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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일정 및 행사 (8.24-28)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주간일정 및 행사 (8.24-28)◇ 24일(월) ▲총리실-간부회의(집무실, 9시)-녹색성장위원회(19층 대회의실, 오후 3시)▲기획재정부 세제관련 장관님 브리핑(장관, 10시)간부회의(장관, 3시30분)녹색성장위원회(1차관, 3시)지역경제살리기 현장방문(2차관, 3시)▲공정거래위원회 -7월의 공정인 시상식 및 우수연구모임시상식 및 간부회의(대회의실, 8시)▲한국은행-집행간부 및 감사회의(09:00)-외빈면담-Mr. Philip S. Goldberg, 미국 국무부 차관보(부총재보, 09:30)▲금융감독원 주례임원회의(9시)▲금융위원회 - 간부회의(위원장, 부위원장 9시)▲지식경제부-정보통신산업진흥원 현판식 (장관, 10시) -녹색성장위원회(장관, 3시) ◇ 25일(화) ▲총리실-고위당정협의회(공관, 오전 7시 30)-지역현장방문(광양, 남해, 오후 1시50)-나로호 위성발사 참관(고흥, 오후4시30)▲기획재정부 -세제발전심의위원회(장관, 10시)-세제발전심의위원회(1차관, 11시)▲지식경제부-LCD 패널 교차구매 MOU체결(장관, 르네상스H, 2시)-국무회의 (장관, 청와대, 오후6시)▲공정거래위원회 -국무회의(오후 6시)▲한국은행 -통화정책 자문회의(장병화 부총재보, 11:00)-연구자문위원회(부총재, 15:00)-외빈면담/ Mr. Jorg Asmussn, 독일 재무부 차관 (부총재보, 15:00)-한은동우회 이전 기념식(송창헌 부총재보, 오후4시)▲금융감독원 - 파이낸셜뉴스 주최, 제7회 서울국제파생상품컨퍼런스 축사(오전9시)- 제15차 금융위원회(2시)▲금융위원회 -국무회의(위원장, 오후 6시)◇ 26일(수) ▲기획재정부 -서울 이코노미스트클럽 조찬 강연(장관, 오전 7시15분)-위기관리대책회의(장관, 3시)-복권위원회 (2차관, 3시)▲지식경제부-위기관리대책회의(장관, 3시) ▲공정거래위원회 -전원회의 (2시)▲금융감독원 -파이낸셜뉴스 주최, 제7회 서울국제파생상품컨퍼런스 축사(원장,오전9시)-제15차 금융위원회(원장, 2시)▲금융위원회 -제15차 금융위원회(위원장,2시)-제13차 증권선물위원회(부위원장, 10시)-위기관리대책회의(부위원장 3시)▲한국은행- 예금보험위원회( 이광준 부총재보 11:00)-금융위원회 정기회의(부총재, 14:00)◇ 27일(목) ▲총리실-지역 민생현장 방문(경북, 경남)▲기획재정부 -IT산업 발전전략 보고대회(장관, 3시)-서비스산업 점검단 회의(1차관,8시)-차관회의(1차관, 2시)-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1차관, 3시)▲지식경제부- 플랜트업계 오찬간담회 (장관, 11시40분)▲공정거래위원회 -GS그룹 하도급협약체결식(역삼동 GS 타워, 11시)▲한국은행 -외빈면담 - ?Mr. Norbert Baas, 주한 독일대사(총재, 10:30)▲금융감독원 - 아시아경제 주최, 제2회 아시아PB대상 시상식(오후3시)▲금융위원회 -차관회의(부위원장, 2시)◇ 28일(금) ▲총리실-국가정책조정회의(영상회의실, 오전8시)▲기획재정부 -국가정책조정회의(장관, 오전 8시)-인터뷰 < SBS-R SBS 전망대> (1차관, 오전 7시20시)-나라키움 대전센터 준공식(2차관, 오전10시)▲지식경제부 -러시아 극동관구 전권대표 면담(장관, 접견실)▲금융위원회 - 기자간담회(위원장, 11시)
- "생전에 죄송하단 말씀 못드렸는데…"
- [조선일보 제공] 19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김대중 전(前) 대통령 분향소에 70대 노인이 줄을 섰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 자택에서 버스를 타고 온 그는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땀으로 분홍색 셔츠가 붉게 젖었다. 노인은 20분쯤 차례를 기다려 국화꽃을 올렸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그러고 보니 죄송하다는 말씀 한번 못 드렸네요."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을 묵묵히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고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이열(70)씨는 마포경찰서 정보과 형사 신분으로 1976년부터 1996년까지 20년간 김 전 대통령을 전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수시로 가택연금을 당한 1970년대부터 사형선고·투옥·망명을 거쳐 사면복권된 1987년까지 이씨는 매일 오전 9시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私邸)로 출근해 밤샘 근무를 하고 이튿날 오후 6시에 퇴근했다. 밤샘 근무는 사면복권 후에 없어졌다. 김 전 대통령 사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요원들은 이씨 등 정예요원 4명을 포함해 30명쯤 됐다. 