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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위시리스트]'풍선껌' 정려원도 이동욱도, 사랑 앞에 모두 유죄
- ‘풍선껌’[이데일리 스타in 강민정 기자] “이모 두고, 나 안을 수 있어?”여자의 ‘공격력’에 남자는 ‘수비욕’을 상실했다. 사람이 감정을 운용하는 데 정답이 없다지만 적어도 실패한 감정과 성공한 감정이 뭔지는 구분할 수 있다. 케이블채널 tvN 월화 미니시리즈 ‘풍선껌’이 23일 방송에서 선보인 9화,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 편이 그랬다. 정려원과 이동욱, 박희본과 이종혁, 김리나와 박원상 그리고 배종옥까지. 이들이 극중 그려낸 캐릭터의 사랑법을 심판대에 올린다면 모두 ‘유죄판결’을 받을 법했다.라디오 PD 김행아(정려원 분)와 한의사 박리환(이동욱 분)은 인생 최대 고비를 맞았다. 친남매처럼 길러졌지만 돌고 돌아 남녀로 마주한 두 사람. 마음을 확인하기까지도 힘들었던 터라 앞으론 행복할 일만 가득할 줄 알았지만 다 큰 어른들의 사랑에 더 큰 어른들이 개입했다. 어려서부터 두 사람이 이성관계가 되길 경계했던 리환의 엄마이자 행아의 이모, 박선영(배종옥 분)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정신적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선영은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리환의 ‘가족 만들기’에 집중했다. 곧 행아와 리환을 떨어트려 놓는 일이었다.행아는 이성적인 사고를 시작했다. “결국은 너였어. 처음부터 너였어. 다 너였어. 내 말, 틀렸어?” 리환의 진심어린 방어로부터 감정의 날을 세웠다. 밥 뚜껑을 열어주는 일도, 반찬을 얹어주는 일도 거부했다. “너 나쁜 사랑 못하잖아”라는 행아는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죄인이었다. “아니 나 할 수 있어”라면서도 못할 수도 있는 현실과 끝까지 싸워야 하는 리환 역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죄인이었다.돈도 능력도 재력도 갖춘 홍이슬(박희본 분)은 리환을 향한 열병을 앓았다. 리환의 엄마를 조금이라도 낫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신(神)의 경지에 놓여있는 이슬. 그 힘을 이용해 행아를 리환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으려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걸 나는 할 수 있다는 설득은 협박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렇게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쟁취하려는 마음은 간절하다는 걸 알지만 상대의 상처를 해집은 비열한 방법이었다. “가질 수 있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가져도 된다. 자존심까지도. 만약 그런 게 남아있다면.”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먼저 박차고 일어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이슬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죄인이었다.박희본의 극중 극성맞은 엄마(박준금 분)는 사랑을 계산하는 죄인이었다. “엄마 저 좋아하는 사람있어요”라고 말하는 딸에게 “그게 뭐”라고 시큰둥한 대답을 던지며 공부하느라 머리가 다 빠진 ‘대머리 검사’ 사진을 들이밀었다. “결혼에 사랑이 끼어든 거 100년도 안 됐어. 너 할아버지 할머니 때만 해도, 얼굴도 안보고 결혼했어. 사랑 어쩌고저쩌고, 기왕 그렇게 살거면 왕자님이라도 만나던가.” 엄마로서 딸에게 가르칠 수 있는 ‘옳은 감정’은 아니었다.끝내 아버지에게 “죄송해요”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끝내 끔찍이 아끼던 아들에게 “누구세요”라는 말을 던진 선영. 알츠하이머라는 불가항력의 현실과 싸우는 그여도 죄는 있다. 오늘 해야 할 말, 어제 표현했어야 할 마음을 내일로 미룬 죄인이었다.한참 어린 나이, 경력의 후배가 고백해도 진심을 숨기는 라디오 부장 조동일(박원상 분)은 두려움에 굴복했다. 그 역시 사람 좋아지는 일이 무서우면서 다른 이의 사랑법을 운운하는 라디오 작가 노태희(김리나 분)도 잘한 일은 없다.이날따라 ‘풍선껌’은 유쾌함을 상실했다. 무겁게, 묵직하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어떤 인물의 상황에서든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꿈이었으면”이라고 말하는 리환의 내레이션에 시청자의 마음도 쓰렸다. 말대로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예고편을 보니 아닌 듯 싶다. “넌 너대로 살아.” 행아에게 결국 아픈 말을 던지고 만 리환이 울고 말았다.
- [정주영 탄생 100주년]④미완으로 남긴 꿈
-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일평생 건설·중공업·자동차 등 많은 사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살아 생전 못 다 이룬 꿈도 있다.‘아이디어맨’이던 그는 말년까지 정력적으로 신사업 개발에 몰두했다. 그의 사후 일부는 계승됐지만 나머지는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베리아 개발 사업이다. 정주영은 1989년 금강산 개발로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데 이어 아직 한국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지 않은 러시아를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봤다. 시베리아 개발을 향한 첫 행보였다.그는 러시아 시베리아 개발을 통해 목재와 천연가스, 기름, 석탄 등 자원의 창구로 활용하려 계획했다. 중동을 개발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곳을 개발하려 했다.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시베리아 개발은 곧 시베리아와 인접한 북한과의 경제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는 외교는 곧 경제 협력이라며 이를 통해 북한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고, 금강산관광 개발과 함께 러시아~북한~한국을 잇는 가스 파이프라인의 설치를 꾀했다.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이 생애 말년인 2000년 5차 방북에서 돌아온 판문점에서 차남 정몽구 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부축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아산정주영닷컴하지만 이는 미완에 그쳤다. 이를 구상한 지 3년 뒤 그는 대선에 낙선했고, 그 후 5년 동안 공식적인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대북사업에 나선 1996년, 그의 나이는 이미 81세였다.이후 범 현대그룹은 뿔뿔히 흩어졌고, 시베리아 개발 사업 역시 묻혀 버리고 말았다. 현재 시베리아는 한국은 한 발 물러선 가운데 북미·유럽·일본의 자원 쟁탈전이 한창이다.대북 사업 또한 현대그룹이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지만 냉각된 남북관계에 발목이 잡혀있다. 대북사업은 정 명예회장 사후 현대그룹의 대북 로비자금 조사, 북한 핵실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천안함 침몰 등 사건 등 크고 작은 풍파를 겪었고 지금까지도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 회장의 대북사업 유지를 이어오던 현대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해운·상선사업의 극심한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그가 조금만 일찍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면 현재 동북아 정세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그의 사후 묻혀 버린 사업과 아이디어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는 평소 즉흥적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주위 사람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그는 말년에 위 두 사업 외에도 통신사업, 서해안공단 조성사업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인들에 의견을 묻곤 했다. 서산 간척 사업에서 영감을 얻어 티그리스강 유역(이라크)의 농경지 개발 사업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미완의 사업’으로 남았다.북한을 찾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 2번째)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가운데)과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전 회장 등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아산정주영닷컴
