을 수신인으로 해 항의성명을 민원으로 접수했다. 37개 지회는 `정부는 누구를 위해 취재를 제한하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언론계와 시민단체, 정치권 모두가 일관되게 반대를 하고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기사송고실 폐쇄도 검토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며 "정부의 취재지원 선진화방안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보통제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발 그 뻔한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지 말라"고 주장했다. 성명서는 이어 "5.22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의 핵심적 문제는 바로 정부가 공무원과 기자의 대면접촉을 막아 정보를 통제하려는 데 있다"며 "그러나 정부가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실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기자들은 알아야겠다"고 강조햇다. 성명서는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지난 25일자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이번 조치는 정보차단이 아니라 정보접근권 확대에 맞춰져 있다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도 정보 접근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며 "정말 정부의 홍보자료를 일방적으로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정보접근권의 확대라고 믿는 것인가"라고 따져물었다. 성명서는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국민이 주인노릇 하려면 정보가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조치는 댐을 쌓아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선 선진화된 취재지원시스템이라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지금이라도 희대의 언론탄압 행위인 취재제한 조치를 즉각 철회하라"고 주장하고 "만일 정부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 취재제한 조치를 그대로 강행한다면 우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강력히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성명에 서명한 기자협회 지회는 다음과 같다. 연합뉴스 지회는 지회장이 해외출장 관계로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 한겨레 지회는 내부 지회원들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아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 기자협회 경향신문 지회, 국민일보 지회, 서울신문 지회, 동아일보 지회, 문화일보 지회, 세계일보 지회, 조선일보 지회, 중앙일보 지회, 한국경제 지회, 한국일보 지회, 내일신문 지회,헤럴드경제 지회, 머니투데이 지회, 매일경제 지회, 서울경제 지회, 파이낸셜 뉴스 지회, 아시아경제 지회, 디지털 타임스 지회, 이데일리 지회, 전자신문지회, 스포츠서울 지회, 일간스포츠 지회,코리아타임스 지회, 코리아헤럴드 지회, KBS 지회, MBC 지회, SBS 지회, BBS 지회, CBS 지회, MBN 지회, YTN 지회, 일요신문 지회, 시사저널 지회, 한국경제TV지회, 아이뉴스 24지회, 뉴시스 지회, 농민신문 지회 일동
- 외국계 증권사도 "코스피 전망 높여 높여"
- [이데일리 손희동기자] 국내증권사들이 앞다투어 올 코스피 전망치를 올려잡고 있는 가운데, 외국계 증권사들도 `상향` 경쟁에 가세했다. 호주계 증권사인 맥쿼리는 1625로 잡았던 올해 코스피 전망치를 1790으로 165포인트 상향조정한다고 30일 밝혔다. 또 향후 12개월 목표지수는 1890으로 설정했다. 맥쿼리는 "내수와 수출을 포함한 한국의 거시경제에 관한 긍정적 시각이 차츰 확대되고 있다"면서 "기업의 실적 모멘텀과 시장 유동성 등도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또 "한국 시장에서의 외국인 비중은 아직 낮은 편으로, 이는 유동성 증대의 여지가 남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연말쯤으로 예상되는 대통령선거와 한미FTA 비준 등도 투자심리 개선에 일조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UBS 역시 연초 1650으로 설정했던 코스피 예상치를 1850으로 무려 200포인트나 상향했다. UBS가 코스피를 올려잡게 된 근거는 4가지로 요약된다. ▲대기업들의 지주회사 전환으로 지배구조가 투명해진 점 ▲M&A가 계속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중국을 비롯한 신흥 개발국가들의 개발사업이 호조를 보이면서 한국의 건설과 조선, 중공업 업종 등이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식시장 참여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바닥을 찍고 업턴하고 있는 기업들의 실적 개선 조짐도 증시활황의 주요 요인이라고 UBS는 설명했다. 장영우 UBS 투자전략가는 "한국전력을 제외한 상위 30종목의 1분기 순이익은 전년대비 14%, 전분기 대비 16% 증가한 것이었다"며 "하반기 들어서 기업들의 실적증가 속도는 보다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이같은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 단기적인 조정 역시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아울러 제기됐다. 알란 존슨 맥쿼리 기술적분석가는 "현 시점의 코스피는 다소 과매수된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 "예전 박스권에서 저항선으로 작용했던 1530대가 지지선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맥쿼리는 최고 선호종목(top picks)으로 자본재에선 현대중공업(009540)과 현대건설(000720)을 꼽았으며, IT업종에선 하이닉스(000660)와 NHN(035420) 그리고 LG(003550)를, 금융업종에선 신한금융(055550)그룹과 삼성화재(000810), 그리고 우리금융(053000)을 꼽았다. 소비재 중에선 롯데쇼핑(023530)과 빙그레(005180), 소재업종에선 LG화학(051910)과 현대제철(004020)을 가치주로 평가했다. UBS는 탑픽 종목으로 시장확대와 M&A 이슈가 겹쳐진 대우조선해양(042660)과 지주회사 호재의 SK(003600)와 금호산업(002990) 등을 우선 손꼽았다. 또 농심(004370)과 현대백화점(069960), 현대차(005380), 한국타이어(000240), 현대제철(004020), 하나금융지주(086790), 기업은행(024110), 현대해상(001450) 등도 가치주로 언급했다.
