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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문학상 후보 고은 시인은 누구
- ▲ 고은 시인(사진=공식사이트)[이데일리 SPN 김용운] 고은 시인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8세에 출가했다. 수도생활 중 1958년 '현대시'와 '현대문학' 등에 추천돼 문인으로 나섰다.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비롯해 시선집 '어느 바람', 서사시 '백두산'(7권), '고은 전집'(38권) 등 150여권을 펴냈다.올해 4월에는 연작시편 만인보를, 구상한지 30년만에 완간했다. 만인보는 총 작품수 4001편에 전 30권 분량이다. 만인보는 시인이 1980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 구상한 것으로 1986년 1~3권이 나왔다. 만인보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민족의 다양한 얼굴을 그렸는데 등장인물만 5600여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989년부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을 포함 20여개 국어로 시선집이 번역됐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했으며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등을 거쳤다. 현재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이며 단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기사 미리보기 끝-->
- (딸기아빠의 재무설계)충전하고 돈도 버는 휴가 재테크
- [이데일리 김종석 칼럼니스트] 기말고사를 끝낸 학생들의 여름방학이 이번 주부터 시작된다. 아이들 기대에 맞춰 여행 스케줄을 짜고 얇아진 지갑걱정에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추가될 수 있겠지만,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아내)로서가 아닌 ‘1인칭’ 위주의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획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름 휴가철을 맞아 가족, 연인, 친구들과의 즐거운 일탈을 생각하는 자체만으로 흥분되고 짜릿함을 느낀다. 하지만 움직이는 게 돈이고 자칫 사전조사와 계획없는 휴가는 오히려 짜증과 스트레스를 더할 수 있다. 비록 고물가에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금새 흥이 깨지기는 하지만,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활기찬 하반기를 위해 스트레스에 찌든 심신을 재충전하는 것도 그 어떤 재테크 못지 않은 훌륭한 休테크인 것이다. ◆미리 준비할수록 경비를 아낀다! 계획 없이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프로세스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국내를 가던 해외를 가던,자가용을 이용하던 대중교통을 이용하건,숙박은 어디서 할 것인지,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지 등의 계획을 꼼꼼하게 세워야 한다. 특히 숙소와 입장료 등은 현장에서 구하기 힘들뿐 아니라 바가지를 쓸 수 있다. 인터넷과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미리 예약을 한다면 적잖은 경비를 아낄 수 있으므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환전, 주거래은행에서 우대환율 요청하고 T/C를 이용하라! 해외여행에서 환전은 필수이며 환전하는데 수수료가 발생한다. 환전수수료를 줄이는 방법 중 하나는 여행사 사이트나 은행 홈페이지에서 환율우대쿠폰을 이용해 환전하는 것이다. 환전우대쿠폰은 홈페이지에 접속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운받아 활용할 수가 있다. 여행 당일 허겁지겁 공항지점에서 환전하면 수수료 할인을 해주지 않으므로 주거래은행을 통해 미리 환전을 하는 것이 유리하며, 어느 은행이나 에누리해줄 수 있는 우대환율이 있으므로 우대환율을 요구하는 것이 좋다. 또한 여행자수표를 사용하면 환전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으며, 분실하더라도 수표번호를 제시하면 언제든 재 발행이 가능하므로 분실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신용카드를 해외에서 사용하는 경우 결제금액의 1.5%을 수수료로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고, 결제일이 사용 후 3일 이후 이므로 환율이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면 현금을 사용하고, 반대로 환율이 내릴 것으로 예상되면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여행자 보험, 소액으로 위험보장은 필수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안전사고, 질병, 분실 등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상이다. 특히 해외나 위험지역에 여행하는 경우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여 여행 중 사고나 배상책임 손해, 신체상해, 휴대품 도난 등의 스트레스를 미리 비우는 것도 좋다. 가입방법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간단히 가입할 수 있으며 1인당 7일에 3,000원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 1억 원까지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의에 의한 사고, 자살, 범죄행위, 폭력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 지진 해일 등의 천재지변, 전쟁, 폭동, 내란 등으로 인한 손해는 보상하지 않는다. 여행 중 사고가 발생하면 사고별로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보험회사에 청구하면 심사 후 보험금을 지급받게 되므로 관련 영수증이나 증빙 서류를 꼼꼼히 챙겨야 한다.