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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1일` 삼청교육대 창설..`넌 생긴 게 범죄자야`[그해 오늘]
-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삼청교육대는 1980년 8월1일 생겼다. 그해 5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가 만들었다. 5·16 쿠데타 직후 군부가 창설한 국토건설단을 참고했다.삼청교육대 훈련 모습.(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81년 1월25일 교육대가 해산하기까지 3만9742명이 삼청교육을 받았다. 군경은 법원 영장없이 6만755명을 체포하고 여기서 교육 대상을 멋대로 분류했다. 깡패 소탕을 명목으로 불량배가 주요한 타깃이었다. 여기에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 사범’ 등도 포함됐다.체포 기준이 모호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긴 자, 장발이나 문신을 한 자, 전두환을 욕한 자 등이 끌려갔다. 장애인과 12세 구두닦이 소년도 있었다. 실제로 교육 대상자 가운데 학생 980명과 여성 319명이 포함됐다. 셋 중에 하나(35.9%)는 전과도 없었다.교육은 육체 훈련이 주를 이뤘다. 목봉 체조, 유격 등 군인을 상대로 이뤄지는 훈련을 민간인에게 적용했다.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가 자행됐다. 구타와 얼차려와 같은 폭력이 만연했다. 민주적 정당성이 전무한 신군부가 꺼낼 카드는 철권 통치밖에 없었다. 삼청교육은 사회악을 없애 국가 기강을 확립하는 게 표면적 명분이었지만, 정권에 반대하는 이를 억압하려는 수단이 컸다.강창성 전 국회의원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는 1973년 보안사령관 재직 시절 하나회 축출을 시도하다가 눈 밖에 나서 예편한 인물이다. 1980년 전두환을 면담하고 정권 장악을 반대했다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2006년 별세하기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보도검열을 거부한 유호 충주 문화방송 사장도 삼청교육을 받았다. 데모하다 끌려간 대학생도 다수였다.삼청교육대 입소자들.(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교육을 마친 이후에는 전과자 취급을 받았다. 퇴소자는 경찰서에 기록이 넘어가고, 주민등록 등본에는 삼청교육대 이력이 담겼으며, 전출입할 때도 감시 대상으로 분류됐다. 경찰은 1982~1988년 퇴소자 기록을 범죄 수사에 활용했다. 삼청교육이 범죄 예방에 효과를 거뒀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강력범죄는 삼청교육대가 생기기 전후인 1970년대보다 1980년대 더 늘었다.1988년 국정감사에서 교육 과정에서 45명이 사망한 사실이 드러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훗날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까지 합하면 339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는 국방부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2007년 삼청교육대 설치는 불법이고, 교육과정에서 인권을 짓밟은 사실을 확인했다.
- [사사건건]“더이상 빚쟁이 되기 싫어”…자영업자들의 성토
-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에 접어든 것도 잠시,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수 증가에 따라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됐습니다. 지난 18일부터 방역패스(접종증명·음성확인) 적용, 영업시간 제한·사적모임 인원 4인 제한 등을 골자로 한 방역지침이 강화되자 생계에 직격탄을 맞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거리로 나와 단체행동에 나섰습니다. 일부 자영업자들은 정부의 방역 지침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모양새입니다. 이번 주 키워드는 △광화문서 자영업자 생존권 결의대회 △전태일 열사 모친 41년 만에 명예회복 등 △장애인단체 지하철 기습시위 등입니다.정부의 방역지침에 반발한 ‘코로나19 대응 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가 22일 서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총궐기대회를 열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방역패스·영업제한 철폐”…생업 제치고 광화문에 모여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자대위)와 소상공인연합회는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소상공인·자영업자 생존권 결의대회’를 열고 “방역패스와 영업시간 제한 정책을 철회하고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집회 장소 주변은 경찰 14개 부대 800여명이 배치됐으며, 버스와 펜스로 둘러싸여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는데요. 감염병예방법에 따른 집회 최대 허가 인원인 299명을 넘어서자, 막아서는 경찰과 집회에 참여하려는 자영업자들 간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한참 영업을 해야 할 시간에 거리로 나온 식당, 주유소, 미용실, PC카페, 꽃집 등 사장님들은 “더이상 빚쟁이가 되기 싫다”, “자영업자만 죄인이냐”며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광화문에 모인 자영업자 약 300명은 △소상공인·자영업자 생존권 보장 △방역패스 철회 △백신접종 완료자 대상 영업시간 제한 철폐 △소상공인·자영업자 직접 지원 및 손실보상금 확대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 반대 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이 담긴 항의 서한을 정부에 전달했습니다.이들은 이번 거리두기 적용기간인 내년 1월 2일 이후에도 방역방침이 연장된다면 다시 총궐기 대회를 열겠다는 방침입니다.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의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21일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이소선 여사의 무죄 선고가 내려진 뒤 아들 전태삼(오른쪽 셋째)씨가 기자회견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이소현 기자)◇‘계엄법 위반’ 故 이소선 여사 41년 만에 ‘무죄’…윤석열 장모, 징역 1년 선고이번 주 법정에서 선고가 잇따랐습니다. 1980년 노동운동을 벌이다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는 재심에서 4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홍순욱 부장판사는 지난 21일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이소선 여사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해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날 선고는 1분 만에 마무리됐는데요. 