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렬
  • 영역
  • 기간
  • 기자명
  • 단어포함
  • 단어제외

뉴스 검색결과 2,572건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추모의 `말말말`
  • [카드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추모의 `말말말`
  • [이데일리 e뉴스팀] 이명박 전 대통령 :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로서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세웠습니다. 취임 후에는 여러 개혁적 조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한층 심화시키고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퇴임 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원로였습니다. <☞관련기사 :굴곡진 현대사 '민주화의 큰 산' 지다(종합)> 김종필 전 국무총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으로 민주화를 이룬 분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신념을 끝끝내 관철하신 분.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 거산이라는 호처럼 거대한 산이셨던 분으로 민주화에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물을 마실 때 근원을 생각하라는 음수사원이라는 말을 방명록에 적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기여하신 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김덕룡 전 새누리당 의원 :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온 몸을 던졌던 대통령,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취임 이후에 여러 개혁정책을 썼던 분입니다.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아산재단 이사장) :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며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나라를 통찰하는 혜안을 가진 정치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 개혁과 더불어 김 전 대통령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통합과 화합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루고자 했던 우리 사회 이상이었습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불세출의 '정치9단' YS가 남긴 공과 과
2015.11.24 I e뉴스팀 기자
  • 손 안대고 코 푼 금융위와 '담합 논란'에 떠는 은행
  •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은행에 1982년에 입행해 지금 30년 넘게 다니고 있는데 관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래도 과거에는 경제가 성장기여서 그런지 대출까지 관여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출까지 관여한다. 민간회사를 돈 못 벌게 하는데 정말 너무 화가 난다.”한 시중은행의 고위관계자는 최근 가계부채 대책과 관련해 하소연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8개월째 ‘금융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은행은 과거 ‘관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그림자 규제를 없애겠다고 했지만 한쪽에선 더 어마어마한 그림자 규제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예가 ‘가계부채 관리대책’다.금융위는 내년부터 주택담보대출을 상환할 때 원칙적으로 원금과 이자를 매달 갚아나가는 방식의 ‘분할상환’을 정착시키겠다고 지난 7월 밝혔다. 금융위의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결국 은행들의 모임인 ‘전국은행연합회’였다.은행연합회는 은행들을 끌어모아 일명 ‘여신(주택담보대출) 심사 선진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이 각각 60%를 초과하는 경우 전체 대출액을 분할상환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여기서 시중은행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회사가 함께 모여 여신심사 기준을 일률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담합 논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의 은행 ‘팔 비틀기용’으로 은행연합회를 내세웠지만 담합 논란에 휩싸일까 오히려 은행들은 전전긍긍이다.금융위는 60%·60%룰을 만드는 데 관여조차 안 했다고 한다. 어쨌든 금융위와 은행연합회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해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담합 논란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에 따라 여신심사를 할 때마다 ‘담합의 악몽’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은행들의 주장이다.은행연합회가 “주택담보대출 취급에서 일률적인 기준을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은행들은 가이드라인은 기본적으로 준수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항변한다.보이지 않는 강제성을 이길 은행은 없다는 것이다. 당국이 대출 시스템에 관여하면 은행의 이익감소는 둘째 치더라도 담합의 공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은행들이 규제개혁에 ‘반신반의’하는 눈치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할 것이란 우려 탓이다. 금융권 고위 인사의 말을 곱씹어 볼 시기다. “금융은 노동이나 교육처럼 개혁한다고 해서 곧바로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지. 곧바로 사람들이 열광하고 눈에 보이게 하면 그건 개혁이 아니고 오히려 규제야. 수수료를 내리는 게 금융개혁의 본질처럼 여겨지고 청년 일자리 창출에 일조하는 게 금융개혁의 할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이미 개혁은 물 건너간 거다.”
2015.11.23 I 최정희 기자
  • [김영삼 서거]김덕룡 “YS, 제대로 된 평가해주셨으면 생각 간절”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김덕룡 겨레의 숲 공동대표는 23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에 대해, “대한민국의 민주화 시대 개막을 위해서 하늘이 보낸 거목이라고 할까요.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정치인, 요새 정치인이 참 존경을 못 받는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이날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나와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온 몸을 던졌던 대통령,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취임 이후에 여러 개혁정책을 썼던 분으로, 우리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이 조금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대표는 “특유의 낙관적인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두 번째로 국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 국민이 결국은 독재를 이겨낼 것이다 하는 믿음이고, 또 시대의 큰 흐름, 다시 말해서 민주화 시대가 온다는 그런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싸웠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온갖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언제가 제일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에 생명을 걸고 23일간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성격으로 볼 때 도저히 끝낼 것 같지 않은데, 이거 어떻게 큰 사고가 나지 않나, 이런 안타까움이 있었고요. 또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때 저는 형무소에 있었는데, YH사건 때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9호로 제가 구속되었는데요. 감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웠다”고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꼽아달라고 하자, 김 대표는 “독재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는 그런 신념으로 말씀하셨는데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있고요. 그리고 국회의원 제명 당시에, 그때 김 대통령께서는 ‘나는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 두 번 가택연금을 당하셨는데, 그때 ‘인간 김영삼을 가둘 수 있지만 김영삼의 양심은 가둘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며 세 가지를 들었다.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마자 이명박 전 대통령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두 사람 다 김 전 대통령이 발굴했다. 이 외에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정치권으로 이끈 것도 김 전 대통령이다. 인재 발굴 기준을 묻자, 김 대표는 “YS께서는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 아니냐. 좋은 정치를 하려면 좋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요. 그럼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능력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거짓말 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 약속 지키는 것에 아주 집착하셨어요. 특히 작은 것 같지만 시간 약속, 항시 약속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그런 일을 하셨다”고 강조했다.
