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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시스템의 변화..정부와 재벌-워버그 보고서②
-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한국의 경제시스템은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사후 대응"에 주력해 더 많은 도미노가 쓰러졌다.
도미노는 한보그룹에서 시작됐다. 종금사가 영향을 받았고 다른 중소 재벌이 무너졌다. 기아그룹 붕괴를 거치면서 은행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외국투자자들이 이탈했고 외환이 급등했다.
소비가 위축되고 실업이 급등했다. 남아있던 재벌들이 하나둘 쓰러지거나 워크아웃에 편입됐다. 마침내 대우그룹이 무너지고 투신권이 된서리를 맞았다. 올해는 현대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다음 차례는 취약한 은행이 될 것이고 도미노의 끝에는 정부가 서 있다.
◇변화가 암시하는 것.
오래된 꿈(Old Dream)이 깨졌다면 새로운 꿈이 시작되고 있다. 새로운 비젼은 삼성이나 실패했지만 대우에서 볼 수 있다. SK는 통신과 화학 분야에서 부상하고 있다. 신세기통신도 인수했다.
변화는 4가지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기업형태와 지배구조가 바뀌고 있다. "회장"이라는 지위에도 변화가 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배구조도 투명해지고 있다.
둘째, 재무적인 구조조정이다. 차입경영을 차단하기 위해 부채비율 200%라는 가이드 라인이 정해졌다.
셋째, 모방투자(Copy Cat Investment)는 끝났다. 다른 재벌을 모방해서 여러 사업분야에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투자가들의 지분이 늘어났다. 경영에 대한 감시가 심화됐다.
◇정부와 재벌
한국 정부와 재벌에 대해 3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면해 왔다. 우선 정부와 재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치적인 측면에서 접촉했다.
둘째,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제어하려는 관료집단과의 대면이다. 관료집단은 재벌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셋째, 한국의 산업을 이끌어가는 선봉대로서 재벌을 붇돋우는 측면도 있다.
재벌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는 공정거래위원회다. 미국의 반독점 법률과 비슷하지만 독점을 분해할 힘은 없다. 한국 정부는 과거에도 재벌에 대한 조사나 해체를 수행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국제그룹의 분해와 같은 예가 있다.
◇정치인, 관료, 은행가 그리고 재벌
김대중 정부는 과거의 부패를 청산하는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수행했다. IMF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재벌은 이 두가지에 모두 해당했다. 개혁 프로그램은 정부의 구조도 바꿔 나갔다.
재벌 시스템은 한국 정부가 경제를 다루는 방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만약 정부가 거대산업을 조성하기 위해 은행을 임의로 이용하지만 않았어도 재벌과 은행의 관계가 지금처럼 얽혀있지는 않을 것이다.
97년의 한보그룹 위기는 산업과 은행의 결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여줬다. 한보는 사실상 정부의 조정하에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당시 대통령의 아들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보 사건은 4가지 차원에서 한국의 위기를 보여줬다. 1)부패와 한국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2)재벌이 어떻게 경영되고 거대산업이 어떻게 규제되는지 3)금융시스탬이 얼마나 취약한지 4)세계적인 잣대로 볼 때 한국산업의 신뢰도가 얼마나 약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부패척결과 구조조정에 대해 노력했지만 99년의 "옷로비 사건"과 같은 정부 권력과 재벌 사이의 불미스러운 관계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는 한국의 경제기구중 가장 강력한 기구다. 금감위는 금융과 재벌 구조조정을 대행했다. 재벌에 대해 책임질 기구는 아니지만 재벌을 둘러싼 환경 변화를 주도했다. 이는 금감위가 은행과 주식시장을 컨트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감위는 재벌의 부채 구조조정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으며 이를 감시하고 있다. 금감위는 한국 산업의 재정적 건강도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2년반의 개혁
김대중 정부의 복지경제 정책과 반재벌 정책의 근간은 서울대 변형윤 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변 교수는 "정책 입안자들이 성장과 효율에 경도돼 "공정한 경쟁과 이익의 추구"라는 원칙을 포기하는 비싼 대가를 치뤘다"고 말했다.
변 교수와 그의 제자들은 89년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에는 정책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변 교수는 비공식적으로 김대중 정부에 자문을 했고 다른 멤버들은 공직에 진출했다. 전철환 한은 총재, 김성훈 농림부 장관, 김태동 청와대 수석, 이진순 KDI 원장 등이 있다.
특히 김태동 수석은 재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김 수석은 과거 재벌을 "한국산업의 5적"이라고 비난했다.