- [미리보는 이데일리 신문]신평사 날 선 칼날…“못 믿겠소”
- [이데일리 조용석 기자] 다음은 24일자 이데일리 신문 주요 뉴스다. △1면-신평사 날 선 칼날…“못 믿겠소” -내일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이봐, 해봤어?”-“포스트 ‘양김’ 시대, 화합·시대정신 이끌어야”-문어발 끊고 될 것 만 키워…빅딜 전성시대△YS 애도물결 인산인해-朴대통령, 7분간 머물며 손 여사 위로-[사설]김 전 대통령 빈소에 줄 잇는 조문행렬-[사설]유치원 입학전쟁 부치긴 누리예산△YS 노믹스 재조명-경제 도약 발판 ‘금융·부동산 실명제’ 외환위기 그늘에 가려-각계 조문·애도행렬△제22회 이데일리 신용평가-‘조선 빅3 신용전망’ 내놓은 한신평 압도적 1위-흔들리는 1위 한기평 vs 2위 한신평 -자동차·유통 좋고…조선·민자발전 안 좋아-65% “기업 눈치보며…여전히 뒷북평가 쏟아내”△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무일푼이라 창업 못해?…벤처정신으로 일생 ‘무한도전’-86년 생애 이룬 것…중동 건설시장 개척, 첫 국산차 개발, 올림픽 유치-미완으로 남긴 꿈…시베리아 자원개발, 남·북·러 경제협력△정치·경제-YS개혁은 확고·신속했고, DJ경제는 치밀·집요했다-중국 제조업 맹추격하는데 한국 연구개발은 뒷걸음질△금융-온라인보험슈퍼마켓, 클릭 다섯 번에 207개 상품 가격비교-손 안대고 코 푼 금융위…‘담합논란’에 떠는 은행-SC 제일은행 “주거래 고객 연 3.5% 금리에 모십니다”△Industry&Company-삼성 우수협력사 채용 한마당 가보니-“중국산 짝퉁, 또?” 삼성·LG 부글부글-제네시스 EQ900 사전계약 스타트-현대·기아차 ‘착용로봇’ 개발△산업-카카오 ‘다음 홀대’ 논란-옐로 모바일 숙박서비스업 강화-넷마블 “빅데이터·인공지능 전문가 모셔요”△생활산업-패션업체 ‘드라마 PPL’ 스토리도 담는다-2년 CEO 5명 교체, 토니모리…3분기 실적은 합격, 내부결속은 불합격-HDC 신라면세점,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픈 △Culture&Sports-강남 명품거리, 진짜 ‘국보급 명품’ 있었네-베른트 할프헤르 ‘인터섹션스’ 展…사진, 공간을 뛰어넘다△엔터테인먼트-망가진 이태임 ‘전화위복’…중국 간 클라라 ‘첩첩산중’ △스포츠-세리 언니 따라…박인비 ‘LPGA 명예의 전당’ 간다-올해는 리디아 고-키스너, 9년 만에 첫승 키스-프로야구 MVP 빅뱅…‘40-40’ 테임즈 vs ‘53홈런’ 박병호△건강-대장암 부르는 연말회식…“술은 딱 2잔만 드세요”-병마개 돌릴 때 아프면 ‘손목충돌증후군’-‘ADHD약’ 키 성장 방해한다△Stock Market-얼어붙은 공모株 시장…상장 미루거나 접거나-LG생활건강 “나도 황제주”-한솔제지, 지배구조 이슈 벗고 실적모드로△마켓in-‘신동빈 롯데’ 유통-화학서 왕성한 식욕-코웨이 30일 본입찰…CJ유력 후보 거론-삼성發 빅딜러시…구조조정 매물 쏟아져△글로벌 마켓-화이자, 앨러건 품다…몸값 400조원 ‘제약공룡’ 탄생-아르헨 대선 우향우…12년 만에 정권교체-미 자사주 매입 열풍…성장 걸림돌 되나-日 오사카 지사·시장선거…극우파 하시모토계 압승-中톈진에 ‘세계 최대 복제공장’ 건설△People&사람들-영화 ‘도리화가’ 주연 수지 -현대차, 이웃돕기 성금 250억원 전달-김창성 위너스 대표 ‘기능한국인’-‘여자 워럿버핏’ 별명붙은 中배우 자오웨이-김효준 BMW 코리아 대표, 한국경영사학회 CEO 대상-LG그룹 CEO, 군부대 릴레이 위문△오피니언-[목멱칼럼]‘망각곡선’의 교훈-[기자수첩]변호사 특강 듣는 보험사-[데스크칼럼]기업 구조조정의 정치학△사회-민주투사·대통령 아닌 정 많은 동네 어르신이었죠-수능 문항 이의신청 713건…오류없다-軍 전투복 태극기, 위장색으로 통일△부동산-옆집 원룸보다 최대 80% 싸다고?…매입임대 청약 잡아라-동탄2신도시 ‘신안인스빌 리베라 3·4차’ 호수공원 가깝고 강남 30분 OK-서울 ‘뜨는 지역’ 임대료 급상승 막는다
- 삼성물산 '래미안' 아파트 브랜드 파워 1위
- [이데일리 김성훈 기자] 삼성물산(028260)의 ‘래미안’이 국내 아파트 가운데 브랜드 파워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닥터 아파트가 이달 16일부터 22일까지 만 20세 이상 회원 957명을 대상으로 아파트 브랜드 파워를 조사한 결과 삼성물산의 래미안이 16%로 1위를 차지했다. GS건설(006360)의 자이가 12.5%로 뒤를 이은 가운데 현대건설(000720)의 힐스테이트(10.5%), 대림산업(000210)의 e편한세상(10.4%), 대우건설(047040)의 푸르지오(10%)가 3~5위를 기록했다. 이어 현대산업(012630)개발의 아이파크, 롯데건설의 롯데캐슬, 포스코(005490)건설의 더샵, 두산건설(011160)의 위브, 한화(000880)건설의 꿈에그린 등이 10위권을 형성했다.래미안은 브랜드 인지도와 선호도, 가치도 3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알고 있는 브랜드를 모두 선택하게 한 인지도 부문에서는 래미안이 92.8%를 기록했고 자이(91.1%), e편한세상(90.5%) 등 3개 브랜드의 인지도가 90%를 웃돌았다. 래미안은 가장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브랜드를 선택하는 가치도 질문에서도 37.9%를 기록해 자이(15.7%), 힐스테이트(8.7%)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 래미안의 브랜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로는 ‘지역 랜드마크이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32.1%로 가장 많았고, 건설사 규모(25.3%), 입소문(21.9%), 거주 경험(19.8%) 등이 뒤를 이었다.▶ 관련기사 ◀☞41년 경력 미장기술인 박용곤씨..철탑산업훈장 수상☞삼성 이병철 선대회장 제사 CJ인재원서 열려…이재용 부회장 불참☞[건설산업大賞]분양현장 1㎞내 홍보관…‘고객에 한 걸음 더’
- [김영삼 서거]승부사 YS,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40년 동난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한 ‘3김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 중 한 거목이 또 쓰러졌다. 김 전 대통령(YS)은 27세이던 지난 1954년 3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최다선 기록은 우리 의정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YS는 결단의 정치인이다. 결단과 소신, 용기를 빼놓고는 YS를 설명할 수 없다. ◇헌정사 최초 의원직 제명, “영원히 사는 길 택할 것”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여놓고 대통령의 꿈을 키운 YS는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여당 의원 시절도 잠시,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결연히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후 1991년 3당 합당 때까지 30여년을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화 투사로 살았다.야당을 회생시킨 1970년 ‘40대 기수론’도 YS가 먼저 치고 나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했던 신민당은 3선 개헌안마저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이때 YS는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이철승 전 헌정회 회장이 경선 참여를 선언해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에 오른 뒤 1979년 5월 다시 총재에 복귀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이 시작됐고 결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와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이 빌미가 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의원직 제명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YS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줄기찬 반 유신투쟁에 박정희 정권은 10·26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중심의 신군부는 1980년 5·17조치로 강압 통치를 이어갔다. YS는 기나 긴 자택 연금조치를 당했다. YS는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식음을 전폐하고 무려 23일 동안이나 전개했다. 