2015.11.23 I 선상원 기자
문재인 김현철 위로, 김영삼 장남은 잠시 빈소 비워
  • 문재인 김현철 위로, 김영삼 장남은 잠시 빈소 비워
  • [이데일리 e뉴스팀] 김영삼 장남 은철씨가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빈소를 비운 걸로 알려진 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거물급 정치인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김영삼 전 대통령은 22일 오전 0시22분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서거했다. 유족 측에 따르면 22일 밤 9시30분 기준으로 조문객은 3000명을 넘어섰고 조화는 190여개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차남 현철씨는 새벽부터 빈소 준비에 직접 나서며 차분하게 조문객을 맞았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손명순 여사는 오전 10시가 넘어 장례식장을 찾아 빈소를 지키다 건강상의 이유로 오후 4시쯤 자택으로 돌아갔다. 김영삼 장남 은철씨도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빈소를 비웠다고 관계자들은 전언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빈소를 지키고 있는 김현철 씨를 위로했다. 문재인 대표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 철학을 우리가 다시 기리고 계승할 때”라며 “이제 우리 후배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더 잘해야겠다”고 강조했다.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는 22~26일 국가장으로 치러진다. 23일에는 대표분향소가 국회에 차려지고 전국 시·도별 분향소도 설치돼 일반인의 조문을 받을 예정이다. 국가장 마지막 날인 26일에는 국회에서 영결식이 열리고 서울현충원 제3장군모역에서 안장식이 진행된다.
2015.11.23 I 정재호 기자
  • [오늘의 이데일리 신문]"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이데일리 양희동 기자] 다음은 23일자 이데일리 신문 주요 뉴스다.△1면-“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꼼수를 넘어선 ‘상식의 한국야구’-朴대통령 “美·中, 남중국해 非군사 공약 지켜야”△종합-최연소·최다선…불세출 ‘정치9단’-장례는 ‘국가장’으로…26일 현충원 안장-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국민답합 계기돼야-대형마트 규제, ‘프랑스 교훈’ 명심해야△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군사정부 독재시대 종식-집권 5년 ‘7%대 고도성장’이끌었지만 임기말 IMF구제금융 아들 비리 오점△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민주화 동지이자 정치 라이벌…‘양김시대’저물다-슬픔에 잠긴 상도동계, 가장 먼저 달려온 김무성 “나는 정치적 아들”△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금융실명제로 경제 개혁…OECD가입 숙원도 이뤄내-정보통신부 확대 개편 ‘IT코리아’디딤돌 놔△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朴대통령 “깊은 슬픔…예우 갖춰 장례 준비”-외신도 앞다퉈 보도 “한국 군정 끝낸 대통령…부정·부패도 막아”△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정주영과 대선후보 대립각…이건희 “정치는 4류”발언 곤욕-“먹으면 키 안커요” 키 성장 제품 허위·과장 광고△금융-위기의 은행 ‘스마트&슬림’ 승부수-삼성페이만 있냐? 00페이도 있다!-BC카드, 가맹점주용 대출상품 만든다△산업&기업-터보심장 단 현대·기아차, 美·中공략 ‘파워 업’-보는 통화시대 활짝 VoLTE 완전 상용화-이한주 한국호스트웨이 사장“후배 스타트업 해외진출의 지원군 될것”-현대모비스 차세대 친환경車 브레이크 개발-삼성·LG ‘美 블프’할인공세△생활산업-감자칩 만들고 매장 리모델링…성장둔화 대형마트 ‘생존 몸부림’-‘커피, 너마저…’ 고민에 빠진 남양유업-G마켓 간식 매출 살펴보니 ‘길거리 간식’이젠 시키거나 해먹거나△중소기업·벤처-삼성·LG전자, 공공구매 시장 ‘중기 경쟁제품’영역 넘보나-후계경쟁서 밀린 제약업계 오너2세 활발한 주식 매매-중기협동조합, 구조조정 ‘새판짜기’본격화△문화&스포츠-황석영 “내 신작, 전인권 ‘사랑한 후에’ 닮았죠”-도서정가제 1년, 대형서점 웃고 독자는 뿔나고△스포츠-‘KLPGA 퀸 오브 퀸’ 조윤지 “내년 톱2 도전”-약하다던 마운드, 알고 보니 ‘넘사벽’-구자철 시즌 3호골-이보미 다이오제지 오픈 V△화통토크-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 “이커머스 위기? 모바일 못 잡는 백화점·마트가 진짜 위험”-신현성의 승부수 ‘슈퍼배송’△총장과의 대화-천장호 광운대 총장 “ICT기반 위 소프트웨어 특성화대학으로 도약할 것”△스톡마켓-주간증시전망, 연쇄테러 공포에…‘게걸음’보일듯-첫돌 맞은 ETN…‘틈새시장 공략’먹혔다-펀드워치, 파리 테러로 서방과 화해무드 러시아 펀드 2주만에 미소△마켓인-PE하우스 탐방/KTB PE ‘실트론 실패’꼬리표 떼고, 투자명가 부활 꿈꾼다-현대백화점 “인수 없던 일로” 동부익스프레스 매각 무산-로젠택배 M&A매물로 나와-국내 기업공개시장 ‘찬바람’△글로벌마켓-둥밍주 거리전기CEO, 싱글맘 영업녀 연매출 25조 신화 쓰다-‘225년 자존심’ 중국에 판 영국-전세계 反테러 공조에도…끊이지 않는 총성-올 디폴트기업 넷 중 한곳 ‘에너지’△피플&사람들-최태원 회장 “실패를 먹고 살아야 창업 성공”-최양희 장관 ‘스타트업 네이션즈상’ 창조혁신센터로 창업 활성화 공로-구자용 동부팜한농 대표-‘시각장애 변호사 1호’ 김재왕씨 “보이지 않아도 약자 도울 수 있어”-박삼구 회장, 조성진 응원하러 일본行-40년 장기거래 우수고객 초청 국민은행 ‘건강&행복 콘서트’△오피니언-이코노미칼럼 ‘코스닥 150선물’상장에 거는 기대-데스크의 눈, 대기업發 구조조정 성과 ‘눈앞’-기자수첩, ‘프리미어12’ 패자 일본이 부러운 이유△사회-서해5도 포성 끊겼지만…갈수록 교묘해지는 北도발-총장선출 둘러싼 힘겨루기…대학가 몸살-여직원 성희롱한 여성 매표원…법원 ‘준공무원 전환 배제 정당“△부동산-시세보다 비싼 아파트도 낙찰…거품 낀 경매시장-워크아웃 졸업 앞둔 금호산업 분양 대박행진…재기 발판 마련-서울~세종 고속도로 주변 ’개발 기대‘ 들썩
2015.11.23 I 양희동 기자
  • [사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국민단합 계기 돼야
  • 우리는 어제 ‘민주화 운동의 큰 별’을 잃었다.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한 주역이다. 비록 국가 부도 사태를 막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주권을 넘긴 ‘실패한 대통령’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재임 중 업적은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다는 평가가 많다. 1954년 최연소(27세) 민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낸 그의 정치 역정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일찍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아 의로운 길을 고집했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직무 정지와 헌정 사상 첫 현역 의원 제명이란 고초를 겪으면서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저항한 신념의 정치인이다. 결국 이 사건은 부마 사태로 이어져 18년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는 단초로 작용했다. 그는 5공 때에는 23일 단식 투쟁 등으로 독재에 맞서며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했고 1993년 14대 대통령에 취임해 군 비밀조직 하나회를 단칼에 척결해 문민정부의 초석을 놓았다. 경제 정의를 실현한 금융실명제와 공직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킨 공직자재산등록제, 지방시대를 연 지방자치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역사바로세우기도 주요 업적이다. 외환위기는 노동법 개정과 부실기업 처리를 극력 저지한 야당과 노조 책임도 작지 않다는 분석이 유력한 만큼 억울한 측면이 있겠지만 정권 말기의 차남 국정 개입 시비는 치명적 실책이었다.이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양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 관계”로 표현했듯이 두 사람은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앙숙이었다. 양김의 화해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인 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병으로 비로소 이뤄진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양김의 화해가 조금 더 일렀다면 민주화도 앞당기고 외환위기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분열상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지금이야말로 양김의 때늦은 화해를 교훈 삼아 국민 통합에 힘쓸 때다.