이들 개혁론자의 입장에서는 재벌이 IMF 위기의 주범이었다. 이같은 생각들은 처음에 은행과 관료들을 비난으로부터 구해냈고 은행과 관료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98년과 99년의 재벌개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50년대 이후 지속된 정책에 한가지를 추가했다. 김 대통령은 재벌이 기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주회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은 98년 2월 재벌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98년초 정부는 재벌의 회장실을 없애도록 조치하고 불법적인 계열사 지원을 금지했다.
지주회사는 다음의 조건을 맞춰야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지수회사는 자회사의 지분을 50%이상 소유해야한다. 계열사는 손자회사를 가질 수 없다. 부채비율이 100%를 넘기면 안된다. 98년에 이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대재벌은 없었다.
◇회장실 패쇄
회장실의 패쇄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독립적인 회장실 기능의 중단 2)구조조정 사무실은 오직 하나의 계열사에만 존재 3)회장과 계열사와의 법적인 관계정립 4)소액주주의 위상 강화 5)계열사간의 자금지원 금지.
이같은 조치는 외환위기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인 정치적 조치로 재벌을 조정하는 족벌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회장실 패쇄는 대부분의 기업에서 일시적인 조치였다. 98년 7월, 계열사간 지급보증이 없는 회사에 대해서는 지주회사가 기술적으로 허용됐다.
일부 재벌은 즉시 계열사를 합병, 하나의 회사로 만들고 지급보증을 없앴다. 그리고 법적으로 허용된 회장실을 다시 만들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회사 통합은 욕구도 떨어졌고 쉽지도 않았다. 99년 중반, 많은 계열사들이 수익성을 회복했고 통합의 이점도 없어졌다. 동아그룹의 경우처럼 분사가 합병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지주회사 설립이 늦어진 이유는 우선 불만족스러운 법률과 선단식 경영을 제거하려는 정부의 압력때문이다.
회장실 패쇄의 진정한 의도는 1)투명하지 않은 계열사 지배를 막고 2)족벌경영을 그만두거나 법률적 책임이 있는 경영자가 되라는 압력이다.
재벌은 이같은 의도를 기꺼이 따르지는 않았다. 재벌은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을 피하기위해 몸부림쳤다. 지주회사는 논리적으로 합당한 "재벌의 진화"이기 때문에 정부는 기업구조와 경영시스템의 합리화를 뒤로 미뤘다. 이것은 이후 구조조정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사업영역의 축소
장기적인 정부정책 요소의 하나는 재벌의 성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재벌을 핵심사업으로 집중시키위해 "빅딜"정책이 추진되기도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계열사들을 청산시키는 조치도 취해졌다.
한국의 과잉 생산능력을 고려할 때 다른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합리적인 사업 판단이 아니다. 재벌 문화에서는 합병도 길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딜은 여러분야에서 진행됐다.
외국인 투자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이렇다. 한국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충분히 빠르게 진행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재벌 입장에서는 대우의 붕괴를 들어 이같은 견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부가 스스로의 구조조정에서 느리게 행동했던 것처럼 재벌 구조조정도 느리게 진행할 것이라고 본다.
- 김철호 명성 회장 불구속기소-날개 다시 접나
- 김철호 명성회장(62)이 다시 날개를 접을 것인가. 지난해 5월12일 대한생명 인수 전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던 김 회장이 지난 17일 태백산 폐광지역 개발 명목으로 20억원가량을 사취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김 회장은 지난 96년 4월 조경업자 이모(55)씨로부터 백지 당좌수표 20장을 건네받아 액면가 21억여원을 기재한 뒤 사업자금으로 쓰고 갚지 않은 혐의다. 이에대해 김회장측은 "이씨는 당시 명성 계열사의 대표이사였던데다 문제가 된 수표를 모두 회수해 피해가 없었는데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했다" 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83년 구속된 후 10년만인 93년 가석방, 98년 잔형 집행 면제에 이어 지난 8월 광복절에 복권돼 "자유"를 찾은 그가 3개월여만에 다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호남비료에 다니던 김 회장은 29세이던 66년 운수회사를 설립했다. 한때 130대의 코로나택시를 가진 대운수업자가 돼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 78년 관광업에 손댔다가 실패한 그는 79년 오성골프장을 인수했다. 이때부터 레저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81년4월부터 콘도미니엄을 분양하며 큰돈을 벌었다. 레저 관광 건설 무역 전자 식품 등 21개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그가 사업용으로 사들인 땅은 얼마후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자연히 의혹이 제기됐고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전북 출신으로 전주공고 한양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한 그를 70년대 율산 신선호 회장과 함께 한때 탄압받은 "호남기업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김 회장은 83년 7월31일 국내 각 일간지 1면 광고로 "강호 제현께 알리는 말"을 통해 국세청 세무조사로 그룹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 광고는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해 12월28일 선고공판을 통해 벌금 92억3000 만원징역 15년형을 받았다. 84년 8월 벌금은 79억3000만원으로 깎였지만 1280만평의 명성 소유 땅 대부분이 한화로 넘어갔다.