군부독재에 균열을 낸 YS는 이후 DJ와 함께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6~1987년 직선제 개헌 운동 및 6·10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6월 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3당 합당 결단1990년 1월 3당 합당은 승부사라는 YS 별명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사건이다. YS는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부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여당의 2인자로 변신해 2년 만인 92년 5월 민자당 후보로 선출돼 같은 해 대권까지 거머줬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문민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면서 중단 없는 변화와 개혁을 천명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31년 만에 대한민국에 문민시대를 연 것이다.취임하자마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당시 하룻밤 사이에 떨어진 별이 50개로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1993년 8월에는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고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12·12 쿠데타와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뤄졌다.◇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손학규 등 정계 발탁 YS의 결단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덕분에 집권 초에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 정권 말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되자 하락세를 걷게 된다. 급기야 1997년 12월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를 맞았다.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오랜 군사통치의 종지부 찍는다는 건, 하나회 청산이라는 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융실명제도 여러 평가 있지만 역량 없으면 안된다”고 YS의 공적을 평가했다. 빈소를 찾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역대 정부 중에 제일 효율적으로 단시간 내에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되시고 나서 얼마나 개혁적인 일을 했는지는 역사가 나중에 증명할 거”라고 화답했다. 결단의 정치인답게 YS는 용인술에도 능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YS가 발탁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당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정의화 국회의장도 YS 사람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민중당을 결성해 활동하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을 각각 영입해 의원으로 만든 것도 YS다.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 전 의장,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상도동계는 YS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영원한 동지들이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불세출의 '정치9단' YS가 남긴 공과 과☞ [김영삼 서거]전두환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 [김영삼 서거]행자부 "유족 뜻 전적으로 존중..'기독교 장례' 반영"(일문일답)☞ [김영삼 서거]국가장 확정..26일 발인, 장지 현충원(종합)
- [프리미어 12]한국, 가장 깨끗히 가장 높이 날았다
- 사진=AFPBBNews[이데일리 스타in 정철우 기자]일본이 깔아 놓은 판에서 한국이 높이 날아올랐다. 한국은 21일 도쿄돔에서 열린 프리미어 12 미국과 결승전서 승리하며 초대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는 일본의 일본에 의한 대회였다. 세계소프트볼연맹(WBSC)가 명목상의 주최 단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야구계가 기획하고 만든 대회나 다름 없었다. 일본은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타이틀로 야구 대표팀의 스폰서를 받고 있다. 어떻게든 경기를 유치하고 이어가야 한다. 또한 2020년 올림픽에서 야구 종목 부활이라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 입장에서 프리미어 12는 어떻게든 필요한 대회였다. 때문에 그들은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참가국들의 항의나 따가운 시선 따위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 돌아섰다. 우직하게 우승만을 향해 갔다. 예선 1위를 한 팀이 전날 밤 경기 후 8강전을 낮 경기로 치루는 불합리한 조건에 놓여도, 준결승전 일정이 일방적으로 바뀌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 4강전에서 발목이 잡히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애써 2017년 WBC로 시선을 돌려보려 하지만 싸늘해진 여론까지 돌리는 건 당분간 어려운 일이 됐다. 반면 한국은 당당하게 주인공이 됐다. 대회 준비 과정때만 해도 이런 경사가 생기리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부상을 이유로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진데다 도박 파문으로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대회 일정도 빠듯해 제대로 손발을 맞춰 볼 시간도 갖지 못했다. 여기에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일정과 경기 운영은 더블 악재로 우리 대표팀을 덮쳤다. 그럼에도 한국 야구는 잡초처럼 살아 남았다. 그리고 화려한 꽃이 되어 피어났다. 주축 선수들의 잇단 해외 진출 선언으로 안 그래도 위기감이 컸던 한국 야구계다. 여기에 프리미어 12 우승은 가뭄 끝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오재원을 비롯한 새 얼굴들이 새로운 스타로 발굴되며 야구 팬을 넘어 국민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한국 야구가 두 다리 든든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여러가지로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그 중 최고는 단연 ‘가장 깨끗한 플레이를 하면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대회운영의 불리함과 불공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야구로 이겨낸 것, 그렇게 얻은 승리였기에 더욱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 관련기사 ◀☞ 올림픽 야구 부활 시 8개국 출전 열릴 수도☞ [프리미어 12]한국전 첫 번째 패인은 벤치 경험 미숙...日언론 분석☞ [프리미어12]일본, 멕시코 제압하고 3위 마감☞ [프리미어12]오재원 "'오열사' 새 별명 생겼네요"☞ [프리미어12]마지막 대표팀 앞둔 정대현 "이미 충분히 행복"☞ [프리미어 12]한국, 가장 깨끗히 가장 높이 날았다☞ [프리미어12]대한민국, 종주국 미국 꺾고 초대 챔피언 등극☞ [프리미어12]우승 순간도 차분하게, 매너도 우승감☞ [프리미어 12]한국 우승 이끈 결정적 장면 3選☞ [프리미어 12]에이스, 없었기에 더 빛난 우승☞ [프리미어12]피날레는 우승, 정대현의 마지막 태극마크
