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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YT "日 휴대폰 총체적 위기"
- [edaily 김경인기자] "전자제품의 최강국"하면 무조건 일본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현재도 일부분 사실이긴 하나 그 대상이 휴대폰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외형에선 유럽 업체인 노키아가 패권을 잡았고, 기술면에선 삼성전자(005930)의 행보가 눈부시다.
점진적으로 위축된 일본 휴대폰업계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내수시장에서 근근히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3세대(3G) 휴대폰이 본격화되면서 해외 거대기업들의 일본 진출이 가시화되고 있어 그나마 밥그릇 지키기도 어려울 전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30일(현지시간) 일본 휴대폰업계가 해외와 국내 양 시장에서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지나치게 많은 업체수와 보조금 지급 관례 등이 업계의 경쟁력을 좀 먹고 있다고 경고했다.
◇日 휴대폰업계, 내수시장서도 위기
일본 휴대폰업계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시작해 유럽, 그 너머로 텃밭을 넓히는 단 꿈을 꿔왔다. 그러나 오히려 적자에 못이겨 핵심시장에서 잇따라 철수, 그 꿈은 일장춘몽으로 전락해 버렸다.
도시바는 최근 중국시장으로부터 휴대폰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미쓰비시 일렉트릭은 노키아를 비롯한 세계 기업들과의 공격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 본 뒤 유럽시장에서 퇴각했다. 결국 편안한 국내시장에 집중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일본 업체들은 세계 수요의 약 7%를 차지하는 내수시장에서 독점적 우위를 점해왔다. 일본 2G 휴대폰 네트워크가 독특한 일본산(産) 기술에 기반해, 해외 업체들의 진출이 쉽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일본 휴대폰 사용자들은 고속 3G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글로벌 W-CDMA 표준으로 옮아가고 있다. 해외 기업들이 시장에 침투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일본의 선도 무선업체인 NTT도코모가 올 회계연도(05년4월~06년3월)의 하반기가 시작되는 10월경 노키아 제품인 3G폰을 런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코모 또한 올 여름 기업고객을 대상으로 모토로라 폰을 판매할 계획이다.
키무라 미치코 IDC 애널리스트는 "일본 업체들은 내수시장을 가지고있는 한 괜찮다고 판단하는 듯 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해외 거대기업들이 조만간 국내시장에 진입하게 될 것이고, 일본 업체들이 내수시장을 잃는다면 그것은 곧 마지막 보루가 함락하는 셈"이라고 평했다.
◇정부 보조금 관행, 오히려 악영향
IT강국 일본의 휴대폰업계를 부식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NYT는 지나치게 많은 업체 수가 영업과 투자의 효율성을 저해했고,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한 결과 가격경쟁력과 자생력이 약해졌다고 분석한다.
일본의 휴대폰업체는 NEC, 마쓰시타 일렉트로닉, 교세라, 샤프 등을 포함 총 12개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 업체의 총 출하량은 세계 업계 1위인 노키아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제한되고 포화된 국내시장을 두고 12개사가 머리터지는 싸움을 벌이느라 실적은 위축되고 리서치 투자는 분산되며, 생산성 개선도 획득하기 어려워진다. 그 결과 선두사인 NEC와 마쓰시타 조차 지난 회계연도 휴대폰 사업부에서 적자를 기록했다.
가격 경쟁력이 낮은 점도 문제다. 해외시장의 평균 휴대폰 판가는 150~200달러 수준이나, 일본의 경우 400~500달러에 달한다. 일본 업체들은 정부로부터 몇백달러의 보조금을 받아 소매가격을 낮추는데 사용해왔다. 단기적인 이득을 희생해 장기간 소비자들의 사용료를 통해 충당해 온 셈이다.
시마다 요키히코 UFJ 쓰바사증권 애널리스트는 "일본 업체들은 보조금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홈 그라운드에서 게임을 해왔기 때문에, 해외 시장에 적응할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카가와 수구루 요노 리서치 인스티튜트 리서처는 "일본에 너무 많은 휴대폰 업체가 있고 모두 좋지 않은 재정상태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 중 일부는 퇴출이 옳은 해답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기술적 우위 등 경쟁우위도 뺐겨
일본의 가장 큰 장점은 우수한 고가품과 눈부신 기술력이었다. 그러나 이 두 요소 또한 더이상 일본의 강점이 아니다. 고가품 수요가 큰 선진국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고, 새로운 이머징시장은 저가품 선호도가 높다. 기술적 우위 또한 한국 등 해외업체들에게 빼앗겨버렸다.
미쓰야마 나호코 가트너 애널리스트는 "성숙한 선진국 시장의 극심한 가격 경쟁이 업계의 마진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 등 이머징 마켓의 저가제품 부문은 대규모 수요가 존재하는 곳이지만, 고가품에 대한 수요는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NYT는 심지어 일본 휴대폰업계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었던 기술적 혁명 분야에서도 한국 라이벌들에게 뒤쳐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포토-스내핑 기술은 일본 휴대폰업계가 먼저 개발했지만, 카메라폰을 세계에 대량 판매한 것은 삼성전자와 같이 민첩한 타국 기업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카메라폰에 있어 일본 업체들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작년 10월 세계 최초로 5-메가픽셀 모델을 런칭했으며, 지난 3월에는 7-메가픽셀 제품을 공개한 바 있다.
수구루 리서처는 "7-메가픽셀 모델이 잘 팔리느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그런 제품을 소개함으로서 삼성전자가 진보한 기술을 가진 회사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이명희 신세계 회장 "아버지 처럼 되는게 꿈…"
- [조선일보 제공] “솔직히 말해 국내에서의 작은 성공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내에서 제일이 된다든지 국내 경쟁에서 이긴다든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함으로써 선진 외국과 당당히 맞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다.”
세계 경제라는 격전지(激戰地)에서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 고(故)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의 이 말은 등짝을 휘갈기는 채찍처럼 들린다. 이 회장이 20년 전에 했다는 이 말은, 그의 3남5녀 중 막내딸이자 신세계(004170)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명희(李明熙·62) 회장이 가장 소중히 품고 있는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이명희 회장은 오는 8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기업관과 철학,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배워 기업을 우량기업으로 일군 자신의 이야기를 밝혔다. 국내외 언론을 막론하고 그가 인터뷰를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본지와의 독점인터뷰는 지난 3일 강효상 산업부장이 이 회장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으로 찾아가 2시간20분 동안 이루어졌다.
―그동안 왜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아버지처럼 사진찍기를 싫어해요. 남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자신도 없고요. (웃으며) 이번 인터뷰도 1주일 동안 연습한 거예요. 가려져 있는 것을 좋아했고, 사실 영원히 가려져 있고 싶었어요. 우리 직원들도 제 얼굴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올해는 우리 신세계로선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현재 증축 중인 본점이 오는 8월 다시 오픈하는 것을 계기로 새로운 도약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신세계는 삼성그룹에서 분리한 이후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삼성그룹에 함께 있는 동안은 신세계가 발전할 수 없었어요. 삼성의 지원은 대부분 전자나 반도체에만 집중됐지요. 그래서 오빠(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나 분리할래요’라고 말했어요. 분리할 당시 신세계는 백화점 한두 개와 조선호텔 정도였지요. 오늘날 이처럼 성장한 데에는 국제감각이 바탕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다섯 살짜리가 성인이 됐을 때는 현재 있는 직업의 90%가 사라질 것이다’는 무서운 말이 있어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마트’도 회장님이 낸 사업 아이디어였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황했어요.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프라이스클럽(회원제 창고형 할인점)과 월마트(할인점)를 가봤어요. 창고형 매장인데 TV가 너무 쌌어요. 50달러, 100달러였어요. 고장도 안 나고 잘 나오더라고요. 한국에서도 할인점을 해보자고 첫 매장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전문경영인에게 전적으로 회사를 맡기십니까?
“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전문경영인을 두고) 너무 나서면 웃기는 일이죠. 그러나 브리핑을 듣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나섭니다. 일하는 사람을 ‘잘 한다 잘 한다’ 하면서 치켜세워야 합니다. 경영은 맡기지만 나중에 책임은 엄중하게 물어요.”
―인재는 어떻게 키우십니까?
“아버지는 인재를 나무기르듯 기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직접 면접을 보셨어요. 사람들은 아버지가 면접 때 관상(觀相)을 본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길러야 할 사람이라면 기회도 주고 끝까지 지켜봅니다. 동기부여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툭 말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순발력을 보는 거죠. 남이 자기에게 반하게 하려면 자기가 먼저 그 사람에게 반해야 해요. 그러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회사 일을 맡게 됐나요?
“학창시절 제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결혼해서도 집에만 있었죠.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회사에 나오라고 하셨어요. ‘아버지 전 못합니더’라고 했죠. 자꾸 뒤로 빼니까 나중엔 화를 내셨어요. 여자도 앞으로는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백화점 사업을 하게 된 것은 그 분야에 소질이 있어서였나요?