당시 쟁점은 한빛은행(당시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 대리 김동겸씨를 통해 조달한 사업자금이 예금이냐 사채였냐 하는 것. 검찰은 예금으로 간주했지만 대법원은 87년 이 돈은 사채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 회장은 83년 수기통장을 불법으로 발급받은 뒤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돼 서울 고법에서 징역 15년, 벌금 79억3천만원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93년 가석방됐고, 98년 잔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지난 8월 광복절 사면으로 복권됐다.
그는 88년 11월의 5공비리특위 청문회에서 당시 구치소에 수감중이던 김 회장은 국회에 나와 증언하기도 했다. 옥중에서 문학에 심취해 87년에는 김동봉이란 필명으로 예술계 제7회 신인 상을 받기도 했다. 가석방후 95년 3월부인 신명진(56)씨와 인사동에서 시사전을 열기 도 했다. 95년 노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명성은 83년 해체 후 93년 재건됐다. 재기를 꿈꾸는 김 회장이 꺼내든 카드는 94년 2월 태백권 대규모 관광레저단지 조성 계획. 일명 "스노우 마운틴 월드" 프로젝트다. 1조9900억원을 들여 2782만8000평 부지에 골프장, 스키장, 해상스 포츠천국 등을 건설한다고 제시했다. 명성그룹이 사업신청을 한 곳은 태백시황지동 함백산 일대 서학레저단지를 비롯, 태백시화전동 태백관광레저단지, 정선군고한읍 고토일복합리조트, 정선군남면 관광레저단지, 영월군상동읍 장산스키장등 5개 사업. 투자 예정액은 1조1000억원. 폐광지역 종합개발을 위한 강원도의 민자유치계획 1조9000억원의 57.9%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사업계획도 스키 슬로프 136면, 골프장 54홀, 콘도 3050실, 호텔 1100백실등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였다. 명성그룹은 자금 조달 능력에 대해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관광레저 투자 전문회사인 VCC사 등으로부터 약속받은 12억달러가 사업자 지정과 동시에 지원되며, 나머지는 부동산신탁투자방식으로 개발하면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94년 발표한 전남 완도 낚시전문 콘도 "청해진"과 전북 남원 지리산콘도도 97년 공사가 중단됐다. 이유는 미미한 분양실적에 따른 공사비 부족. 일단 착공한 뒤 콘도를 분양해 공사비를 조달하겠다는 복안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3월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 시화방조제 앞에 "명성아쿠아토닉 호텔"을 짓겠다고 경기도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도로부터 "현실성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 계획은 경기 안산시 대부동 시화방조제 중간 작은 가리섬과 북서쪽 외해의 공유수면을 포함해 5만9000여평에 수상 25층 수하 4층 객실 664실규모의 원추형 호텔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카지노와 스카이라운지, 해양박물관 등 부대시설을 갖추며 방조제와 호텔 사이는 케이블카로 연결하는 것. "2002년 월드컵" 관광특수에 맞춰 늦어도 공사에 들어가 3570억원으로 추산되는 사업자본은 전액 미국과 호주의 투자회사로부터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
"강릉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선 강원도 칠성산에 태권도 수련장이 건립되면 일대를 개발해 중국소림사를 능가하는 관광명소로 개발하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역시 무위로 끝났다. 강원도 성산에 태권도 수련장이 건립되면 미국 한곳에서만 매년 전체 태권도 동호인의 10%에 해당하는 50만명 정도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에는 대한생명 인수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 여름 밤의 꿈"이 됐다. 정책당국은 "해프닝"정도로 무시했다. 일본 민단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겠다고 밝혔으나 신빙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 뒤 1년여만에 드러낸 김 회장의 모습은 "불구속 기소"였다. 20여년간 꿈꾸고 추진해온 레저사업에 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재기의 꿈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는 듯하다.
- (초점) 벨 캐나다가 엄청난 투자수익을 올리기까지- AWSJ
-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이 30일 벨 캐나다 인터내셔널과 AIG가 어떻게 한솔M.com에 투자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는 지에 대해 1면 좌측 기사로 상세하게 보도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은 벨 캐나다와 AIG이 투자수익을 거둔 사실은 외국인의 관점에서는 한국 투자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벨 캐나다와 AIG는 최근 한국의 한 이동통신회사에서 12억 달러의 투자수익을 거뒀다. 2년이 안된 시기에 5배의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였던 한국은 금융위기로 인해 외국인 투자자에게 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1998~1999년중 200억 달러가 넘는 외국인 직접투자 자금이 유입됐다.