- 일본연극, 대학로 단골메뉴된 까닭은
- 일본 번역극이 최근 국내 공연시장에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 미타니 코키의 동명원작 뮤지컬 ‘오케피’의 연출·연기를 맡은 배우 황정민(왼쪽부터), 2년만에 앙코르공연하는 2인극 ‘웃음의 대학’의 서현철과 박성훈, 한·일합작극 ‘태풍기담’의 박상종과 오다 유타카(사진=샘컴퍼니·마케팅컴퍼니아침·서울문화재단).[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우리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대처방식이 조금씩 다른 게 흥미롭다”(일본희곡 번역가 이홍이), “억지로 꾸미거나 유치한 부분이 거의 없다. 탄탄한 대본일수록 어떤 것을 첨가하지 않아도 좋은 공연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배우 이시훈), “한국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연출가 박근형). 일본 번역극이 국내 공연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다. 올 1월부터 연말까지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한 주요 작품 수는 줄잡아 20여편. 이중 상당수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단순히 라이선스 수준을 넘어 한일 공동제작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부터 스릴러, 코믹극 등 장르를 막론하고 국내 공연계에 흐름을 형성해가는 모양새다. 일본 드라마와 영화의 영향으로 일본식 유머코드가 어색하지 않은 점도 한몫을 했다는 게 공연 관계자들의 전언. 장기불황·대지진·히키코모리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쾌하게 읽히는 것도 무기다. 마침 한일수교 50주년인 만큼 앙코르공연은 물론 초연작까지 줄을 잇고 있다. 연극 ‘웃음의대학’에서 ‘검열관’ 역을 맡은 남성진. 남성진은 연기 생활 24년 만에 희극에 처음 도전했다(사진=마케팅컴퍼니아침).◇미타니 고키, 유쾌한 웃음으로 강타 ‘웃음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일본 극작가 미타니 고키(54)는 하나의 브랜드라 불릴 만하다. 연말에 개막하는 뮤지컬 ‘오케피’(12월 18일~2016년 2월 28일 LG아트센터)를 포함해 올해에만 3개 작품이 잇달아 국내 무대에 올라서다. 지난 5월 초연한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는 입소문만으로 인기몰이를 한 데 이어 연극 ‘웃음의 대학’(2016년 1월 24일까지 대학로예술마당 1관)이 2년 만에 앙코르 중이다. ‘웃음의 대학’은 2008년 국내 초연 후 2013년까지 누적 관객 수 33만명을 기록한 대표적인 흥행작. 2차대전을 배경으로 희극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냉철한 검열관과 웃음에 모든 것을 건 극단 웃음의 대학 작가가 벌이는 7일간의 해프닝을 그렸다. 극중 인물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소동과 상황극이 작품의 묘미다. ‘작가’ 역을 맡은 배우 이시훈은 “연기를 하면서 내 대사에 웃음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며 “어느 한 지점이 웃긴다기보다 웃음이 축적돼 후반부에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는 게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언어유희가 미타니의 매력 중 하나다. 배우 박성훈은 “대사량이 엄청나다. 비슷한 말도 많다. ‘검열관님 잠깐만요’ ‘그게 아니라’ ‘어째서요’ ‘이유를 좀’ ‘왜 안 되는 겁니까’ 식으로 계속 나열한다”며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다 있어서 정확하게 대사를 해야 한다. 그것이 웃음의 포인트”라고 귀띔했다. 연극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의 한 장면(사진=두산아트센터).‘오케피’는 1000만 배우 황정민이 연출은 물론 배우로도 활약해 하반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제작사 샘컴퍼니 관계자는 “미타니의 드문 대극장용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단원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웅장하다”며 “캐릭터마다 생명력이 강하다. 미타니 특유의 언어유희도 대단하다”고 덧붙였다. 18인조 오케스트라와 30개 이상의 악기로 들려주는 넘버는 또 다른 매력이다. ◇관계의 시선, 우리 모습 닮았네 무거운 문제를 일본 특유의 가볍고 유쾌한 터치로 어루만지는 작품들은 한국 사회에도 공감할 만한 메시지와 울림을 준다. 18일까지 공연한 연극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나 지난 8일 막을 내린 한일 공동제작극 ‘태풍기담’도 다르지 않다. ‘도쿄타워’로 국내에 알려진 극작가 쓰치다 히데오의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는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남자들의 유치한 편가르기를 다룬 블랙코미디로 인간의 본성을 유쾌하면서도 신랄하게 풀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원작으로 한 ‘태풍기담’은 언어와 권력의 힘에 대한 질문까지 보탠다. 연극 ‘나무 위의 군대’(12월 19일~2016년 2월 28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현대 일본의 고민이 우리의 현실과 맞닥뜨려 있다.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의 미완성 희곡이 원작이다. 작가 겸 연출가 호라이 류타가 완성했다.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적군의 공격을 피해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가 2년 동안 그곳에서 지낸 두 군인의 실화가 모티프다. 극한 상황에서 겪는 두 사람의 대립과 이해에서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이란 메시지를 던진다. 연극 ‘해변의 카프카’의 원작자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왼쪽)와 연출 니나가와 유키오.◇일상 담은 섬세한 대사의 힘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을 옮긴 연극 ‘해변의 카프카’(24~28일 LG아트센터)도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난다. 무라카미의 장편소설 중 연극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15세 소년 다무라 카프카가 삶과 죽음, 어른과 아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무대화했다. 특유의 몽환적이고 스펙터클한 연출로 작가가 말하려 한 의미가 생명력을 얻는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히는 것이 특징. “운명 지어져 있다 하더라도 너는 조금도 어김없는 너인 거고, 너 이외에 아무도 아닌 거야. 너는 너로서 틀림없이 전진하고 있어”(소설 ‘해변의 카프카’ 중). 대사가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지난 5월에 공연한 이와이 히데토의 연극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다. “세상과 어우러지는 연습 중입니다”처럼 소소한 일상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치밀하고, 또 섬세하게 대사로 표현하면서 깨달음과 감성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일상의 한 단면을 뚝 잘라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겨놓은 듯한 대사는 현대인의 삶의 풍경과 고독한 내면을 보여준다. 연극 ‘해변의 카프카’의 장면모음(사진=LG아트센터).