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는 보험금 청구서, 의사진단서, 치료비영수증, 피보험자의 통장사본, 보험 증권 등을 제출해야 한다. 단 휴대품 도난시에는 반드시 가까운 현지 경찰서에서 도난 확인서를 발급받아 제출해야 보상이 가능하다. 여행보험에 가입하기 전에 보험사에서 보장하는 손해의 범위, 기간 등을 꼼꼼히 비교하여 선택하는 것이 좋다. 또한 1대의 자동차를 가족이나 친구들과 이용하는 경우 장시간 운전으로 운전자를 교대할 때는, '누구나 특약’에 가입하는 것이 좋다. 특약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가입된 보험사에 전화해 기간과 운전연령 등을 정할 수 있다. ◆신용카드를 이용하고, 금융기관의 이벤트 혜택을 누려라! 신용카드만 잘 이용해도 적잖은 휴가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원하는 여행지나 여행상품을 여러 가지 혜택으로 즐길 수 있는 신용카드야 말로 휴가철의 필수품이다. 특히 신용카드 사용액은 연말정산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좋다. 휴가철이 시작되면 카드사에서는 무료공연, 리조트시설 할인, 휴가경비 지원, 항공권 할인, 경품이벤트 등 풍성한 이벤트·서비스를 시행하므로 신용카드사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활용하면 된다. 또한 해외에서 카드를 분실하거나 도난 당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국내 카드사에 신고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카드사 신고센터 전화번호를 미리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 분실 시 체류 국가에서 긴급 대체카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내에서 발행되는 국내외 겸용 카드는 대부분 비자나 마스터카드와 연계돼 있으며 각 나라 긴급 서비스센터를 이용하면 2일 안에 새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또한 출국 전 여권과 신용카드상 영문 이름이 일치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해외 카드결제는 일시불만 가능한데 귀국 후 ‘해외결제 할부전환 서비스’를 이용해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또한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현지통화'로 결제하는 것이 유리하다. 해외에서 원화로 결제하면, 원화가 현지통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환전수수료가 더 부과되기 때문에 예상보다 많은 대금이 청구될 수 있다. ◆공과금, 미리 내거나 자동이체를 설정해라! 보통 일주일간의 휴가기간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대출이자·공과금·신용카드 결제금액 등은 미리 내거나 자동이체계좌의 잔고를 미리 확인하고 떠나야 한다. 연체했을 경우의 연체료도 문제이지만, 신용사회에서 연체로 인한 신용상의 문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므로 무시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 자진신고나 납부할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불성실가산세를 추가로 내야 한다. ◆귀중품, 은행의 무료대여금고에 맡겨라! 여름 휴가철이면 좀도둑이 극성이어서, 귀중품을 집에 두고 떠나면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휴가철이면 은행들은 대부분의 점포에서 대여금고를 무료로 빌려주므로, 각종 예금증서, 주요한 문서, 귀금속 등은 은행의 대여금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대여금고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신분증과 도장을 지참하고 은행을 방문하면 된다. ◆금융상품, 금융 주치의를 활용하라! 유럽 발 국가부도 위기 등의 우려로 연일 증시는 말 그대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이고 있다.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고 있는 경우 맘 편한 휴가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추가로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거나 환매하고자 하는 경우 휴가지에서 PC방을 전전하거나 휴대폰에 메달리다간 자칫 분위기를 망치는 폭탄으로 낙인 찍히기 쉽다. 따라서 평소 거래하는 금융기관의 관리자에서 원하는 가격조건이 되면 연락을 해 달라고 미리 당부하면 된다. 또한 ‘투자에서 가장 안전한 상품은 현금이고, 쉬는 것도 투자다’라고 한다. 시황예측에 자신이 없거나, 경제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한다면 시중 실세금리가 자동으로 반영되는 MMF와 CMA상품을 활용하는 것도 변동성이 큰 장세에 고려해 볼 만 하다. (김종석 우리투자증권 마포지점 WM팀장 / ‘2010 실전 재테크 시나리오’저자)▶ 관련기사 ◀☞(딸기아빠의 재무설계)`꿩 먹고 알 먹는` 주식관련 채권투자
- 30주년 5.18 `광주`를 알린 영화들