물론 벨 캐나다와 AIG가 투자하고 투자금을 빼기 까지의 과정이 쉽 지는 않았다.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관련된 정치적 스캔들이 투자에 위협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투자를 했고 수익을 낸 뒤 탈출할 수 있었다.
이번 성공은 절묘한 타이밍과 20년을 거슬러 올라간 인간 관계, 투자비용이 솟구칠 때 빠질 줄 알았던 미국 교육을 받은 경영진 덕분이었다.
벨 캐나다가 한솔M.com의 경영감독을 맡고 한국통신에 주식을 매각한 것은 한국의 기업문화에 있어서 분기점이 된다. 외환위기 이후 첫번째 대규모 투자였을 뿐 아니라 외국회사가 처음으로 한국 통신회사의 최대 주주가 됐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외국인 투자자가 정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현금 다발을 갖고 한국 시장을 떠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UBS워버그 증권 서울의 매니징 디렉터인 리처드 사무엘슨은 "큰 진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그 계약은 정치적으로 이슈화가 될 만큼 큰 건이었다. 그러나 방해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젠트 퍼시픽 그룹의 매니징 디렉터인 줄리안 마요는 "탈출구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며 "우리가 앞으로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1998년초 벨 캐나다와 AIG는 이미 3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는 한솔M.com에 주목했다. 그리고 휴대폰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이 계약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재가를 받았다. 사실 델 캐나다의 데렉 버니 회장은 1980년 주한국 캐나다 대사였다. 그는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정치인에 대해 사형집행을 하지 말아달라고 청원한 여러명의 외교관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형선고를 받은 정치인은 대통령이 돼 있다.
한솔M.com의 조동만 부회장은 버니 회장의 과거 행동이 계약에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1998년초 함께 김대중 대통령을 찾았을 때 조 부회장은 이 일을 상기시켰고 그 때문에 분위기가 아주 좋게 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솔M.com이 휴대폰 사업권을 따기 위해 정부 관료에게 로비를 했다는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계약이 무산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조 부회장은 검찰에서 180시간이나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조 부회장의 경영권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고 확인시켜 줌으로써 1998년 9월에 거래가 성사될 수 있었다.
그 때 벨 캐나다는 1억5900만 달러, AIG는 1억600만 달러를 투자해 각각 23.3%, 15.5%의 지분을 확보했다. 최대 주주가 된 벨 캐나다와 AIG는 16명의 이사 자리중 4개, 2개를 확보했다. 그리고 회사 경영은 한국인 경영진이 맡기는 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동의를 받도록 했다. CFO는 벨 캐나다측이 맡았다.
처음에는 이 계약이 대박인 것처럼 보였다. 1998년 초부터 1999년 말까지 한솔M.com의 시장 점유율은 매년 2배씩 성장하는 한국 휴대폰 시장에서 두 배로 늘어났다. 벨 캐나다와 AIG가 처음 투자했을 때 6억7000만 달러 정도였던 시가총액은 기술주 거품이 거의 최고치에 달했던 기업 공개시에는 폭발적으로 증가, 두 회사의 지분은 시가총액으로 40억 달러에 육박했다.
그러나 경쟁심화로 인해 수익을 내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한솔M.com의 경우 가입자가 2년만에 3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거의 수익을 내지 못했다. 조 부회장은 "미국에서는 50만 명의 가입자만 확보하면 엄청난 돈을 번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휴대폰을 거줘나눠줬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조 부회장의 시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당초 그는 한국 최대의 휴대폰 서비스업체를 운영하려는 꿈을 갖고 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노스웨스턴대 MBA 출신인 그는 냉정한 투자자처럼 적절한 시기에 파는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업공개 한 달전인 1999년 11월 한솔과 벨 캐나다, AIG가 탈출 전략에 동의했다. 조 부회장은 "비이성적인 경쟁을 지탱하는 것은 주주나 종업원에게 좋지 않았다"고 말한다.
확실한 구매자가 있었기는 하지만 매각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협상을 시작했을 때 기술주는 치솟고 있었다. 벨 캐나다와 AIG, 한솔은 주당 7만 원에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4월 버블이 꺼지면서 그들은 주당 3만 원 수준에서 팔 수 밖에 없었다. 차액은 25억 달러나 된다.