경찰은 사저의 양쪽 옆집과 앞집을 사들여 감시장소 겸 휴식처로 썼다. 요원들은 망원경을 들고 사저 안을 살폈다. 동네 복덕방 한 곳도 임차해 초소처럼 사용했다. 김 전 대통령이 외출하면 경찰차 두 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차 한 대가 기본으로 따라붙었다. 이희호(87) 여사가 서대문구 영천시장에 장 보러 갈 때, 둘째아들 홍업(59)씨가 서점에 책 심부름을 갈 때…. 이씨 등 경찰들은 가족과 측근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감시했다. 이씨는 "이 여사가 두부 몇 모, 콩나물 몇 g을 사는지도 다 지켜보고 보고했다"며 "책 심부름은 홍업씨가 아버지가 사오라는 책 제목과 저자 이름을 알려줘서 수월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 내외는 측근을 시켜서 그날 집에 누가 왔다 갔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대략 알려줬어요. 우리가 보고를 못 하면 혼나는 줄 아셨던 것 같아요. 측근들이 경찰에게 '우리가 나라 팔아먹는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떳떳하니 말해주겠다'고 했지요." 이씨의 고향은 충남 서천이다. 그가 처음 동교동에 배치됐을 때 중정 직원들이 "(김 전 대통령은)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주의를 줬다. 김 전 대통령과 대화하거나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금기였다. 이씨는 "마포경찰서 서장님도 김 전 대통령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중정 직원을 대동한 채 사저에 들어가 '말'이 아닌 '글'로 의사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서장이 종이에 '오후에 집회가 있는데, 그곳에 참석하시면 위법이오니 참석하지 않길 바랍니다' 같은 문구를 적어서, 마주 앉은 김 전 대통령에게 보여주는 식이었다. "이 여사가 과일을 내오시곤 했어요. 중정 직원들이 못 먹게 해서 입에 댄 적은 없지요. 친하게 지내는 표를 내면 혼이 났어요." 이씨는 "그래도 석 달쯤 지나면서부터 김 전 대통령 일가와 측근들을 대할 때 인사를 주고받게 됐다"고 했다. 나중에는 측근들이 사저에 드나드는 길에 이씨에게 들러서 "연금생활이 힘들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하루는 집 앞에서 이 여사와 마주쳤어요. 제가 웃으며 인사하니까 '이 형사님, 왜 이리 웃음이 많으세요. 웃지 마세요. 중정 직원이 저기서 사진 찍고 있어요' 하고 놀렸어요. 둘 다 웃음을 터뜨렸죠, 하하." 연금의 강도는 그때마다 달랐다. 외부인 출입을 전면 통제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의 지지자 한 명이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자칫 죽을지도 모른다"며 이씨에게 돈 200만원이 담긴 봉투를 김 전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애원했다. 당시로선 거금이었다. 이씨는 고민 끝에 김 전 대통령의 큰아들 홍일(61)씨에게 말을 거는 척하면서 봉투를 슬쩍 쥐여줬다. "뒤에서 중정 직원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요. 그 현장이 걸렸다면, 어휴…." 가택연금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온종일 책을 읽었다. 이발사 출입을 통제했을 때는 혼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잘랐다. 하루에 한두 번 마당에 나와 꽃에 물을 주고, 키우던 개와 놀아줬다. 20년간 김 전 대통령을 지척에서 지켜봤지만 이씨는 김 전 대통령과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다. 눈을 똑바로 마주친 것도 단 한 번뿐이었다. "70년대 말에 병원도 못 가게 하고 의사도 들여보내지 않은 적이 있어요. 이 여사가 앓아누웠는데 중정에서 '동향을 파악해오라'고 해서 사저에 들어갔어요. 이 여사가 초주검이 돼 있더라고요. 거실에서 김 전 대통령과 마주쳤는데,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쳐다보시더군요. 얼마나 미안했는지…." 이씨는 1996년 정년퇴직하면서 동교동을 떠났다. 이듬해 겨울, 대선에 승리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에 이씨를 초대했다. 이씨는 1997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록 '김대중 보고서'를 펴냈다. 이 여사가 수행원을 보내 책 5권을 사갔다. 이씨는 목멘 소리로 "자신을 감시한 사람인데, 책값으로 책의 원래 가격보다 훨씬 많은 '금일봉'을 주셨다"고 했다. 그는 금일봉 액수를 밝히지 않고 분향소를 떠났다.