- ▲ 5.18을 다룬 '꽃잎','박하사탕','스카우트','화려한 휴가'(사진 왼쪽상단부터 시계방향)[이데일리 SPN 김용운 기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오늘로 30주년이 됐다. 지난 1980년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이 신군부의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 사령관의 퇴진을 요구하며 벌였던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데일리SPN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광주'를 다룬 영화들을 짚어봤다. 신군부독재가 이어지던 1980년대 5.18은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금기 단어였다. 그러나 지난 1992년 문민정부의 탄생과 함께 5.18의 명예가 회복되고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 1996년 장선우 감독 '꽃잎' 영화계에서는 5.18을 상업영화 테두리 안에서 처음 다룬 작품으로 1996년 4월 개봉한 장선우 감독의 '꽃잎'을 꼽는다.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잎 꽃잎이 지고'를 원작으로 한 '꽃잎'은 어린 소녀를 통해 5.18 피해자들의 상처를 되돌아본 작품이었다. 문성근 외에 당시 신인이었던 설경구, 추상미 등이 출연했다. 특히 이 영화로 열다섯의 나이로 데뷔한 이정현은 5.18 당시 계엄군에게 쫓기다 총에 맞아 숨진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주인공 소녀로 분했다. 이정현은 기차 창에 머리를 부딪치며 자해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유리창을 깰 정도로 광기가 어린 연기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꽃잎'이 개봉될 당시에는 5.18주범에 대한 반란 및 내란죄가 확정되기 전이었던 때라 영화 개봉 후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꽃잎’ 제작에 참여했던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개봉이 될지 불안할 정도로 여러 보이지 않는 압력들이 많았다”며 “ 하지만 감독을 비롯해 촬영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5.18을 소재로 첫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사명감에 임했다”고 밝혔다. ◇ 2000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꽃잎’ 이후 다시 영화계가 5.18을 소재로 관객들에게 선보인 작품은 2000년 1월1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다. 설경구의 ’나 돌아갈래‘라는 명장면으로 시작한 ’박하사탕‘은 순수했던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가 군시절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민간인을 죽인 뒤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창동 감독은 1997년 영화 ‘초록물고기’로 데뷔 한 이후 2년여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박하사탕’을 완성했다. ‘박하사탕’은 영화계 전문가들로부터 2000년 한국영화가 거둔 가장 큰 수확 중 한 편으로 평가받았다. 작품성과 함께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등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 2007년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와 김현식 감독의 '스카우트' ‘박하사탕’ 다음으로 5.18을 다룬 영화는 2007년 7월 개봉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다. ‘화려한 휴가’는 5.18 당시 광주를 점령한 계엄군들의 작전명으로 1980년 5월의 광주의 참상을 정면에서 응시한 작품이다. ‘꽃잎’과 ‘박하사탕’이 5.18로 상처를 입은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영화였다면 ‘화려한 휴가’는 5.18 당시 광주 시내와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광주시민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사진=CJ엔터테인먼트)김상경이 평범한 택시기사에서 계엄군에 맞서는 시민군 민우로 분했고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 박철민, 나문희 등이 출연했다. 광주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광주시 인근 상무지구에 도청을 재현한 세트를 지어 극의 리얼리티를 높였다. 영화를 연출한 김지훈 감독은 “대구에서 자랐지만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며 “불의에 맞섰던 시민군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당시 ‘화려한 휴가’는 730만 관객을 모아 2007년 한국 극장가 흥행 톱3에 오르는 등 흥행에도 성공했다. ‘화려한 휴가’ 외에 같은해 11월 개봉한 김현식 감독의 ‘스카우트’ 또한 5.18을 소재로 한 영화로 꼽힌다. 스카우트는 1980년 5월, 광주가 낳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실제 있었던 대학 스카우트들의 비사를 표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스카우트’의 속살은 5.18로 비롯된 주인공들의 어긋남으로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려고 광주에 내려갔던 호창(임창정 분)은 그곳에서 반독재운동을 하는 대학후배 세영(엄지원 분)을 만났고 결국 5.18의 복판에 들어서게 된다. 비록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5.18을 녹여낸 점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카우트’로 김현식 감독은 2008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시나리오상을, 임창정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들 네 편의 영화 외에 1988년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와 1993년 제작된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상업영화에 앞서 5.18을 다룬 독립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 우파정권에서도 고개를 드는 `증세(增稅)론`