2015.11.23 I 김민구 기자
  • [미리보는 이데일리 신문]"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이데일리 양희동 기자] 다음은 23일자 이데일리 신문 주요 뉴스다.△1면-“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꼼수를 넘어선 ‘상식의 한국야구’-朴대통령 “美·中, 남중국해 非군사 공약 지켜야”△종합-최연소·최다선…불세출 ‘정치9단’-장례는 ‘국가장’으로…26일 현충원 안장-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국민답합 계기돼야-대형마트 규제, ‘프랑스 교훈’ 명심해야△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군사정부 독재시대 종식-집권 5년 ‘7%대 고도성장’이끌었지만 임기말 IMF구제금융 아들 비리 오점△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민주화 동지이자 정치 라이벌…‘양김시대’저물다-슬픔에 잠긴 상도동계, 가장 먼저 달려온 김무성 “나는 정치적 아들”△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금융실명제로 경제 개혁…OECD가입 숙원도 이뤄내-정보통신부 확대 개편 ‘IT코리아’디딤돌 놔△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朴대통령 “깊은 슬픔…예우 갖춰 장례 준비”-외신도 앞다퉈 보도 “한국 군정 끝낸 대통령…부정·부패도 막아”△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정주영과 대선후보 대립각…이건희 “정치는 4류”발언 곤욕-“먹으면 키 안커요” 키 성장 제품 허위·과장 광고△금융-위기의 은행 ‘스마트&슬림’ 승부수-삼성페이만 있냐? 00페이도 있다!-BC카드, 가맹점주용 대출상품 만든다△산업&기업-터보심장 단 현대·기아차, 美·中공략 ‘파워 업’-보는 통화시대 활짝 VoLTE 완전 상용화-이한주 한국호스트웨이 사장“후배 스타트업 해외진출의 지원군 될것”-현대모비스 차세대 친환경車 브레이크 개발-삼성·LG ‘美 블프’할인공세△생활산업-감자칩 만들고 매장 리모델링…성장둔화 대형마트 ‘생존 몸부림’-‘커피, 너마저…’ 고민에 빠진 남양유업-G마켓 간식 매출 살펴보니 ‘길거리 간식’이젠 시키거나 해먹거나△중소기업·벤처-삼성·LG전자, 공공구매 시장 ‘중기 경쟁제품’영역 넘보나-후계경쟁서 밀린 제약업계 오너2세 활발한 주식 매매-중기협동조합, 구조조정 ‘새판짜기’본격화△문화&스포츠-황석영 “내 신작, 전인권 ‘사랑한 후에’ 닮았죠”-도서정가제 1년, 대형서점 웃고 독자는 뿔나고△스포츠-‘KLPGA 퀸 오브 퀸’ 조윤지 “내년 톱2 도전”-약하다던 마운드, 알고 보니 ‘넘사벽’-구자철 시즌 3호골-이보미 다이오제지 오픈 V△화통토크-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 “이커머스 위기? 모바일 못 잡는 백화점·마트가 진짜 위험”-신현성의 승부수 ‘슈퍼배송’△총장과의 대화-천장호 광운대 총장 “ICT기반 위 소프트웨어 특성화대학으로 도약할 것”△스톡마켓-주간증시전망, 연쇄테러 공포에…‘게걸음’보일듯-첫돌 맞은 ETN…‘틈새시장 공략’먹혔다-펀드워치, 파리 테러로 서방과 화해무드 러시아 펀드 2주만에 미소△마켓인-PE하우스 탐방/KTB PE ‘실트론 실패’꼬리표 떼고, 투자명가 부활 꿈꾼다-현대백화점 “인수 없던 일로” 동부익스프레스 매각 무산-로젠택배 M&A매물로 나와-국내 기업공개시장 ‘찬바람’△글로벌마켓-둥밍주 거리전기CEO, 싱글맘 영업녀 연매출 25조 신화 쓰다-‘225년 자존심’ 중국에 판 영국-전세계 反테러 공조에도…끊이지 않는 총성-올 디폴트기업 넷 중 한곳 ‘에너지’△피플&사람들-최태원 회장 “실패를 먹고 살아야 창업 성공”-최양희 장관 ‘스타트업 네이션즈상’ 창조혁신센터로 창업 활성화 공로-구자용 동부팜한농 대표-‘시각장애 변호사 1호’ 김재왕씨 “보이지 않아도 약자 도울 수 있어”-박삼구 회장, 조성진 응원하러 일본行-40년 장기거래 우수고객 초청 국민은행 ‘건강&행복 콘서트’△오피니언-이코노미칼럼 ‘코스닥 150선물’상장에 거는 기대-데스크의 눈, 대기업發 구조조정 성과 ‘눈앞’-기자수첩, ‘프리미어12’ 패자 일본이 부러운 이유△사회-서해5도 포성 끊겼지만…갈수록 교묘해지는 北도발-총장선출 둘러싼 힘겨루기…대학가 몸살-여직원 성희롱한 여성 매표원…법원 ‘준공무원 전환 배제 정당“△부동산-시세보다 비싼 아파트도 낙찰…거품 낀 경매시장-워크아웃 졸업 앞둔 금호산업 분양 대박행진…재기 발판 마련-서울~세종 고속도로 주변 ‘개발 기대’ 들썩
2015.11.22 I 양희동 기자
  • [김영삼 서거]YS 빈소 새벽부터 조문 행렬
  • [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는 새벽부터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22일 김 전 대통령 유족 측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오후 6시 현재까지 2600명가량의 문상객이 방문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오후 들면서 조문객이 빠르게 늘고 있어, 첫날에만 수천명이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현직 정치인이나 과거에 함께 정치했던 정계 인사들이 주로 빈소를 찾았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그동안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오신 김영삼 전 대통령께 합당한 예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가장으로 정부가 최선을 다해 모시고자 한다”고 말했다. 황 총리와 최경환 경제부총리, 황우여 사회부총리,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등은 김 전 대통령의 영정에 조화를 바치며 추모했다.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안철수 의원 등 야당 정치인도 빈소를 찾았다. 문 대표와 안 의원은 “온 국민과 함께 애도합니다. 이 땅에 민주화의 역사를 만든 큰 별이셨습니다”, “고인께서 일생 헌신하신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헌신은 국민들 가슴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라고 방명록에 각각 글을 남겼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휠체어를 타고 방문해 “다른 사람은 못하는 일을 한 신념의 분”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이어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으로 민주화를 이룬 분”이라며 “어떤 어려움에도 신념을 끝끝내 관철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어려운 시절을 견디면서 민주화의 큰길을 개척했던 큰 지도자라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며 “김 전 대통령은 야당과 민주화 운동에 큰 지도자였다. 정말 우리 사회의 큰 별이 지셨다”고 애도했다. 서울시는 23일 정오부터 서울광장에 김 전 대통령 분향소를 설치해 일반인 조문이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다. 김 전 대통령과 각별한 정치 인연을 맺은 인사들도 잇따라 빈소를 방문했다. ‘YS의 오른팔’로 불렸던 최형우 전 의원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빈소를 찾아 영정 사진 앞에서 오열했다.민주산악회 홍보위원장 출신인 정진일(73)씨는 “군사정권을 뿌리 뽑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민주화의 영웅”이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사나이답게 밀고 나간 대통령”이라고 회고했다.대통령과 인연이 없는 일반 시민들도 안타까움을 표하며 빈소를 찾았다. 아들과 함께 빈소를 찾은 박장휘(61·대구)씨는 “서울에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20~30대 시절 정치인 김영삼에 대한 추억이 생각나 오게 됐다”며 “유신 시절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산행을 갔다가 비보를 듣고 등산복 차림으로 빈소를 찾은 최병일(57)씨는 “대통령 때보다는 유신 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던 기억이 나서 빈소를 찾았다”면서도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은 YS만이 할 수 있었던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중국 언론 "개혁 일으킨 대통령"☞ [김영삼 서거]방송사, 뉴스 특보 체제·일부 예능 결방☞ [김영삼 서거] 서울시, 서울광장에 내일(23일) 분향소 설치☞ [김영삼 서거]"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 [김영삼 서거]YS가 남긴 어록은