뒤늦게 도착해 법정 밖에서 취재진으로부터 재판부의 무죄 선고를 전해들은 차남 전태삼(71)씨는 “계엄군이 왜 어머니를 전국에 지명수배하고 군사재판을 했는지에 대한 한마디 언급 없이 1분여 만에 선고가 끝나 아쉽다”며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전태일 재단 등 시민단체는 41년 만에 이뤄진 이 여사의 명예회복에 “늦었지만,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이어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 동창생을 감금하고 가혹행위를 하며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명은 지난 21일 1심 재판에서 징역 3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은 살인의 고의성이 없었고, 보복의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피해자가 사망 무렵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위급한 상황임을 인식했어도 피해자를 화장실에서 꺼내거나, 결박한 타이를 풀어주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며 살인의 고의성을 인정했습니다.또 윤석열 대선후보의 장모 최모(74)씨가 땅 매입 과정에서 통장 잔고증명 위조 혐의로 지난 23일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위조한 잔고 증명서의 액수가 거액이고 수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범행하고 이 잔고증명서를 증거로 제출해 재판 공정성을 저해하려 했다”며 “차명으로 부동산을 매입해 상당한 이익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최씨는 법정 구속을 면했는데요. 사문서 위조 부분에 대해 자백하고 현재 고령이고 건강 상태가 안 좋은 점 등을 참작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입니다.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휠체어를 스크린도어 틈에 넣고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사진=서울교통공사 제공)◇‘기습시위’에 지하철 운행 중단…‘나쁜 장애인’ 자처한 이유는지난 20일 오전 7시께부터 5호선 왕십리역이 멈춰섰습니다. 장애인단체의 기습시위 때문이었는데요. 휠체어 약 10대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워져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서면서 스크린도어는 파손되고 열차 운행은 지연됐습니다. 출근시간대라 시민들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나쁜 장애인’을 자처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호소합니다. 올해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 20년째를 맞은 가운데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교통약자법)의 연내 개정을 촉구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2005년 교통약자법 제정에도 정부의 법 집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이행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해당 목표가 이뤄진 적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국토부는 1차 계획에서 2011년까지 ‘저상버스 도입률 31.5%’를 목표로 세웠지만, 지난해 말 기준 도입률은 28.8%에 그쳤습니다. 저상버스 관련 의무 조항이 없는 상황인 만큼 실효성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장애인단체의 지적입니다.장애인단체의 이동권을 위한 투쟁은 계속 될 전망입니다. 모든 지하철역 내 엘리베이터 설치뿐만이 아니라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 장애인 콜택시 등 ‘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을 지역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 반성도 사죄도 없이 ‘전두환’ 떠나다
- [이데일리 박태진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2·12 군사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반성도 사죄도 없었다. 특히 광주 유혈 진압 때 발포지시 여부에 대해 끝까지 함구하면서 진실은 묻혔다. 결국 현대사에선 ‘대통령 전두환’이 아닌 민주주의를 짓밟고, 역사의 단죄를 받은 ‘정치군인’으로만 남게 됐다. (그래픽=문승용 기자)◇ 하나회 결성…10·26 사태로 권련 야욕 드러내 그의 일대기는 권력 야욕으로 가득 찼다.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11기)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았다. 1955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특전단장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58년 육군 장군이었던 이규동 씨의 차녀 이순자 씨와 결혼했다. 영남 출신 육사 동기와 후배를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며 권력 중심에 다가서게 된다.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오른 그는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서거하자 권력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그는 각종 월권행위로 군내 비판이 일면서 교체 위기에 몰리자 하나회 장교들과 군사 반란을 도모했다.그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내란 방조 혐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고 전방 육군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켜 군 지휘체계를 무너트리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金)을 정치규제로 묶고 권력을 한 번에 장악했다. 5·17 조치 다음날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며 거리에 몰려나와 저항했으나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 유혈 진압을 감행하며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낳았다.이후 그는 1980년 6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 데 이어 국회를 해산시켰다. 