- [이데일리 윤진섭 기자] 10일 공개된 조세연구원의 `사회복지 재정분석을 위한 중장기 재정추계 모형개발에 관한 연구 보고서`는 `증세(增稅)`라는 대안으로 귀결되고 있다.인구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앞으로 우리나라의 재정적자가 큰 폭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국민들의 세 부담을 높여야 한다는 정책권고다. 세금제도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소관의 국책연구원에서 나온 보고서여서 무게가 가볍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참여정부 후반기를 달궜던 이른바 `좌파정권 증세론`이 우파정권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는 점이다. 증세론의 배경도 똑같다.◇ 참여정부 '비전 2030'과 닮은 꼴조세연구원은 보건 및 사회복지분야의 재정 지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을 증세 필요성의 이유로 꼽았다. 보건 및 사회복지분야 지출 총액이 2009년 GDP 대비 9.52%에서 2050년에는 21.61%로 2.2배 가량 늘어난다고 예상했다. `복지지출 21%`는 참여정부 좌파정책의 집대성이라고 비판받았던 `비전 2030`의 목표와 일치한다. 단지, 시기를 20년 늦췄을 뿐이다.특히 국가가 부담해야 할 재정 지출은 보건 분야의 경우 2009년 GDP 대비 2.88%에서 2050년 5.29%로, 사회복지 분야는 6.64%에서 16.31%까지 증가할 것으로 연구원은 분석했다.▲ (자료: 통계청, 조세연구원)문제는 돈이다. 지금 수준(GDP의 20.8%)의 조세부담률을 유지한다면, 2050년 국가채무가 GDP의 116%에 달할 것이라는게 보고서의 전망이다. 나라가 거덜나게 됐다고 난리가 난 그리스(123%)와 비슷한 수준이다. 조세연구원이 제시한 해법은 2050년까지 조세부담률을 25%로 올리라는 것인데, 번 돈의 5%를 세금으로 더 내란 의미다. 참여정부의 `비전 2030`은 해법으로 △세금을 늘리거나 △나라 빚을 더 내거나 △세금을 조금 늘리고, 빚도 좀 늘리는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이번 조세연구원 보고서도 절충안을 내놨다. 나라 빚을 좀 더 내 국가채무 비율을 60% 수준으로 높이는 한 편으로, 세금도 좀 늘려서 조세부담률을 23.8% 수준까지 높이는 방안이다. ◇ "증세 군불지피기 아니냐" 국책연구원이 이 같은 보고서를 작성함에 따라 향후 정부가 세금 인상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 안팎에선 과거 현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정경제부가 같은 이유로 세금 인상, 특히 부가가치세 인상을 검토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2006년 6월 계명대학교 산업경영연구소는 당시 재정경제부의 의뢰로 부가가치세 인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당시 재경부에 제출된 보고서는 "향후 복지지출 확대 등에 따른 대규모 재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부가가치세 인상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관련기사 : 정부 용역 보고서 "부가세 인상이 유일한 대안" 정부,`부가세 인상` 연구 의뢰..또 폭탄? )물론 세율을 인상하거나 특정 세목을 신설하지 않고도 세수를 늘리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이날 조세연구원은 별도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넓은세원 낮은 세율` 정책기조하에 세입기반 확충을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세원확충` 방식으로는 조세연구원이 제시한 만큼 세수를 유의미하게 끌어올리기 어려운데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국민경제에는 `증세`와 똑같은 작용을 하게 된다.기획재정부는 이에 대해 "중기재정계획에 따라 2013~2014년에 재정 균형을 이루고 국가 채무 또한 GDP 대비 30% 대를 유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현 상태에서 볼 때 향후 국가채무가 100%를 넘을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재정을 확충한다는 차원에서 각종 감세를 줄이고 있지만 부가가치세 인상 등을 통한 세금 인상을 거론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김前대통령서거)끊이지 않는 추모행렬..`애도의 물결`
- [이데일리 박기용 온혜선기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틀째인 19일 오후 임시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정관계와 종교계등 주요 인사들의 추모 행렬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공식빈소와 분향소로 결정된 국회 광장의 준비가 끝나는 20일 오전까지 세브란스병원을 찾는 주요 인사들의 발길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승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은 낮 12시께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다. 한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과 이희호 여사에게 심심한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한 큰 주체로, 우리 국민들은 그 분의 위업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절차에 대해선 "최고의 위엄을 갖춰 엄수할 것"이라며 "추모행사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씨도 고 김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 2분여간 엎드린 채 "아직 통일도 안됐는데 조금만 더 오래 사시지.."라며 흐느껴 울었다. 이씨는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천국에서 기도해 달라"면서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하나님 자비를 베푸세요"라며 통곡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도 빈소를 찾았다. 그는 지난 1980년 5월 내란음모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일본에서 줄곧 사형집행 정지를 요구한 바 있다. 