- (채권폴)국고5년 5.11~5.27%.."금리 급등후 `쉬어가자`"
- [이데일리 황은재기자] 이번주(5.28~6.1) 채권시장은 금리 급등 이후 `쉬어가자` 분위기를 연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경기회복 기대감, 통화정책 당국의 긴축 정책, 주가지수 상승세 등이 어느 정도 채권금리에 반영됐다는 것. 그러나 적극적인 매수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더 강하다. 채권시장의 큰 손인 외국계은행의 매수세가 위축됐고, 국내 투자자들도 중립적인 포지션 전략 구사를 통해 위험 관리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 이데일리, 단위(%)이데일리가 28일 채권시장 참가자 7명을 대상으로 이번주 채권금리 변동범위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고채 3년물 5.08~5.23%, 국고채 5년물은 5.11~5.27%로 집계됐다. 최경진 도이치방크 상무는 "전체적으로 채권시장은 바닥을 다지는 한 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4월 산업생산이 발표되지만 시장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규윤 대구은행 차장은 "최근 긴축을 단행한 중국시장과 이로인한 환율 움직임은 중요한 관심사이며 수급은 바이백 실시로 좋다"면서도 "계속된 당국의 통화정책 방향이 (채권투자결정에 있어)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다음은 전문가별 주간전망 ◇최완석 새마을금고연합회 팀장 높아진 경기회복 기대감, 통화당국의 긴축정책, 사상최고치를 보인 주식시장, 미국 금리상승 등 채권시장 주변 여건을 보면 악재 투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 투자심리가 쉽게 살아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러한 재료들이 이미 시장에 반영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는 기간 조정을 고려해보아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간 조정을 보이더라도 금리하락을 이끌만한 새로운 모멘텀이 나오기 전까지 금리하락 기대에 따른 매수세 유입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고채 3년물 5.10 ~ 5.22% -국고채 5년물 5.13 ~ 5.25% ◇이윤희 칸서스자산운용 팀장 지난주는 만기도래 물량이 많아서 단기금리가 하락하며 장기금리 상승도 주춤하였으나 금리상승의 일시 휴식인지 아니면 올라갈만큼 다 올라간것인지 판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주는 단기고점을 형성하고 일정부분 상승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월말 경제지표가 기대 이상의 호조로 나오지 않는다면 경기회복 속도에 비해 금리상승 속도가 앞서 갔다는 판단과 이미 나온 악재 외에 더 나올만한 악재가 없다는 것 자체를 호재로 보고 매수세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고채 3년물 5.09 ~ 5.22% -국고채 5년물 5.11 ~ 5.26% ◇김종희 신영투자신탁운용 차장 지난주는 여전히 외국계은행이라는 시장 매수축의 이탈로 인한 장기물 수급불안이 지속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기물이 안정을 찾아가고 이번주 있을 산업생산 등 지표가 예상치를 초월하지 않는다면 이를 고비로 최근까지 급등한 양상을 보이던 금리도 최소한 기술적 조정의 빌미를 갖지 않을까 예상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매수세가 얼마나 될지는 외국계은행 또는 기타매수세력의 급격한 포지션 전환가능성 등을 고려해 볼 때 큰 기대를 갖게 하지는 못할 수준이 아닐까 싶다. -국고채 3년물 5.07 ~ 5.20% -국고채 5년물 5.09 ~ 5.23% ◇ 이규윤 대구은행 차장 월말이 됨에 따라 각종 경제지표가 발표되며, 특히 4월 산업활동동향의 내용에 따라 방향성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예측대로 좋게 나오면 추가 상승 가능성이 있으나, 예상에 미흡할 경우 최근 가파른 금리상승에 따른 일정부분 되돌림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긴축을 단행한 중국시장과 이로인한 환율도 중요한 관심사로 보여지며, 바이백등으로 인한 수급은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계속된 정부의 통화정책 방향이 의사결정의 중요한 포인트다. -국고채 3년물 5.05 ~ 5.25% -국고채 5년물 5.08 ~ 5.30% ◇김병섭 국민은행 과장 단기자금시장에 풍부한 잉여자금과 만기 1년이하 단기물의 금리 하락이 지속되고, 주식시장의 조정이 계속된다면 단기적으로 반락 시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경제지표 발표를 앞두고 있어 관망세가 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금리가 좁은 레인지 안에서 움직일 것으로 본다. -국고채 3년물: 5.10~5.25% -국고채 5년물: 5.15~5.30% ◇황순재 전북은행 실장 이번주 채권시장은 단기적으로 안정 국면을 예상한다. 그러나 기술적인 강세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국고채 3년물 5.05 ~ 5.25% -국고채 5년물 5.08 ~ 5.30% ◇최경진 도이치방크 상무 이번주 채권시장은 전체적으로 바닥(국채선물 기준)을 다지는 한 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4월 산업생산이 발표되지만 시장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되며 점점 악재에 내성을 쌓는 한 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고채 3년물 5.10 ~ 5.20%-국고채 5년물 5.13 ~ 5.25%