2015.11.22 I 최훈길 기자
필생의 라이벌 '양 김' 역사속으로 영면하다
  • [김영삼 서거]필생의 라이벌 '양 김' 역사속으로 영면하다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대중 전 대통령(DJ), 두 정치 거목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2009년 DJ에 이어 2015년 11월 22일 새벽 YS 마저 영면에 들었다.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며 반세기 넘게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양김(兩金) 시대’가 완전히 저물게 된 것이다.‘양김’으로 일컬어져온 두 전직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에서는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대통령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영원한 ‘맞수’이자 ‘경쟁자’였다. YS가 스스로 생전에 DJ와의 사이를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로 표현했던 것처럼, 필생의 라이벌이었다.◇출발점 달랐지만, 40대 기수론 제창 후 지도자로 성장 = 정계 최대 맞수였지만 출발점은 확연히 달랐다. DJ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한 뒤 사업을 하다 정계에 뛰어든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1954년 선거에서 낙선한 뒤 1961년 4·19혁명으로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지만 5ㆍ16군사 쿠데타로 당선 3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고 1963년 6대 총선에서야 비로소 정치권에 입문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부터 순탄치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상도동계 1세대로 불리는 최형우 전 내무장관이 22일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반면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YS는 1951년 당시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출신 지역과 정치적 배경이 달랐던 만큼 두 사람은 야당과 여당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YS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한 4사5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하면서 DJ와 한 배를 탄다. 야당인 신한민주당에서 YS와 DJ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치 보폭을 넓혀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때 YS과 DJ가 처음으로 맞붙었다. YS 승리였다. 이후 YS는 원내총무를 5차례 맡으며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 성장했다.YS가 국민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것은 1970년 9월 제창한 ‘40대 기수론’부터다. 당시 신민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한 후 깊은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이 때 40대의 YS가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DJ도 1971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결과는 DJ 승리였다. 1차 후보 경선 투표에서 앞선 YS가 2차 결선투표에서 역전패당한 것이다. 결국 DJ가 대선에 나갔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100만표 차이로 패했다. DJ가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사건을 겪고 유신체제 하에서 정치활동이 금지되면서 YS가 유신 독재에 맞서 싸웠다. ◇DJ 정치활동 금지로, YS가 유신독재에 온 몸으로 맞서 =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유진산 총재가 타계하자 47세에 최연소로 제1야당 총재에 올랐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며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이끌었다. 1979년에는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하게 됐고,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까지 당했다. 부마사태에 이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종언을 고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YS와 DJ, 박 정권 아래서 정치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김종필(JP) 자민련 전 총재까지 함께한 본격적인 3김 시대가 열렸다. 그것도 잠시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로 정치활동이 다시 금지됐다. DJ는 신군부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DJ가 1985년 귀국할 때까지 국내에서 신군부와 맞선 사람은 YS이었다.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군부 강압통치에 숨죽여있던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7년 6·10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다.YS와 DJ 모두 대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여당 후보이던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됐다. 훗날 DJ는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YS DJ 연달아 대통령직 올라… JP, 내각제 개헌 고리로 손 잡아 = 1990년을 기점으로 YS는 3당 합당을 통한 여당의 길로, DJ는 야당의 길을 걷는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던 YS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DJ를 누르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숙명의 라이벌인 DJ를 이긴 것이다. 그 후 DJ는 1997년에 YS가 초래한 IMF 외환위기를 기회로 삼아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YS와 DJ 모두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두 사람은 1990년 이후 2009년 DJ가 눈을 감을 때까지 대립하고 반목했다. DJ는 3당 합당 이후 어제의 동지였던 YS를 공격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리며 DJ를 비난했다. YS는 보수세력, DJ는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DJ가 서거하던 2009년까지 이어졌다. YS가 그 해 8월 DJ를 전격 찾아가 문병한 뒤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이제 3김 중 남은 사람은 JP 뿐이다. JP는 YS가 운명을 달리하자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제외하고는 맨 처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JP는 YS와 3당 합당을 함께 했고 DJ와는 1997년 DJP연대로 정권교체에 동참했다. 공통분모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3당 합당의 명분도 내각제 개헌이었고 DJ와 손을 잡은 것도 내각제 개헌 추진이었다. JP가 그토록 열망한 내각제 개헌은 다 무위로 그쳤다. 이날 빈소를 찾은 JP는 “내가 해준 것 아무것도 없지만 국회에서 제명할 때 난 반대했거든. 다 찬성을 했는데, 근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걸 아셨는데, 나한테 아무 말도 뭐라고 안했어. (YS가) 하신 말씀 많이 있는데, 그중에 잊혀지지 것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유형 무형으로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내 신념 꺾지 못하고 역사는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신뢰의 분이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신뢰를 끝끝내 관철하신 분이야”라고 회고했다. 상주인 김 전 의장이 “오래 사셔야 된다”고 하자, JP는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이 나이되면 오래 사는 것도 사회의 짐이요. 적당한 때 불러 주시길 바래”라고 답했다. ▶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 [김영삼 서거]경총 "금융실명제 도입 등 경제선진화 기틀 마련"☞ [김영삼 서거]무역협회 "경제강국 도약 초석 놓으신 분"☞ [김영삼 서거]염수정 추기경 "민주화 위해 평생 헌신했다"
