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렬
  • 영역
  • 기간
  • 기자명
  • 단어포함
  • 단어제외

뉴스 검색결과 2,401건

  • (김前대통령서거)벙어리장갑·옥중서신 등 추가 공개
  • [이데일리 김재은기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숨을 거둘 당시 끼고 있던 벙어리 장갑 등이 공개됐다.22일 오후 국회 브리핑룸에서 이희호 여사가 직접 뜨개질한 아이보리빛 벙어리 장갑과 황토빛 양말, 녹음기 등이 공개됐다. 최경환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열흘 전쯤 이희호 여사가 하루만에 짠 것"이라며 "벙어리 장갑은 (김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약품 때문에 약간 얼룩져 있다"고 설명했다.이희호 여사는 벙어리 장갑과 양말을 뜨고 남은 실로 배덮개를 만들어 김 전 대통령의 관에 넣어드렸다고 덧붙였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중환자실에서 잠시 의식을 찾았을 때 가끔 라디오를 듣던 녹음기도 공개됐다. 녹음기에는 중환자실 반입을 위해 주치의 이름과 환자명 '김대중' 등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이와함께 김 전 대통령이 80년 신군부하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중일 때 썼던 27통의 옥중서신 등도 공개됐다. 이 유품들은 앞서 공개된 지팡이, 안경, 성경책, 낙관 등과 함께 국회 본관 앞뜰 분수대에 전시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한편, 이희호 여사는 이날 오찬을 마치고, 국회 본관 앞뜰을 찾아 김 전 대통령의 유품들을 둘러봤다.
2009.08.22 I 김재은 기자
(김前대통령서거)장남 김홍일 수척해진 모습.."안타까워"
  • (김前대통령서거)장남 김홍일 수척해진 모습.."안타까워"
  • [이데일리 박기용기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이 파킨슨병에 걸린 야윈 모습으로 나타나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19일 김 전 의원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병세로 인해 수척해진 모습을 한 채 휠체어에 앉아 조문객을 맞고 있다. 김 전 의원은 파킨슨병으로 인해 거동은 물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다. 90년대 들어 파킨슨병이 발병, 행동뿐 아니라 언어에도 상당한 장애를 겪고 있다. 파킨슨병은 신경계 만성 진행성 퇴행성 질환으로, 환자는 대개 침대에 누워 생활해야 할 만큼 몸 상태가 불편하다. 김 전 의원의 경우 최근 그마나 몸 상태가 나아진 편이지만 말은 거의 하지 못한다. ▲ 김홍일 전 의원의 현역 국회의원 시절 모습김 전 의원은 지난 1972년 공군 중위로 만기 전역할 만큼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아버지와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병의 원인인 것으로 측근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에는 김 전 의원이 고문 와중에 아버지의 혐의를 허위로 자백하지 않기위해 자살시도까지 했다고 쓰여 있다. 누리꾼들은 "아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면서 "김 전 의원도 역사의 피해자"라는 등의 애통의 글을 올리며 안타까워했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김 전 의원은 당시 내란음모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후 1995년 국민회의 소속으로 전남 목포·신안갑에서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9.08.19 I 박기용 기자
  • (김前대통령서거)끊이지 않는 추모행렬..`애도의 물결`
  • [이데일리 박기용 온혜선기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틀째인 19일 오후 임시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정관계와 종교계등 주요 인사들의 추모 행렬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공식빈소와 분향소로 결정된 국회 광장의 준비가 끝나는 20일 오전까지 세브란스병원을 찾는 주요 인사들의 발길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승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은 낮 12시께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다. 한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과 이희호 여사에게 심심한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한 큰 주체로, 우리 국민들은 그 분의 위업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절차에 대해선 "최고의 위엄을 갖춰 엄수할 것"이라며 "추모행사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씨도 고 김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 2분여간 엎드린 채 "아직 통일도 안됐는데 조금만 더 오래 사시지.."라며 흐느껴 울었다. 이씨는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천국에서 기도해 달라"면서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하나님 자비를 베푸세요"라며 통곡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도 빈소를 찾았다. 그는 지난 1980년 5월 내란음모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일본에서 줄곧 사형집행 정지를 요구한 바 있다. 하루키 교수는 "`동북아의 위기적 상황`과 관련, 한미일 지식인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왔다"면서 "원래 성명 발표 직후 병문안을 오려고 했는데 어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한국에 와서 그런 부탁을 드리려고 했는데 입원하셨다"며 "한국과 북한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돼야 김 전 대통령이 열어놓은 새로운 길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종교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성태 원불교 교정원장과 이선종 서울교구장 등 원불교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원장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면서 "어버이 같았던 분으로 우리의 마음은 마치 친아버지를 잃은 것 같다"며 10여분간 기도하고 돌아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추기경도 빈소를 찾았다. 정 추기경은 "당신을 어렵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핍박받는 사람들 모두를 용서하고 포용한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셨다"면서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본보기를 국민에게 남겨주신 삶을 사셨다"라고 말했다. 무소속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정계 인물들의 조문도 계속됐다. 정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장례절차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춰야 한다"며 "국민들이 김 전대통령께 빚진 민주주의 헌신과 노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헌화 뒤 눈물을 훔치며 조문했고, 김종필 전 총리도 건강상 조문을 못하지만 위로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전갈을 보내왔다. 주한 외교사절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청융화 주한중국대사 참사관을 비롯,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와 엘살바도르, 터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페인 대사 등이 빈소를 찾았다. 경제계 인사 가운데선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이 박찬법 회장과 계열사 사장단 18명과 함께 빈소를 찾은 것을 비롯, 민병준 전 한국광고주협회 회장, 김재실 전 성신양회 사장, 이용구 대림산업 회장, 이종희 KAL 사장, 유진 풍산그룹 회장 등이 조문했다. 