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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고졸 인권변호사 21세기 첫 대통령 당선
- [edaily 조용만기자] "그래도 이겼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막판 정몽준 대표의 지지철회라는 역풍을 딛고 제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자의 영예를 차지했다. 지역감정 극복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고졸, 인권변호사 출신이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을 거친 원내 1당 후보를 누르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 된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의 인생을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볼 때 이번 당선이 전인지 결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만큼 인생이 파란만장했고, 앞으로도 어떤 변화를 겪을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노 당선자는 66년 부산상고 졸업후 9년만에 29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이전까지 고학생에 백수신세를 면치 못했다. 가난에 따른 좌절과 반항, 열등감은 성장시절 늘 그를 감싸고 있었다.
노 당선자는 1946년 8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본산리에서 빈농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어 겨우 생계를 꾸려갔고 학생 노무현은 공부는 잘했지만 학비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는 못갈 뻔 했고 고등학교 진학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3년 장학금 제안을 받고서야 부산상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술과 담배는 고등학교때부터 배웠다.
학교졸업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협 취직시험에 낙방하자 독학으로 고시에 도전하지만 책 살 돈이 없어 공사판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상처는 지금도 입가에 흉터로 남아있다. 고시패스는 열등감과 가난을 한꺼번에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합격의 영광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노 당선자는 군에서 제대한뒤 고향친구인 권양숙씨와 2년간 열애끝에 1973년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권씨도 수업료를 못 낼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부산 계성여상 3학년을 중퇴했으며 장인은 좌익경력으로 복역하다가 71년에 옥사했다.
결혼후 권씨는 4년여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도왔고 노 당선자는 학교졸업후 9년만에, 결혼후 2년만에 마침내 사시에 합격했다. 어려운 시절을 부인과 함께 한 노 당선자는 올해 국민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좌익경력이 문제되자 후보를 버려도 아내는 버리지 않겠다며 정면돌파해 여성지지자들로부터 격려의 박수를 얻어내기도 했다.
노 당선자는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상속세 반환소송 등 100억원대 이상 거액 소송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며 재산을 모았고 부산상고 동창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선기간 동안 한나라당으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던 요트타기도 이때의 취미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범했던 법조인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81년 부림사건을 맡으면서부터.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소개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이 연루된 `부림사건` 변론을 담당하면서 노 당선자는 불법구금과 고문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고 운동권 학생들과의 만나면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인식을 함께 했다. 고급술집 출입과 요트타기 취미는 끊어버렸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을 맡은 고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 노동변호사로 변신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재야인사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한다. 1987년 2월에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했으며, 6·10 항쟁직후 대우조선 사건때는 제 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노 당선자의 두번째 인생전기는 1988년의 정치입문이다. 노 당선자는 당선과 낙선을 거듭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좌절과 성공을 함께 맛봤다.
노무현은 88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13대 국회에 진출하는 이변을 낳았다.
노무현을 국민적 스타로 만든 것은 그해 국회에서 열린 5공 청문회. 노 당선자는 청문회에서 5공 실세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 등에게 송곳같은 질문과 논리적인 추궁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정치권에서 노무현의 행동은 때로는 소신으로, 때로는 이단으로 비쳐졌다. DJ-YS-JP 등 이른바 3김이 지역정서와 할거주의로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할 때 이에 편승하지 않고 맞서왔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소신이 빛을 발한 것은 3당 합당 거부. 1990년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 의원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YS와 결별한뒤 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해 야당잔류를 선언했다.
3당 합당을 시원스레 거부했지만 지역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결과는 참담했다. 노 당선자는 92년 총선에서 YS가 미는 허삼수씨에게 패배했고 다음해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96년 총선때는 서울종로에서 출마했지만 떨어졌고 98년 보궐선거에서 간신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부산에서 다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노 당선자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이라는 명분을 걸고 DJ와 다시 손을 잡았다. 노 당선자는 "머리는 DJ에게서, 행동은 YS에게서 배웠다"는 평가도 받는다. 개혁노선은 상당부분 DJ의 것과 일치하고,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정치스타일은 YS와 닮았다는 것이다.
거듭된 낙선은 그에게 좌절을 안겨줬지만 국민들에게는 소신있는 정치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줬고 지역감정 극복을 위한 노력에 대해 국민들은 `노사모`로 보답했다. 2000년 4월13일 그가 낙선하자 노무현 홈페이지에는 낙선을 안타까워하는 네티즌들의 이메일이 쏟아졌고 이후 노무현 지지자들은 최초의 자발적 정치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만들어냈다.
이후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에게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적, 물적측면에서 뒷받침이 됐고 올해 국민경선과 대선에서는 정치인 노무현을 부각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지난 봄 민주당 경선때는 회원이 5만명으로 불어났고 노사모의 헌신은 그의 정치적 성공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노사모와 함께 인터넷을 통해 발산된 젊은 세대의 정치열기는 노 당선자의 지지기반 확산에 기여했다. 재야 변호사 시절 노변으로 불리던 노 당선자의 별명은 노사모를 거치며 "노짱"으로 바뀌었다.