“모든 자식이 다 회사를 물려받지는 않았어요. 제가 분석하는 걸 좋아하고, 변화무쌍한 것,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 백화점 사업을 맡기신 것 같아요. 한때는 6개월간 기자생활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출근 전날 아버지는 저를 불러 말씀하셨어요. 첫째가 ‘서류에 사인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책임을 피하라는 게 아닙니다.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라는 것이죠. 대신 믿지 못할 사람은 아예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무한추구죠.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는 빨리 진행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아버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죠?
“과거를 돌이켜보면 사연도 참 많아요. 조용필의 노래 ‘허공’을 들어보면 아버지와 저의 관계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와의 모든 약속과 사랑이 허공 속에 사라졌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는 왜 저러시지’라고 불평할 때도 전 ‘아버지처럼 해야지’라고 다짐했어요. 형제 중 저만 아버지처럼 메모하기를 좋아해요.
(이 회장은 매일 쓰고 있는 메모장(다이어리)을 보여줬다. 다이어리에는 굳은 결심에서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구두 사진까지 다양한 자료와 단상이 적혀 있었다.) 제 금고 안에 이런 공책이 20권 정도 있어요. 저는 편식 습관까지 아버지를 닮았어요. 아버지는 스트레스까지 즐기셨지만 전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망가는 편입니다.”
―이병철 회장님이 반도체를 시작하려 했을 때 참모들의 반대가 많았지요?
“고민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는 68세 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서 73세 때 64K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셨어요. 병상에서 암과 투병하시면서도 반도체 실적을 보고받으셨어요. 우리보다 앞선 세대셨던 아버지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시대를 내다보셨는지,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뿐입니다.
아버지는 늘 왜 우리나라에 장보고의 동상이 없는지 궁금해하셨어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장보고와 아버지는 뜻을 같이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는 자주 나가십니까?
“1년에 두 번 정도 유럽과 뉴욕을 다녀옵니다. 1년 이상 해외에 다녀오지 않으면 패션을 따라가지 못해요. 저는 외국을 갖다오면 완전히 바뀌어 돌아옵니다. 미국에 가면 건축에 빠지고, 미술감각도 달라져 돌아옵니다. 좋은 것을 발견하면 반드시 사진을 찍습니다. 그 물건이 몇 달 뒤엔 꼭 제 앞에 있어야 해요. 추구하지 않고 감동받지 않는 삶은 재미가 없어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는 자주 만나십니까?
“남산에 운동하러 갈 때 만나요. 오빠가 가끔 집으로 오라고도 합니다. 집안 문제 가지고 의논하죠. 가족끼리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할 때 말이죠. 홍 관장(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현재 삼성미술관인 ‘리움’ 관장)하고도 친하게 지내요.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자식들 나이도 비슷하니까요. 판단 기준도 비슷해요.”
―선대 회장님과 오빠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성격은 아주 달라요. 물론 예민한 건 우리 셋이 다 닮았죠. 하지만 아버지는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파악하세요. 아버지는 계획적이고 통제적이시죠. 오빠는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적이며 한없이 관대하죠.”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십니까?
“9시쯤 일어나서 제일 먼저 신문을 보면서 기고문, 경제·교육분야 기사 등을 스크랩합니다. 원본은 따로 스크랩하고 복사한 종이는 다이어리에 붙여요. 식사 후에는 책을 봅니다. 요즘은 책을 보면 어깨가 아파서 다른 사람보고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마인드’(하워드 가드너 지음)같이 너무 좋은 책은 직접 읽어요. 밤에는 시사프로그램 등 TV를 봅니다.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려요.(자신이 직접 스케치한 언니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얼굴과 자화상 등을 보여줬다.) 대학들어갈 때는 그림을 입학하기 위한 ‘무기’로 배웠지만 지금은 즐겨요. 앞으로 한문글씨도 배우고 싶고 펜글씨도 배우고 싶어요.”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1년 동안 8㎏을 뺐어요. 살찌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드니까 먹는 것을 방치해서인지 자꾸 살이 찌더라고요. 어느날 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번 결심한 것을 안 하면 전 입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요.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달려듭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만 먹어요. 저녁은 샐러드를 겸해서 먹고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먹어요. 골프와 남산을 걷는 것이 즐기는 운동입니다.”
―오는 8월 오픈하는 신세계 백화점 본점은 어떤 곳이 되길 바라십니까?
“지금 한국 백화점들은 그게 그겁니다. 내 콘셉트는 차별화입니다. 손님들이 ‘신세계는 도대체 어딜 가서 이런걸 뽑아왔어?’라고 할 정도로 놀라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업체에 백화점 매장만 빌려주는 임대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물건을 사서 들여 놓을 겁니다.”
―신세계 그룹이 장래에 삼성그룹을 능가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십니까?
“아직 세상 끝난 것 아니잖아요? 백화점만이 유통은 아닙니다. 유통은 무궁무진한 세계입니다. 빨리 아이디어를 내서 바꿔나가는 게 중요해요.”
―언제가 가장 보람있는 때입니까?
“아버지가 평가받으실 때입니다. 제가 일군 이마트도 자랑스럽지만 아버지처럼 되는 게 제 꿈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제 처지도 보람있어요. 그것은 저에 대한 브랜드 가치가 있어서 아닙니까? 하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대면 인터뷰를 안 할 생각입니다.(웃음)”
―신세계의 미래 비전을 말씀해주시죠.
“비전이 크지요. (유명 브랜드) 아웃렛도 해야 하고, 홈쇼핑, 소프트웨어도 팔 겁니다. 이마트에서는 지금 하드웨어만 팔지만 앞으로는 컴퓨터 프로그램 등 갖가지 소프트웨어도 살 수 있게 할 겁니다. 또 세계에서 최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2013년까지 신세계를 세계 10대 유통그룹으로 키울 겁니다. 국내에 이마트를 130개, 중국에도 이마트를 25개까지 늘릴 겁니다. “
―그룹의 임직원들에게 어떤 당부를 하고 싶으십니까?
“이 상태에서 행복을 유지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제가 30대에 하루는 골프를 쳤어요. 파 포(par four) 홀에서 잘 쳐서 두 번째 샷으로 그린에 공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 치느라 바빠 저만 나무 밑에서 쉬었어요. 모자를 벗으며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불행이 오면 어떡하나’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행복할 때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신용분석의 세가지 색깔(2)
- [edaily] (1편에서는 신용분석의 3대축 가운데 신용평가사에 대해 주로 다루었으며, 2편은 투자자인 자산운용부문과 증권회사의 신용분석에 대한 것입니다.)
회사채 가격체계는 신용등급을 기본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직접신용시장의 신용분석도 평가사의 신용등급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신용등급을 추종한다면 시장의 신용분석은 의미가 없다. 시장은 신용등급의 적정성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변화 방향을 예측하여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한다.
시장은 대개의 경우 평가사의 신용등급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지만, 때로는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스프레드 확대는 평가사 신용등급의 신뢰도를 도마 위에 올리는 것과 다름없고, 당국의 규제정책에 대한 입장표명은 신용평가사의 존립기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밀고 당기면서 관계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 자산운용부문 신용분석의 비약적 성장
최근 수년간 자산운용부문의 신용분석은 신용분석의 3대 축 가운데 가장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2000년 채권시가평가 도입 당시만해도 자산운용부문에서 신용분석 전문인력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기관에서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회사채 투자규모가 작아 신용분석 전문인력이 입지확보에 애로를 겪고 있는 기관도 있고, 반대로 적지 않은 회사채 투자규모에도 불구하고 전문인력 없이 꾸려가는 기관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신용분석 전문인력 확보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회사채 투자확대의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카드위기 이후 시장의 불안심리로 인해 등급과 가격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적극적으로 회사채 투자에 임한 투자자들은 모두 높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도 꽃이 피는 일방적인 흐름에서는 오히려 신용분석 전문인력의 역할이 부각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스프레드 축소의 계절이 지나고 저평가 종목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진검 승부가 시작되는 재미있는 상황이다.
회사채 투자확대의 필요성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국고채 중심의 자산운용이 어려워질수록, 경쟁자가 회사채 투자에 적극적으로 임할수록 회사채 투자확대의 필요성은 커진다. 이미 그런 흐름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자산운용부문의 신용분석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는 이유다.
◇ 자산운용부문의 신용분석 네트워크
조직의 연륜이나 규모를 생각한다면 개개 자산운용조직의 신용분석 역량을 평가사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산운용부문 전체의 신용분석 역량은 그리 간단한 수준이 아니다. 판단 하나하나에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절박함도 있겠지만, 시장에 폭 넓게 형성된 네트워크의 현실적인 위력 때문이다.