한편 19일 오후 3시 현재 서울시청 광장의 분향소에 4000여명이, 세브란스병원 임시빈소엔 오후 4시 현재 9000여명의 조문객이 조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2009.08.19 I 박기용 기자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인동초`. 김대중에 대한, 말하자면 비유라기보다 묘사다. 그는 한 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빨갱이`였다.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될 당시부터 심지어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 진부한 색깔론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살아나 그와 그 주변을 괴롭혔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자체로 소설이었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모두 실패였다. 4수 끝에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쿠데타로 당선 이틀 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45세이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거공약을 내걸고 박정희 후보와 맞섰다.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박정희에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쿠테타 세력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김대중은 46%를 득표,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사건`은 곧 김대중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73년 8월에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택 연금. 이제 투옥, 살해 위협, 연금과 감시는 그의 일상사가 된 듯 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죄` 재판 장면1980년 초 `서울의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 해(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이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때 김대중은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또 다시 체포, 수감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귀국한 그는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통해 당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군사정권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았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지만 그것을 내용적으로 실현할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야당의 분열 속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민주화세력에게 적전 분열은 재앙을 의미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 평화민주당 총재직 사퇴,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 그의 정치인생 놓인 시련과 굴곡은 끝이 없어 보였다. ▲ 1985년 미국서 귀국 당시 모습그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한다. 그리고 패배. 이후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곧 9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마침내 1997년 12월. 그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4번째 도전 끝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만에 이룬 꿈이었다. 생전에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6년 인생을 쉼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고,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2009.08.18 I 이숙현 기자
(이종문의 골드 러시아)서브프라임 사태후 러시아 증시(I)
  • (이종문의 골드 러시아)서브프라임 사태후 러시아 증시(I)
  • [이데일리 이종문 칼럼니스트] 지난 9월 16일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역풍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10월 3일 7,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정부의 강도 높은 구제금융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에서 구제금융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지며 10월 6일에는 미국 뉴욕증시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4년 만에 10,000선 아래로 떨어졌고,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증시도 7~9%나 급락하는 동반 폭락 장세를 시현하였다.  금융위기가 투자와 실물경제를 위축시켜 글로벌 경제를 침체(recession)로 몰아가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확산되며 글로벌 금융시장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브릭스(BRICs)로 대표되는 신흥경제에서 금융위기가 확대되며 주가하락이 깊어지고 변동성이 증폭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증권시장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러시아 증시는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고한 9월 16일 하루에만 17%폭락하며 오후부터 거래가 중단되었고, 17일에도 10%이상 폭락하면서 다시 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러시아 금융당국은 18일 하루 임시 휴장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발표에 힘입어 24일에는 주가지수가 1,300선을 회복하며 다소 안정을 되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유가 하락과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러시아 증권시장을 지배하면서 10월 3일에는 1,071 포인트를 기록하며 7.3%하락하였다.  다음 거래일인 10월 6일에는 2차례 거래 중단(서킷 브레이크)을 연출하며 무려 19.1%폭락한 866.39까지 추락하는 패닉상태를 연출하였다. 달러화 표시 주가지수인 RTS지수가 심리적 마지노선인 1,000포인트 아래로 추락한 것은 2005년 11월 16일 이후 약 3년 만에 처음이었고 하루 낙폭으로는 1998년 8월 러시아 외환위기 이후 최대 낙폭이었다. 미국경제 침체가 글로벌경제 침체로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감이 증폭되면서 11월 인도분 국제유가(WTI)가 배럴당 87달러 81센트를 기록하며 8개월 만에 90달러 이하로 내려앉으면서 러시아 에너지산업에서의 경기둔화에 대한 우려감이 시장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최대 석유업체인 로스네프트 주가가 27.41%(5.4$→3.92$) 폭락하였고, 가즈프롬이 24.42%(6.88$→5.2$), 루크오일이 24.16%(53.4$ →40.5$), 수르구트네프테가스가 22.92%(0.48$→0.37$) 추락하는 등 대부분의 에너지관련 기업 주가하락이 20%를 넘었다. 그 외 노릴스크 니켈이 대주주의 주식매각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무려 37.67%(110.7 $→69.0$) 폭락하였고, 러시아 2번째 상업은행인 VTB Group이 26%, 최대 식료품업체인 X5는 28%하락하였다. ▲ 세계 주요국 주가 동향이와 같이 러시아 증시는 최근 1개월간 무려 41.03% 폭락하며 세계 주요 증시 가운데서 최대의 하락률을 기록하였다. 