- (미리보는 경제신문)美, FTA 추가협의 요구할 듯
- [이데일리 김일문기자] 다음은 내일(28일)자 경제신문 주요기사다.(가나다 순)◇매일경제 ▲1면- 한국은 하이브리드카 후진국- 美, FTA 추가협의 요구할 듯- 러시아 차관 첫 현금 상환▲종합- 주택대출 6년4개월만에 감소- 외환보유액서 美 국채 보유 줄인다- 공공기관 운영위는 거수기?- 한미 FTA 협정문 오해와 진실은- 휘발유값 사상 최고가 넘나- 전경련, "고비용구조 해결 안되면 경제위기"▲정치·외교안보- 이명박 `대운하` 지켜낼까- 노 대통령 부쩍 잦아진 지방 나들이..왜?- 추미애 "부동산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사회정책에 집중해야"▲국제- 외국기업 M&A에 지레 겁먹은 日 기업- 탄소배출권 놓고 은행간 경쟁 치열- 日, 에너지 절약형 가전 보급 촉진- 中, 원자력 발전량 15~20배 확충▲금융·재테크- 7월 첫 선보이는 역모기지론- 은행 "국장병 마음을 잡아라"- 엔화 대출 5개월째 감소▲기업·증권- 다음-구글 깊어지는 밀월관계- 포스코, 파이넥스서 나온 가스로 전기 생산- 출력 20% 높인 그랜드 스타렉스- 삼성전자 VS 모토로라 세계 시장 놓고 한국서 전초전- LCD 부품 독과점 무너진다- 정몽구 회장 2년만에 전경련 나들이- 소액으로 `부동산 주식` 한번에 잡을까- LG, 자회사 덕에 오랜만에 웃음- 롯데쇼핑 실적개선 불투명- 제조업체 끝없는 현금 쌓기▲증권·종합- 공모기업 내실 따져보고 투자해야- 코스닥 알짜 내수업종 여행·건설·게임·제약주 유망▲펀드평가- 주식형펀드 5주 연속 상승- 해외 부동산펀드도 지역별 분산해야▲부동산- 동탄 메타폴리스 당첨되면 돈 될까- 신도시 후보지 거래는 뜸한데 호가만 올라- 용인 모현 위장전입 51명 적발◇서울경제▲1면- 체감물가는 이미 "高물가시대"- 국민 78% "3년내 경제위기"- 2009년 `인터넷 지적재산권 대란` 예고▲종합- 정몽구회장 2년만에 전경련 회의 참석한다- 주택담보대출 6년4개월만에 감소- 사모펀드, 보험사 인수 가능- 유류세 인하논란 재점화- 한미FTA 협정문 공개 이후 `재협상 범위` 확대될 듯- 분당급 신도시 후보지 가보니..최근 석달째 거래 한건도 없어- 상장사 채무상환능력 좋아져- 한우값 `바닥모를 추락`- 20·50대 근로자 가구 외식비 비중 최고- 작년 인구 1000명당 주택수 285채▲정치- 李-朴 내일 직접토론 `관심집중`- 홍준표 "대선후보 경선 출마"- 열린우리당 진로 싸고 `갑론을박`- DJ "한나라, 상대없이 주먹질"▲금융- 교육보험 들면 노후·위험까지 보장- 금융권 초단기 고금리상품 봇물- 산업銀 사모펀드 해외진출 본격화- 저축銀·신협 등 가입비 낮춘다▲국제- 중동산유국-美 정유업계 `고유가 네탓` 공방- 中 증시 거래규모 日 앞질렀다- 中 자기부상열차 사업 전격 중단▲산업- 가전업계 "풀 HDTV 특수 잡자"- 삼성·LG전자 노트북·TV 등 中 박람회서 인기- 현대차 `그랜드 스타렉스` 출시- 삼성테크운 DSLR 시장선 `고전`- 삼성전자-보다폰 손잡았다- PCB 유럽시장개척단 1070만불 수출상담 실적- 제품이 과일을 입는다- 쌀과자 시장이 살아난다▲증권- 금융·내수관련주 `시선집중`- 포스코 현대제철 목표가 상향- LG필립스LCD 5만원 넘본다- 코스닥선 기관이 `족집게`- "종목별 순환매 확대"..상승기조 지속▲부동산- "동탄 랜드마크" 큰 인기 예고- GS, 베트남에 100만평 `나베 신도시` 건설- 양주고업지구 `양주 신도시` 성패가를 시험대- 인천 아파트 고가 낙찰 지속▲미디어&콘텐츠- 케이블 SO업계 `대형 M&A설` 솔솔◇한국경제 ▲1면- 기업들 `새 우물 찾기` 총력전- 美 "이번주 FTA 추가협의"- 4명중 3명 "한국서 기업하기 어렵다"▲종합- 해외 부동산 큰손들 `유혹`- 월街 투자자들이 칸 영화제 간 까닭은?- 재경부 `증권사 지급결제` 한은에 백기- `과거`에 발목잡힌 국민은행- 휘발유값 사상 최고 `초읽기`- 美 FTA 재협상, 복수노조 허용 최대쟁점 부각- 만기 지났는데도 안찾아간 증금채 1500억 주인 누구?- 현대硏 "올 성장률 4.2%→4.5%"- 사모펀드 보험사 M&A 쉬워진다▲정치- 벌써 大選 신경전..6월 국회 `산넘어 산`- "1주택 10년이상 보유자 종부세 면제"- 이명박, 정책자문단 131명 공개- 홍준표의원 경선출마 선언▲국제- 지구 온난화로 주목받는 탄소배출권시장- 中 "주식투자 자제하라" 대학생에 경고- 혼다 "부품 90% 中 현지조달"▲산업- 삼성·LG 中 사령탑 "한국제품 기술우위 없어졌다"- MK, 2년만에 전경련 회의 참석- 1년 지난 수입차 반값이면 산다- `그랜드 스타렉스` 오늘부터 판매- `모바일 UCC` 전송속도 경젱- 아시아나, 사이판 주간 노선 주4회 증편▲부동산- 수도권 남부..동탄 메타폴리스 VS 동천 래미안- 용인시도 분양가 제동..공급업체 `비상`- 인천 그린벨트 110만평 개발 추진- 이번주 전국 6곳 8412가구 공급- 구리 수택·인창 재정비지구 지정- 하반기 전국 15만3300가구 입주▲증권- CS, 벽산 대량보유 `5%룰` 위반- 삼호·캠브리지 등 외국인 집중매수로 주가 껑충- 대우증권, 베트남 리조트 사업 직접투자- 미국증시 5월 고용지표·4월 물가 시선집중- `테마` 지고 `실적` 뜬다
- [명예기자석]김주찬의 선발 출장이 지닌 의미(상)