신용분석에서 나 홀로의 판단은 항상 위험하다. 원론에 입각한 토론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 자산운용시장의 여건에서 개별 기관이 내부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할 만큼 충분히 많은 신용분석 전문인력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시장의 네트워크는 이러한 제약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방편이며 그 자체가 새로운 위력을 낳는다. 리스크에 대한 문제의식의 공유는 쏠림을 만들고 이는 다시 평가사에게 전에 없던 압력이 되고 있다.
사실 네트워크라는 성격 규정은 매우 조심스럽다. 귀 밝고 입 무거운 것이 미덕인 자산운용부문의 문화도 그렇거니와 현실적으로 기회까지 공유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리스크 요인에 대한 시장의 컨센서스 형성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시장의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공유 이상의 신용위험 관리수단은 없다는 점이다. 시장의 아이큐는 2,000 이상이라고 하지 않던가?
◇ 증권회사 신용분석의 화려한 꿈은 그냥 꿈인가?
2000년 채권시가평가 도입 이후 시작된 시장의 신용분석 역사에서 증권회사 페이지는 빈약하기 그지 없다. 신용분석 전문인력도 얼마 되지 않고 역할도 매우 제한적이다. 하지만 꿈만은 화려하다. 아니 오히려 꿈만 놓고 보면 다른 어떤 부문도 이만큼 화려할 수는 없다.
기업금융 업무의 비중확대는 주요 증권사의 중장기 비전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다. 이러한 비전이 실현된다면 신용분석 역량은 당장 수십 배 확충되어야 한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신용분석 역량은 평가사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비전은 좀처럼 알을 깨지 못하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 증권회사의 역할은 기업금융(IB)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단순중개업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기업금융의 부진은 회사채시장의 성장과 안정화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딱히 한가지의 모순 때문이 아니라 총체적 난국이라고 할 정도로 이런 저런 모순이 뭉쳐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적으로 증권회사 스스로가 기업금융에서의 가치제고에 소극적이다. 어느 정도의 리스크 부담이 필수적이지만 위기의 경험과 인식의 부족으로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리스크 부담을 적정수준으로 관리할 수단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결국 영양가 있는 대형 거래는 모두 외국 투자은행(증권회사)의 차지가 되고 있다.
제도적인 모순도 매우 큰 걸림돌이다. 수천억원의 회사채발행절차가 십수억원의 기업공개만도 못하다. 특히 해외채권 발행절차와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회사채 투자자들은 역차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정 국책은행에 의한 시장 싹쓸이도 큰 부담이다. 연못 속의 고래 때문에 도무지 시장의 질서를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가야만 할 길이라면 한걸음이라도 먼저 내딛는 것이 정답이다.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해서 못하는 것이다. 이미 이런 저런 변화가 태동하고 있다. 카드위기 이후 회사채 소매시장의 급성장을 보자. 초반에 이를 주도한 증권회사가 탁월한 성과를 올리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Jealousy is my middle name).
최근의 은행대전이나 금융규제완화에서는 보다 큰 그림을 엿볼 수 있다. 구조조정기에서 확장기로 넘어가는 고비에서 기업금융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너무 큰 기회이자 해볼만한 도전이다. 그리고 이에 다가서기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열쇠가 바로 신용분석 역량이다.
◇ 보다 깊은 대화가 시장의 발전을 이끈다
생태계의 놀라운 균형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절묘한 역할나누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네 금융시장도 다양한 형태의 생존경쟁과 역할나누기를 통해 매일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간다. 회사채신용분석도 마찬가지다.
회사채시장과 신용평가는 조금씩 입장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서로가 서로를 끌어가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따라서 최근 평가사 서비스 향상에 대한 요구가 급격히 커지는 현상은 시장의 신용분석 역량 향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장은 평가사에게 보다 실질적인 기여를 구하고, 평가사는 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의의와 방향성을 확인한다. 평가사 서비스의 품질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시장발전을 위한 고민을 나누고 지혜를 모으는 대화의 과정이다. 보다 깊어진 대화는 또 한걸음의 시장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 기업분석부 연구위원/Credit analyst
- "삼국지" 만화가 고우영씨 타계
- [조선일보 제공] 만화가 고우영(高羽榮) 화백이 25일 낮 12시30분 입원 중이던 경기도 일산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66세. 고인의 가족들은 “3년 전 수술을 받았던 대장암이 최근 재발해 폐와 뇌로 전이돼 치료를 받아왔다”고 전했다.
‘한국 만화계의 거대한 뿌리’ ‘국민 만화가’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고 화백처럼 세대를 가로지르며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작가는 찾기 힘들다.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복 이후 부모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피란길에 오른다. 만화계에 데뷔한 것은 중2 때인 부산 피란 시절. 형 둘이 모두 만화가여서 어깨너머로 자연스럽게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부산에서 만화 ‘쥐돌이’를 출간하며 데뷔했다. 고3 때는 요절한 둘째 형 고일영이 ‘추동식’이라는 예명으로 연재하던 만화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라는 예명으로 이어받았고, 그때부터 인기 만화가 대열에 올랐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최배달의 스토리를 ‘대야망’이란 제목으로 처음 소개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역시 고우영이란 이름 세 글자를 대중들의 마음에 새겨넣은 것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사극(史劇) 시리즈다. 1972년 1월 1일 일간스포츠에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18년 동안 ‘수호지’ ‘삼국지’ ‘초한지’ ‘서유기’ ‘열국지’ ‘일지매’ ‘십팔사략’ 등의 고전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재해석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한국 만화계에 최초로 등장한 본격 패러디 작가라는 후세대의 별칭이 어색하지 않은 그이다.
특히 1978년 연재하기 시작한 그의 대표작 ‘고우영 삼국지’는 일본 극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체, 특유의 익살스러운 대사와 파격적인 전개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됐다. ‘쪼다’로 묘사된 유비, ‘폼나는 인물’로 그려진 관우는 그만의 참신한 해석이었다. 또 ‘수호지’에서 창조해낸 반금련의 기둥서방 ‘무대’는 좁쌀 같은 외모에 한없이 순박하고 바보스러운 캐릭터로 당시 대학가에 ‘무대 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상상력은 만화가의 밥”이라는 지론처럼, 그는 동양 고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버무려,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빚어낸 것이다.
고 화백은 당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18년을 연재하면서 하루 24시간 중 평균 20시간이 작업시간이었다”면서 “꿈에서 있었던 일을 줄거리에 옮긴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회고했다.
고 화백은 만화가협회 제15, 16대 회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문화예술상과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인 우정상을 받았다. 2002년 대장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1970년대에 당국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했던 부분을 되살린 복원판을 내놓는 등 ‘영원한 현역’의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에는 본지에 “내 인생과 한국만화 100년 역사를 만화로 정리하겠다”고 제안하며, 2회분의 원고를 보내왔다. 하지만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창작엔 은퇴가 없다”던 자신과의 약속은 하늘나라에서 계속 이어지게 됐다.
신문수 화백은 “고인은 ‘국민 만화가’로 불리며 우리 만화계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라며 “우리 만화계에서 아까운 선배가 떠나셔서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인희씨를 비롯해 장남 고성우씨 등 3남1녀.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발인은 27일 오전 9시. (031)901-4799.
- (투자!定石이 해답이다)①개미도 돈 벌 수 있다
- [edaily 김춘동기자]저금리와 수명 연장으로 개인 자산관리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정석(定石)투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과거와 같이 단기매매, 뇌동매매, 올인투자로 일확천금을 노리다가는 원천적으로 재기가 불가능한 사태를 맞이할 위험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투자문화가 성숙하면서 이른바 "대박"이나 "로또식"투자 보다는 "가치" 혹은 "펀더맨털"투자가 장기적으로 높은 수익을 냈다는 결과가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이유도 있다.
미국 제2위 투자회사인 뱅가드그룹의 설립자이자 세계적 투자가로 명성이 높은 존 보글(John Bogle). 워렌 버핏과 어깨의 나란히 하고 있는 월가의 전설이지만 그나 워렌 버핏이나 세계의 투자자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던 성공 비결도 바로 정석투자였다.
존 보글은 대박을 노리는 단기투자를 도넛에 비유한다.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몸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된다는 이유에서다. 정석투자는 딱딱한 빵인 "베이글"이다. 씹기에도 딱딱해 먹기에 불편하지만 영양이 많아 몸에 좋다.
이 말은 "양약은 입에 쓰나 병을 치료하는 데 이롭다"는 옛말과 같다. 이데일리는 주가가 본격적인 네자릿수를 넘나들고 있는 1000포인트 시대의 개인 투자전략도 정석투자 중심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왜 정석투자인가에 대한 기획시리즈 7편을 테마로 묶어 소개한다.[편집자註]
◇개인 투자자는 봉?