러시아 증시의 폭락 장세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세계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나 러시아 시장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제점으로 인해 증시가 급락한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최근 발생한 러시아적 몇몇 특수 요인들이 러시아 증권시장 하락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여기에 세계 금융위기가 더해져 폭락 장세로 몰아가고 있다. 2008년 하반기 들어 러시아 증권시장의 폭락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 요인으로는 다음의 5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물가상승을 들 수 있다. 4~5월 들면서 심화되기 시작한 물가불안이 2008년 상반기까지 8년 연속 상승분위기를 이어가던 러시아 증시에 처음 그림자를 드리운 요인이었다.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6월까지 8.7%에 달하며 러시아 정부 연간 목표치인 8.5%를 초과하였다. 정책당국이 경기과열에 관한 소모적 논쟁을 벌이면서 연 15%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감은 러시아 경제 펀드멘탈의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5월 17일 2,487.92를 기록하며 역사적 고점을 찍었던 증시는 유가상승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2,200선으로 내려앉았고, 다음 날인 7월 2일에는 2,100선으로 떨어졌다. 둘째, 국제유가의 하락 반전을 들 수 있다. 7월 12일 배럴당 147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었던 국제유가가 불과 2달만인 9월 16일에는 91달러까지 급락하였고 이는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의 실적악화와 유동성 부족에 대한 우려를 야기하였다. 2006년 이후 국제유가 폭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석유업체들은 수익의 80%를 수출세 및 자원채굴세 명목으로 지불하고 있어 유가상승의 실질적 혜택을 거의 보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러시아 증권시장 시가총액의 55%를 석유-가스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유가 동향은 러시아 증시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정치권력의 무분별한 시장개입을 들 수 있다. 지난 7월 24일 철강기업 메첼(Mechel)에 대한 푸틴의 자의적 반독점조사 지시는 증권시장 참여자들에게 2003년 유코스 사태를 떠올리게 하면서 언제라도 정부가 민간사업이나 비즈니스 활동에 다시 개입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심어 주었다. 또한 러-영 합작 석유회사인 TNK-BP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러시아 정부와 영국간의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7월 25일 TNK-BP 최고경영자(CEO)인 로버트 더들리가 러시아 당국의 비자갱신 거부로 모스크바를 강제로 떠나게 되었다. 정치권의 계속되는 시장개입은 외국인투자자들로 하여금 러시아 증권시장에 대한 불안감과 심각한 신뢰 상실을 야기하였다. 넷째, 그루지야 사태의 발발을 들 수 있다. 8월 8일 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아 지역을 선제공격하면서 촉발된 러시아와 그루지야간의 전쟁은 러시아 증권시장에 대한 불확실성을 확대 재생산했다. 그루지야와의 전쟁은 막대한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적 자신감에 더해 국제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러시아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적 리스크를 부각시키며 러시아 증시에 최대의 악재로 작용하였다. 증시가 가장 두려워하는 요인이 전쟁 또는 내란이라는 점에서 그루지야 사태는 러시아 주가폭락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루지야 사태 발발 1개월 만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러시아 자산 및 주식시장에서 400~5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회수하면서 증시와 외환시장이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RTS 지수는 사태 발생 전 1,843포인트에서 1개월 후인 9월 11일에는 1,298포인트로 30% 폭락하며 2년 2개월 만에 최저치인 지수 1,300선 아래로 떨어졌고, 달러대비 루블 환율도 8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오르며 동 기간 동안 약 10% 가치가 절하되었고, 루블 채권의 스프레드도 급등하였다. 또한 그루지야 사태를 빌미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의 선진 8개국(G8)지위와 세계무역기구(WTO)가입 등에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면서 러시아 시장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간 것도 시장 위험도와 불확실성을 증폭시켰다. 다섯째, 미국발 금융쇼크로 인한 세계경기 침체를 들 수 있다. 러시아 상업은행 및 기업들의 해외차입(2008년 7월 1일 기준 각각 1,362억 달러, 2,389억 달러)이 주로 독일과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고, 대외교역 및 투자에 있어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리만 브라더스 파산으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역풍을 직접 받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세계 금융시장에서의 신용경색이 심화되면서 민간대출 및 투자재원의 대부분을 해외차입으로 충당하였던 러시아 상업은행과 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부족을 겪게 되었다. 또한 금융위기가 세계 실물경기로 전이되며 글로벌 경제가 침체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국제 유가를 포함한 원자재가격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에너지부문이 국내총생산의 약 30%, 상품수출의 65%, 연방세수의 50%, 시가총액의 55%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에너지 가격의 급락은 러시아 증시에 치명타가 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정부가 향후 3년간 우랄산 국제유가가 약 75~80달러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경제정책을 수립하였다는 점에서 국제유가가 80달러 이하로 내려갈 경우 러시아 경제와 증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인다. ▲ 러시아 경제위기와 증권시장 동향이와 같이 2008년 하반기 러시아 증권시장의 폭락 장세는 미국발 국제 금융위기 확산에 따른 글로벌 실물경기 침체와 국제유가 하락이라는 외부요인에다 정치권의 시장개입과 인플레이션 압력, 그루지야 사태라는 내부요인이 혼재되면서 발생했다. 지금의 사태가 지속될 경우 1998년과 같은 금융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률은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8.10.10 I 이종문 기자
  • 한승수, 재산은닉·군특혜 의혹 `뜨거운 감자`
  • [이데일리 온혜선기자] 한승수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둘째날은 한 후보자 본인의 군 복무 특혜 및 부인의 재산은닉 의혹에 초점이 맞춰졌다. 통합민주당 서갑원 의원은 한 후보가 군 복무 기간 3년 동안 대학 1년, 대학원 2년을 다녔다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한 후보는 58년에 군에 입대한 이후 60년 3월 대학을 졸업했으며, 제대 후 1년만에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재산은닉 및 위장전입 논란도 불거졌다.   민주당측은 한 후보의 부인이 2003년 양도소득세 4600만원 납부를 했음에도 그해 재산변동 내역에는 양도한 자산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2002년 당시 서울 논현동과 강원도 춘천에 집을 두고도 남의 집이었던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전입신고를 한 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한 후보자가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재무위원으로 활동하며 받은 훈장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한 후보는 "국보위가 내란 목적의 단체라는 대법원 판결도 있는만큼 반납할 용의가 있냐"는 질문에 "훈장을 반납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한편 통합민주당 김효석 원내대표는 본회의에 앞선 의원총회에서 "한승수 총리 후보자의 흠결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며 "과연 한 내정자가 인사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틀간의 청문회 결과를 바탕으로 26일 국회 본회의 직전 당 의원총회를 열어 총리인준안에 대한 당론을 결정한다. 총리인준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려면 재적의원 과반수에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2008.02.21 I 온혜선 기자