첫번째 구매자로 등장한 곳은 LG텔레콤이었다. 그러나 지난 2월 가격 차이로 협상이 무산됐다. 1월6일 6만3300원까지 갔던 주가는 4만원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는 한국통신이 매입의사를 밝혔으나 3월에는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다. 한솔M.com의 집행 부사장인 사무엘 권은 "한국통신은 큰 인수를 해본 적도 없었고 시기도 안좋았다"고 말했다.
LG가 다시 협상 테이블로 되돌아왔다. 3주간의 집중적인 협상 끝에 협상이 거의 타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4월28일 초 저녁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변호사와 투자은행 관계자들이 호텔 방에서 계약서 초안을 다듬고 있는 동안, 벨 캐나다의 아시아 대표인 Mr 체가 LG측과 최종 미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매수자측을 만나고 1시간 만에 돌아온 체가 협상이 다시 깨졌다고 말했다. 벨 캐나다를 대리한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사장인 매튜 긴스버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믿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2~3시간 후면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뉴욕에 있었다. 나스닥 주가가 급락하면서 한솔M.com 주가도 60%나 하락, 2만5000원까지 하락해 있었다. LG텔레콤의 인수가격은 대략 5만원 선이었다. LG의 대변인인 수 김은 가격에 불안해 했다고 말한다.
계약이 성사되지도 않았고 홍콩으로 돌아갈 비행기도 없었기 때문에 20여명의 협상팀은 하얏트 호텔의 J.J.마호니스에서 술을 퍼 마셨고, 조 부회장은 호텔 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탈출 전략이 실패할 즈음 한국통신이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가능한 빨리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 신문들이 정부가 대주주인 한국통신이 외국인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론들이 협상을 주시하자 양측은 홍콩과 서울의 르네상스 호텔을 오가면서 비밀스럽게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6월 첫째주 관계부처에서 거래를 승인했고, 한 주 뒤에 청와대에서 OK 사인이 나왔다.
서울 근교의 한 골프 클럽에서 양측 실무진이 가격을 뺀 나머지 사안을 최종 검토하는 동안, 양측 대표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최종 타결을 보았다. 이로써 벨 캐나다는 9억9500만 달러, AIG는 6억 달러를 챙겼다. 7월26일에 거래가 끝났다. 한솔M.com의 어제 종가는 1만5900원이다.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긴스버그는 "결국 한국통신과 함께 방안에 들어간 벨 캐나다, 한솔, AIG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조언자나 변호사도 없이 그들이 계약을 성사시켰고 악수를 나눴다"고 말했다.
- (초점) 미 언론의 생명공학주 분석
- 24일 미국 뉴욕 증시에서 생명공학, 특히 게놈 관련주들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에 따라 생명공학 주식이 과연 계속해서 오를 수 있을 것인가와 생명공학 기업들이 언제쯤이나 수익을 낼 것인 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로이터 통신 등이 이날 일제히 생명공학 업종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일단 24일 게놈주 상승은 미국의 전미건강연구소(NIH)의 발표 때문이었다. NIH는 이날 태아의 줄기 세포와 관련된 리서치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으로 돈을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가 중단될 수도 있는 프로젝트였다. 줄기 세포(stem cells)는 다양한 조건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미성숙 세포를 말한다. 줄기 세포는 초기 단계에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장하면서 다양한 세포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줄기세포를 규명하게 되면 다양한 질병의 원인을 알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가 있다.
이 발표로 휴먼 게놈 사이언스는 15%, 셀레라 게노믹스는 14.7%, 어피메트릭스는 13.5%, 아브게닉스는 14%, 밀레니엄 제약은 8% 이상 올랐다. 진 로직과 메드이뮨 등도 큰 폭으로 상승했으며, 태아상태의 줄기세포와 직접 관련된 게놈 업체들인 게론은 25%, 아스트롬 바이오사이언스는 60%, 스템셀스는 30% 폭등했다. 아스트롬은 미국 뉴욕 증시에서 거래량 상위에 들기도 했다.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는 모든 줄기 세포 관련 생명공학 업체가 상승한 것이다.