하루키 교수는 "`동북아의 위기적 상황`과 관련, 한미일 지식인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왔다"면서 "원래 성명 발표 직후 병문안을 오려고 했는데 어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한국에 와서 그런 부탁을 드리려고 했는데 입원하셨다"며 "한국과 북한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돼야 김 전 대통령이 열어놓은 새로운 길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종교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성태 원불교 교정원장과 이선종 서울교구장 등 원불교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원장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면서 "어버이 같았던 분으로 우리의 마음은 마치 친아버지를 잃은 것 같다"며 10여분간 기도하고 돌아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추기경도 빈소를 찾았다. 정 추기경은 "당신을 어렵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핍박받는 사람들 모두를 용서하고 포용한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셨다"면서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본보기를 국민에게 남겨주신 삶을 사셨다"라고 말했다. 무소속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정계 인물들의 조문도 계속됐다. 정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장례절차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춰야 한다"며 "국민들이 김 전대통령께 빚진 민주주의 헌신과 노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헌화 뒤 눈물을 훔치며 조문했고, 김종필 전 총리도 건강상 조문을 못하지만 위로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전갈을 보내왔다. 주한 외교사절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청융화 주한중국대사 참사관을 비롯,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와 엘살바도르, 터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페인 대사 등이 빈소를 찾았다. 경제계 인사 가운데선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이 박찬법 회장과 계열사 사장단 18명과 함께 빈소를 찾은 것을 비롯, 민병준 전 한국광고주협회 회장, 김재실 전 성신양회 사장, 이용구 대림산업 회장, 이종희 KAL 사장, 유진 풍산그룹 회장 등이 조문했다. 한편 19일 오후 3시 현재 서울시청 광장의 분향소에 4000여명이, 세브란스병원 임시빈소엔 오후 4시 현재 9000여명의 조문객이 조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인동초`. 김대중에 대한, 말하자면 비유라기보다 묘사다. 그는 한 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빨갱이`였다.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될 당시부터 심지어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 진부한 색깔론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살아나 그와 그 주변을 괴롭혔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자체로 소설이었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모두 실패였다. 4수 끝에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쿠데타로 당선 이틀 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45세이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거공약을 내걸고 박정희 후보와 맞섰다.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박정희에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쿠테타 세력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김대중은 46%를 득표,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사건`은 곧 김대중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73년 8월에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택 연금. 이제 투옥, 살해 위협, 연금과 감시는 그의 일상사가 된 듯 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죄` 재판 장면1980년 초 `서울의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 해(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이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때 김대중은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또 다시 체포, 수감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귀국한 그는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통해 당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군사정권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았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지만 그것을 내용적으로 실현할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야당의 분열 속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민주화세력에게 적전 분열은 재앙을 의미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 평화민주당 총재직 사퇴,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 그의 정치인생 놓인 시련과 굴곡은 끝이 없어 보였다. ▲ 1985년 미국서 귀국 당시 모습그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한다. 