같은 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뒤 그해 유신헌법에서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7년 독재 후 육사 동기생에 정권 이양그는 7년 독재를 일삼은 후에는 영욕의 연속을 보냈다. 5공 헌법을 만들고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언론 통폐합 조치와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학원가에는 안기부와 보안사 요원들을 풀어 학생들을 감시했다. 야당 인사와 학생들은 친북 용공 혐의가 씌워져 모진 고문을 당했고, 기업인들을 겁박해 통치자금을 조성해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집권 당시인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로 덮으려 한 경찰의 발표는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회고록 등에서 경제성장 기조 유지,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을 유치 등을 치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두고는 “박정희가 차려놓은 밥상 위의 밥을 먹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스포츠와 영화 등의 발전에 공을 들였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른바 ‘3S(스포츠·섹스·스크린) 정권’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로 문화·스포츠를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해 민주화 열망을 꺾는 도구로 이용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선언으로 육사 동기생인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퇴임 한 달 만에 동생 전경환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등 ‘5공 청산’ 분위기에 위기를 맞았다. 결국 1988년 11월 재임 기간 과오와 비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치자금 139억원과 개인재산 23억원 등 재산을 헌납한 뒤 부인과 함께 강원도 백담사 유배 길에 올랐다. 백담사로 향한 11월 23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숨진 날이기도 하다. 1990년 12월 백담사에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역사의 단죄였다. 문민정부를 연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와 12·12, 5·18 진상규명 및 관련자 처벌 등 과거사 청산 조치에 따라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95년 12월 내란죄 혐의로 검찰의 출두 통보를 받은 그는 연희동 자택 앞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길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하지만 곧바로 사전구속영장이 집행돼 압송됐고,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승리한 1997년 12월 대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구속 2년 만에 풀려났지만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논란의 어록도 남겼다. 그는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후인 2003년에도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해 공분을 샀다. 1995년 내란 혐의 재판과정에서는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했다. 1997년 법원이 뇌물 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2205억원의 추징금 납부를 명령하자 “예금자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며 버티기로 일관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 로맨티시스트→가슴 찡한 연기…'오월의 청춘' 이도현에 치인다
- ‘오월의 청춘’(사진=KBS)[이데일리 스타in 김가영 기자] ‘오월의 청춘’ 배우 이도현의 직진 사랑이 안방극장을 애틋하게 물들였다.지난달 31일 방송된 KBS2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극본 이강, 연출 송민엽, 제작 이야기 사냥꾼)에서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돼 아비규환 사태를 맞은 시민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지켜 나가는 희태(이도현 분)와 명희(고민시 분)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다.기남(오만석 분)의 협박에도 다시 손을 맞잡으며 사랑을 확인한 희태와 명희는 광주를 떠나기로 약속했지만 떠나기 전, 희태가 무차별하게 시민들을 공격하는 군인에게서 명희를 구하다 머리 부상을 입으며 함께 광주병원으로 돌아왔다.두 사람은 통금으로 인해 병원 처치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고, 희태는 밖의 심상치 않은 상황에 불안해하는 명희에게 적절한 농담과 믿음직한 말들로 안심시키며 기타 연주와 함께 자장가를 들려주며 로맨티시스트 면모를 보여줬다.하지만 다음날, 희태는 너무 많은 부상자들로 인해 환자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명희에게 “꼭 더 좋아하는 쪽이 지지. 항상”이라고 말하면서도 명희와 함께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때 진아(박세현 분)가 부상을 입은 친구와 함께 왔고, 잠시 후 희태는 군인에게 머리를 맞은 충격으로 병원 한복판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진아를 발견해 다급하게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하지만 희태는 과거 부상당한 친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상태. 그럼에도 평소 자신을 따랐던 진아를 살리기 위해 있는 있는 힘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이어갔고, 결국 살려내는데 성공하며 과거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모습으로 가슴 찡한 먹먹함을 선사했다.이도현은 ‘오월의 청춘’에서 참혹한 현실과 무자비한 아버지의 횡포로 인해 좌절하지만 자신의 소신과 한 여자를 향한 사랑 모두를 지켜내고 있는 희태로 완벽하게 분하며 안방극장의 무한한 지지를 받고 있다.이도현은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애절하면서도 달달한 눈빛과 로맨틱한 보이스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책임감으로 버티는 신념 있는 희태로 완벽하게 녹아들며 다양한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도현이 만들고 있는 희태가 앞으로 마주할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궁금증이 모이고 있다.한편, KBS2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매주 월, 화 오후 9시 30분 방송된다.