휴먼 게놈 사이언스와 셀레라 게노믹스는 줄기 세포와 관련된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초 유전자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강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연구소와 동물 실험을 거쳐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 약품을 개발해 이익을 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생명공학 업종에 가장 큰 문제는 언제쯤이나 수익을 낼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생명공학 기업들은 과거보다 펀더멘털이 훨씬 좋은 상태다. 따라서 올해에도 다른 업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공학 기업들은 작년에 113.5% 폭등했으며, 올해에도 3월에 40.4%나 폭락한 뒤 5월말 이후로 54.9%나 상승했다. 올들어 지금까지 39.3% 상승해 있는 상태. 생명공학 업종보다 더 많이 상승한 업종은 반도체등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상승폭이 컸던 만큼 변동성도 어떤 종목보다도 크다. 이처럼 생명공학 기업들의 주가가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대부분의 생명공학 업체가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비즈니스 모델도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상태며, 이익을 내는 업체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미 연방식품의약국(FDA)가 생명공학 업체가 개발한 약품에 대해 승인을 내릴 지 여부는 더욱 불투명한 상태. 만약 FDA가 승인을 거부할 경우, 수년에 걸친 연구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또한 정부 정책에 쉽게 흔들린다는 리스크도 안고 있다. 지난 봄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인간 유전자 지도의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하면서 주가가 폭락한 것이 그 예다. 그리고 클린턴이 이 발언을 번복하면서 생명공학 주가는 다시 급상승했다.
이처럼 생명공학 업체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생명공학 업종의 주가는 1991년에 250%나 폭등한 뒤 이후 7년간 매년 평균 12%씩 주가가 하락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명공학 업체들의 펀더멘털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금처럼 전망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승인을 받은 의약품 숫자는 1995년 6개에서 작년에는 70개로 늘어났고, 올해에는 90개에 도달할 전망이다. 또 이익을 내는 업체도 10년 전에는 3개에 불과했지만 작년에는 14개가 됐고, 2001년까지는 40개에 이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생명공학 업체들이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기존의 대형 제약업체들과의 계약에서 칼 자루를 쥐게 됐다고 보도했다. 제약회사와 노예문서와 다름없는 계약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제약회사들이 생명공학 업체에 자금을 대고 거기서 나온 연구성과의 이익을 거의 전부 독차지했다.
그러나 이것이 게놈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셀레라 게노믹스는 지난 6월 인간 유전자 지도의 완전 해독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생명공학 업체들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셀레라의 유전자 지도 해독을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과 비견할 만한 과학적 업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생명공학 기업들의 자금확보가 훨씬 용이해지고 있다. 생명공학 기업들은 올 상반기에만 221억 달러의 자금을 유지했다. 작년에는 120억 달러, 1998년에는 81억 달러였다. 그리고 몇 년 전만 해도 한 기업이 기업공개(IPO)로 끌어들이는 자금 규모가 30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1억 달러 이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아브게닉스와 메다렉스, 밀레니엄 제약 등은 올 초에 각각 4억 달러 이상을 끌어들였고, 셀레라 게노믹스는 3월에 있었던 2차 증자에서 1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7월초 이래 지금까지 30개 생명공학 기업이 IPO에 성공했으며, 이들이 끌어들인 자금만도 25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16개 기업이 IPO를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이 자금이 생명공학 기업들이 제약회사들과의 계약에서 칼 자루를 쥐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일부 생명공학 기업들은 개발한 신약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을 50대50으로 나누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아브게닉스와 밀레니엄 제약이 각각 이뮤넥스, 아벤티스와 이러한 계약을 맺었다. 제약회사들이 생명공학 기업들에 2%의 로열티만 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그런 불평등한 계약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생명공학 기업과 제약회사간에 힘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알로스 세라페틱스 같은 업체는 아예 IPO로 확보한 9000만 달러의 자금을 토대로 자신들이 직접 신약을 개발, 판매하겠다고 선언했다. 제약회사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공학 기업들의 미래가 밝지는 않다. 돈이 풍부하지 못한 기업도 있는 것이다. 레콤비난트 캐피털이 지난 1분기에 247개 생명공학 기업들을 조사한 결과, 61개 업체가 1년을 버틸 현찰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재정상태가 좋은 기업들도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밀레니엄 제약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케빈 스타는 “게놈은 규모의 게임이며 게놈 이후는 더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게놈으로 성공하려면 1억 달러가 아닌 수십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공학 기업들이 실제 대박을 터뜨리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생명공학 기업들에게는 리스크 요인이다. 1991년과 1995년의 붐이 쉽게 수그러들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 다시 투자자들이 “생명공학 기업들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는 것. 따라서 생명공학 기업 주식은 항상 폭락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체이스 H&Q의 애널리스트인 비벡 제인은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말한다. 생명공학 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했던 1991년에는 2년을 버틸 자금을 확보할 생명공학 기업이면 매우 재무상태가 좋은 기업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많은 기업들이 5~6년을 버틸 자금을 확보해 놓은 상태라는 것이다. 연구개발에서 신약개발까지 할 수 있는 돈을 확보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개발이 가까워질 수록 자금확보가 더 용이해질 수도 있다.