과연 개미들도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주식투자로 돈을 버는 방법은 아주 쉽고 간단하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된다. 하지만 개인투자자 소위 개미들이 주식투자로 돈을 번 경우는 기껏 5%미만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개인은 주로 대박의 꿈만 가지고 소문에 기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투자가 아닌 투기를 하기 때문이다. 종목선택의 일관성도 매매원칙도 없다. 더 오르겠지 이익실현을 주저하며, 이제는 오르겠지 손절매를 망설인다.
더구나 하루에 수 천억원씩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과 리서치센터의 정보력, 선물·옵션과 같은 첨단무기로 무장한 외국인과 기관에게 견주어 볼 때 객관적으로도 절대 열세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계금융자산의 주식투자 비중이 가장 낮은 반면 개인의 직접투자 비중은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증시는 고위험·고수익 시장으로 투자보다는 투기의 성격이 강하다.
개인투자자가 주식시장에서 돈을 번 사례도 극히 드물다. 지난해의 경우 개인이 순매수 한 상위 20개 종목 중 14개 종목의 주가가 하락했다. 오른 종목은 5개에 불과했다.
반면 외국인 매수종목은 12개가 오르고 내린 종목은 5개에 불과했다. 지난 92년 증시개방 이후 12년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40%에 불과했던 반면 외국인 선호 30개 종목은 1057%나 올랐다.
주가지수가 936.06까지 올랐던 작년 4월23일과 921.44였던 지난 2월2일을 비교해 보면 외국인은 상승종목을 3조2637억원 매수한 반면 개인은 하락종목을 2조2358억원 매수해 대조를 이뤘다. 개인의 경우 상승종목은 오히려 4조3309억원어치를 매도했다.
◇대박의 꿈 쪽박의 현실
그렇다면 개인이 번번히 투자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사례1: 개인투자자 K씨는 외환위기 당시 외국여행을 가기 위해 모아 두었던 돈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샀다. 약간의 애국심도 작용했다. 삼성전자는 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차익을 안겨줬다.
L씨는 자신만만했다. 월급으로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 대박의 추억은 항상 대박을 꿈꾸게 했다. 투자대상은 KDS나 하이닉스 등 주로 주가 변동성이 큰 종목들이었다. 하지만 주가는 크게 떨어졌고 본전 생각에 주식을 장기 보유했지만 손실을 만회하지 못했다.
사례2: P씨는 2001년 초 코스닥 종목에 투자했다. 주식을 사자말자 몇 일간 상한가를 기록하며 급등했다. 대박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코스닥은 폭락세로 돌변했고, 금세 원금을 까먹었다. 이 종목 저 종목 갈아타며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한 동안 주식시장을 떠났던 P씨는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다시 객장을 찾았다. 이번엔 소위 테마주에 투자했다. 주가는 무서운 기세로 올랐다. 주식을 더 사지 못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에 투자금 전체를 올인했다. 날라갈 것 같던 주가는 급락세로 돌아서고 말았다.
사례3: L씨 역시 외환위기 직후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99년 주식을 시작했다. 증권사 직원과 친분이 있던 L씨는 소위 재료주에 주로 투자했다. 주가는 날아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오르면 팔아야지 했지만 결국 손실을 본 후에 내다 팔았다.
대박의 환상은 계속됐다. 한꺼번에 높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한 코스닥 종목에 다시 투자했다. 미수거래도 시작했다. 하지만 투자종목이 연일 하한가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었다. 결국 투자원금은 10분의1로 줄어들었다.
사례4: J씨는 97년 지금은 없어진 모은행 주식을 매입했다. 외환위기로 은행주가 급락하자 소위 물타기로 원래 매입규모의 몇 배에 이르는 주식을 더 샀다. 결국 은행은 퇴출됐고 투자금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갔다.
◇개인투자자 성공의 비결은
그렇다면 개인은 주식시장에서 패배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S씨는 개인투자의 성공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우량종목을 중심으로 원칙투자에 나선 사례다.
주식을 시작한 지 수년째인 S씨는 여느 개인들처럼 `묻지마 투자`로 손해를 많이 봤다. 절치부심 S씨는 나름대로 투자원칙을 세우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투자에 나섰다.
철저히 우량종목에만 투자했고, 손절매와 과감한 이익실현, 분산투자 등 투자원칙도 준수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꾸준히 이익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복구할 수 없을 정도의 손실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목표수익률을 낮추고 서두르지 않는 겸허한 자세도 배웠다. S씨는 이제 투기가 아니라 투자의 원리를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다.
◇"우량종목·손절매·분산투자가 관건"
개인투자자들은 공통적으로 대박의 환상을 가지고 주식을 시작한다. 한 두 차례 대박의 경험은 이러한 확신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손실은 수익의 몇 배로 돌아온다.
대박의 환상으로 종목선정에 일관성이 없고, 매매원칙도 없다. 실적이나 펀더멘털 보다는 소문이나 느낌으로 종목을 고른다. 투자하는 종목이 어떤 회사인지도 관심도 없다. 올인(all in)은 기본이다. 순간순간의 욕심이나 근거 없는 믿음으로 매매 타이밍도 놓치고 만다.
반면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내재가치에 투자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영혼의 투자가 존 템플턴은 "분산투자로 위험을 줄이라"고, 예술적 투자자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잘못 선택한 종목에서 손실을 만회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한만식 삼성증권 온라인지원팀장은 "매매종목을 우량종목으로 한정하고 손절매와 분산투자 등 적절한 투자원칙을 지키면 개인들도 주식시장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보아·베이비복스, 글로벌 스타로 부상할까
- [edaily 하정민기자] "보아, 베이비복스, 우타다 히카루, 타타 영 등 아시아 가수들이 월드 스타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아시아 음악시장의 급성장과 아시아 가수들의 활발한 미국 시장 진출 노력으로 이들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 시장을 정복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1일 `아시아 스타, 세계로 발돋움하다(Asian act make a global play)`란 제목의 기사에서 보아, 베이비복스 등 아시아 가수들의 활발한 미국 시장 진출 노력을 자세히 소개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말 현재 아시아 음악시장 규모는 58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 음악시장의 규모는 9억달러에 불과하다. 125억달러에 달하는 북미, 118억달러의 유럽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다.
그러나 아시아 음악시장의 성장속도가 매우 빠른데다 유명 아시아 가수들의 활발한 서구시장 공략 시도는 아시아 가수들의 월드 스타 등극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아시아 각국 가수들의 급부상 이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아시아 스타들이 국제 음반 프로듀서, 뮤직비디오 제작자들과 활발히 협력한 것이 주효했다. 그 결과 음악이 좋아지고 가수들의 외모가 세련돼졌으며 스타일도 서구인들에게 어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신문은 평가했다. 아시아 문화 자체도 세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WSJ이 스파이스 걸스의 아시안 버전이라고 평가한 베이비복스를 보자.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며 한류 열풍을 선도한 베이비복스는 미국의 유명 흑인음악 레이블인 벙갈로 뮤직과 협력키로 했다. 베이비복스는 지난해 미국 시장을 겨냥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앨범 `라이드 웨스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앨범에는 지난 1996년 총격 사건으로 사망한 전설적 힙합 아티스트 투팩 사커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 화제를 모았다.
한국의 브리트니 스피어스 보아도 마찬가지다. 보아의 소속회사 SM(041510)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은 "나의 꿈은 보아를 미국 스타와 경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스타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시장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과 중국시장부터 제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 팝 차트 1위에 오른 바 있는 아이돌 스타 보아는 이미 일본 시장을 석권했으며 활동 범위를 날로 넓혀가고 있다. 미국 화장품업체 메이블린의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는 보아는 메이블린이 지역 광고에서 기용한 최초의 한국인 모델이기도 하다. 보아는 지난 2003년 방한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한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같이 공연한 바 있다.
이수만 회장은 "종국에는 아시아 음악시장이 할리우드를 제치고 세계 음악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며 "이 때 아시아 스타들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로 중국 음악시장이 세계 5위 안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했다. 중국 음악시장은 2003년 말 현재 1억1570만달러의 규모로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태국 최고 아이돌 스타 타타 영은 최근 소니BMG와 계약하고 미국, 유럽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타타 영은 지난 2월 최초의 영어 앨범을 발매했으며 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프로모션 활동을 벌이고 있다. 타타 영의 소속사인 소니BMG는 호주와 독일 시장에서도 그녀의 영어 앨범인 `I Believe`에 관심을 표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특히 호주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경우 미국 시장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호주 시장 진입에 주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소니BMG의 리처드 데니캠프 아시아 담당 사장은 "무한한 수의 경쟁자와 대적해야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모든 아시아 스타들의 꿈"이라며 "반드시 타타 영을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물론 아시아 스타들의 앞날이 무조건 장미빛으로 물든 것은 아니다. 아시아 스타들은 미국 내에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히스패닉을 공략하는 데 부족함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내 아시아 사회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이것 만으로는 주류 백인, 히스패닉, 흑인 등 대다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
영화 `와호장룡`의 주제가를 부른 대만 여가수 코코 리가 좋은 예다. 코코 리는 지난 2000년 미국에서 최초의 영어 앨범을 발표했고 소니BMG는 마케팅을 위해 대대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녀의 앨범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중국 시장을 발판으로 삼아 미국까지 정복하겠다는 전략이 통할 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소니BMG의 리처드 데니캠프 사장은 "중국 시장이 급부상하겠지만 2008년에 세계 5위로 발돋움하기는 다소 이른 것 같다"고 말했다.