- '귀국행렬' 이어지는 미얀마…현재까지 411명 귀국
- 4일 태국 치앙마이에서 미얀마 시민들이 미얀마 시위를 지지하고 아웅산 수지 고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FP)[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부의 유혈 진압이 더욱 극심해지면서 미얀마에 거주하던 교민들의 귀국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생업을 이유로 당장 미얀마를 떠나기 어려운 교민들도 적지 않아 정부의 고민 역시 깊어지는 상황이다. 정부는 자발적인 귀국을 독려하는 한편,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컨티전시 플랜을 준비하고 있다.앞서 우리 정부는 미얀마 전역에 대한 여행 경보를 3단계인 철수 권고로 상향했다.5일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의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 4월 4일까지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교민은 총 411명이다. 3월 15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귀국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지난 3월까지 주 1~2회 운영되던 임시항공편 역시 최대 3편으로 늘어나 오는 27일까지 예약한 사람들만 274명이다. 아울러 주미얀마 대사관과 한인회 등을 통해서 지속적인 귀국 수요를 확인한 결과 100여명이 또 귀국의사를 밝혔다.현재 미얀마와 항공을 잇는 임시항공편은 미얀마국제항공(MAI)만 운행되고 있다. 대한항공(003490)의 경우, 협력 지상조업사가 시민불복종운동(CDM)에 들어가면서 운항이 멈췄다. 다만 외교부는 필요할 경우 MAI와 협력해 대한항공은 물론, 아시아나 등 국적기도 운항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이 당국자는 “최대 주 4편까지 비행기를 띄울 수 있으나 현재 파악된 수요로는 주 3편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여전히 미얀마에는 적지 않은 한국 교민들이 남아 있다. 현재 외교부가 파악하고 있는 미얀마 교민 규모는 3000여명, 기업은 230여개다. 삼성·LG·롯데 등 대기업과 금융기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봉제공장 등을 운영하고 있는 중소기업이다. 이대로 미얀마를 탈출할 경우, 생업 수단을 전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귀국이 쉽지 않다.이런 상황에서 외교부는 일단 긴급안전공지 등을 통한 실시간 상황 안내와 행동요령 배포 등을 교민사회에 공유하고 있다. 아직 교민들의 인명·물적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군경이 자의적 판단으로 무차별적인 총격을 하는 상황에서 외국인이라고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지난달 말에는 회사가 제공한 차량을 타고 귀가하던 신한은행 현지직원이 군경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신한은행 총격사건의 경우, 귀가 과정에서 군경이 젊은이들을 구타하는 모습을 본 버스기사가 우회해야겠다는 판단을 하고 유턴하던 중 발생했다”며 “미얀마 군경 사이에서 민간인 차가 군경 체크포인트에서 유턴하면서 수류탄을 던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신한은행 버스가 유턴하니 총을 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미얀마 대사관은 이같은 사례를 파악해 안전에 대한 주의사항, 행동요령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안전 대피 훈련도 실시 중이다. 최악의 경우, 여행경보를 여행금지도 격상하는 동시에 24시간에 교민들을 철수시킨다는 목표로 군 수송기, 전용기 투입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교부는 정의용 장관을 본부장으로 한 중앙대책본부를 설립하고 관계부처와 면밀히 협력하고 있다.자료=외교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