그리고 패배. 이후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곧 9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마침내 1997년 12월. 그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4번째 도전 끝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만에 이룬 꿈이었다. 생전에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6년 인생을 쉼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고,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 (이종문의 골드 러시아)서브프라임 사태후 러시아 증시(I)
- [이데일리 이종문 칼럼니스트] 지난 9월 16일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역풍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10월 3일 7,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정부의 강도 높은 구제금융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에서 구제금융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지며 10월 6일에는 미국 뉴욕증시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4년 만에 10,000선 아래로 떨어졌고,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증시도 7~9%나 급락하는 동반 폭락 장세를 시현하였다. 금융위기가 투자와 실물경제를 위축시켜 글로벌 경제를 침체(recession)로 몰아가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확산되며 글로벌 금융시장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브릭스(BRICs)로 대표되는 신흥경제에서 금융위기가 확대되며 주가하락이 깊어지고 변동성이 증폭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증권시장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러시아 증시는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고한 9월 16일 하루에만 17%폭락하며 오후부터 거래가 중단되었고, 17일에도 10%이상 폭락하면서 다시 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러시아 금융당국은 18일 하루 임시 휴장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발표에 힘입어 24일에는 주가지수가 1,300선을 회복하며 다소 안정을 되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유가 하락과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러시아 증권시장을 지배하면서 10월 3일에는 1,071 포인트를 기록하며 7.3%하락하였다. 다음 거래일인 10월 6일에는 2차례 거래 중단(서킷 브레이크)을 연출하며 무려 19.1%폭락한 866.39까지 추락하는 패닉상태를 연출하였다. 달러화 표시 주가지수인 RTS지수가 심리적 마지노선인 1,000포인트 아래로 추락한 것은 2005년 11월 16일 이후 약 3년 만에 처음이었고 하루 낙폭으로는 1998년 8월 러시아 외환위기 이후 최대 낙폭이었다. 미국경제 침체가 글로벌경제 침체로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감이 증폭되면서 11월 인도분 국제유가(WTI)가 배럴당 87달러 81센트를 기록하며 8개월 만에 90달러 이하로 내려앉으면서 러시아 에너지산업에서의 경기둔화에 대한 우려감이 시장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최대 석유업체인 로스네프트 주가가 27.41%(5.4$→3.92$) 폭락하였고, 가즈프롬이 24.42%(6.88$→5.2$), 루크오일이 24.16%(53.4$ →40.5$), 수르구트네프테가스가 22.92%(0.48$→0.37$) 추락하는 등 대부분의 에너지관련 기업 주가하락이 20%를 넘었다. 그 외 노릴스크 니켈이 대주주의 주식매각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무려 37.67%(110.7 $→69.0$) 폭락하였고, 러시아 2번째 상업은행인 VTB Group이 26%, 최대 식료품업체인 X5는 28%하락하였다. ▲ 세계 주요국 주가 동향이와 같이 러시아 증시는 최근 1개월간 무려 41.03% 폭락하며 세계 주요 증시 가운데서 최대의 하락률을 기록하였다. 러시아 증시의 폭락 장세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세계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나 러시아 시장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제점으로 인해 증시가 급락한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최근 발생한 러시아적 몇몇 특수 요인들이 러시아 증권시장 하락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여기에 세계 금융위기가 더해져 폭락 장세로 몰아가고 있다. 2008년 하반기 들어 러시아 증권시장의 폭락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 요인으로는 다음의 5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물가상승을 들 수 있다. 4~5월 들면서 심화되기 시작한 물가불안이 2008년 상반기까지 8년 연속 상승분위기를 이어가던 러시아 증시에 처음 그림자를 드리운 요인이었다.