  • '이명박 특검'..시나리오별 파장은
  • [이데일리 좌동욱기자] 17일 이른바 '이명박 특검법'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함에 따라 대통령 선거 이후 특검 조사에 따라 어떤 상황이 전개될 지에 '관심'이 쏠린다. 이날 통과된 특검법은 속전속결로 수사를 진행한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가급적 대통령 취임 전후에 맞춰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헌법학자들은 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대통령직을 상실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이날 특검은 '법적 대응'이라기 보다는 '정치 공세'에 가깝다는게 전문학자들의 평가다. ◇ 속전속결 특검 수사..취임식 전후 결과 발표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특검은 내달 중순부터 수사를 시작한다. 1차 조사기간(30일) 내 수사를 마무리 할 경우 오는 17대 대통령 취임식 이전에 수사가 마무리된다. 수사기간을 1차 연장(최대 10일)하더라도 2월말까지는 수사가 마무리 된다. 특검 조사에 따라 이명박 후보가 처해질 상황은 크게 4가지다. 우선 이명박 후보가 올해 대선에서 낙선하는 경우는 사안이 간단해진다. 특검이 수사한 결과를 토대로, 이 후보에 대해 기소를 하면 된다. 물론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와 같이 무혐의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추이를 볼 때 이런 가능성은 높지 않다.   ◇ 취임 전, 확정판결 있어야 당선무효 가능문제는 이명박 후보가 오는 19일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경우다. 특검이 30일 이내 수사를 끝낼 경우 대통령 취임식인 내년 2월 25일 이전에 수사가 끝난다. 하지만 특검이 이 후보의 범죄 혐의를 찾아 기소를 하더라도 대통령 당선자 자격이 상실되지는 않는다.  고려대 장영수 법대 교수는 "공직선거법 상 당선 무효는 확정 판결이 있어야 한다"며 "취임식 이전 확정 판결까지 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확정판결은 1심 결과에 이의가 없을 경우 1심에서 선고될 수 있지만, 이의가 제기되면 2심이나 최종심인 대법원까지 갈 수도 있다. 특검법은 공소제기 후 3개월 내 1심 판결선고를 내리도록 하고 있다. 2심과 3심은 각각 직전심  판결 후 45일 이내 선고해야 한다. 이 후보가 특검 기소 혐의에 대해 최종심까지 진행할 경우 최대 반년이 걸리는 셈이다.   ◇ 취임 후, 대통령 기소 못해특검 수사기간이 길어져 대통령 취임식 이후 이 후보를 기소할 경우, 기소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헌법 84조는 대통령에 대해 내란과 외환의 죄를 짓지 않는 한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 '불소추 특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법과대학 교수 출신인 대통합민주신당 우윤근 의원도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소 자체를 못한다"며 "최대한 수사를 빨리 진행해 취임 전 결론을 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후보가 17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스스로 대통령직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이 후보의 대통령직이나 당선자 신분이 정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장 교수는 "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특검 조사로 인해 대통령직을 상실할 가능성은 0.1%도 안된다"며 "이 때문에 특검법을 통과시킨 것은 이 후보를 법률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의도 보다는 국민 홍보용 정치공세에 불과하다"고 잘라말했다. 다만 특검 조사에서 이 후보의 범죄 사실이 드러나 기소될 경우, 이 후보가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있다. 이 후보는 "BBK와 관련된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대통령직을 걸겠다"고 수차례 공언한 바 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될 경우 공직선거법 34조에 의거, 60일 이내 보궐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며 "이 경우 대통령 선거일은 대통령 혹은 대통령 권한대행자가 선거일 29일 전에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한나라당 "특검법 통과는 다수당 폭거..원천무효"☞''이명박 특검법'' 국회 통과☞檢 "이명박 동영상, 수사결과에 하등 영향 없어"
2007.12.17 I 좌동욱 기자
  • 대선 이후는 온통 ''특검 정국''
  • [이데일리 김수연기자] 이른바 '이명박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대선 직후 정국은 '삼성 특검', '이명박 특검' 등 온통 특검으로 요동치게 됐다. 국회는 17일 한나라당이 표결에 불참한 가운데 이른바 '이명박 특검법'을 재석의원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도 특검 수용 의사를 밝힌만큼 특검법은 이제 일사천리로 시행 절차를 밟을 것이 확실시된다. 특별검사 임명과 준비기간 등을 거쳐 내년 1월 중순 실제 조사가 시작되고, 이후 40일간 조사가 이뤄진다. 이에 따라 빠르면 2월 25일 새 대통령 취임 전까지 수사가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간 수사결과 공개 1회를 포함해 특별검사는 수사를 마치며 그 결과를 발표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새 대통령 취임과 수사결과 발표 시기가 맞물림에 따라 극심한 정국 혼란이 예고되고 있다.  특히 현재 지지율 1위인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고 특검수사 결과 혐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기소되기라도 한다면 당선자 신분으로 '피의자'가 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다. 당선자를 기소할 수 있는 지 여부는 법 조항에 해석 여지가 많고 사례도 희박해 정설이 분명치 않은 상태다. 따라서 기소 여부를 둘러싸고 정국은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기소한다 하더라도 며칠 후 대통령직에 취임한다면 현행 법상 대통령은 내란죄와 외환죄를 제외하고 형사소추를 받지 않게 돼 있어 5년간 기소가 무의미해지는 상황도 설정 가능하다. 반대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고 특검 결과 혐의가 없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이어지는 4월 총선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특검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 해도 당선 직후부터 취임까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꾸려 새 정부 인선을 하고, 정권 인수 준비와 함께 국정 운영 방향의 밑그림을 짜는 등 극히 중요한 시간들이다. 이런 금쪽같은 시간을 특검 조사를 받으며 보낼 경우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어려울 수도 있다.   한편 삼성 특별검사 후보를 대한변호사회가 추천한 것과 달리 이명박 특별검사는 대법원장이 후보를 추천한다. 또 특별검사보 4명 중 2명을 검사나 판사 경력이 없는 사람으로 임명토록 한 것도 눈에 뜨인다. 검찰 조직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삼성 특검과 더불어 이명박 특검까지 이어지면서 검찰조직 쇄신 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2007.12.17 I 김수연 기자