2015.11.22 I 선상원 기자
승부사 YS,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 [김영삼 서거]승부사 YS,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40년 동난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한 ‘3김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 중 한 거목이 또 쓰러졌다. 김 전 대통령(YS)은 27세이던 지난 1954년 3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최다선 기록은 우리 의정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YS는 결단의 정치인이다. 결단과 소신, 용기를 빼놓고는 YS를 설명할 수 없다. ◇헌정사 최초 의원직 제명, “영원히 사는 길 택할 것”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여놓고 대통령의 꿈을 키운 YS는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여당 의원 시절도 잠시,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결연히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후 1991년 3당 합당 때까지 30여년을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화 투사로 살았다.야당을 회생시킨 1970년 ‘40대 기수론’도 YS가 먼저 치고 나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했던 신민당은 3선 개헌안마저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이때 YS는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이철승 전 헌정회 회장이 경선 참여를 선언해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에 오른 뒤 1979년 5월 다시 총재에 복귀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이 시작됐고 결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와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이 빌미가 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의원직 제명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YS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줄기찬 반 유신투쟁에 박정희 정권은 10·26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중심의 신군부는 1980년 5·17조치로 강압 통치를 이어갔다. YS는 기나 긴 자택 연금조치를 당했다. YS는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식음을 전폐하고 무려 23일 동안이나 전개했다. 군부독재에 균열을 낸 YS는 이후 DJ와 함께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6~1987년 직선제 개헌 운동 및 6·10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6월 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3당 합당 결단1990년 1월 3당 합당은 승부사라는 YS 별명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사건이다. YS는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부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여당의 2인자로 변신해 2년 만인 92년 5월 민자당 후보로 선출돼 같은 해 대권까지 거머줬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문민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면서 중단 없는 변화와 개혁을 천명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31년 만에 대한민국에 문민시대를 연 것이다.취임하자마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당시 하룻밤 사이에 떨어진 별이 50개로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1993년 8월에는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고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12·12 쿠데타와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뤄졌다.◇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손학규 등 정계 발탁 YS의 결단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덕분에 집권 초에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 정권 말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되자 하락세를 걷게 된다. 급기야 1997년 12월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를 맞았다.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오랜 군사통치의 종지부 찍는다는 건, 하나회 청산이라는 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융실명제도 여러 평가 있지만 역량 없으면 안된다”고 YS의 공적을 평가했다. 빈소를 찾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역대 정부 중에 제일 효율적으로 단시간 내에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되시고 나서 얼마나 개혁적인 일을 했는지는 역사가 나중에 증명할 거”라고 화답했다. 결단의 정치인답게 YS는 용인술에도 능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YS가 발탁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당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정의화 국회의장도 YS 사람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민중당을 결성해 활동하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을 각각 영입해 의원으로 만든 것도 YS다.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 전 의장,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상도동계는 YS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영원한 동지들이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불세출의 '정치9단' YS가 남긴 공과 과☞ [김영삼 서거]전두환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 [김영삼 서거]행자부 "유족 뜻 전적으로 존중..'기독교 장례' 반영"(일문일답)☞ [김영삼 서거]국가장 확정..26일 발인, 장지 현충원(종합)
2015.11.22 I 선상원 기자
 김영삼 前 대통령이 남긴 어록은...