- "애국가는 항상 한국인들의 것으로 생각"
- [오마이뉴스 제공] "한국 땅 아닌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한국땅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만세!"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켰던 지난 16일, 공교롭게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1906∼1965)의 유족들이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에 무상기증 했다. 유족의 대변인 격인 외손자 미겔 익태 안(28·변호사)씨는 최근 일고있는 독도문제에 대해 이같이 말하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이어 "최근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도 잘 알고 있다"며 이 역시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안익태 선생의 외손자 미겔 익태 안(Miguel Eaktai Ahn)씨는 1977년생으로 스페인 마르요카에 살고 있다. 그는 발레릭 아일랜드 대학을 졸업한 뒤 법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시민을 위한 변호사(Civil lawyer)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2년 동안 한양대에서 국제관계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미겔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특히 겨울방학 때는 기숙사에 나혼자만 남아 남방도 제대로 안돼 추위에 떨면서 외로워했다"며 "여자친구도 떠나갔다"고 활짝 웃었다.
그는 17일 <오마이뉴스> 와 인터뷰를 가졌다. 안 선생의 부인인 롤리타 안(89) 여사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다 이날 다른 일정 때문에 인터뷰에 함께 하지 못했다.
대화의 대부분은 역시 최근까지 논란이 됐던 애국가 저작권 문제. 미겔은 약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불거진 "저작권 논쟁"으로 "그저 평범하게 지내고 있던" 가족이 풍랑을 만났다고 했다. 정부에서 처음으로 저작권 반납을 협상했던 시점은 2월 중순이었다.
논쟁의 중심에는 "저작권료"가 있었다. 당시 누리꾼(네티즌)들은 "유족들이 유상으로 애국가를 넘기려 한다"며 찬반 논쟁을 벌였다. 특히 언론에서 이같은 내용의 보도를 하면서 비난의 화살은 가족들에게 쏠렸다.
"한달 전쯤 갑자기 저작권 문제로 정부를 대표해 스페인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에게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아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똑같았다. 단 한차례도 돈을 요구한 적 없다. 저작권 문제는 정부와 국민들간의 문제인지 알았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항상 애국가는 한국민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공공재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미겔은 "우리가 무상으로 기증하더라도 한국정부가 저작권법에 의해 애국가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이 (정부를) 비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리를 비판했다"고 덧붙였다.
이런 미겔의 말은 18일 오후 문화관광부 관계자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그는 "유족측에서 협상과정에서 유상기증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고 전했다.
"협상 당시 여론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우리 가족과 스페인 주 한국 대사관(정부와 가족의 연락책 역할을 했다고 함), 그리고 정부간 의사소통이 잘못됐다(miscommunications)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2월 말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 3개국어로 된 대언론 성명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저작권을 무상기증할 것을 밝혔다."
유족들을 아프게 했던 또하나는 이들이 지금까지 많은 저작권료를 받았다는 소문. 그러나 "우리는 1999년 300달러, 2000년은 500달러, 2001년 1000달러, 2002년 5000달러, 2003년 3000달러, 그리고 지난해엔 5000달러를 받았다"며 "우리는 저작권료를 받아 부자가 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한참을 저작권에 대해 힘주어 말하던 미겔의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할아버지께서 한국을 떠난 건 일본제국이 할아버지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최고 애국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한국에는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애국자라는 말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족들은 안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길 원한다. 정부는 지금까지 안 선생에 대해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드셨으면 좋겠다"며 "국민들이 단지 할아버지께서 한국을 항상 사랑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해줬으면 할 뿐"이라고 작지만 힘주어 말했다.
이어 미겔은 안 선생의 유품에 대한 한국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 가족은 이미 많은 유품들을 정부에 기부했지만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유품들은 많지 않다"며 "한국 정부에 알아봤더니 최근까지 나머지 유품을 전시할 기념관 건립 등의 대안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두가지 모두 해결될 가능성이 보인다. 문광부에서 안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예우와 기념관 건립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 정동채 문광부 장관은 지난 16일 "애국가 저작권 무상기증서 전달식" 뒤 "가족들의 바람을 충분히 받아들여 독립유공자 예우와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국의 네티즌들이 우리를 돈만 밝히는 비애국자(unpatriotic)라고 몰아붙였을 때 참기 힘들었다"는 미겔씨. 그는 "혹시 생전에 보지못한 할아버지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는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며 미소지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한 꿈을 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때 통일을 위해 무언가 일했으면 한다는 꿈을 가져봤다. 조금이라도 통일에 일조할 수 있다면 해방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행복하실 것 같아서였다."
- 李부총리 "심히 죄송"..사의 표명안해(종합)
- [edaily 김수헌 이정훈기자]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땅투기 의혹과 관련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부동산 거래 때 편법할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편법시비를 일으킨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부총리를 그만두겠다는 사의 표명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부총리의 투기의혹 관련 모두발언과 일문일답이다.
(모두발언)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재산등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겠다.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서는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국민들이 불경기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때에 본의 아니게 제 처 부동산 문제가 불거지게 된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부동산 거래 관계에서 사전에 편법을 할 의도나 생각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편법시비를 일으킨데 대해 심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와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오래전 민간인 신분에서 (거래가) 있었고 여러번 재산공개 과정을 통해 소상히 밝혀온 내용이지만 어떠한 의혹도 남지않도록 보다 신중히 생각하고 처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시한번 죄송하게 생각한다.
(일문일답)
-부동산 투기의혹과 관련해 2가지 질문을 하겠다. 재산공개에 대한 문제제기 이후 오늘을 포함해 대통령이나 청와대에 사의표명한 적이 있나. 그리고 편법여부와 상관없이 경제정책 수장으로서 이번 일로 투기억제대책 등을 추진하는데 있어 국민적 신뢰가 떨어질텐데, 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비판도 있는데, 잃어버린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안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제 개인문제로 인해 혹시라도 국정운영에 차질을 주는 상황이 오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이번 사태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앞으로 부동산 주택정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
-예정에 없이 대통령과 오찬을 했는데 오찬을 하시면서 투기의혹에 대해 대통령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주로 올해 경제정책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초점이 있었다. 특히 신용불량자 문제가 지금까지 잘 진행됐고 마지막 마무리가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특별히 제 개인 재산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었다.
-25년 전 위장전입과는 별도로, 거래가 이뤄진 광주시 땅 매각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지난해 재산신고 때 거래가를 58억으로 신고했다. 당시 땅을 산 사람이 이걸 담보로 대출받은 돈이 70억원이 넘고, 46억원에 판 임야만으로도 50억원 대출이 이뤄졌다. 그래서 실제로 판 땅 가격이 100억 넘는다고 추정도 가능한데, 설명을 해달라.
▲제가 매각한 이후에 그 땅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저나 집사람 모두 아는 바 없다. 매각대금은 정확하게 직접 은행구좌로 들어와 한점 차이도 없고, 그대로 신고를 다했다.
-땅을 샀던 사람과 통화를 했는데, 신고금액보다 높은 값에 샀다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집사람 통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건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매매가나 통장금액을 밝힐 수 있나.
▲필요하면 밝히겠지만 지금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 재산공개가 실사 진행중이다. 그러한 문제를 전부 따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푼도 차액이 있을 수 없다.
-지난해 말 재경부 지역특구위원회에서 전북고창을 특구로 지정했다. 이 곳은 부인이 보유한 땅으로 처남농장이 있는데, 지역특구 선정과정에서 그런 부분이 논의가 됐는가. 부인 소유 땅이 특구에 들어간 사실 자체가 공직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지역특구 선정과정에 저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선정절차나 과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제가 박병원 차관보로부터 보고받기로는, 그 지역에 대해 혹시라도 물의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서 몇번씩 검토를 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해서 지역특구위원회에 상정키로 결론내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틀전에 산업은행 유지창 총재를 만나 부총리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인가.
▲취재를 광범위하게 한 것 같다. 유총재에게 그런 말 한 적 있다.
-20년동안 갖고 있던 땅을 한꺼번에 팔면서 대금을 어떻게 58억원으로 확정지을 수 있었나. 그리고 왜 팔았는가.
▲계약은 그때(2003년 10월)했지만 (매각)논의는 상당히 전부터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금액에 대해 서로간에 논의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58억원에 하기로 합의해서 계약을 맺은게 그날일 뿐이다.