- 정운찬, 세종시 향한 날선 비판…"1급 공무원은 하루만 세종시에"
-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세종시 한 행정부의 1급 공무원들은 세종시 하루 있고, 2급 공무원은 이틀 있고 (중략) 5급 공무원은 5일 있고… 장관들은 한두번 왕복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이명박정부 때 세종시(행정도시) 수정안을 주도했던 정운찬 전 총리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정부 청사 세종시 이전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정 전 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꿈보따리정책연구원(꿈보연) 창립 2주년 심포지엄에 기조연설을 한 뒤 가진 질의응답 시간에 ‘박근혜 대통령은 세종시 덕분에 당선됐는데, 세종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 참석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할지 잘 모르겠을 때는 남들은 어떻게 갔나, 특히 우리보다 이런 저런 것에서 앞선 나라들은 어떻게 했나를 보는 것도 방법”이라며 “행정부가 반은 잘려서 반은 서울에 있고 반은 세종시에 있고 이런 나라는 역사상 없었다”고 지적했다. 정 전 총리는 “동경, 워싱턴, 파리, 런던 다 가보면 입법·행정·사법부가 3~4㎞ 내에 있다”면서 “우리보다 먼저 근대국가를 만든 나라들이 이렇게 할 땐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됐던 행정부도 하나로 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는 왜 나누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이해를 하려고 하면 결국 그건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전략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고 일침을 놨다.정 전 총리는 “(세종시는) 참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라며 “지금처럼 한다면 이 나라는 움직일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세종시는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로 제안했지만 이명박정부에서 정운찬 당시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수정안이 제시되는 등 주춤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대표 시절부터 ‘원안 고수’를 주장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정부기관의 세종시 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편, 정 전 총리는 이명박 정부 시절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당 내 친박근혜계와 대립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고리로 정운찬 총리를 여당의 대선후보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됐다. 박근혜 전 대표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 정운찬, 야권 잇단 '러브콜' 고사…"바빠서"☞ 정운찬 "천정배 의원 만나 나라 걱정 많이 했다"☞ 천정배, 정운찬 전 총리에 신당 참여 제안☞ 아파트 입주물량 몰린 세종시…충청권 인구 유입 증가☞ 총선 전까지 안전처·인사처 세종시 이전..내부 '뒤숭숭'
- [이주의 人터뷰]김재승, '맨땅에 헤딩'하고 '엄마'를 만나기까지①
- 배우 김재승이 2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이데일리 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이데일리 스타in 강민정 기자] 배우 김재승. 포털사이트 프로필엔 없지만, 1983년생이다. 서른 중반을 내다보고 있는 건실한 청년이다. 드라마에선 다르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권력과 부를 얻은 남자. 유라(강한나 분)의 약혼자 시경 역을 맡았다. 김재승은 요즘 MBC 주말극 ‘엄마’에서 엄마 시청자들 복장을 터트리는 악역으로 열연 중이다. ‘이주의 인(人)터뷰’, 김재승의 스토리를 전한다.“이런 역할 처음이에요.(웃음) 저한테 악역이라는 것 자체가 신선하지 않아요? 저에게서 그런 모습을 봐준 분들이 없거든요. 저 역시 그랬고요. 제 눈에서 뭔가 묘하다는 그 눈빛을 봐준 오경훈 감독님 덕에 ‘엄마’를 만났어요.”‘엄마’는 전통적인 주말극 분위기에서 한 발 떨어져있다. 대단한 막장 소재나 불륜, 출생의 비밀과 같은 코드가 없다. 유일하게 나쁘고, 부정적이고, 욕을 부르는 장치가 있다면 김재승, ‘시경’ 역이다.“악역으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있더라고요. 연기하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신기했어요. 상위 1%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웃음) 그런 걸 경험할 수 있는 재미도 있고요.”2004년 MBC ‘논스톱4’로 데뷔했다. 독특한 성격의 매점 아르바이트 생으로 후반부에 합류했다. 이력을 따지면 무려 10년 넘도록 쌓아온 셈. 그에 비해 ‘김재승’ 이름 석자를 또렷이 기억하는 대중은 많지 않다.“그때는 정말 제대로 연기를 했다, 배우로 살았다, 그렇게 말할 수 없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이게 뭔지, 잘 모르고 살았던 때거든요.”터닝포인트가 된 건 MBC 드라마 ‘맨땅에 헤딩’이었다. 2008년, 유노윤호와 고아라, 이윤지, 이상윤과 연기했다. 어려서부터 운동, 특히 구기종목에 두각을 나타냈다는 김재승은 축구 소재의 드라마를 만나 좋았다. 연기를 업으로 삼은 후 가장 활력을 얻은 때였다. 세상은 자기 맘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드라마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에게 비보가 있었다. 아버지를 세상으로 떠나보냈다.“정말 ‘멘붕’이었어요 그땐. 말도 안 되는 감정을 감당했던 것 같아요. 진짜 내가 좋아했던 축구, 내가 하고 있는 일,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되다니 꿈만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예기치 못한 일을 겪게 됐죠.”배우 김재승이 2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이데일리 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방인권기자)드라마를 마치고 군대로 갔다. 스물 아홉. 입영열차를 탈 수 있는 마지막 티켓이었다. 제대 후 달라졌다. 물론 방황기가 있었다. 바로 일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알고 지내던 업계 관계자의 소개로 지금의 소속사를 만났다. 뒤늦게 철이 들었다.“제대하고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삶의 각오를 달리하게 됐죠. 연기 전공도 아니었던 제가, 연기를 하고 난 후에도 ‘연’자도 모르고 일했던 제가 달라지더라고요.”그 사이 ‘마이 시크릿 호텔’, ‘가족의 비밀’, ‘나쁜 녀석들’에 얼굴을 비췄다. 역할 비중을 떠나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다. ‘엄마’를 만난 지난 9월부터 그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엄마’ 촬영이 끝나고 매니저 분한테 제가 그런 얘기를 했대요. ‘내가, 이런 연기라는 행위 자체를 하고 있다는 게 말이야. 왜 이렇게 행복한거야?’ 저는 생각도 안 나는데, 매니저 분이 얼마 전에 알려주더라고요. 제가 요즘 그런가봐요.”큰 눈에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까지. ‘호남형’의 정답과도 같은 그다. 흰 피부에 긴 팔다리까지. 선하고 바른 모습의 그가 ‘엄마’를 만나 행복을 느껴가는 자신을 발견한 결과물은 더 없이 소중해 보였다.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 큰 눈에 눈물이라도 고이면 어쩌지’라는 마음에 기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그는 진국이었다.“연기요, 연기는요 지금 제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거에요. 창피하지만 옛날엔 비주얼 신경썼어요. 어떻게 하면 더 멋질까, 잘 생기게 나올까.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요. 저 요즘은 1%도 신경 안 써요. 대본 공부하는 저, 선배님들과 얘기하고 있는 저, 그 모습에만 집중하고 정진하려고 해요. 정말 뒤늦게 철들었어요.(웃음)”