  • [카드뉴스] 김영삼 前 대통령이 남긴 어록은...
  • [이데일리 e뉴스 김민화 기자]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선 굵은 정치만큼이나 ‘촌철살인’과도 같은 어록들로도 유명하다.“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1979년 박정희 정권이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을 폭력진압하자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고 발표한 성명서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제명은 부마(釜馬)항쟁을 촉발시키고 유신을 끝내는 전환점을 만들어냈다.“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1990년 김 전 대통령은 30여년의 야당생활을 접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함께 자신의 통일민주당(민주당)을 합당하는 ‘3당합당’을 결행했다. 당시 이 때문에 야권으로부터 ‘변절자’란 비판을 받고 ‘대통령병 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구국의 결단’이란 심정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해 1992년 14대 대선에서 승리, 1993년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초석을 놨다.대도무문(大道無門)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며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다.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대도무문,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고 말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끊임없는 열망과 원칙을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이 친필로 ‘대도무문’을 쓰는 장면이 언론에 자주 연출되기도 했다.“민주화의 길은 산행과 같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축적되던 1987년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백m 전방에 와 있는 셈”라며 머지않아 민주화가 달성될 것으로 예측했고, 그해 6월항쟁으로 국민적 열망은 표출됐다.“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1993년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다.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겠다”고 한 선언은 공직자 비리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취임 초기 정치개혁으로 이어졌다.“김대중 대통령은 네로와 같은 폭군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끈 ‘양대 거목’으로 정치적 동지이자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남북교류를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네로와 같은 폭군”이라고 비난했고, 김 대통령이 그해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이슈추적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관련포토갤러리 ◀☞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사진 더보기
2015.11.22 I 김민화 기자
  • [김영삼 서거]"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
  •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각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특히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재임 시절부터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거나 알고 지냈던 각계 인사들은 잇따라 깊은 슬픔과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 뜻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면서 “유가족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같은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주유엔 한국대표부에 전달한 조문 메시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슬픔을 금치 못하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청와대 의전수석과 외교안보 수석을 지낸 반 총장은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한양대 특임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앞장선 분은 김 전 대통령밖에 없다”며 “회의 때문에 당장 한국에 갈 수 없어 미안하다. 한국에 가면 찾아 뵙겠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킨 유일한 마지막 인물이 이제 사라졌다”며 애도했다이 전 대통령은 빈소 방문 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새벽에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로서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세웠다. 취임 후에는 여러 개혁적 조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한층 심화시키고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상주(喪主)’를 자처했다. 김 대표는 “각하를 모시던 제자들이 모두 상주”라며 5일장 내내 상주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이 땅의 ‘민주화 역사’를 만들다시피 하셨는데 굉장히 안타깝다”며 “(YS의 어록인)‘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면서…”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독일 방문 중인 정의화 국회의장도 “대한민국사의 큰 별이자 민주화의 주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심정”이라며 “재임 중 문민정치, 금융실명제, 세계화와 같은 개혁의 시대를 열어 대한민국을 새로운 반석 위에 올려놨다”고 강조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권양숙 여사도 각각 보도자료 등 서면으로 애도를 표했다. 이희호 여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남편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며 “우리 국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양숙 여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과 문민정부 출범을 통해 민주주의의 길을 넓힌 지도자”라며 “고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도 영향을 끼친 분”이었다고 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반기문 “민주화 선봉에선 유일한 분”☞ [김영삼 서거]정의화 "대한민국 새로운 반석위에 올린 정치 선구자"☞ [김영삼 서거]권양숙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도 영향"☞ [김영삼 서거]박원순 “민주 헌정의 기초 닦으셨던 분”☞ [김영삼 서거]황교안 "국가장으로 최선 다해 모실 것"☞ [김영삼 서거]반기문 "많은 가르침…공직생활 밑거름 됐다"☞ [김영삼 서거]"큰 별이 가셨다" 슬픔에 잠긴 상도동계
2015.11.22 I 장영은 기자
  • [김영삼 서거]YS가 남긴 어록은
  • [이데일리 김진우 기자]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선 굵은 정치만큼이나 ‘촌철살인’과도 같은 어록들로도 유명하다.1979년 박정희 정권이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을 폭력진압하자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고 발표한 성명서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제명은 부마(釜馬)항쟁을 촉발시키고 유신을 끝내는 전환점을 만들어냈다.“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1990년 김 전 대통령은 30여년의 야당생활을 접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함께 자신의 통일민주당(민주당)을 합당하는 ‘3당합당’을 결행했다. 당시 이 때문에 야권으로부터 ‘변절자’란 비판을 받고 ‘대통령병 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구국의 결단’이란 심정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해 1992년 14대 대선에서 승리, 1993년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초석을 놨다.대도무문(大道無門).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며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다.