-잔금지급이 왜 늦어졌나. 거래상대방이 10명인 걸로 아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논의했는데 잔금지급이 늦게 된 이유는.
▲12월말까지 돈을 받기로 한 것으로 들었는데 (상대방이)매각대금 마련이 잘 안됐던 것으로 들었다. 연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연기를 해 준 것으로 알고 있다.
-부총리쪽하고 상대방인 차아무개씨하고 중간에 유모씨가 중간매매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 중간매매자는 등기부상에 안 나와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미등기전매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 미등기 전매는 원매도자(이부총리측)이 그런 의도를 허용하지 않으면 안될텐데, 사전에 미등기전매 의도를 알았는가. 그리고 땅은 왜 팔았는가
▲그 땅을 팔기로 한 이유는 제가 그때도 공직을 다시 하리라고 꿈에도 생각못했다. 작년 2월 부총리 제의를 받았을 때도 오랫동안 안 맡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가 마지막에 받아들였다. 땅을 팔 당시에도 공직 다시 하리란 생각없었다.
처음 그 땅을 살 때는 그 일대가 길도 제대로 나지않은 오지였다. 그런데 최근 와서 소위 그 일대 개발이 진행되면서 땅이 형질이 많이 훼손됐다. 그땅을 보유하면서 당초 개발할려던 생각이 바뀌게 됐다.
그래서 집사람이 더 이상 그걸 보유하면서 나중에 개발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주변이 도시화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던 차에 몇달전부터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계속 매수제의가 있어서 논의끝에 2003년 10월30일 매도계약을 맺은 것이다. 저희는 그대로 58억을 매도하기로 하고, 끝냈기 때문에 그 중간과정에서 전매가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매수자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계약 맺은 다음에 잔금 지급이 끝나면 등기서류를 넘겨주면서 끝난다. 그리고 매도인 인감증명서를 떼주고 등기서류 주면서 끝난다. 실제로 누가 어떤 명목으로 등기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서류처리를 끝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 (법원경매천하평정)나의 경매입문기
- [우형달] 나의 경매입문기
몇 년 전만 해도 1억 원 만들기라는 제목의 책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사이에 부자 기본 단위가 10억 원으로 높아져 버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중에는 10억 원은 고사하고 1억 원도 없고, 심지어는 전세보증금 5천만 원이 자산의 전부라며 낙망하는 분도 계신데 말이다.
나는 가혹하지만 부자의 기준을 좀더 명확히 제시하고자 한다. 막연한 10억 원이 아니고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집 빼고, 그리고 부채 빼고 10억 원 정도는 있어야 비로소 요즘 유행하는 웰빙스런 삶이 가능하다고 본다. 가장 바보들중 하나가 집하나 달랑 가지고 있으면서 집값 올랐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말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설령 10억 원짜리 강남의 아파트라고 해도 이 집은 이미 자산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타당하려면 적어도 다섯채 정도는 가지고 있으면서라야 설득력이 있다. 이런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나라면 팔아서 5억 원짜리 같은 평수의 강북아파트로 이사 가고, 나머지 5억 원으로는 재테크 종자돈으로 쓸 텐데!’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또 하나, 부채도 제외해야 한다. 수중에 10억 원의 현금이 있지만 은행 부채가 10억 원 있다면 상계처리해서 현금자산은 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엄격한 기준으로 따져 보면 여러분의 대차대조표는 어떨까?
** 나 역시 가난했다
무일푼에 가까운 처지에서 IMF를 거치면서 짧은 기간에 오직 부동산 경매로만 오늘의 부를 어떻게 축적했는가? 인생역전을 가져다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정말 우연히(?) 시작한 부동산 경매에 대한 나의 생각과 투자전략, 철학을 가감 없이 보여드리며 낙찰사례도 소개하겠다.
게임은 끝나지 않아 결론으로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누가 언제 시작해도 지지 않은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 부동산 경매를 통한 부동산 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환희의 순간도 있었고, 몇천만 원이라는 거금의 입찰보증금을 날려야만 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이 본인의 실제 투자사례인가 아닌가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유는 자신의 투자사례나 명도 경험은 단 한차례도 없이 오로지 책상과 인터넷의 산물로 투자현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공허하기 짝이 없는 부동산 경매투자서가 재테크 비법을 전수하는 관련 서적들이라고 오늘도 유명 서점 진열대를 꽉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내 돈 싸들고 경매판에 뛰어들어 조사·분석하여, 응찰하여, 낙찰 받고, 잔금내고, 명도하여, 부동산을 차지한 다음 처분(임대나 매각)해서 수익을 올린 생생한 투자 체험서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벌써 10년이 지나갔다
부동산 경매시장을 처음 경험한 것이 1994년 말이었으니 벌써 10년 이상이 흘러갔다. 처음부터 부동산 경매를 공부하여 투자하겠다는 야무진 각오가 있어서라 아니라 뒤늦게 입사한 곳이 경기도 성남에 있던 모상호신용금고였다.
‘뒤늦게’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것이 1990년 2월 이었는데, 공부를 좀 더하고 싶어 4학년 때부터 유학을 준비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동경으로 가서 약 3년여의 유학생활을 하였는데, 너무 가난했던 일본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 너무나 가난했던 일본유학시절
춥고 배고팠던 동경시절 이야기 하나만 하자면, 유학 생활 거의를 동경 나까노구(中野區)의 와까미야(若宮)라는 곳의 조그마한 아파트(다다미 4.5장짜리 실평수 3평정도)에서 살았다.
한 층에 공동 화장실이 한개 있던 주택으로 동경의 여름은 길고 높은 습도와 무더운 날씨로 에어콘 없이는 생활하기가 힘들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샤워를 해야 하는데 동전샤워장에는 갈 돈도 없고, 아까워 가지 못하고 집안 싱크대 수도꼭지에다 조그마한 호수를 연결하여 최대한 약하게 물을 틀고는 싱크대 안에 올라가 샤워하는 식의 생활이었다.
아파트에서 역(高円寺驛)까지는 자전거로 10분 정도를 가서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는데, 어느 하루는 역에 도착해서 전철패스(1개월 정기권)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천천히 생각해보니 전날 정기권이 1개월이 다되어 검색기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 그 때서야 생각이 났다. 학교까지 일반권으로 가려면 130엔이 있어야 했는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70엔 뿐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고 무료티켓을 하나 받을까 하다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씩 내리는 비와 함께 한없이 울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마침 그날은 쌀까지 떨어져 아침도 먹지 못하고 학교 가서 교수님한테 밥값을 얻어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3년 내내 거의 그런 생활이었다.
참 많이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은 내 생의 또 다른 밑받침이 되고 있다.
* 무슨 인연으로 경매를 시작하게 되었나
그런 동경생활을 3년 넘게 버티다 경제적으로 기력이 완전히 소진하여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어 내 인생에서 공부는 끝났다고 체념하고 귀국해서 입사한 곳이 성남의 모 신용금고였다. 하는 일이 고객의 이자·원금 밀렸으니 언제까지 송금해 주세요, 채무자가 시간 없다면 직접 받으러 가고, 또 연체상태가 심한 경우는 담보로 잡아놓은 부동산을 경매 넣는 일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경매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게는 두 분의 인생 은인이 있다. 그 중 한 분이 이 시절에 내게 경매공부를 권유한 직장 상사이다. 하고 싶던 공부를 할 수없이 포기하고 돌아와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된 직장에서의 업무는 단순한 회사의 일로만 여겨졌다. 관심이 없으면 어떤 일을 아무리 오래 해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배우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 너무나도 재미있었던 경매공부
부동산 경매와 관련된 일을 나름대로 하면서도 내공을 쌓지 않고 업무로만 익숙해지며 회사를 다니기 2년 정도 될 즈음에 나를 아껴주던 직장의 상사가 어느 날 “우계장 경매공부를 한번 해보지!”라고 지나가는 듯 한마디 하셨다.
이처럼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가 천상에서 들려오는 신의 복음처럼 내 머리를 때렸고 “어떻게 공부하면 되나요?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하면서 신천지 경매세계로 뛰어 든 것이 1996년도였다.
그렇게 시작한 부동산과 경매공부가 그렇게 즐거울 줄은 정말 몰랐다. 기본적인 법률공부, 권리분석, 수익률분석, 물건분석 요령, 임차인에 관한 사항 등 공부하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어볼 때마다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심지어 새벽 두세 시에도 자다 일어나 성실하게 응대해준 상사가 있었기에 오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시금 감사하다.