- [이데일리 SPN 고남욱 명예기자] 최근 롯데 자이언츠 팬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주인공은 김주찬(26). 야구 팬들이라면, 각종 매체에서도 김주찬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김주찬은 아직 관심의 진행형에 속하는 행복한 선수인 셈이다.김주찬은 현재 롯데 팬들의 기대감 그 자체이다.김주찬이 소집해제가 되던 시점인 4월 15일 께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대전에서 롯데가 한화에 극적으로 승리한 이 경기에서 김주찬은 2안타를 몰아친다. 이와 비슷한 타격 자세는 5월 19일 잠실 LG 트윈스전서도 나타났다. 좌익수 쪽으로 당겨치는 타구가 파울이 되었지만, 타구 자체는 좋은 점이 아닌 나쁜 점에서 눈여겨 볼만했었다. 무릎을 굽혀준 상태에서 공을 걷어낸 그 타구는 치는 데 급급해 김주찬의 타격 포인트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음을 설명하기도 하는 타격이기도 했다.재능에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김주찬의 모습은 그 이후로 안쓰러울 정도였다. 보름전인 잠실 LG와의 게임은 김주찬에 대한 기대치가 무너질 수 있는 시점이었다. 5월 11일 LG 선발 팀 하리칼라(36)는 초반에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김주찬은 1회 2,3루의 스코어링 포지션에서 삼진을 당하고 만다. 문제는 이런 부분이 당시에 쉽게 수정이 안됐다는 점이다. 문제는 공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비에서도 보이는 실수는 물론 기록되지 않은 실책까지 겹치는 사건도 생겼다. 공격에서 부진하니, 도미노식으로 수비에서도 실수가 나타나는 모습은 게임에서 몇 차례 드러냈던 것이다. 우천으로 취소된 12일을 넘긴 13일, 김주찬은 이 날 중견수로 선발 출장을 하게 된다. 이 게임에서도 1회초 1사 만루의 찬스에서 결정적인 삼진을 당하고 만다. 롯데의 중심 이대호(25)가 바로 뒤에 배치된 김주찬의 부진 탓에 잇달아 볼넷만 얻는 일이 벌어졌다.13일은 김주찬에게 잊을 수 없는 날로 기록됐다. 수비에서 결정적 에러로 게임을 헌납한 하루였기 때문이다. 0-0으로 비기던 3회말 무사 1루서 LG 권용관(31)이 중견수 앞 안타를 때렸다. 달려 나오며 잡으려던 김주찬이 가랑이 사이로 빠뜨렸고. 조인성(32)과 권용관이 한 루씩 더 진루했다. LG는 이어 1번 이대형(24)의 2루수 내야땅볼로 선취득점을 했다. 실책이 아니었다면 병살플레이가 될 상황이었다. LG는 이종열(34)의 중견수 플라이로 추가 득점했다.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글러브 속에 빠졌다 나오는 플라이도, 한차례 보여주었다. 이 또한 점수로 연결이 됐다. 노력하는 선수들, 재능있는 선수들롯데 선수들은 과거에는 어땠나를 떠나서, 현재 모습을 보면, 팬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만큼 현재 1군 로스터에 있는 선수들은 훈련양과 근성이라는 측면에서 만큼은 박수를 쳐줘도 좋을만한 선수들이 즐비하다.김주찬 또한 자신의 훈련량을 넘어서는 모습을 팀 내에서 보여주고 있다. 팬들이 바라는 무한 경쟁의 중심에 김주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팬들의 입장에서는 흐믓하다.과거 조범현(47)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 카드 불문하고 김주찬을 탐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김재박 LG 감독(53)도 현대 유니콘스 감독시절 이대호(25)와 김주찬의 재능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든 바 있다. 백인천 전 롯데 감독(64)의 지도 후 타격 폼이 무너졌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지만, 그랬다면 현재 박현승(35)도 예전 수정한 타격 폼에서 지금도 헤매고 있어야 한다. 박현승은 오랜 시간동안 모토이 인스트럭터가 교정 시켜준 타격폼을 유지하다가, 자신의 폼을 잃어버린 바 있다. 당시 마해영(37, 현 LG)은 자신의 맞춤사이즈 옷처럼 새로 터득한 타격 폼이 잘 맞았으나, 박현승을 교정해주었던 폼은 박현승의 장타는 물론, 기존의 간결하게 끊어치는 스윙마저 잃어버리게 했다. 그러나 박현승은 예전의 폼을 다시 찾았다. 선수들에게 자신의 고유 타격폼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나쁜 타격 폼으로 너무 오랫동안 고정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자신이 변하고자 하는 노력이 항상 답을 주기 마련이다.김주찬에게는 1군 경기출장이라는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 김주찬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치를 예로 들지만, 그 부분은 확연히 다르다. 우선 군복무라는 기간은 그의 최근을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단어이다. 상무에서 뛰던 선수가 아니기에 감각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본인 입으로도 너무 감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1군에서 오래 뛰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김주찬의 기용에 답답해 하는 팬들도 많지만, 단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꾸준한 믿음이라는 것은 대 선수를 만들기 위해서 분명 필요한 과정이었다. 체력적이나 멘탈적으로 바닥을 쳤을 때, 정말 큰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독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김주찬과 맞트레이드 되었던 마해영도 그랬고, 조경환(34, 현 KIA), 거슬러 올라가서 공필성(40, 현 롯데 자이언츠 코치), 전준호(38, 현 현대 유니콘스), 김응국(41, 현 현대 유니콘스 코치) 모두 시련기가 있었다.<사진-고남욱,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 [명예기자석] 김주찬의 선발 출장이 지닌 의미(하) 2007-05-27
- 이만수, 빤스, 박수?