미국 언론들은 생명공학 기업에 대해 투자할 경우에는 단기 급등락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변동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에 장기간 투자했을 경우에는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다고 한다. 로이터통신은 생명공학 기업에 투자하려면 투자금액중 5~10% 정도만 넣은 뒤 장기투자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 (분석)한일합섬, 철저한 구조조정으로 회생 기미
- 부도로 사형선고를 받은 한일합섬이 2년 만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법정관리 아래에서 착실한 자구노력을 진행, 회생의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구조조정에 실패한 현대건설의 워크아웃, 법정관리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마당에 법정관리 기업의 재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일합섬의 박창준 상무는 "부도났을 당시에는 우리만 당했다는 원망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법정관리 덕분에 철저한 구조조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고 털어놓는다.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시작하다=한일이 부도난 것은 지난 98년 7월1일. 이로부터 6개월만인 99년1월 법정관리 개시결정이 나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사실 부도가 나기전인 90년대 초반부터 한일은 구조조정을 생각했다. 섬유산업이 성장에 한계를 보임에 따라 이 부분을 줄이는 대신 건설, 생명공학, 전자 등으로 다각화하고 섬유공장 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박 상무는 "구조조정 착수 시기가 남들보다 늦은 것은 아니었다"며 "다만 최고경영진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어 효과가 미미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최고경영진의 의지가 없는 구조조정이 잘 될 리 없었다.
법정관리는 이런 자발적 구조조정보다 가혹하게 회사를 바꿔놓았다. 한일은 생명공학 진출의 꿈을 스스로 접었다. 총 700억원 투입해 키웠던 한효과학기술원을 198억원에 벤처기업에 팔면서 제약 사업부도 매각했다.
의류내수 부문은 총 7개 브랜드중 자체 수익이 가능한 남성복 "윈디클럽", 여성복 "레쥬메" 등 2개 브랜드만 남기로 5개 브랜드를 포기했다. 900억원 매출사업이 300억원으로 축소됐다.
올해 한해동안 162억원의 자구노력을 이행키로 채권단과 약속했지만 한일은 올들어 6개월만에 269억원의 자구실적을 달성, 채권단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 사이 엄청난 인원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97년말 15개 본부 1789명으로 연간 인건비가 449억원이 소요되던 한일합섬은 2년6개월만에 10개본부 1009명으로 줄였고 인건비도 227억원으로 낮췄다. 한때 40명이나 되던 임원도 지금은 9명에 불과하다. 인원수는 44%, 금액은 49%가 감소한 것으로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눈물을 머금고 회사를 떠났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들의 희생 대신 연간 280억원 규모의 손익개선 성과가 가능할 전망이다.
백용기 기획실 차장은 "2년여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기간동안 노조의 파업이 없었고 올해에는 노사가 임금가이드라인 이하로 임금인상을 타결지을 정도였다"고 직원들의 협조가 큰 보탬이 됐음을 잊지 않았다.
김정재 한일그룹 전부회장을 재산관리보전인으로 맞은 것도 불행중 다행이었다.
수년전 김중원 회장과 마찰을 빚어면서 그룹 부회장에서 물러났던 김 관리인은 기획통으로 한일합섬 사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한일의 내부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직원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박 상무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법원이나 은행 등으로부터 협조를 받는게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관리인 덕분에 이를 잘 넘기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 관리인은 직원들의 협조를 끌어내는데도 강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노사가 한몸이 되어 구조조정을 진행하자 구사주가 경영에 간섭할 여지가 없었다. 백 차장은 "만일 구사주가 경영에 개입했다면 구조조정은 백년하청이 됐을 것"이라며 "이것이 법정관리의 최대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철저한 자구노력과 노사협조, 구사주 배제 등 3박자가 갖춰지자 한일은 고통의 터널에서 서서히 헤쳐나올 수 있었다.
◇한일의 몰락은 무리한 사업확장 때문= 한일합섬은 70~80년대 달러를 긁어모으던 한국 최고의 수출업체였다. 이 회사가 부도난 것은 98년7월1일로 지금으로부터 거의 2년전의 일이다.
문민 정부 시절 경남고 인맥을 내세워 무리한 사업확장을 펼치던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모기업인 한일합섬을 중심으로 전체 매출이 기껏 2조원 안팎이던 한일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우성그룹을 인수하려고 촉수를 뻗쳤던 것은 무모한 확장경영의 대표적인 예.
우성 인수가 무산된지 얼마 안돼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로 들어가자 한일은 바로 휘청거렸다.