처음 부동산 경매공부를 권하면서 상사가 권해 준 경매 서적이 『당신도 이틀이면 경매박사』(강현구 지음, 매일경제신문사)였는데 최소한 30번은 읽어보라고 하던 일이 바로 어제 일 같기만 하다. 이렇게 나에게 지나가듯 다가온 부동산 경매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도구가 되었고, 내가 부동산에 입문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 인생역전의 계기가 왔다
본인이 처음 경매법원에 다니던 시절은 호가제와 입찰제가 병행되던 시절로, 아직은 호가제가 주류였던 시기였다. 호가제란 원하는 물건이 진행되면 응찰자들이 집행관 앞으로 나가 구두로 가격을 올려가면서 응찰하여 더 이상 응찰자가 없으면 그때까지 최고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낙찰시키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 농수산물 도매시장이나, 동산 입찰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보면 되는데, 당시에는 일반인들이 경매에 투자하기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요즘처럼 여성들이 법원경매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 누가 응찰했는가 하면 극히 한정된 꾼(?)들만의 잔칫집으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상시로 벌어지면서 경매꾼들에게 떼돈을 벌어주었다.
경매꾼들만이 잔치집이라며 일반인들은 꺼리던 그곳에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부동산 경매가 인생역전의 전환점을 가져다주리라고는 공부시작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회사 모르게(?) 아르바이트
생전 처음 낙찰 받은 물건이 경기도 성남시 신흥동에 있는 대지 면적이 20평이고, 건물은 반지하 1층 지상 2층 단독주택이었다. 지금 성남 구시가지 재개발 논의가 한창 뜨거운 지역의 물건으로 당시 감정가격이 8천500만 원 정도였는데, 3회 유찰로 4천352만 원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4천620만 원에 응찰하였는데 결과는 단독이었다.
소유권 이전에 필요한 비용과 1층에 살면서 보증금을 날린 임차인에게 이사비용으로 준 200만 원을 합해 총 5천여 만 원이 들어갔다. 이중 2천만 원은 잔금융자를 받았으니 실제로 투자된 내 돈은 3천만 원 정도로 소유권을 취득한 다음 전체를 전세로 임대한 내용을 보면 지층은 보증금 1천500만 원, 1, 2층은 각 3천만 원으로 총 7천500만 원이 회수되었다.
이 물건처럼 회사에 근무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낙찰 받은 물건이 총 4건이었는데 회사 다니면서 낙찰 받는다는 것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비밀(?)에 붙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서서히 부동산 경매에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고 자립의 기틀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이 물건은 전세로 임대하고 있다가 경기도 성남 구시가지가 개발 열풍에 휩싸이던 2002년에 1억 2천500만 원에 매도처분 하였다.
* 실직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1997년 말에 몰아닥친 IMF 한파로 다니던 금융회사가 부도나기 일보직전에 실시한 명예퇴직을 자진신청하면서 조직(회사)생활 4년 만에 실직자가 되었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판단하고 경매에 전념하기로 작정하고, 집사람과 퇴직하기로 합의하고 이틀만에 사표를 내고는 구로구 구로동에 있는 ‘경영기술개발원’이라는 곳에서 노동부 고용실업급여를 받으며 고급 이론무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경매세계에 뛰어 든 것이 1998년부터였다.
당시 함께 명퇴를 신청했던 동료가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는데 송별회식장은 그야말로 눈물의 바다였다. 그때가 J모 은행의 눈물비디오가 TV에 방영되던 시기였다.
경매투자 시작 당시 수중에는 퇴직금 포함해서 투자가능 총금액이 3천100만 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처음부터 가난하기도 했지만 다니던 회사 3층에 모 증권회사 지점이 있어, 그곳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날린 돈이 4천여 만 원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은 당시 우리 회사 직원들 중 주식으로 까먹은 금액이 내가 가장 작았다는 점이다. 주식에 손 안댄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 경매 시작 당시 경제·사회분위기
정상화되면 다시 받아주겠다던 신용금고는 퇴직 얼마 후 회사도 부도처리 되었고, 올데갈데없어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경매에 뛰어들 때는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도 했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부동산을 가진 것 자체가 더없이 고통스럽고, 적어도 이 땅에서는 부동산은 더 이상은 재테크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염세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었다.
미달러 대비 환율은 2천 원을 넘었고, 은행이자율은 30%에 육박했으며, 대통령은 TV에 나와 하루라도 빨리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하고 그것에 동참해서 착한 국민들은 몇 시간씩 긴 줄을 선 다음에도 아무런 군말 없이 금 모으기에 동참하던 시절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경제코너 기자님들과 언필칭 전문가를 자칭하는 일부 부동산 점쟁이들은 이 나라에서는 부동산은 더 이상 재산증식 수단이 아니라 애물단지일 뿐이라고 침이 마르게 떠들던 시절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단군 이래 초유의 부동산가격 대폭락을 목격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은 더 이상의 재테크수단이 아니라고 아우성치는 기사들을 읽으면서 착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맞아”, “그래 정말이야”, “부동산은 이제 끝이야!”라고 중얼거리던 시절이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 당시 전체 분위기는 부동산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런 시절에 부동산 경매는 권할만한 재테크 방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많은 돈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가진 돈이라고는 3천100만 원이 전부인 종자돈을 몰빵 치는 심정으로 남들을 경매시장을 쳐다보지도 않을 때 본격적으로 경매를 시작했다.
시쳇말로 ‘물반 고기반’이던 당시 경매시장을 잠시 들여다보면, 고리사채도 아닌 은행이자율이 연 27~30%에 육박하자 파산에 빠진 경매물건이 폭증하는 바람에 자고 나면 법원경매계가 하나씩 생기는 판이었고, 인천·수원지법의 경우는 경매계가 23~25계까지로 늘어나 공휴일·일요일을 빼고는 매일 경매가 진행되었고, 하루에 진행되는 물건이 200~250여건에 이르렀다.
서울 시내 크고 작은 빌딩들이 외국계 투기 자본에게 속속 소유권을 강탈당하던 가슴 아픈 시절로, 부동산 매매시장은 종별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최고 반토막 난 것들도 허다했고, 부동산 경매시장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서울 남부법원에서 진행된 목동의 40평형대 로열층 APT가 감정가격이 2억 2천만 원에 형성되어 2차 유찰은 기본이고, 심지어 3차 유찰되어 감정가대비 51%(1억 1천200만 원)에서 55%(1억 2천100만 원)에 응찰하면 경쟁률은 높아야 3대 1이면 낙찰 받을 수 있었고,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진행된 감정가 1억 8천여 만 원 짜리 분당의 32평형 로열층 아파트가 2차례 유찰되고 3차에서 1억 2천만 원 정도 쓰면 너끈히 낙찰 받던 시절이니, 다른 물건들은 어땠을까는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02~2003년의 부동산 폭발장세를 맞아 서울 양천구 목동아파트의 경우 현재는 평당 매매가가 대략 1천500-1800만 원 선으로 약 6-7억 원 선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고, 분당의 경우는 5억 원 전후에 거래가 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자체만 보면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을 규제하겠다는 것과 금융측면을 보면 은행의 금리가 낮다는 것 정도가 당시와는 차이라 할 수 있다.
** 그 동안의 투자실적은
3천100만 원으로 시작한 부동산 경매 건수가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개인적으로 낙찰 받은 것이 15개이고, 동업자와 공동으로 투자한 것이 15건, 법인과 펀드로 투자한 것이 20여 건으로 총 50여 건에 이른다.
이 중에 IMF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99~2001년 사이에 낙찰 받은 20여개 물건들은 현재 원금대비 최소한 2배에서 많게는 6배까지 부풀어 올라 있는데, IMF 당시 나는 권리분석이 좀 복잡하고 세입자가 많아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던 다가구주택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그래서 본인이 ‘다가구 전문’으로 소문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실제사례 하나를 소개하면 감정가격 3억 5천만 원짜리 마포구 망원동 소재의 대지 47평,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120여 평으로 총 9가구의 세입자가 들어있던 다가구주택이 3차 유찰되어 감정가격 대비 51% 상태인 1억 7천800여 만 원에서 2억 1천300만 원에 입찰하여 경쟁률 6대 1로 낙찰 받아, 선순위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으로 인수한 금액 빼고, 이전비와 공사비 합해서 총 투자금액이 2억 4천 500만 원 정도 들어갔는데, 전세로 회수한 보증금만 3억4천만 원을 받았다.
임대만으로 1억 원 정도를 더 확보하는 식으로 재산을 불려 왔다. 지금 생각해도 뭘 믿고 홀로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왔는지 지나고 보니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결과를 가지고 출발점을 칭찬하자는 것이 아니라 마인드가 말이다. 남들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처분하지 못해 난리법석을 떨던 시절에 낙찰로 부동산을 사들이겠다는 돈키호테 식 발상은 신념과 확신이 있어 가능했다.