- [로스앤젤레스=구자겸 통신원] 일제시대를 겪었던 우리 어머니들은 팬티를 '빤스'라고 했습니다. 형님 팬티도 그렇게, 누이 것도 그렇게 하나로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빤스는 일본말인데도 전혀 왜색적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어쩌다 듣게 되면 웃음부터 나옵니다. 빨랫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삼각, 사각, 그리고 동그란 형형색색의 이미지들과 함께 비라도 올라치면 "얘들아, 빤스 걷어라"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공감각으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만수 SK 코치의 '빤스 퍼포먼스'가 화제입니다. 이 코치가 1위를 달리고 있는데도 홈 관중이 없는 것을 보고 선수들에게 "대체 그동안 어떻게 했길래 관중이 이렇게 없느냐 . 열심히 뛰어 앞으로 10경기 내에 3만 관중을 채우면 내가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겠다"고 농담 섞어 다그친 호통이 발단이 됐습니다. 이 말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진담'화 하고 드디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판국입니다. 이미 팬들로부터 요상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팬티들이 답지하고 있고, SK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당사자인 이 코치도 팬이 보내 준 야시시한 팬티를 라커에 내걸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진하며 결전의 날에 대비해 '몸 다듬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 야구 백년사, 아니 세계 야구사에 유례가 없는 '빤스 퍼포먼스'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역시 '이만수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야구 때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파이팅의 이만수' 아니었습니까. 그의 한양대 포수 시절엔 이런 실화도 있었습니다. TV로 중계된 경기였는데 당시 영남대 타자 김종모(현 삼성 코치)가 하도 뒤에서 떠들어대는 통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자 "야, 조용히 좀 해"라고 웃으면서 한 이야기가 그대로 전파를 타기도 했습니다. 프로에 들어와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년이었던 10년 전 쯤으로 기억됩니다. 어렵사리 플레이오프에 오른 삼성이 잠실서 LG에 큰 점수차로 뒤져 이미 승부가 기운 때였습니다. 마지막 공격에서 대타로 등장한 그는 좌월 솔로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를 돌면서 3루 측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홈인했습니다. 그 때 침통하기 짝이 없었던 덕아웃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 코치가 혀를 끌끌 차며 하던 말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쟤는 혼자서 저 맛에 야구한다니까." 이 코치에 대한 팬들의 사랑과 그의 팬 사랑은 지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삼성이 대구 팬들의 질타가 두려워 미루고 미뤘던 그의 은퇴를 마침내 확고한 방침으로 정했을 때였습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구단의 으름장에도 그는 "구단의 뜻에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다. 너무 많은 팬들이 만류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말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걷고 돌아와 줄기차게 '스포테인먼트'를 외치며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그가 이번에 뜬금없는 '빤스 퍼포먼스'를 벌이겠다는 것도 더욱 지극해진 팬 사랑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도 밝혔듯이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위기를 저 한 몸 던져 타개해내고야 말겠다는 충정의 소산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법론적으로 아쉽기만 한 물음이 생깁니다. 왜 하필 '빤스 퍼포먼스냐'라는 것입니다. 빤스의 정감 때문이라면 그런 난센스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강산이 여섯 번도 더 바뀌어 버린 세월 전의 '구닥다리 버전'입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다년 간 불펜 포수 코치로 활약하면서 쌓아 올린 메이저리그에 정통한 지식과 경험으로 종종 선수들을 기죽이는 이 코치의 화려한 이력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코치도 너무도 잘 알고 있듯이 '빤스 퍼포먼스'는 명백한 '섹슈얼 해러스먼트 (Sexual Harassment)'입니다. 여성 팬들은 물론이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을 기치로 삼는 프로야구의 현장에서 과연 그렇게까지 선정적인 몸짓을 해야 하는 것인지요? 오히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표를 향한다고 할지라도 이젠 과정의 온당성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 코치가 예전과 똑같이 매일 신문에서 거듭 확인하는 한국 사회의 여전한 후진성도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표 달성 지상주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던가요? 또 있습니다. '빤스 퍼포먼스'로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 칩시다. 그럼 다음엔 더 자극적인 방법이 동원돼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인데 그렇다면 '벌거벗은 임금님' 밖에 없습니다. 그 임금님의 후유증은 유치원생조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코치님, 진정 '빤스 퍼포먼스'를 하실 작정입니까? 이 코치님의 갸륵한 충정은 이미 팬들에게 전달됐습니다. 목표는 벌써 이루고도 남았습니다. 때문에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빤스 퍼포먼스'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이란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메이저리그의 밑바닥에서 몸으로 익힌 지식과 경험을, 후배 선수들과 한국 야구의 모자람을 지적하는 데만 쓰지 말고 함께 끌어 올리는데 귀히 써주기를 바랍니다. 이 코치님의 순수한 한국 야구 사랑과 열정을 믿습니다 .
- [한들의 친구, 야구] 이만수, 빤스, 박수?