- 바람을 찾아 떠나는 마법의 시간여행…
- [편집부] 거제시문화예술재단(이사장 김한겸)은 지역극단 ‘예도’와 함께 가족연극 “바람이 멈춘 마을”을 공동 제작하여 오는 8월 22일(토)부터 25일(화)까지 거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첫선을 보인다. 이 작품은 지역문예회관의 고정 레퍼토리를 확보하고 지역예술단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상생의 창작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는 시금석이 되고자 기획되어 올해 전국문예회관연합회의 복권기금 지방문예회관 제작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거제시 문화예술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거제문화예술회관과 올해 전국연극제 금상을 수상한 거제시의 대표적인 예술단체인 극단 예도가 힘을 합쳐 공동으로 제작한 창작극이다. 그림자극, 인형극, 노래극 장면 등이 포함되어 어린이와 청소년 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가족연극 “바람이 멈춘 마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을, 비행기도 오르지 못하는 높은 하늘 위를 날아다닐 수 있는 바람은 얼마나 많은 얘깃거리를 가지고 있을까? 만약 그 얘기들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면?’과 같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종래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미처 느끼진 못하지만 항상 주위에서 사람들을 지켜주는 환경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해주는 교육적 효과까지 꾀하고 있다. 바람과 더불어 살던 바람마을에 어느 순간 갑자기 바람이 멈춰 바람개비도 풍차도 돌지 않아 방앗간이 멈추고, 돛이 부풀지 않아 고기잡이 배도 멈춰서고, 하늘을 날던 새들이 떨어지고, 비구름이 한 곳에 머물러 한 곳은 집중호우, 다른 곳은 가뭄에 시달리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되자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인 바람주머니와 함께 ‘바람이 멈춘 이유’를 찾아 과거로 마법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일회성 공연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언제나 감상할 수 있는 거제문예회관의 장기 레퍼토리 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켜, 거제도 전역의 찾아가는 공연 뿐 아니라 전국의 문예회관 및 일본 지역 순회공연, 더불어 예술교육 프로그램과의 연계 활동 등 거제시를 대표하는 공연상품으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다. 바람직한 예술교육은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재미와 감동을 느끼고 오래도록 체험을 나눌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번 공연은 아이들과 동반한 어른들의 입장료를 50% 할인해준다. 공연 전후로 거제문예회관 전시실에서 8월 27일까지 연장 전시중인 “사랑이 이루어지는 섬, 지심도”전시회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으므로, 여름의 막바지 주말에 온 가족이 함께 문화 나들이를 통해 더위도 이기고 가족이 하나 되는 멋진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거제시문화예술재단 소개>거제 문화예술의 활성화, 예술의 대중화, 거제문화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21세기 문화의 시대로의 항해'를 시작한 거제시문화예술재단은 거제시에서 출자한 재단법인으로 거제문화예술회관을 운영하고 있다. 거제시문화예술재단 홈페이지: http://www.geojeartcenter.or.kr▶ 관련기사 ◀☞제9회 사랑나누기 공연 캠페인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황☞제9회 사랑나누기 공연캠페인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그리스` `싱글즈` `김종욱 찾기` `펌프보이즈`, 한번에 본다
-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인동초`. 김대중에 대한, 말하자면 비유라기보다 묘사다. 그는 한 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빨갱이`였다.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될 당시부터 심지어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 진부한 색깔론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살아나 그와 그 주변을 괴롭혔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자체로 소설이었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모두 실패였다. 4수 끝에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쿠데타로 당선 이틀 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45세이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거공약을 내걸고 박정희 후보와 맞섰다.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박정희에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쿠테타 세력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김대중은 46%를 득표,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사건`은 곧 김대중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73년 8월에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택 연금. 이제 투옥, 살해 위협, 연금과 감시는 그의 일상사가 된 듯 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죄` 재판 장면1980년 초 `서울의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 해(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이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때 김대중은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또 다시 체포, 수감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귀국한 그는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통해 당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군사정권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았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지만 그것을 내용적으로 실현할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야당의 분열 속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민주화세력에게 적전 분열은 재앙을 의미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 평화민주당 총재직 사퇴,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 그의 정치인생 놓인 시련과 굴곡은 끝이 없어 보였다. ▲ 1985년 미국서 귀국 당시 모습그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한다. 그리고 패배. 이후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곧 9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마침내 1997년 12월. 그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4번째 도전 끝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만에 이룬 꿈이었다. 생전에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6년 인생을 쉼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고,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