  • ''대회전'' 앞둔 鄭·孫·李…광주서 추석 민심에 ''올인''
  • [노컷뉴스 제공] 정동영·손학규·이해찬 등 대통합민주신당 대선예비주자 3인이 오는 29일 광주·전남 경선을 앞두고 호남민심을 잡기 위해 광주로 총출동했다.광주·전남이 범여권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이고 이 곳 유권자들이 전략적 투표를 한다는 점에서 세 후보에게는 사활적 존재다.특히 광주·전남 경선 다음날 부산·경남 경선이 이어지는 등 광주에서의 승기가 나머지 지역의 경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세 후보들에게 추석연휴는 호남 민심에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초반 4연전 승리로 정동영 대세론에 불을 지핀 정동영 후보는 지난 22일 광주에 내려온 후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해 광주·전남 곳곳을 누비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정 후보는 24일 태풍 나리의 피해를 입은 고흥과 보성의 수해 지역을 찾아 봉사를 하는 데 이어 광주로 올라와 사랑의 집에서 숙박을 한다. 손학규 후보도 이날 아침 일찍 남광주 수산물시장 방문을 시작으로 전남 함평과 영광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는 등 민심행보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오후에는 광주역과 송정리에서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을 상대로 이명박을 이길 필승카드는 손학규 뿐 임을 선전할 계획이다.추석연휴를 맞아 부산·경남과 광주·전남 곳곳을 누비고 있는 이해찬 후보는 23일 오후 광주로 넘어와 1박을 한 뒤 양동 시장 방문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호남민심 구애작전에 나섰다.이 후보는 특히 "지난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이해 광주와 27년 역사를 같이 했다"며 "광주가 만들어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이어 3기 민주정부를 기필코 탄생시키겠다"며 광주민심에 다가갈 예정이다.한편 정동영 후보측과 이해찬 후보 진영의 공방이 주제를 바꿔가며 연일 벌어지면서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특히, 한명숙 후보의 대변인이었던 김형주 의원이 이 후보 캠프에 가세하면서 이 후보측의 정동영 후보 공격의 예봉이 날카로와 지고 있다.이런 가운데 23일 오후 정동영 후보 홈페이지 자유토론방에 광주에서 이해찬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인단명단이라며 1,870명의 신상명세가 기재됐다 한 시간만에 삭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에 대해 이해찬 후보측 김형주 대변인은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을 자행하는 정 후보 측의 위선과 극단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라고 맹공을 퍼부었다.하지만 정 후보측은 "자유토론방은 네티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며 모든 일은 캠프 활동의 결과인양 매도하고 낙인찍는 모습에 참담함을 느낀다"고 김형주 대변인을 비난했다. /CBS정치부 안성용 기자 ahn89@cbs.co.kr
이명박, 개발시대 주역서 대통령후보까지
  • 이명박, 개발시대 주역서 대통령후보까지
  • [이데일리 김수연기자] 가난, 현대건설과&nbsp;정주영, 서울시장. 이명박을 상징하는 키워드들이다. 그의 삶은 개발시대 한국사와&nbsp;고스란히 궤를 같이 한다. ▲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명박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자 이충우씨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45년 가족이 일본에서 아버지 고향인 경북 포항으로 이주했다.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해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지냈고,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살림을 돕기 위해 성냥과 김밥 따위를 팔러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6.25 와중에 폭격으로 누나와 동생을 잃었다. 이명박은 가난을 공부로 딛고 일어선 `입지전`의 전형이다.&nbsp;중학교 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3년 내내 전교 1등 하면 장학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nbsp;졸업했다. `매일 출근하고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사서 공부, 고려대 상대에 들어갔다.&nbsp;4학년때 6.3 데모와 관련해 `국가내란선동`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65년 현대건설에 공채로 입사했다. 해외 현장에 보내준다는 말에 입사 지원했지만, 학생운동 경력으로 취업이 쉽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 입사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등을 통해 유명해진 일화다. 현대건설 입사 5년만에 이사가 됐고 12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현대건설 시절 태국서 목숨걸고 회사 금고를 지킨 이야기,&nbsp;청와대의 자재 주문을 맞추려던&nbsp;옆 공장 사장과 불도저로 땅을 파가며 담판을 벌인 이야기 등&nbsp;`샐러리맨 신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이때 탄생한다. 현대건설 이사 시절인 1970년 부인 김윤옥씨를 만나 결혼했다.&nbsp;&nbsp;정치판에 들어선 것은 19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문했지만 정치인으로의 삶은 기업인의 그것보다&nbsp;순탄치 못했다. 95년 지방선거때는&nbsp;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붙어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다. 이어 96년 총선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종로에서 당선됐지만, 선거비용 초과지출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nbsp;거푸 실패에도 불구,&nbsp;2002년 서울시장으로 뽑히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뚝섬 서울 숲 건설, 청계천 복원,&nbsp;시청 앞 광장 조성 등의 대규모 역사와&nbsp;교통체계 개편, 보행자 중심으로의 거리 정비 등이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nbsp;화려한 이력 중에는 흠집도 적지 않다.&nbsp;노조· 동성애자· 장애인 등&nbsp;소수· 약자에 대한&nbsp;비하성 발언과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발언 등 잦은 설화로 인해&nbsp;성향에 대한 의심을 받기도&nbsp;한다. &nbsp;또&nbsp;서울시장 재직 시절 몇몇 유력인사들과 함께 시민들이 사용하는 남산 실내 테니스장을 주말에 공짜로 특혜 이용했다는 이른바 `황제테니스` 논란&nbsp;등으로 `비호감`을 사기도 했다. &nbsp;`성공한 기업인`이라는 경력도&nbsp;그의 무기이자 약점이다. 현대 출신인 그를 두고 현대 내에서는 좋게 말하는 쪽과 나쁘게 말하는 쪽 두 부류로 갈린다. 일부 현대 출신 인사조차 그의 재산증식 과정에&nbsp;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nbsp;&nbsp;BBK 관련 의혹,&nbsp;여러 차명재산 의혹 등 기업인 시절 부를 쌓는 과정에서 생겨난&nbsp;의혹들은 아직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그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경력에서 부각된 추진력과 난관 극복능력 등은&nbsp;그를 지나치게 강성&nbsp;이미지로 각인시키는&nbsp;역효과도 있다. ◇ 이명박 대통령후보 프로필1941.12.19 일본 오사카 출생54 2 포항 영흥국민학교 졸업57.2 포항중학교 졸업60.2 동지상고 야간부 졸업65.2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65 현대건설 입사70.12.19 김윤옥씨와 결혼77~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78 인천제철 대표이사·한국도시개발 사장 겸임88~92 현대건설 회장92~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전국구)92~94 6·3 동지회 회장96~98 15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종로)2000~현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02~06 32대 서울시장 ▶ 관련기사 ◀☞檢 발표에 朴"진짜 주인 밝혀져"vs 李 "차명의혹 벗어"