- ▲ 지난 4월 29일 SK와 LG경기에서 SK 이만수 코치가 가발을 쓰고 그라운드에 나타나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뉴시스][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일제시대를 겪었던 우리 어머니들은 팬티를 '빤스'라고 했습니다. 형님 팬티도 그렇게, 누이 것도 그렇게 하나로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빤스는 일본말인데도 전혀 왜색적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어쩌다 듣게 되면 웃음부터 나옵니다. 빨랫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삼각, 사각, 그리고 동그란 형형색색의 이미지들과 함께 비라도 올라치면 "얘들아, 빤스 걷어라"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공감각으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만수 SK 코치의 '빤스 퍼포먼스'가 화제입니다. 이 코치가 1위를 달리고 있는데도 홈 관중이 없는 것을 보고 선수들에게 "대체 그동안 어떻게 했길래 관중이 이렇게 없느냐 . 열심히 뛰어 앞으로 10경기 내에 3만 관중을 채우면 내가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겠다"고 농담 섞어 다그친 호통이 발단이 됐습니다. 이 말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진담'화 하고 드디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판국입니다. 이미 팬들로부터 요상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팬티들이 답지하고 있고, SK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당사자인 이 코치도 팬이 보내 준 야시시한 팬티를 라커에 내걸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진하며 결전의 날에 대비해 '몸 다듬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 야구 백년사, 아니 세계 야구사에 유례가 없는 '빤스 퍼포먼스'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역시 '이만수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야구 때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파이팅의 이만수' 아니었습니까. 그의 한양대 포수 시절엔 이런 실화도 있었습니다. TV로 중계된 경기였는데 당시 영남대 타자 김종모(현 삼성 코치)가 하도 뒤에서 떠들어대는 통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자 "야, 조용히 좀 해"라고 웃으면서 한 이야기가 그대로 전파를 타기도 했습니다. 프로에 들어와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년이었던 10년 전 쯤으로 기억됩니다. 어렵사리 플레이오프에 오른 삼성이 잠실서 LG에 큰 점수차로 뒤져 이미 승부가 기운 때였습니다. 마지막 공격에서 대타로 등장한 그는 좌월 솔로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를 돌면서 3루 측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홈인했습니다. 그 때 침통하기 짝이 없었던 덕아웃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 코치가 혀를 끌끌 차며 하던 말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쟤는 혼자서 저 맛에 야구한다니까." 이 코치에 대한 팬들의 사랑과 그의 팬 사랑은 지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삼성이 대구 팬들의 질타가 두려워 미루고 미뤘던 그의 은퇴를 마침내 확고한 방침으로 정했을 때였습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구단의 으름장에도 그는 "구단의 뜻에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다. 너무 많은 팬들이 만류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말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걷고 돌아와 줄기차게 '스포테인먼트'를 외치며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그가 이번에 뜬금없는 '빤스 퍼포먼스'를 벌이겠다는 것도 더욱 지극해진 팬 사랑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도 밝혔듯이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위기를 저 한 몸 던져 타개해내고야 말겠다는 충정의 소산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법론적으로 아쉽기만 한 물음이 생깁니다. 왜 하필 '빤스 퍼포먼스냐'라는 것입니다. 빤스의 정감 때문이라면 그런 난센스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강산이 여섯 번도 더 바뀌어 버린 세월 전의 '구닥다리 버전'입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다년 간 불펜 포수 코치로 활약하면서 쌓아 올린 메이저리그에 정통한 지식과 경험으로 종종 선수들을 기죽이는 이 코치의 화려한 이력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코치도 너무도 잘 알고 있듯이 '빤스 퍼포먼스'는 명백한 '섹슈얼 해러스먼트 (Sexual Harassment)'입니다. 여성 팬들은 물론이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을 기치로 삼는 프로야구의 현장에서 과연 그렇게까지 선정적인 몸짓을 해야 하는 것인지요? 오히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표를 향한다고 할지라도 이젠 과정의 온당성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 코치가 예전과 똑같이 매일 신문에서 거듭 확인하는 한국 사회의 여전한 후진성도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표 달성 지상주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던가요? 또 있습니다. '빤스 퍼포먼스'로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 칩시다. 그럼 다음엔 더 자극적인 방법이 동원돼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인데 그렇다면 '벌거벗은 임금님' 밖에 없습니다. 그 임금님의 후유증은 유치원생조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코치님, 진정 '빤스 퍼포먼스'를 하실 작정입니까? 이 코치님의 갸륵한 충정은 이미 팬들에게 전달됐습니다. 목표는 벌써 이루고도 남았습니다. 때문에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빤스 퍼포먼스'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이란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메이저리그의 밑바닥에서 몸으로 익힌 지식과 경험을, 후배 선수들과 한국 야구의 모자람을 지적하는 데만 쓰지 말고 함께 끌어 올리는데 귀히 써주기를 바랍니다. 이 코치님의 순수한 한국 야구 사랑과 열정을 믿습니다 .