특히 수출유전스를 1억달러 가량 사용하고 있던 한일합섬은 외환위기로 환율이 급등하자 환차손의 직격탄을 맞았다. 1달러당 800원에 빌렸던 것을 1600원이상으로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부채비율이 600~700%에 이르던 한일은 급기야 정부의 퇴출기업 명단에까지 포함됐다.
"법정관리 신청이라니, 그런 소리는 내앞에서 다시 꺼내지 마라" 부도가 나기 한달전쯤 한일합섬의 자금담당 실무자들이 김 전회장에게 법정관리를 준비하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정 뿐이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실무자들은 몰래 법정관리 신청을 위한 서류준비를 시작했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자금 담당자를 중심으로 일상 업무가 끝나는 저녁 시각부터 경영진 몰래 숨어서 일을 했다"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법정관리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실제 며칠 뒤 한일은 정부의 퇴출기업 명단에 포함되면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98년7월1일 도산했다.
당시에는 불만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김영삼 정권과 관계가 가까운 대표적인 기업으로 알려지면서 "손 볼 기업"으로 찍혀 부도처리됐다는 식의 서운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며 "얼마뒤 우리가 법정관리절차를 밟는데 비해 고합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것을 비교하면 더 그랬다"고 술회했다.
◇되살아나는 회사 분위기=지난2월말 법정관리 인가결정으로 일단 채무상환이 유예받게 되자 남 탓을 하는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회사정리계획안에서 당시 확정된 채권액은 무려 2조3천183억원. 이중 주채무는 7357억원이었고 계열사 보증채무와 건설사업과 관련한 분양채무 등이 나머지 대부분이었다.
한일은 확정 채무중 보증채무를 100% 면제를 받았다. 대신 7개나 되던 자회사의 지분을 내놔야 했다. 주채무 7357억원가운데 담보채권 5590억원은 전액 상환키로 하는 한편 나머지 정리채권은 은행이 70%를 출자로 전환하며 30%인 1703억원(원리금 포함)만 상환하는 조건을 부여받았다. 모두 7293억원 및 이자를 10년내 갚으면 법정관리체제에서 졸업하는 것이다.
이처럼 은행 등 채권단의 협조가 있자 곧 좋은 징조가 나타났다. 첫째 한일합섬의 사업근거지인 마산 지역 주민들이 한일을 돕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일은 마산 도심에 위치한 총 13만평에 달하는 공장 부지중 일부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키로 하고 , 올 7월초 664세대를 분양했다. 당시 주채권은행인 한빛은행도 요즘처럼 건설경기가 좋지 않은 시기에 분양율이 70%만 되어도 다행이라 할 만큼 리스크가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마산 시민들이 적극 참여한 덕분에 1차 분양에서 90%가 넘는 분양율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분양대금으로 742억원이 확보된 셈이다.
한일은 2006년까지 이 지역에 모두 4880세대를 분양, 7458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이중 2827억원의 자금을 회사로 유입시킨다는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다.
건설사업 확대와 함께 신인견 섬유인 "코셀(COCEL)"의 사업화도 한일이 사운을 걸고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섬유는 93년 한국과학기술원(KIST)의 이화섬 박사팀이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하는데 성공, 95년부터 한일합섬과 상업화를 추진했던 신섬유다.
한일은 현재 마산공장에 연산 60톤짜리의 파일럿 공장을 가동, 여기서 생산된 원면으로 방적, 제직 및 염색가공을 거쳐 후가공 업체들을 통해 제품화하고 있는데 성공할 경우 영업이익률이 무려 30%나 되는 기대주다.
이 같은 시험운영과 함께 모두 90억원을 들여 하루생산량 7.5톤 규모의 1단계 생산공장건설을 착수, 내년 3월 국내 섬유업계에서 처음으로 정상 가동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어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증설, 2단계는 하루 생산량 30톤, 3단계도 30톤 등 모두 800억원을 투입해 총 하루생산량 67.5톤 규모로 공장을 확대, 연간 85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다.
한일은 이밖에도 연평균 115만달러에 이르는 대북경협사업을 더욱 확대키 위해 기술을 전수하고 유휴공장 이전 등 사업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8월중 실무회담을 목적으로 평양 방문도 추진중이다.
백 차장은 "4500억원 정도(97년)이던 매출액이 지금은 4000억원정도로 줄어 들었지만 올해 64억원의 영업이익을 예상하고 있으며 건설사업, 신인견 섬유의 사업화가 성공하면 회사 실적은 급속도로 호전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일은 무엇보다 부도후 한푼의 신규자금도 은행으로부터 지원받지 않은 채 자체 자금으로 사업을 수행, 은행권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부실기업들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