2007.08.20 I 김수연 기자
해외여행보험 가입시 주의사항은
  • 해외여행보험 가입시 주의사항은
  • [이데일리 김춘동기자] 최근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전염병 발생 등으로 해외여행보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15일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해외여행보험에 가입할 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을 소개했다. 해외여행보험이란 신체상해나 질병, 휴대품 도난 등 해외여행 중 다양한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보험을 말한다. 손해보험사 콜센터나 대리점, 공항내 보험사 창구와 인터넷 등을 통해 가입할 수 있다. 가령 40세의 남자가 보험기간이 10일인 상해사망 1억원짜리 해외여행보험에 가입할 경우 보험료는 2만4000원 가량이다. 보장기간은 보험기간 첫날 오후 4시부터 마지막날 오후 4시까지며, 단 주거지 출발 전과 주거지 도착 후 발생한 사고의 경우 보상받을 수 없다. 주요 보상내용을 살펴보면 ▲ 여행 중 사고로 사망하거나 후유장해가 남은 경우 ▲ 상해나 질병으로 인해 치료비가 발생한 경우 ▲ 여행 중 발생한 질병(전염병 포함)으로 사망한 경우 ▲ 여행 중 가입자의 휴대품 도난 등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경우 등이다. 통화나 유가증권, 신용카드, 항공권 등은 보상대상 휴대품에서 제외된다. 휴대품을 방치하거나 분실한 경우에도 보상받을 수 없다. 보험에 가입할 때는 여행지(전쟁지역 등)와 여행목적(스킨스쿠버, 암벽등반 여부 등), 과거의 질병여부 등 건강상태, 다른 보험 가입여부 등을 사실대로 기재해야 한다. 가입자의 직업과 여행지 등 사고발생 위험 등에 따라 보험가입이 안되거나 가입금액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대로 알리지 않을 경우 보험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보험약관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단 ▲ 전쟁이나 외국의 무력행사, 혁명과 내란 중인 국가나 ▲ 가입자의 고의나 자해, 자살, 형법상의 범죄행위나 폭력행위 ▲ 직업이나 동호회활동 목적의 전문등반과 스쿠버다이빙 등 위험한 활동 ▲ 질병치료와 무관한 치아보철 비용 등은 사고가 나더라도 보상받을 수 없다. &nbsp;한편 해외여행자가 꾸준히 늘면서&nbsp;해외여행보험 가입자와 가입률도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nbsp;지난 2002회계연도 184만4000명이던 해외여행보험 가입자는 2006회계연도에는 422만3000명으로 두 배이상 급증했다. 같은 기간 보헙가입률은 28.9%에서 39.6%로 상승했다. &nbsp;
2007.08.15 I 김춘동 기자
해외여행보험 10명중 3명만 가입..가입률 저조
  • 해외여행보험 10명중 3명만 가입..가입률 저조
  • [이데일리 문승관기자] 해외여행자가 매년 늘고 있지만 해외여행보험은 10명 중 3명만 가입하고 있어 가입률이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손해보험협회는 29일 2005회계연도(2005년4월~2006년 3월)해외여행자보험 실적을 분석한 결과, 평균가입률은 36.2%였다고 밝혔다. 2005회계연도 동안 해외로 출국한 출국자수는 약 960만명으로 이중 347만명이 여행자보험에 가입했다. 연도별 가입율을 살펴보면 2001회계연도 23.1%, 2002회계연도 28.1%, 2003회계연도 21.7%, 2004회계연도 34.0% 순이었다. 원수보험료는 611억원으로 전년 같은기간보다 8.1% 증가했다. 매년 가입자수가 늘고 있지만 해외에서의 질병이나 상해, 도난 사고 등이 증가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여행보험 가입률이 저조하다는 지적이다. 손보협회 관계자는 "단체여행의 경우 보험가입을 비교적 충실히 하고 있지만 개인이나 가족여행을 떠날 때는 일반적으로 여행보험에 가입하지 않기 때문에 저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외여행보험은 해외여행 중 발생할 수있는 다양한 사고를 보장하는 보험으로 최대 3개월까지 여행기간에 맞춰 가입이 가능하다. 보험가입조건에 따라 여행 중에 발생한 상해나 질병 등 신체사고는 물론 휴대폰 손해, 배상책임 손해까지 보상한다. 그러나 이번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같은 전쟁·내란·폭동 등으로 인한 여행자의 손해는 보장범위에서 제외된다. `전쟁위험담보 특별약관`에 가입하면 이같은 위험도 담보할 수 있지만 보험료가 배 이상으로 비싸질 뿐만 아니라 보험사들이 인수자체를 하지 않으므로 위험지역 여행시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보험전문가들은 지적했다.
2007.07.29 I 문승관 기자
이명박, 가난 속에서 이룬 샐러리맨의 신화
  • 이명박, 가난 속에서 이룬 샐러리맨의 신화
  • [조선일보 제공] “이명박(李明博)의 삶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닮았다”고 이명박 캠프의 박형준 대변인은 말한다. 일제 때 일본에서 태어나 6·25 때는 폭격에 형제를 잃었고, 찢어지는 가난 속에 공부로 일어서서 ‘샐러리맨의 신화’가 된 이명박의 삶이 한국의 발전과정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난…가난…가난 이명박은 노동을 했던 이충우씨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이명박은 “네 살 때인 1945년에 가족 전체가 일본에서 귀국하는데 배가 침몰해 그나마 남은 재산도 바다에 빠뜨리고 알몸으로 시작해야 했다”고 말한다. 다른 형제는 이름이 상(相)자 돌림인데 본인만 ‘명박’인 이유에 대해선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다. 족보엔 상정(相定)으로 돼 있다”고 했다. 고향인 경북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가 터졌는데 미군의 폭격에 바로 위의 누나와 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살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워야 했다. 그 때문에 학교선 “술 냄새 풍긴다”며 구박을 받기도 했다. 살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러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동창생 박이득씨는 “명박이는 그런 생활에서도 구김이 없었다”고 했다. ▲ 이 전 시장의 고려대 재학 시절(오른쪽에서 두 번째).◆끈질긴 학업에의 꿈 이명박은 “중학교 때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로 쓰러져 넉 달간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성적은 전교 2등을 했다”고 했다. 집에서는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하게 했지만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를 다녔다. 끝까지 1등을 했다. 동지상고 동기인 강원구씨는 “명박이가 친구들이 놀릴까봐 밀짚모자 눌러쓰고 행상을 했지만 공부는 정말 잘했다. 동급생들이 대부분 서너 살씩 많은 직장인들이었는데 ‘저놈 나중에 한 자리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당시 친구 김칠복씨는 “학교 배구선수들이 시험거부를 주동하며 명박이에게도 시험을 못 보게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시험 안 보면 장학금 안 준다’고 명박이를 다그쳤지만 명박이는 용감하게 시험거부에 동참했다”고 했다. ▲ 이 전 시장이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64년 6·3 운동 법정에서 국가내란죄로 6개월형을 선고받기 전, 죄수복을 입고 시위 주동자들과 함께 선고를 기다리는 모습(오른쪽에서 두 번째). 주요 신문에 게재됐다.◆꿈을 안고 상경(上京) 형 상득(현 국회부의장)씨를 공부시키기 위해 가족들은 서울 이태원으로 이사했고, 이명박도 서울로 왔다. 돈을 벌기 위해 기말시험만 치고 올라와 고교 1등상과 졸업장도 친구가 대신 전해줬다.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꿨던 당시 그의 꿈은 “매일 출근하고 월급 받을 수 있는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함께 상경했던 친구 김창대씨는 “집이 좁아서 내 하숙방과 노동자 합숙소를 전전했다”며 “하지만 노동하고 와서 늦게 자고 피곤해도 새벽이면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책도 읽고 했다. 