- (미리보는 경제신문)정몽구 회장 "7년내 1조 헌납"
- [이데일리 문승관기자] 다음은 내일(23일)자 경제신문 주요기사다. (가나다순) ◇매일경제▲1면 -`폭주기관차`중국 괜찮나-국민 알권리가 버림받았다-정몽구 회장 "1년내 1200억 출연"-미래에셋, 두바이 현지법인 연내 설립▲종합 -대선주자, 기자실 폐쇄 일제히 반대-신도시, 강남 대체할 곳에 분당보다 크게-6월 부동산시장 변수 많다-수도권에 日보다 큰 유니버설 스튜디오-2011년 국민절반 수도권 거주-상장사 시가총액 GDP제쳤다▲기획-유시민 前복지부장관에 듣는다 ▲국제 -中철강 등 110개 품목 5~15%수출관세-도쿄에 금융특구 만든다-日기업 "비철금속 사용 줄여라" ▲금융·재테크 -외국계 은행 3인방 1분기 실적 따져보니-카드 1년이상 안스면 자동 탈퇴-한국인 노후생활비 스스로 조달▲기업과증권 -LCD·PDP분리해 경쟁시킨다...LG전자-냉매·실외기 없는 에어컨 개발-한국, 中 철강수출 통제 덕볼까-삼성LCD TV 세계최대 유람선 탄다-남북한 기업 만화영화 공동 제작-25개국 바이어 "한국 UCC굿"-해외 부가세 돌려받으세요-국산전기차 중국서도 달린다-증권사 뒤늦게 목표지수 올리기-우체국·온라인 등 펀드판매 채널 다양화 -제일상호·신민저축은행 영업이익 흑자 전환-올해 주당순이익 전망치 속속 변경-바이오에탄올株 옥석 가려야 ▲부동산 -민간시행사업 `알박기`시대는 갔다-대우빌딩 1조원 이상에 팔릴듯-은마 34평형 경매현장.."아직 바닥 몰라" 입찰 참여 9명뿐◇한국경제 ▲1면 -사모펀드형 `계모임`이 뜬다-朴 "물가연동 소득세제 도입"-"개인자산으로 사회공헌기금 조성"-"아파트 공시가격 내려달라"..강남 등 주민 집단이의신청-1년 이상 안쓴 카드 자동 해지▲종합 -실외기·냉매 필요없는 에어컨 나온다-틸팅열차 2010년께 상용화-中, 펀드에 유동성 확보 긴급 지시-해외여행 다니는 기초생계 급여자도 있다-분당급 신도시는..수도권 동남부 600만평 예상-예보, 한전지분 7월께 매각-공기업CEO 성과급 줄어든다-일본판 월스트리트 만든다-유니버설 한국 테마파크 아시아 최대 2012년 개장-2011년 국민 50%가 수도권에 거주-카드 신규 연회비 반드시 받아라-대부업 이자상한 확정..연 30%넘으면 계약 원천무효▲국제 -中·인도 18억 소비층 몰려온다-日적대적 M&A적극 방어 상장사 15% `포이즌 필`도입▲산업 -LG전자 `남용 way`로 생산성 3배 높인다-코오롱, 車소재 GM공급 길 열려-PMP·전자사전 영역 공방전-한미약품 `슬리머`드디어 빛본다-500원으로 이젠 과자도 못 산다▲부동산 -역세권 소형 오피스텔 `군침 도네`-대우빌딩 가격 1조 넘을 것-수도권 `미니신도시`릴레이 분양▲금융 -은행 영업경쟁 "튀어야 산다"-돈줄 막힌 은행 `특판 전쟁`-수시입출금 예금이 `연리 5%`▲증권 -증시 연일 최고치 행진..단기전망 놓고 낙관·경계론 팽팽-미래에셋 `글로벌 브랜드 펀드` 25일 첫선-KGI證매각 주간사 `라자드`횡포-사채시장 최대 큰 손은 생보사-중견 건설사 `물만났다`-6월 결산 상장사 실적 살펴보니..유가증권사 울상 코스닥사 미소◇서울경제 ▲1면 -고급두뇌 한국은 유출...중국은 유입-新언론통제 각계 비판 쏟아져-정몽구 회장 7년내 1조 헌납▲종합 -해외유명 테마파크 특혜만 요구, 사업은 지지부진-아산 탕정지구 536만평으로 확대 개발-세계 최고 권위 암치료 병원 인천 경제자유구역에 선다-8월부터 기자실통폐합 추진..사실상 족쇄-한미FTA 재협상 초읽기-한국 등 아시아 경제 버블붕괴 조짐-장롱카드 자동 탈퇴 처리▲금융 -녹아웃형 ELD가입자 노심초사-입원급여금 지급 해마다 급증-국내 저축銀, 美은행 지분 첫 인수▲국제 -美휘발유값 거침없는 고공행진-도쿄에 금융특구 만든다-월가 투자銀, 헤지펀드 투자 잇따라▲산업 -LG "LCD-PDP, 사내 경쟁체제로"-상하이자동차, 쌍용차 최대주주로-좋은 인터넷 쇼핑몰 더 없나요"-셋톱박스업계 사업다각화 활발-대형쇼핑몰 이대 앞 `4파전`-수입차, 여풍 몰아친다▲증권 -증시하반기 전망 `장밋빛`-반도체株 오랜만에 반등-인덱스 펀드 상승장서 비실-바이오 에너지는 성장산업 ▲부동산 -상가주택 투자바람 분다-대우빌딩 매각가 1조는 넘어야
- 저물지 않는 태양… 산 속의 바다 위에서 나의 시간도 멈췄다
- [조선일보 제공] >> 노르웨이 ‘피오르드’ 유람선 여행기 ▲ 예아랑에르 마을에서 바라본 예이랑에르 피오르드. 피오르드를 거슬러 오르던 유람선은 이곳에서 바다 쪽으로 뱃머리를 돌린다.베르겐에서 매일 저녁 8시에 북쪽을 향해 후티그루틴사에서 운영하는 유람선이 출발한다. 저녁 8시라고는 하지만, 5월의 베르겐은 아직 오후처럼 환하다. 북쪽으로 가면 아마도 더 많은 빛, 영어로 ‘자정의 태양(Midnight Sun)’이라고 부르는 백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물지 않는 태양이라는 게 내게는 흐르지 않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은 그 멈춰버린 시간을 향해 떠나는 입구다. 도시를 알리는 팸플릿마다 ‘피오르드로 가는 입구’라고 적혀 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느낌은 베르겐에서부터 시작한 다. 밤 10시가 되도록 빛의 잔영은 남아 있다. 넘쳐흐르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선창가에서 한자(Hansa)라는 이름의 생맥주를 마셨다. 한 잔에 55크로네. 한화로 8000원이 넘었다. 중세의 그 도시 동맹에게 갈취를 당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빛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맥주 한 잔을 홀짝이며 손바닥만한 크기의 48면짜리 ‘베르겐 약사(略史)’라는 책을 읽었다. 65크로네. 250면이 넘는 내 소설책의 가격과 거의 비슷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신선한 연어, 굴 등의 어패류는 반드시 배와 선창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는 법규가 나온다. 1276년 베르겐 시에서 제정한 법규다. 연어와 굴 등 어패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금방 700여 년 전의 베르겐 사람들을 이해해버린다. 그 법규에 나오는 선창이란 내가 맥주를 마시던 바로 그 자리였다. 선창으로는 12세기 초엽에 형성된 건물과 골목이 여전히 늘어서 있다. 이 때문에 1979년 유네스코는 베르겐의 선창가인 브리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지금의 건물은 1702년 화재로 불탄 뒤, 원형대로 재건한 것이지만 거기 여전히 신선한 연어와 굴을 선창에서 사던 옛 노르웨이인들의 잔영은 빛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다. 매일 술에 취한 어부들과 상인들로 북적대는 통에 한 주교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사악한 도시라고 일갈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처럼 고요하다. ▲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자 피오르드로 가는 입구인 베르겐의 "브리겐" 선창가. 12세기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다음날 저녁 8시 남쪽 부두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에 오른다. 11일 일정으로 노르웨이의 북쪽 끝인 키르케네스까지 다녀오는 배다. 당연히 유람선은 모두 11척이다. 내가 탄 배의 이름은 MS 트롤피오르드. 노르웨이에서는 피오르드라는 이름을 피해갈 수 없다. 사실상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빙하기와 간빙기의 유산인 피오르드다. 피오르드란 흡사 산악지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찬 모양을 닮았다.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강인지 어떻게 구분할까? 