** 경매투자 이력서
* 시작(1994년)부터~1998년(IMF로 회사퇴직)까지
이 때는 경매를 접하고 배우던 시절로 회사 업무에 충실하여 그다지 본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식투기로 돈 까먹는 줄 모르고 허송세월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경기도 성남의 구시가지에다가 낙찰 받은 20평지 구옥 두 채를 낙찰가의 거의 세배 가격에 매매했다는 것으로 공부에는 확신을 가졌지만 투자로는 재미를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 1998년 퇴직부터 ~ 2002년 월드컵 개최 시까지
솔직히 말씀드려 내가 평생 먹고 살 것을 만들어 놓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비장한 호들갑이 전국을 덮고 있던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부동산 경매시장에 투자한 사람치고 재미 보지 못한 사람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의 경우도 이때 낙찰 받은 물건들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당시는 이자율이 높아 경매물건은 넘쳐나도 낙찰 받는 사람들은 미친놈(?) 취급당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미친놈 취급하던 분들이 그러나 지금은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하고 있다.
* 2003년부터 현재까지
개인적인 투자와 법인 및 펀드 물건을 구분해서 입찰에 임하고 있다. 1억 원 전후의 물건이나 오래 버티기를 해야 하는 경매물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낙찰 받아 장기전으로 임하고, 덩치가 큰 물건이거나 수익용 부동산의 경우에는 법인이나 펀드를 구성해서 입찰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현재 상황을 보면 수익률이나 우량물건이 IMF 때보다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 이후 부동산 경매시장 전망
부동산 시장의 가격전망에 대한 영역은 귀신도 모르는 부분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아 장래를 예상해 본다면 적어도 2006년 말까지 경매시장은 다른 어떤 시장보다도 수익률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상해 볼 수 있는 이유로는 부동산시장과 경매시장의 서로 연관된 특성 때문이다. 부동산매매 시장이 나빠지면 경매시장은 구조적 특성상 약 6개월 후부터 감정가격이나 낙찰가격이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현재는 참여정부의 10·29 규제정책으로 불황(부동산매매시장은 2005년 말까지 지금 같은 불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음)국면을 지나가고 있다.
본격적인 회복국면을 2006년 초로 본다면 그 1년 뒤인 2006년 말까지는 부동산 경매시장은 다른 어떤 투자보다 높은 수익을 보장할 것이다. 다만 현재 과열되고 있는 경매시장의 일부 ‘토지’는 이 전망에서 제외해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고 좀더 쓰겠습니다.
나의 책 초고라는 점을 미리 밝히며, 제가 이글을 올리는 것은 자랑을 하려고가 아니고 부동산투자는 장기에 걸쳐서 평생하는 투자여서 당장의 어떤 상황에 너무 민감해하지 마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일문일답)김남구 동원금융지주 사장
- [edaily 조진형기자]김남구 동원금융지주 사장은 22일 "저와 동원금융지주 임직원들은 아시아 최고 금융기관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며 한투증권 인수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는 또 "동원증권과 한투증권은 이제 한 가족이 됐고 양사는 규모면에서 1등으로 시작해 앞으로 질적으로도 최고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피력했다.
김 사장은 아울러 "커다란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인수에 따른 직원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의지도 나타냈다.
김 동원금융지주 대표 일문일답
-동원증권과 한투증권의 합병 시기는
▲오늘 내일 중으로 컨설팅 회사를 선정해 합병 시기를 논의할 계획이다. 현재 신한은행·국민은행·하나은행 등 여러가지 합병 사례를 참조하고 있다. 다만 어느 쪽이 좋은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컨설팅사와 논의해 빠른 시일내에 합병 방법과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또 한투 직원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투 직원들의 생각도 듣고 참고하면서 합병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합병 후 구조조정 계획은
▲은행과 은행의 합병은 대부분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이뤄진다. 그래서 명예퇴직을 많이 받고 구조조정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은행과 같은 구조조정은 없다.
동원지주는 사실상 증권과 투신간 이업종 결합이다. 동원증권은 브로커리지 업무에 주수입원을 두고 있고 한투는 금융상품 판매가 주수입원이다. 따라서 같은 증권 투신업을 하고 있다. 전혀 다른 업체와의 합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커다란 구조조정은 없을 것으로 본다.
-향후 다른 곳과도 전략적 제휴를 염두에 두고 있나
▲장기적으로는 유수의 외국 금융기관과 제휴를 할 생각이다. 그러나 일단은 전략적 제휴 없이 단독으로 할 계획이다. 동원의 IB부분은 강하다. 기업공개(IPO)부문에서 작년에 50%의 시장점유율를 장악하고 올해도 30%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소싱이 아닌 프레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투는 반대로 프레싱은 강하지만 소싱이 약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고 실제로 여기서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 합병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합병과 관련해 컨설팅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전에도 컨설팅을 했는데 과거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지난번 컨설팅을 받은 것은 인수 후에 어떤 모습이 그려질까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합병을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기에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컨설팅을 받으려고 한다.
-합병이 미뤄진다면 한투 경영진은 어떻게 되나
▲현 경영진 유지되고 경영활동에 전념할 것으로 본다. 한투가 과거에 오랜 부실을 안고 왔지만 근래 좋은 실적을 유지하고 있고 현 경영진이 열심히 하고 있다. 현 경영진을 믿는다.
-증권사들이 점차 대형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화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
▲현재 동원증권은 IB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소싱쪽에 강하다. 특히 유가증권 발행하는데 아주 강하다. 그러나 소화시켜내는 능력은 아직 일류라고 할 수 없다. 그 부분 가장 강한 것이 한투다. 동원쪽의 시너지는 IB다.
그러나 한투는 20조가 넘는 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이고 수익률이 높은 유가증권에 편입시켜야 하는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고정적인 소싱처를 확보함으로 한투는 고객들에게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률을 가져다주는 회사로 탈바꿈할 것이다.
또 동원은 파생상품 부분에서는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동원을 정밀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으로 비유한다면 한투를 만나 그 제품을 고객들과 만나게 할 수 있는 채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에서 최고의 금융기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궁극적 목표는 `20-20`클럽에 가입하는 것이다. 즉 ROE 20%, 시가총액 20조가 목표다. 이것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선배 세대들이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 때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있다. 돈도 있고 사람도 경험도 있다. 과거 선배들만한 의지가 있다면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고 본다.
-동원증권 유상감자 대금과 하나은행 지분매각 자금을 한투 인수 자금으로 사용했는가
▲한투증권 인수대금은 동원증권 유상감자 대금 5500억원을 조달할 예정이다. 하나은행 지분을 팔아 한투 인수대금을 마련할까하는 생각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현재 자금상황으로 봤을 때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하나은행은 유가증권 운용차원에서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주가가 많이 올르면 팔 것이고 떨어지면 추가 매집할 것이다.
-은행업을 끼고 있는 금융지주와 비교해서 항간에는 열세라는 지적이 있는데
▲한투 인수를 추진하고 나서 국내에서 경쟁자가 누군가에 대해 고려해봤다. 경쟁상대는 은행계열의 증권사들이 될 것이다. 은행의 막대한 자산, 고객, 점포망이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범용성과 고수익을 갖춘 상품을 내놓고 은행을 통해서 팔 것이다. 즉 은행과 마케팅에서 손을 잡을 계획이다.
증권사에서는 좀더 차별화된 상품을 팔 것이다. 가령 은행에서 팔기 어려운 파생상품은 증권사를 통해 판매할 것이다. 은행과의 제휴를 추진해 약점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 아마 한달 후면 은행과 제휴를 위한 조인식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어느 은행과 제휴하는지는 공시 문제 등으로 아직 말할 수 없다.
-투자은행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금확충력이 이뤄져야 하는데 성장전략은 무엇인가
▲당분간 유상증자를 감안하고 있지 않다. 한투증권 인수자금을 내부자금으로 마련한 것도 내부적으로 자금에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번 인수를 위해서 큰 돈이 들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특별한 자금조달 계획은 없다. 성장해나가는데 현재로선 내부 자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은행과의 제휴는 지분 인수도 포함되는가. 또 다른 증권사 추가 인수 계획은
▲현재까지 계획으로는 은행과의 제휴에서 지분 교환을 하지 않는다. 증권사나 투신사 인수는 향후에도 필요하다면 할 것이다. 내부 역량보다는 외부적으로 인수합병하는게 꿈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할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아무것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한투증권 인수조건은(김범석 동원투신운용 사장 답변)
▲한투증권의 부실이라는 것은 대부분 신탁형 증권저축(TTAS), 즉 차입금 때문에 발생했다. 다른 부분에서 이익이 나도 이 부분에서 이자 등 손실이 발생했기 때문에 부실이 심화됐다. 이번 인수조건 중 키포인트는 TTAS 부분을 완전히 매꿔주고 일부 부실자산을 전부 들어내서 매꿔주기로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존 주식을 완전 감자한 후 영업용순자본비률(NCR) 150%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항간에 대투와 한투 모두 특수목적회사(SPC) 부실자산을 떠안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한투의 경우에는 지난 2002년부로 순자산 부족분이 커버돼, 현재 SPC 청산가치가 플러스로 돌아선 상태다. 한투는 명실상부하게 클린컴퍼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