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대도무문,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고 말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끊임없는 열망과 원칙을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이 친필로 ‘대도무문’을 쓰는 장면이 언론에 자주 연출되기도 했다.“민주화의 길은 산행과 같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축적되던 1987년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백m 전방에 와 있는 셈”라며 머지않아 민주화가 달성될 것으로 예측했고, 그해 6월항쟁으로 국민적 열망은 표출됐다.“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1993년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다.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겠다”고 한 선언은 공직자 비리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취임 초기 정치개혁으로 이어졌다.“김대중 대통령은 네로와 같은 폭군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끈 ‘양대 거목’으로 정치적 동지이자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남북교류를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네로와 같은 폭군”이라고 비난했고, 김 대통령이 그해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반기문 “민주화 선봉에선 유일한 분”☞ [김영삼 서거]정의화 "대한민국 새로운 반석위에 올린 정치 선구자"☞ [김영삼 서거]IMF 외환위기에 빛바랜 YS노믹스☞ [김영삼 서거]권양숙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도 영향"☞ [김영삼 서거]원유철 "민주화 이뤄낸 YS, 국민들에 영원히 기억될 것"
2015.11.22 I 김진우 기자
굴곡진 현대사 '민주화의 큰 산' 지다(종합)
  • [김영삼 서거]굴곡진 현대사 '민주화의 큰 산' 지다(종합)
  •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민주화 운동의 ‘큰 산’이 스러졌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을 지낸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22일 0시22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했다가 상태가 악화됐고,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서거했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전했다.서울대병원 측이 밝힌 공식 사인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이다. 향년 88세.김 전 대통령의 삶은 말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 현대사의 거인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화투쟁의 최전선에 섰고,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최초로 문민시대를 열어 젖혔으며, 임기 말에는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를 부르기도 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최연소(27세) 국회의원, 9선 국회의원, 3번의 야당 총수, 문민정부 대통령 등을 역임했다.특히 임기 초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은 우리나라 전반의 시스템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9단’ 김 전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던 개혁이라는 시각도 많다.김 전 대통령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필생의 라이벌’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둘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관계”로 불렸을 정도로 뗴려야 뗄 수 없었다. 민주화 투쟁 때는 한마음으로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권력을 앞에 두고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맞수’였다.이로써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온 ‘3김’ 중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만 남게 됐다. 사실상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한 페이지가 넘어가게 된 것이다.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대통령의 빈소는 이날 하루종일 조문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김영삼 대통령 기념사업회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등 상도동계 인사들은 차남인 현철씨(고려대 교수)와 함께 상주를 자처했다.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도 서거 소식을 접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 AP통신 등 주요 외신들도 긴급기사로 “30여년에 걸친 군정(軍政)을 종식한 첫 대통령”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인물” 등으로 일제히 보도했다.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國家葬) 형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지는 현충원, 발인은 26일이다. 국가장 절차에 따라 정부는 빈소를 설치·운영하며 운구, 영결식, 안장식을 주관한다.
2015.11.22 I 김정남 기자
  • [김영삼 서거]문재인 "YS 민주주의 정치철학 우리몫"(종합)
  • [이데일리 김진우 한정선 기자]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이 땅의 ‘민주화 역사’를 만들다시피 하셨는데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했다.문 대표는 이날 새정치연합 지도부와 함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이같이 말하고 “(YS의 어록인)‘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면서…”라고 했다.문 대표는 “(1971년 신민당 대선 경선에서)40대 기수론 때 (김 전 대통령이)김대중 후보에게 패한 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연설을 하는데 ‘김대중 후보 승리는 바로 나의 승리’라고 했는데 엄청났다”며 “부산 시민들이 엄청 지지했다. 그게 우리나라 야당사에서 상당히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문희상 전 비대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YS 지지표명을 하면서 연설했었다. 그땐 또 DJ가 (YS) 손을 들어줬다”며 “대단한 정치인들이다. 서로 싫어하면서 서로 필요하면 대의명분으로 서로 도왔다”고 말했다.당 ‘민주60년 기념사업추진회’ 위원장인 전병헌 최고위원은 “야당 60년사를 스크랩하며 김영삼 총재 시절을 얘기하는데, 당시에 야당이 그래도 국민적 기대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승복의 문화 덕분이었다”며 “오늘날에는 야당에 승복의 문화가 없어져버렸다”고 고인을 기리며 아쉬워했다.문 대표가 “우리 당 창당 60주년 기념행사때도 다들 모시고 싶었다”고 거들자, 상주인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원 소장은 “바쁘신데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감사를 표했다.문 대표는 조문을 마친 후 취재진과 만나 “(김 전 대통령이)이 땅의 민주화 역사를 만드신 아주 큰 별이셨다”며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하나회 척결로 문민정치를 확립하고, 금융실명제로 경제정의를 세우고, 공직자 재산 등록 신고로 공직문화에 새로운 기풍을 만들어내셨다”고 회고했다.문 대표는 “이런 업적들은 길이길이 역사 속에서 빛날 것으로 생각한다”며 “지금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셨던 김 전 대통령이 떠나신 것이 너무나 아쉽다”고 했다.그러면서 김 전 대통령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했던 말을 다시 거론하며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 철학을 우리가 다시 기리고 계승할 때”라며 “이제 우리 후배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힘줘 말했다.당초 문 대표는 이날 강원도 춘천을 방문해 자신의 평화구상인 ‘한반도 신(新) 경제구상’을 구체화하고 정책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김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현안 일정을 취소했다. 문 대표는 문 전 비대위원장, 전 최고위원, 이종걸 원내대표, 정청래 최고위원, 최재성 총무본부장 등 지도부와 함께 조문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이명박 “민주주의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종합)☞ [김영삼 서거]임시국무회의 소집..국가장 방안 심의☞ [김영삼 서거]朴대통령 "깊은 애도..유가족에 심심한 위로"(종합)☞ [김영삼 서거]박희태 "뜨거운 포용력 있던 '정치 대인'"☞ [김영삼 서거]IMF 구제금융 신청 18년째 되는날 영면