- [보험 재테크 톡! talk!]당신이 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
- 최근 SNS를 통해 금수저, 은수저, 심지어 흙수저론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굳은 마음을 먹고 금수저, 은수저를 물고 세상에 나온 친구들보다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했지만, 연차가 늘어가고 연봉이 높아져도 늘 궁핍하다. 열심히 돈을 벌어도 늘 쪼들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당신이 늘 가난한 이유 첫번째 - 소비패턴보통 사회 초년생 때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낯선 업무에 적응 하느라 오히려 돈쓸 시간이 없다. 굳은 마음으로 급여의 절반을 저축한다거나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각종 금융상품을 착실하게 불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좀 모일 때쯤이면 어느새 후배가 생기고 업무도 숙달되어 선배들의 소비생활를 배우기 시작한다. 직급 올라갈수록 통큰 선배가 되어야 할 것 같고, 용돈을 받아쓰던 학창시절 궁핍했던 과거를 안주삼아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가? 여자들은 해외여행이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미명하에 명품 소비에 눈을 뜨기도 하는 등 점점 통 큰 소비를 시작한다. 남자들은 그간 조금이라도 모아둔 돈이 있다면, 애써 외면했던 자동차가 눈에 들어온다. 일정 금액을 선납하고 할부금 이 삼십만원으로 오너가 되는 꿈에 부풀어 한 달에 몇 번 타지도 않을 자가용을 소유하기도 한다. 그 후로는 세금과 유지에 필요한 돈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축과는 담을 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생활수준에 벗어난 소비패턴이 늘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다. 당신이 늘 가난 한 이유 두번째 - 투자절망스러운 기사를 자주 접하다보면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로또와 같은 정보에 귀가 번쩍 뜨인다. 주변에서 어디 어디에 투자해서 큰 돈을 벌었다거나, 부동산이 상승한다는 뉴스가 들리기라도 하면 조바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회생활 몇 년 후 돈이 좀 모일 때쯤이면 ‘좋은 정보’나 ‘투자’에 대한 정보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큰 노동력을 들이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다단계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를 대입해 보곤 한다. 한 번 쯤은 공부 삼아서 투자했던 주식에서 수익을 내기라도 하면 투자금이 적었음에 아쉬워하며, 마치 내가 주식 고수가 된 양, 서점에서 각종 투자관련 서적을 탐독해 보기도 하고, 투자와 관련된 카페나 모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제 통 큰 투자를 하겠다며 대출을 통한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다가 큰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신이 늘 가난 한 이유 세 번째 - 보험위에서 말한 과소비를 하지도 않고 투자를 하지도 않는데도 충분히 궁핍해 질 수 있다. 그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험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보험료를 납입하는 것은 월급이 정해져 있는 직장인에게 부담이 되기 십상이다. 물론 나중을 대비해서 드는게 보험이라지만 별다른 금융지식이나 정보가 없이 들게 된다면 매월 납입료가 부담될 뿐만 아니라 잘못된 보험으로 소중한 자산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실제로 마이리얼플랜 1대1 문의 게시판을 보면 제대로된 정보가 없이 은행에 통장을 만들어 가서도 덜컥 가입하기도 하고 전화로 걸려온 전화 상담으로 이런 저런 작은 보험에 가입을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온 보험 설계사와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실 수령액 일 이백만원의 직장인도, 선뜻 월납 오십만 원 백만원의 저축보험에 싸인을 한다. 매달 보험료를 납입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장기상품인 보험을 본인의 납입여력은 무시하고 과도하게 가입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지출이 통제되지 못하거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목돈이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 자신의 자산이 보험에 쏠려 있으면 아무래도 유지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가입과 해약하기를 반복해서 적지 않은 금전적인 손해를 보기 일쑤다. 직장생활하면서 궁핍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백만 원의 1%보다 일억 원의 1%가 더 의미 있기에, 높은 이자율을 찾는데 힘쓰기보다 우선 종자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적에 맞는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어 균형 있는 돈 관리를 해야 한다. 수입이 높아져도 과도하게 소비를 늘리지 않아야 함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본인의 직업에 투자해서 수입을 늘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자신에게 투자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스스로의 만족도도 높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투자이다. 투자와 금융상품 가입 전 학습은 필수이다. 특히나 보험만큼은 다양하고 복잡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하며 철저한 계획 하에 가입해야 한다. 10년, 20년 혹은 평생을 유지해야 하는 장기 상품으로 자기 일생에서 가장 장기계획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이리얼플랜(www.myrealplan.co.kr)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고객과 설계사를 효과적으로 이어주는 플랫폼입니다.