늦게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그때 붙은 거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명박은 “돈이 없어 중퇴하더라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지 않겠느냐”며 청계천 헌책방에서 수험서를 사서 대학에 도전, 고려대 상대에 붙었다. 그의 합격 소식을 들은 이웃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새벽에 쓰레기 넝마주이 일을 맡겨준 덕에 학비를 벌 수 있었다.&nbsp;▲ 이명박 전 시장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인 1981년(40세), 정주영 회장(왼쪽)과 함께 강원도 신입사원 수련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학생회장에서 현대 신화까지 고려대 친구였던 천신일(현 교우회장)씨는 “명박이는 말수가 적고 건강도 늘 안 좋아 보여서 넝마주이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줄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이명박은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뽑혀 4학년 때 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6·3 데모를 주동했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살기도 했다. 당시 죄목은 국가내란선동이었다. 이명박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김도현 강서구청장은 “이 전 시장은 감옥에서도 쾌활했다. 말도 많았지만 시국 얘기보다는 ‘누가 면회 왔느냐’, ‘아침밥 어땠냐’는 신변 얘기를 많이 나눴다”고 기억했다. 이로 인해 대학 졸업 후 중앙정보부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취직을 못 하다가 현대건설에 입사할 당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취업의 벽을 뚫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건설에 입사해서는 1년차 때 태국 현장에서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회사 금고를 지킨 일부터 청와대의 부당한 지시에 불도저로 맞서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했던 일 등의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다.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사장이 됐다. 이명박의 정치 스타일도 현대에서 형성된 측면이 크다. 그를 잘 아는 한 작가는 “이 전 시장은 마치 사람 영혼을 빼먹을 듯이 쥐어짜는 스타일”이라며 “밑에서 일하는 입장에선 정말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했다. 현대건설 이사가 된 뒤인 1970년 부인 김윤옥씨를 만나 마포의 14평 새서울아파트에서 사글세로 신혼을 시작했다. 이명박은 부인 김씨와 결혼할 때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공동묘지에서 프러포즈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전 시장은 “집사람을 묘지 아래 두고 혼자 어머니 묘소에서 ‘결혼을 하려 한다’고 보고를 드리고 있는데, 집사람이 무섭다며 뒤따라 올라왔다가 들은 것”이라고 했다. ▲ 이명박 전 시장의 셋째딸 수연(32)씨의 결혼식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아들 시형, 둘째딸 승연, 수연씨 부부, 큰딸 주연씨 부부다.◆순탄치 않았던 정치… 군사정권과의 악연은 그가 현대 사장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1980년대 신군부는 현대그룹에 “3김씨에게 준 정치자금을 대라”며 추궁했다. 현대자동차를 포기하라는 압력도 넣었다. 정주영 회장은 포기 각서에 도장 찍는 일을 이명박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는 “내 손으로 넘겨줄 수 없다”며 끝내 버텼다. “그날 밤 회사로 돌아와 정 회장을 만나니 말로만 듣던 피눈물이 정말로 눈에서 나더라”고 했다. 그러나 현대 관계자들 중에는 현대를 그만둔 이명박 얘기를 좋게 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로 나뉜다.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동지상고 시절 학생기록부.그는 이처럼 악연이 있던 정치판에 19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문했다. “고르바초프라는 한 인물로 인해 세계에 생긴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도 뭔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정치입문 출사표였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대통령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인 이명박의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95년 지방선거 때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의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다. 96년 총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물리치고 정치1번지 종로에서 당선됐지만 선거비용 초과 지출 혐의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서울시장 출마의 꿈도 16대 국회의원 출마도 접어야 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미국에서 공부하며 몸을 추스른 이 전 시장은 2002년 서울시장에 선출되면서 정치에서도 ‘성공신화’를 다시 꿈꾸고 있다. 그러나 여론지지율 1위를 질주하던 이 전 시장은 11일 국회에서 384억원 횡령사건 관계회사인 BBK와의 관련설(說) 때문에 여당의원들의 집중타를 맞는 등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명박 프로필 1941.12.19 일본 오사카 출생 54 2 포항 영흥국민학교 졸업 57.2 포항중학교 졸업 60.2 동지상고(야간) 졸업 65.2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65 현대건설 입사 70.12.19 김윤옥씨와 결혼 77~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78 인천제철 대표이사·한국도시개발 사장 겸임 88~92 현대건설 회장 92~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전국구) 92~94 6·3 동지회 회장 96~98 15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종로) 2000~현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02~06 32대 서울시장 07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장 아호: 일송(一松) 별명: 컴도저(컴퓨터+불도저), 훈남(훈훈한 남자) 본적: 경북 포항시 북구 홍해읍 의창면 덕성동 537 본관: 경주 병역: 면제(입소 후 기관지 확장증으로 의병 퇴소) 혈액형: B형 신장: 173㎝ 체중: 70㎏(허리 32인치) 시력: 좌1.0 우1.0 신체비밀: 남보다 손바닥 길이만큼 팔이 길다 종교: 기독교(장로) 주량: 맥주 1병 흡연: 안 피움 취미: 테니스·수영·조깅·고전음악 가족: 부인 김윤옥씨와 1남3녀 존경인물: 안창호, 간디 좌우명: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가훈: 정직 첫사랑: 초등학교 5학년 때 짝 감명 깊은 책: 슈바이처 전기, 무소유(법정 스님) 좋아하는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함석헌) 감명 깊은 영화: 오아시스, 집으로 선호음식: 순두부, 비빔밥, 스파게티 애창곡: 사랑이여(유심초) 아침이슬(양희은) 이거야 정말(윤항기)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보아, 비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 장동건, 송강호 스트레스 해소법: 운동, 친구와 전화통화 살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 어머니 학교 때 가장 못했던 등수: 3등 가장 창피했던 때: 고교 시절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할 때 몇 살까지 살고 싶나: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나의 패션: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가 챙겨주는 대로 입는다 어린 시절 꿈: 선생님, 소방관 잊을 수 없는 친구: 