2015.11.22 I 김진우 기자
  • [김영삼 서거]문재인 "YS 민주주의 정치철학 우리 몫"
  • [이데일리 김진우 한정선 기자]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이 땅의 ‘민주화 역사’를 만들다시피 하셨는데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했다.문 대표는 이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이같이 말하고 “(YS의 어록인)‘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면서…”라고 했다.문 대표는 “(1971년 신민당 대선 경선에서)40대 기수론 때 (김 전 대통령이)김대중 후보에게 패한 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연설을 하는데 ‘김대중 후보 승리는 바로 나의 승리’라고 했는데 엄청났다”며 “부산 시민들이 엄청 지지했다. 그게 우리나라 야당사에서 상당히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당초 문 대표는 이날 강원도 춘천을 방문해 자신의 평화구상인 ‘한반도 신(新) 경제구상’을 구체화하고 정책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김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현안 일정을 취소했다.▶ 관련이슈추적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임시국무회의 소집..국가장 방안 심의☞ [김영삼 서거]이명박 “민주주의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종합)☞ [김영삼 서거]朴대통령 "깊은 애도..유가족에 심심한 위로"(종합)☞ [김영삼 서거]박희태 "뜨거운 포용력 있던 '정치 대인'"☞ [김영삼 서거]정동영 "민주화 선봉 지도자..타계 안타깝다"
2015.11.22 I 김진우 기자
YS '성공한 민주화투사' vs '실패한 대통령'
  • [김영삼 서거]YS '성공한 민주화투사' vs '실패한 대통령'
  • 지난해 병상에서의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김현철씨 페이스북[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거목 중 거목이었다. 향년 88세.거산(巨山) 김 전 대통령의 생애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발언으로 요약된다. 그만큼 그의 정치인생은 민주화 투사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그 과정에서 가택연금, 의원직 제명, 단식 투쟁 등 험난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그러다가 1993~1998년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는 족적을 남겼다.다만 우리나라 민주화에 남긴 깊은 발자국과는 달리 임기 말 외환위기를 초래해 시련을 겪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자신의 책상 앞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붙여놓고 공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김 전 대통령은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해 주로 정치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1951년 졸업 이후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1954년에는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거제에서 만 25세 나이로 최연소 당선됐다.김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3선 개헌을 추진한 이승만정권에 반발해 자유당을 탈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때부터 사실상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4대 총선에서는 낙선했지만 5대 총선 때 재기했고, 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1970년대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함께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1974년 신민당 총재에 오른 뒤 강경 투쟁을 주도했고, 그 여파로 1979년 의원직을 강제 제명 당하기에 이른다. 1980년 5월에는 가택연금도 당하는 등 모진 정치적 박해를 겪었다.김 전 대통령은 1981년 가택연금이 풀린 이후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이후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끄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DJ와 후보단일화 협상에 실패한 것은 민주화 진영에 오점으로 남았다.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여론에도 두 인사는 모두 대선에 출마했고, 김 전 대통령은 결국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패했다. 훗날 YS는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DJ도 “내가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했다.이후 김 전 대통령은 민주정의당ㆍ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에서 대선 후보에 올랐고, 1992년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문민시대를 열었다.김 전 대통령은 ‘정치9단’ 답게 전광석화 같은 개혁으로 재임 초 잇단 성과를 냈다. 하나회를 청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정치력이 빛을 발한 업적들로 꼽힌다. 지방자치제도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처음 시작됐다.다만 김 전 대통령에게는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붙는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낙인 찍힌 건 평생의 오점으로 남았다. 김 전 대통령 집권 말기 대기업집단들의 잇단 부도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다.친인척 비리도 김 전 대통령에게는 뼈아픈 사건이다. 김 전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씨는 ‘소통령’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결국 친인척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잇따라 터지면서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김 전 대통령은 ‘상도동계’로 불리는 민주화세력을 이끌며 우리 현대사와 고락을 함께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3김시대’를 이끌던 인사 중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만 남게 됐다. ▶ 관련이슈추적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관련포토갤러리 ◀☞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사진 더보기
2015.11.22 I 김정남 기자
'"더이상 귀여움은 NO!" 폭스바겐, LA오토쇼서 '비틀 듄' 공개
  • '"더이상 귀여움은 NO!" 폭스바겐, LA오토쇼서 '비틀 듄' 공개
  • 폭스바겐 ‘비틀 듄’ [사진=폭스바겐 공식 홈페이지][이데일리 e뉴스 김민정 기자] 폭스바겐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2015 LA 오토쇼’에서 ‘비틀 듄(Beetle Dune)’을 공개했다.‘비틀 듄’은 지난 2000 LA 오토쇼를 통해 처음 콘셉트카로 공개됐다. 하지만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2014년 폭스바겐은 양산 모델에 가까운 모델을 2014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다시 한번 공개했다.이번에 공개된 ‘비틀 듄’은 2014년 공개된 콘셉트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적인 비틀에 비해 지상고는 10mm 높고 스키드 플레이트와 새로운 범퍼, 바디 프로텍터 등이 장착됐다.☞ 폭스바겐 ‘비틀 듄’ 사진 더 보러가기폭스바겐 ‘비틀 듄’ [사진=폭스바겐 공식 홈페이지]실내는 일반 폭스바겐 비틀과 동일하지만 스포츠 시트가 장착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6.3인치 센터 디스플레이를 통해 애플 카플레이와 구글 안드로이드 오토 등을 사용할 수 있다.파워트레인은 1.8리터 4기통 TSI 엔진이 탑재돼 최고출력 170마력, 최대토크 25.4kg.m의 성능을 발휘하며 6단 자동변속기가 장착된다.폭스바겐 ‘비틀 듄’은 쿠페와 컨버터블로 구성됐다. 비틀 듄 쿠페는 2016년 6월, 컨버터블은 11월부터 판매가 시작될 예정이다.▶ 관련포토갤러리 ◀☞ 폭스바겐 `비틀 듄` 사진 더보기☞ 2015 LA 오토쇼 사진 더보기
2015.11.20 I 김민정 기자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