물을 맛보면 아는 일이겠지. 나의 순진한 추측에 한 노르웨이 사람은 해초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일러준다. 과연 물 속 깊숙이 진한 녹색의 해초가 깔려 있다. 산 속의 바다라는 것. 그건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학창시절에 죽어라고 외웠던 피오르드 지형이라는 건 노르웨이에서 별무소용이다. 피오르드 앞에서는 12세기 초엽에 형성됐다는 거리마저도 이제 갓 등장한 역사의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니 자정의 태양을 보기 위해 떠나는 유람선 객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부부들로 가득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지도제작자라면 절망했을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유람선의 항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요란스런 카지노도, 떠들썩한 바도 없는, 마치 명상센터처럼 고즈넉한 분위기의 유람선이다. 노인들은 갑판 여기저기에 앉아서 하루 종일 지치도록 자신의 선조가 태어나기도 전에 형성된 지형만 바라본다. 그 지형으로 구름은 몰려왔다가 다시 사라지고, 밤새 비는 내렸다가 오후면 해가 떠오른다. 그들의 인생 역시 그처럼 변화무쌍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간빙기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산과 바다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인생은 없다. 선박회사는 자신의 유람선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유람선이라고 선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20년째 그 유람선을 운행했다는 선장 토모드 칼슨은 대형지도를 펼쳐놓고 우리가 예이랑에르 피오르드(Geirangerfiorden)를 따라 내륙 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마치 버스를 운전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보인다. 그의 뒤로 GPS가 북위 62도 27분, 동경 6도 46분이라며 현재 위치를 알리고 있다. GPS에 따르면 해발고도는 28.1m인데, 그건 배의 맨 위에 있는 조종실의 고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에서 내륙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승객들은 착시현상을 느낀다. 주위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는 설산이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풍경은 기이해진다. 노르웨이의 5월은 눈이 녹는 시기다. 그래서 도처에 폭포다. 이름이 붙은 폭포는 몇 안 된다. 자부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베르겐을 안내하던 할머니 베아트 로셔 잘렌은 베르겐에서 하루 코스면 다녀올 수 있는 ‘노르웨이 인 어 넛셀’ 코스를 출발하기 전에 산이 우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해서 한껏 기대를 품었다. 막상 아울란드 피오르드에 가서야 나는 산의 울음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절벽으로는 수없이 많은 물줄기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그건 나로서는 감히 위로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치 유람선에 올라탄 노인들의 깊은 주름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닮아 있었다. 요컨대 슬퍼서, 혹은 아파서 흐르는 눈물이 아닌 것이다. 예이랑에르 피오르드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에도 산은 몸 안에 담아둔 모든 눈물을 쏟아낸다. 노인들은 하루 종일 그 눈물을 바라본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몇 번의 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겸허해지고 또 오만해진다. 고통과 슬픔 없이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몸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이랑에르 피오르드의 끝인 예이랑에르 마을에 도착해 유람선이 다시 바다 쪽을 향해서 방향을 돌리자, 한 할머니가 소녀처럼 갑판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다가 내게 소리친다. “봤어요? 이 좁은 틈에서 이 큰 배가 제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걸!” 봤어요, 라고 나는 대답한다. 좁은 피오르드 지형 안에서 큰 배가 제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은, 물론 피오르드란 리아스식 해안과 구별해야만 하는 시험문제 속의 지형이 아니라는 것도 다 봤어요. 그리고 나는 피오르드를 향한 항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원히 지지 않는 하얀 빛을 보는 경험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그 할머니는 여전히 배가 어떻게 제자리에서 돌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갑판의 끝까지 달려간다. 피오르드와 마찬가지로 노인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베르겐에서 유람선 타기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베르겐은 인구 23만5000명 정도의 도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적지를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12세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창가인 브리겐, 그 이후 목조, 벽돌, 콘크리트 등으로 발전해나가는 건축양식상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외브레가텐의 골목들, 여전히 연어와 굴을 팔고 있는 어시장, 베르겐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플뢰옌 등이 찾아가볼만한 곳이다. 베르겐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나가면 작곡가 그리그의 생가도 볼 수 있다. www.visitBergen.com 하루 코스로 피오르드를 경험하고 싶다면 ‘노르웨이 인 어 넛셀’에 참가하면 된다. 이는 베르겐에서 보스까지는 기차로, 보스에서 구드반겐까지는 버스로, 구드반겐에서 플롬까지는 배로, 플롬에서 뮈르달까지는 산악기차로 여행했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르겐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반나절이면 피오르드를 경험할 수 있다. www.fjordtours.no 후티그루틴사의 유람선 티켓을 예약하려면 어시장 왼쪽에 있는 스트란드 호텔의 사무실로 찾아가면 된다. 매일 저녁 8시, 뇌스테브리겐에서 유람선이 출발한다. www.kystopplevelser.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