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6월까지 8.7%에 달하며 러시아 정부 연간 목표치인 8.5%를 초과하였다. 정책당국이 경기과열에 관한 소모적 논쟁을 벌이면서 연 15%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감은 러시아 경제 펀드멘탈의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5월 17일 2,487.92를 기록하며 역사적 고점을 찍었던 증시는 유가상승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2,200선으로 내려앉았고, 다음 날인 7월 2일에는 2,100선으로 떨어졌다. 둘째, 국제유가의 하락 반전을 들 수 있다. 7월 12일 배럴당 147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었던 국제유가가 불과 2달만인 9월 16일에는 91달러까지 급락하였고 이는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의 실적악화와 유동성 부족에 대한 우려를 야기하였다. 2006년 이후 국제유가 폭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석유업체들은 수익의 80%를 수출세 및 자원채굴세 명목으로 지불하고 있어 유가상승의 실질적 혜택을 거의 보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러시아 증권시장 시가총액의 55%를 석유-가스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유가 동향은 러시아 증시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정치권력의 무분별한 시장개입을 들 수 있다. 지난 7월 24일 철강기업 메첼(Mechel)에 대한 푸틴의 자의적 반독점조사 지시는 증권시장 참여자들에게 2003년 유코스 사태를 떠올리게 하면서 언제라도 정부가 민간사업이나 비즈니스 활동에 다시 개입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심어 주었다. 또한 러-영 합작 석유회사인 TNK-BP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러시아 정부와 영국간의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7월 25일 TNK-BP 최고경영자(CEO)인 로버트 더들리가 러시아 당국의 비자갱신 거부로 모스크바를 강제로 떠나게 되었다. 정치권의 계속되는 시장개입은 외국인투자자들로 하여금 러시아 증권시장에 대한 불안감과 심각한 신뢰 상실을 야기하였다. 넷째, 그루지야 사태의 발발을 들 수 있다. 8월 8일 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아 지역을 선제공격하면서 촉발된 러시아와 그루지야간의 전쟁은 러시아 증권시장에 대한 불확실성을 확대 재생산했다. 그루지야와의 전쟁은 막대한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적 자신감에 더해 국제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러시아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적 리스크를 부각시키며 러시아 증시에 최대의 악재로 작용하였다. 증시가 가장 두려워하는 요인이 전쟁 또는 내란이라는 점에서 그루지야 사태는 러시아 주가폭락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루지야 사태 발발 1개월 만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러시아 자산 및 주식시장에서 400~5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회수하면서 증시와 외환시장이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RTS 지수는 사태 발생 전 1,843포인트에서 1개월 후인 9월 11일에는 1,298포인트로 30% 폭락하며 2년 2개월 만에 최저치인 지수 1,300선 아래로 떨어졌고, 달러대비 루블 환율도 8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오르며 동 기간 동안 약 10% 가치가 절하되었고, 루블 채권의 스프레드도 급등하였다. 또한 그루지야 사태를 빌미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의 선진 8개국(G8)지위와 세계무역기구(WTO)가입 등에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면서 러시아 시장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간 것도 시장 위험도와 불확실성을 증폭시켰다. 다섯째, 미국발 금융쇼크로 인한 세계경기 침체를 들 수 있다. 러시아 상업은행 및 기업들의 해외차입(2008년 7월 1일 기준 각각 1,362억 달러, 2,389억 달러)이 주로 독일과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고, 대외교역 및 투자에 있어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리만 브라더스 파산으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역풍을 직접 받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세계 금융시장에서의 신용경색이 심화되면서 민간대출 및 투자재원의 대부분을 해외차입으로 충당하였던 러시아 상업은행과 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부족을 겪게 되었다. 또한 금융위기가 세계 실물경기로 전이되며 글로벌 경제가 침체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국제 유가를 포함한 원자재가격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에너지부문이 국내총생산의 약 30%, 상품수출의 65%, 연방세수의 50%, 시가총액의 55%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에너지 가격의 급락은 러시아 증시에 치명타가 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정부가 향후 3년간 우랄산 국제유가가 약 75~80달러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경제정책을 수립하였다는 점에서 국제유가가 80달러 이하로 내려갈 경우 러시아 경제와 증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인다. ▲ 러시아 경제위기와 증권시장 동향이와 같이 2008년 하반기 러시아 증권시장의 폭락 장세는 미국발 국제 금융위기 확산에 따른 글로벌 실물경기 침체와 국제유가 하락이라는 외부요인에다 정치권의 시장개입과 인플레이션 압력, 그루지야 사태라는 내부요인이 혼재되면서 발생했다. 지금의 사태가 지속될 경우 1998년과 같은 금융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률은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 이명박, 개발시대 주역서 대통령후보까지