- 생계형 배우의 명쾌한 신념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한동규
- 한동규"/><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연습 전 마주한 한동규가 처음으로 한 말은 "왜 저를 인터뷰하시는 거에요?"였다. 올해만 해도 그는 <여기가 집이다> <엠 버터플라이> <아리랑> 등 세 편의 연극, 뮤지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변함없이 선보인 '관록의 배우'임과 동시에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이 든 영화 <암살>에서 일본군으로 등장해 그간 무대 위의 그를 보지 못했던 많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모습과 이름을 더욱 알린 '뉴페이스'이기 때문이다. 동글게 부푼 곱슬머리, 그와 어울리게 자리한 콧수염, 강렬하게 반짝이지만 웃음기 어려있는 눈동자. 등장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는 절제를 알고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감각을 바탕으로 13년 간 배우라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다져오고 있는 배우 한동규다. 이제 그는 가상의 교도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경계와 힘의 논리, 인간성의 변화 등을 유쾌하게 다룬 연극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의 간수로 등장할 참이다. 스스로 생계형 배우라 지칭하는 자의 자신감과 무대를 향한 번민 없는 믿음, 그리고 명확한 시선이 얼마나 한 사람을 빛나게 하는지, 이번 작품에서도 지켜보면 좋을 것이다.Q. 일본군 역을 맡아 출연한 영화 <암살>이 큰 흥행기록을 세웠다. 단역만 계속 하다 조연으로서는 첫 영화인데 잘 돼서 좋다. 망하면 안 되는 작품이었다,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웃음) 최동훈 감독님이 워낙 잘 만드시는 분이니까, 다음 작품 기대하고 있습니다! (웃음). Q. 그러고 보니 출연한 영화 편수가 많지는 않더라. 한 세 편? 띄엄띄엄 했다. 그리고 워낙, 나도 찾아야 보이는 배역들이라, 훅 지나가고. (웃음) 난 들어오는 건 다 한다.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웃음) 작품도 안 가린다. 스케줄 맞으면 다 한다. Q. 올해 뮤지컬 <아리랑>에서도 친일파 역으로 등장했다. 한 해에 친일파 역을 두 번이나 맡은 셈이다. 광복 60주년에 친일파 역으로 1년을 먹고 산다는 게 쉽지 않은데.(웃음) 글쎄, 내가 친일파 이미지에 잘 맞나 보다. <아리랑>은 '나쁜 역할이다'고만 하고 섭외가 됐는데 '괜찮다, 얼마나 나쁘겠냐' 하고 와 보니 진짜 나쁜 놈이더라. 공연하면서 욕 많이 먹었다. 어우, 진짜 쌍욕도. (웃음) 물론 역할이라 애교 섞인 욕이긴 한데 좀 기분은 나쁘더라. 난 역할에 충실한 것 뿐인데. 얼마 있지도 않은 팬들 다 떨어져 나갔다. (웃음) Q. 곱슬머리, 수염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변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한동규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부러 고집한 적은 없다. 연출이 원하면 바꾸는데 (김)광보 연출님은 스타일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으시더라. 예전에 최용훈 연출님은 본인이 지겨우시니까, 이번에 머리 한번 자르자, 수염 한 번 기르고, 그러셔서 그렇게 했다. 근데 내가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너무 얼굴이 평범해져서.(웃음) 장모님도 사위는 수염 기르는 게 낫다고, 그게 배우 같다고 하신다. Q. 데뷔 후 초창기 사진을 보니 곱슬머리도 아니고, 수염도 없는 매끈한 얼굴이 정말 '꽃미남'이더라. 그런가? 내가? (웃음) 머리는 파마한 거다. 파마한 건, 뭐, 멋있어서? (웃음) Q. 어려서부터 배우를 꿈꿨나? 어려서 꿈은 은행에 취직하는 거였다. 평범한 직장인. 집에 아들이 하나다 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그렇게 주입이 된 것 같다. 나중에 내가 부모님 모셔야 하니까, 취직하려고 주산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6년이나, 오로지 은행에 가려고. 그래서 과도 오로지 경영학과. 그러다 대학교 1학년 때 극예술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들어갔고, 동아리 문을 잘못 여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웃음) 그(연극) 매력에 푹 빠져서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갑자기 연극한다고 하니까 집에서 난리가 났었는데, 그렇다고 크게 말리진 않으시더라.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부모님은 내가 금방 성공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금방 텔레비전에 나오고. 그렇게 시작이 됐다. 텔레비전 한번 나오는 데는 오래 걸렸지. (웃음) Q. 무엇이 그토록 무대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무대에 있는 게 그렇게 좋았다. 관객이 날 바라봐 주고, 마지막에 박수 받고. 그 희열이 어떤 걸로도 표현이 안 되더라. Q. 극단 아리랑에서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극예술동아리 선배가 먼저 아리랑에 입단해 있었다.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고 싶다고 선배한테 말씀을 드렸다. 어떻게 해야 대학로에서 프로로 활동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리랑 들어와라, 그래서 들어갔다. 거기서 막내부터 시작한 거다. Q. 극단 입단 후 무대에 서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안다. 3년 걸렸다. 난 내가 잘 하는 줄 알았고 그래서 바로 무대에 설 줄 알았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였지. 동아리 안에서 잘 해봐야 뭔 소용이 있겠나. 또 그땐 다 취직하러 가고 연극만 하겠다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대에 섰던 거고. 극단엔 워낙 선배도 많았고, 신입단원을 바로 무대에 세우지도 않았다, 조명실부터 들어가게 했지. 규율이 그랬다. Q. 자신감을 가지고 20대 후반에 들어간 극단, 그 안에서 3년의 기다림은 결코 쉬운 시간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명실에서 선배들 연기 보고 배우고, 이것도 되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이 욕심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뭐, 칼 갈았지, 조명실에서. (웃음) Q. 조급해하지 않았던 것은 본인의 성격 영향도 있지 않을까. 같이 공연하던 박철민 선배가 그때 영화 <목포는 항구다>로 조금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술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나도 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할 수 있겠나" 물었을 때 35살까지 무조건 버텨야 된다고, 그 말 믿고 버텼다. 그런데 서른 다섯에 만나니까 다시 40살까지 버텨야 한다고. (웃음) 계속 버티는 인생이었다. 끝까지 버텨보자, 그런 마음 없었으면 중간에 그만뒀을 수도 있었을 거다. Q. 잘 버틴 것 같나? 잘 버텼다. 내 천직이니까. 배우 안 했으면 뭐 했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상상이 안 된다. 그런데 직장생활도 잘 했을 것 같긴 하다. 유머러스하게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내가 빠릿빠릿하게 일도 좀 잘하는 편이고 눈치도 빠르고 해서. 정년퇴직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 일(배우)이 좋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 뵈면, 아, 나도 저 나이 때까지 연기해야겠다, 그 생각 든다. 이호재 선생님이나 오영수 선생님 같은 분 뵈면 정정하시지 않나. 연극을 하시니까 더 건강하신 것 같다, 계속 일하시니까. Q. 출연했던 작품들을 보면 강렬한 이미지를 줄 때가 많다. 대단히 희극적이거나 또는 대단히 악하거나. 희극적 캐릭터는 내 몸에 제일 잘 맞는 옷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희극적 캐릭터만 고집한 적은 없는데 대부분의 연출가들이나 캐스팅하시는 분들이 그런 역할들을 (내게서) 원하시더라. 아니면 아예 강렬한 악역으로 가든지. 그렇게 좀 극단적인 캐릭터를 많이 한 것 같다. Q. 희극적 캐릭터라 해도 작정하고 웃기는 인물, 그러한 표현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웃기려고, '내가 다 웃길 거야' 하고 별 짓을 다했다. 그런데 조금씩 나이가 들다 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 코미디가 진짜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한다. 