어려운 시절 달걀을 매일 갖다 주었던 양계장 집 친구 잃고 싶지 않은 것 세 가지: 가족·건강·친구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어머니 살아계실 때 새 옷 한 벌 못해드린 것 내 일생 3대 사건: 좋은 어머니를 만난 것, 중학교 선생님의 야간고 입학 권유,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것 은퇴 후 나의 모습: 초등학교 선생님(명예직으로라도) 외국어 구사: 영어(상) 저서: 신화는 없다(96)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02),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05), 온몸으로 부딪쳐라(07), 어머니(07) 학위: 고려대 경영학사, 서강대 명예경영학박사,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 명예박사, 몽골국립대 명예경제학박사, 목포대 명예경제학박사 상훈: 체육훈장 백마장(82) 민족훈장 석류장(84) 금탑산업훈장(85) 50년을 만든 50대 인물(98 조선일보) 세계의 인물 대상(05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몽골정부 우정훈장(05) 코리아베스트드레서(05 모델라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05 한국언론인연합) 대한민국 뉴스위크 아시아판 차세대 리더(05) 정책인대상(06 고려대) 한국관광진흥대상(07 한국관광학회)
  • [보험 든 남자] 든든한 여행 도우미 여행 보험(VOD)
  • [이데일리 보도제작부] 여행이나 유학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더불어 주목받는 보험 상품이 있다. 여행 보험이 그것인데, 여행 보험이란 말 그대로 여행 중의 사고는 물론 유학, 장기 출장 등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보험이다. &nbsp;다치거나 아플 경우, 여행 경비나 휴대폰을 도난 당했을 경우 바로 이 여행 보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여행 보험은 주로 손해 보험사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 LIG 손해 보험에서는 유학생과 여행자 장기 출장자 보험 등 각각의 목적에 따른 다양한 플랜의 여행 보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nbsp;국내와 해외 여행지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상해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사고를 당한 여행자에게 전화 한통만으로도 전문 서비스 요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nbsp;또한 피보험자가 2주 이상 현지에서 입원해야 할 경우, 2인의 가족이 방문할 수 있도록 왕복 교통비와 숙박비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행방 불명 또는 조난의 경우, 수색구조 비용을 보장하기도 한다. &nbsp;현대 해상의 여행 보험은 의료 지원서비스를 통해 사고 등의 긴급 상황 발생 시 보험 가입액의 한도로 현장 병원에 지불보증을 한다. 각종 의료 상담은 한국어가 가능한 의사와 연결되며 국내 가족에게도 긴급 연락을 취한다. &nbsp;그 밖에 사고 발생 시에는 보장 받기 위한 구비 서류 안내, 보상 절차 상담 및 담당자와의 연결을 돕는 등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여행 보험의 경우, 본인 부주의에 의한 경우에는 보상 받을 수 없다. 또한 해외 여행의 경우에는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해당 국가의 전쟁이나 내란 등에 의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 별도의 특약에 가입해야 한다. &nbsp;여행 보험 중에는 무료로 가입하는 상품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보상이나 한도가 크게 낮으니 꼼꼼히 체크해봐야 한다. 사고 발생 시 준비해야 하는 서류와 절차 등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nbsp;MBC '개그夜' 김완기씨가 진행하는 [자신만만 재테크] '보험 든 남자'를 보시려면 이데일리(www.edaily.co.kr) 홈페이지에서 '이데일리TV'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기사 미리보기 끝-->
  • `인혁당 재건위 사건` 32년만에 무죄 판결(상보)
  • [이데일리 조용철기자] 지난 75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인민혁명당`을 만들어 국가 내란을 꾀하려 했다는 혐의 등으로 8명이 사형당했던 `인혁당 사건`이 3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함에 따라 조작 논란이 제기되어 온 군사정권 당시의 공안사건들에 대한 재심청구 및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국가전복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고 우홍선씨의 부인 강순희씨 등 유족 8명이 관련증거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재심을 청구한 사건에서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재판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선고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의 경우 이미 폐지된 법률이라는 이유로 면소판결했다. 재판부는 다만 여정남씨의 경우 이번 사건 이외에도 대구지역에서 반독재 구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해 교부한 혐의(반공법 위반)로 기소돼 대구지법에서 재판을 받다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병합된 부분에 대해서는 징역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 74년 중앙정보부가 24명을 국가 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75년 4월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18시간만에 8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앞서 대법원은 2005년 유족들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재판을 진행했으며 공판 과정에서 검찰은 과거 수사와 재판이 위법했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사건 유족 46명은 지난해 11월 "국가기관 자체 조사 결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이 밝혀졌다"며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낸 바 있다.
2007.01.23 I 조용철 기자
  • 인혁당 재건위 사건 32년만에 무죄 판결
  • [이데일리 조용철기자] 지난 75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인민혁명당`을 만들어 국가 내란을 꾀하려 했다는 혐의 등으로 8명이 사형당했던 `인혁당 사건`이 3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함에 따라 조작 논란이 제기되어 온 군사정권 당시의 공안사건들에 대한 재심청구 및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국가전복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고 우홍선씨의 부인 강순희씨 등 유족 8명이 관련증거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재심을 청구한 사건에서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 74년 중앙정보부가 24명을 국가 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75년 4월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18시간만에 8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앞서 대법원은 2005년 유족들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재판을 진행했으며 공판 과정에서 검찰은 과거 수사와 재판이 위법했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사건 유족 46명은 지난해 11월 "국가기관 자체 조사 결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이 밝혀졌다"며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낸 바 있다.
2007.01.23 I 조용철 기자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