- [이데일리 김수연기자] 가난, 현대건설과 정주영, 서울시장. 이명박을 상징하는 키워드들이다. 그의 삶은 개발시대 한국사와 고스란히 궤를 같이 한다. ▲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명박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자 이충우씨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45년 가족이 일본에서 아버지 고향인 경북 포항으로 이주했다.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해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지냈고,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살림을 돕기 위해 성냥과 김밥 따위를 팔러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6.25 와중에 폭격으로 누나와 동생을 잃었다. 이명박은 가난을 공부로 딛고 일어선 `입지전`의 전형이다. 중학교 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3년 내내 전교 1등 하면 장학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 졸업했다. `매일 출근하고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사서 공부, 고려대 상대에 들어갔다. 4학년때 6.3 데모와 관련해 `국가내란선동`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65년 현대건설에 공채로 입사했다. 해외 현장에 보내준다는 말에 입사 지원했지만, 학생운동 경력으로 취업이 쉽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 입사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등을 통해 유명해진 일화다. 현대건설 입사 5년만에 이사가 됐고 12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현대건설 시절 태국서 목숨걸고 회사 금고를 지킨 이야기, 청와대의 자재 주문을 맞추려던 옆 공장 사장과 불도저로 땅을 파가며 담판을 벌인 이야기 등 `샐러리맨 신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이때 탄생한다. 현대건설 이사 시절인 1970년 부인 김윤옥씨를 만나 결혼했다. 정치판에 들어선 것은 19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문했지만 정치인으로의 삶은 기업인의 그것보다 순탄치 못했다. 95년 지방선거때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붙어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다. 이어 96년 총선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종로에서 당선됐지만, 선거비용 초과지출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거푸 실패에도 불구, 2002년 서울시장으로 뽑히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뚝섬 서울 숲 건설, 청계천 복원, 시청 앞 광장 조성 등의 대규모 역사와 교통체계 개편, 보행자 중심으로의 거리 정비 등이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화려한 이력 중에는 흠집도 적지 않다. 노조·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 약자에 대한 비하성 발언과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발언 등 잦은 설화로 인해 성향에 대한 의심을 받기도 한다. 또 서울시장 재직 시절 몇몇 유력인사들과 함께 시민들이 사용하는 남산 실내 테니스장을 주말에 공짜로 특혜 이용했다는 이른바 `황제테니스` 논란 등으로 `비호감`을 사기도 했다.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경력도 그의 무기이자 약점이다. 현대 출신인 그를 두고 현대 내에서는 좋게 말하는 쪽과 나쁘게 말하는 쪽 두 부류로 갈린다. 일부 현대 출신 인사조차 그의 재산증식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BBK 관련 의혹, 여러 차명재산 의혹 등 기업인 시절 부를 쌓는 과정에서 생겨난 의혹들은 아직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그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경력에서 부각된 추진력과 난관 극복능력 등은 그를 지나치게 강성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역효과도 있다. ◇ 이명박 대통령후보 프로필1941.12.19 일본 오사카 출생54 2 포항 영흥국민학교 졸업57.2 포항중학교 졸업60.2 동지상고 야간부 졸업65.2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65 현대건설 입사70.12.19 김윤옥씨와 결혼77~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78 인천제철 대표이사·한국도시개발 사장 겸임88~92 현대건설 회장92~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전국구)92~94 6·3 동지회 회장96~98 15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종로)2000~현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02~06 32대 서울시장 ▶ 관련기사 ◀☞檢 발표에 朴"진짜 주인 밝혀져"vs 李 "차명의혹 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