코미디 호흡이 어마어마한데,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그 흐름, 호흡, 템포를 알아야 관객들을 웃길 수 있으니까. 그런 호흡으로 욕심을 좀 비우고, 내가 골을 넣으려 하지 않고 수비한다는 마음으로 항상 작품에 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절제하게 되고. 연습할 때는 마음껏 해보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깎아내는 과정이 있고 마지막에 공연 때는 어느 정도의 선에 도달하는 거다. 그런데 뭐라 해도 코미디 연기할 때가 가장 편하고, 그런 재능도 조금 있는 것 같긴 하다. (웃음) Q. 집에서도 코믹한 아빠인가? 되게 평범하다. 말도 별로 없고. 아무래도 밖에서 에너지를 많이 쓰다 보니까 집에 들어가면 녹초가 돼서. 그렇다고 뭐 그게(원래 성격) 어디 가겠나. 애들한테 책 읽어 주는 거 되게 좋아 한다. 캐릭터 다 바꿔가지고. (웃음) 동화책을 한 편의 작품처럼 읽어버리니까 애들은 좋아한다. (웃음) Q. 연출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연출을 하겠다고 달려든 건 아니고, 극단 프로젝트로 한 번 해 봐라, 해서 했는데 너무 어렵더라. 내가 연출론이라는 게 없고, 그러니 자꾸 외부에서 봤던 연출들은 흉내 내고 있더라. 아우, 이런 건 아니다 싶어서 거기서 접었다. 난 연기하는 게 좋다. Q. 잘 하는 사람들을 따라 하다 보면 내 실력도 느는 것 아닌가. 그렇다. 그런데 난 롤모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의 좋은 호흡이나 화술들을 따라해 본 적은 있는데 그걸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 이런 적은 없었다. 극단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런 캐릭터로 온 것 같다. Q. 자신감, 자기 확신이 큰 것 같다. 전공서적을 읽어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연기론을 배워본 적도 없고, 오로지 젊었을 때 무대 경험만으로,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게 다다. 그래서 나한테 거창하게 무슨 연극적 이론을 대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순간에 딱 표현할 수 있는 게 배우라고 생각할 뿐이다. Q. 과거 박철민에게 물었던 것처럼, 후배 배우가 '언제쯤 나도 선배처럼 뭔가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일단 버텨라. (웃음) 그리고 많은 무대 경험을 쌓아라. 연극 그만두고 영화사에 프로필 막 돌리는 후배들 있다. 그 마음은 알겠으나 되게 덧없는 행동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프로필만 돌리면 기회가 오기도 힘들 뿐더러, 그 시간에 차라리 어떤 작품이든 작품을 알아보러 다녀야지. 그렇게 하다 잠깐 쉬고 다시 연극으로 돌아오면 이미 설 자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묵묵히 그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는데. Q. 스스로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해 의심도, 고민도, 후회한 적도 없었나? 없었다. 하다 보니 (사람들이) 공연 보러 오고, 공연 보신 감독님이 캐스팅도 하고. 내가 억지로 뭘 막 했다면 그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다 보면 찾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Q. 순리에 맡기는 쪽인 것 같다. 작품 선택할 때도, 작품을 읽어보고 선택하지 않고 스케줄 맞으면 다. (웃음) 생업으로, 내가 작품 고르고 할 때가 아니니까. 운이 좋게 지금 김광보 연출님도 그렇고 그 전에 연출님들도 그렇고, '이거 왜 했지?' 그런 생각 드는 작품이 없는 걸 보면 지금까지 순리대로 잘 온 것 같다. 욕심 안 내고. 운이 좋았던 거지. Q.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의 간수 '대기 곽'은 시류에 편승하고 힘을 가지면 그 힘을 남용하는 캐릭터이다.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진짜 무소불위의 완장을 차게 됐을 때 주변을 통치하고 억압하려는, 그런 본능은 누구나 인간 본연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악한 인물이 아니고 그 상황에 처했을 때 변화하는 인물이라고 본다. Q.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의 배우들은 대본 리딩할 때도 배역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간수 두 명(유연수, 한동규)만 캐스팅 때부터 배역이 확정되었다고. 광보 연출님이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장점을 살려서 캐스팅하신 걸로 일단 생각한다. (어떠한 장점이 캐릭터와 맞았다고 생각하나?) 뭘까, 어떤 명쾌함? 뜨뜻미지근하지 않은. 예전에 연출님이 나에게 되게 명쾌한 사람이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배려. 이 말을 내 입으로. (웃음) 내가 되게 남을 배려하는 배우라고. 앞에 안 나서고 서포트하는. 지금 대기 곽도 그런 역할인 것 같다. 물론 나중에 권력을 잡았을 땐 앞에 나서기도 하지만 중반까지는 극에서 죄수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역할이다. 내가 뭘 해보려고 욕심을 내면 작품도 죽을 뿐더러 되게 안 좋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 같다. Q. 주인공 욕심이 없나?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2007)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는데. 글쎄. 되게 부담스럽더라. 포스터 맨 위에 내 이름이 올라와 있다는 게. 작품이 잘 되고 안 되고가 나한테 달려있는 것 같고. 내 성향도 원톱으로 나서서 뭘 끌고 가거나 그런 건 아직 자신이 없다. 배우가 어떻게 주인공 욕심 없겠나. 물론 있는데,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 욕심 안 내고. 그리고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더 빛나고 박수 받고 관객들 뇌리에 강하게 남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지. Q. 올해로 배우 데뷔 13년이 되었다. 시작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밑바닥에서부터 배우로서의 인성을 극단에서나 참 많이 배운 것 같다. 바로 인기 얻고 바로 무대에 섰다면 우쭐한 마음에 빨리 지치고 좌절도 했을텐데,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올라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쉽게 지치지 않고 계속 이 일을 할 것 같다. 한 작품 할 때마다 대본이랑 포스터, 팜플렛, 계약서까지 (웃음) 파일로 해 두는데, 하나하나 쌓이는 게 되게 뿌듯하더라.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아빠가 걸어온 길을 보면 '아빠가 이런 일을 했구나', 그러지 않겠나. 더 이상 꽂을 데가 없을 때까지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자부심도 크고, 언제까지 쌓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내 가보 같은 거다. Q. 생계형 배우임을 강조하지 않았나. (웃음) 생계형 배우이긴 하지만 자본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다. 일이 겹쳤을 때는 고민도 하는데 과감히 연극 쪽으로 선택하는 편이다. <여기다 집이다> 할 때, 돈을 좀 벌 수 있는 일이 겹쳤다. 돈이 한 열 배 차이는 나더라. 애랑 엄마랑 노는 거 보는데,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 나한테 없었던 돈이라 생각하자' 그러고 <여기가 집이다>를 했는데 그 해 상을 다 휩쓸었다. 그때 돈을 선택했으면 내가 여기까지 못 왔겠다 싶다. 역시 무대는 배신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생계형 배우가 돈 되는 것만 한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들어오는 건 다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달수 선배님 되게 존경한다. 1억 배우지 않나. 그런데도 여전히 연극배우 같으시다. 아무리 바빠도 1년에 한 편씩 연극하려고 하시고, 돈 벌어서 극단 연극 제작도 하시고.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다. 나도 진짜 바빠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꼭 1년에 한 두 편씩 연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감을 놓쳐버리면 나중에 무대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두렵기도 할 테고.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