노 당선자는 국민경선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이인제 현 자민련 총재권한 대행을 누르고 민주당 후보로 뽑혔다. 예선도 힘들었지만 본선은 더 어려웠다. 국민경선 과정에서 치솟았던 노무현의 인기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본격 경쟁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추락, 지지율이 역전됐고 민주당은 후보교체 논의 등으로 내홍에 휩싸이면서 분당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노 당선자는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를 극적으로 타결지으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선거운동 과정에서 줄곧 이회창 후보를 압도해왔다.
인생에서 유난히 반전이 많았던 노 당선자에게는 이번 대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보단일화후 공동유세 등으로 막판 대세몰이를 거들었던 정몽준 대표는 공식선거운동 7시간여를 남긴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를 전격 발표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최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정 대표는 미국과 북한에 대한 노선차이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차차기 보장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행정수도 이전공약에 대한 한나라당의 강한 반대논리와 이에따른 수도권에서의 지지율 변화 움직임 등으로 이회창 후보와의 격차가 좁아진 상황에서 터진 느닷없는 지지철회는 노 후보의 당선가능성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하지만 이같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노 당선자는 지역감정 해소에 대한 노력과 정치개혁에 대한 젊은 세대의 지지 등에 힘입어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고 학력과 지역정서, 사상 등 힘겨운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다음은 노무현 당선자 프로필
▲대선표어 : 새로운 대한민국
▲생년월일 : 1946년 8월 6일(음력)
▲출생지 : 경남 김해 진영
▲본관 : 광주
▲가족관계 : 부인 권양숙(55)씨와 1남 1녀
▲체격(키와 몸무게) : 168cm, 62kg
▲혈액형 : O형
▲학력 : 김해 대청초등, 진영중, 부산상고
▲주요경력 : 변호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정치경력 : 13·15대 의원, 통합민주당 부총재, 해수부 장관, 민주당 상임고문·최고위원
▲병역 : 육군 상병 만기제대
▲재산 : 2억6263만원
▲납세(최근 3년간) : 소득세 446만 1천원
▲주택 : 45평형 빌라
▲승용차 : 체어맨
▲종교 : 없음(천주교 영세는 받았음)
▲저서 : `여보, 나 좀 도와줘`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공저)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존경하는 인물 : 링컨, 김구
▲좌우명 : 자신에게 엄하고, 타인에게 너그럽게
▲별명 : 돌콩, 노천재, 노짱
▲성격 : 직선적, 솔직
▲취미 : 등산
▲특기 : 없음
▲좋아하는 스포츠 : 등산
▲좋아하는 음식 : 삼계탕, 추어탕
▲즐겨입는 옷차림 : 콤비 스타일
▲주량·흡연 : 소주 반병, 금연했다가 최근 반갑 정도
▲외국어 능력 : 영어 중급
▲자격증 : 변호사, 주산2급·부기2급, 독서대 실용신안
▲홈페이지 : www.knowhow.or.kr
- (화제)신한은행 양신근 부장, 은행 M&A 책 출간
- [edaily 김병수기자][미국 머린내셔널은행 매입 체험기 "그럼, 미국은행 하나 사 볼까"]
조흥은행 인수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신한지주회사. 이 금융그룹의 핵심인 신한은행 양신근 자금부장이 은행 M&A에 대한 책을 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94년 말 추진됐던 신한은행의 미국 머린내셔널 은행 인수과정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필자의 소회가 최근 조흥은행 인수전과 맞물려 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물론 필자가 머린내셔널 은행 인수과정을 책으로 엮은 것은 조흥은행과는 무관하다. 필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미국은행을 인수했던 과정을 있는 그대로 생생히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래서 책 제목도 "그럼 미국은행 하나 사 볼까?"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해가고 있는 지금 "세계 은행에 눈을 돌리자"는 메시지도 담겼다. 마침, 국내 최대은행이라는 국민은행이 미국의 여러 동포은행들로부터 은행 매입의사를 타진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실감난다.
필자는 "M&A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머린내셔널 은행 인수 전 과정에 실무적으로 참여하면서 과정과정마다 발생한 현실적인 문제들의 극복과정을 소상히 소개한만큼 필자의 기대는 상당부분 충족되고 있어 보인다.
책의 전 과정을 통해 필자는 "M&A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이기도 한 이 질문에 필자는 "타이밍(Timing)"이라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상대가 있는 게임인만큼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타이밍에 주력하라는 권고다.
실제로 신한은행이 인수했던 머린내셔널은행은 맨 처음 조사보고서(Work Paper)에서는 30개의 후보은행 가운데 10위를, 당시 신한은행의 전략을 감안해 순위를 매겼을 때도 6위에 머물렀던 은행이다. 신한은행의 입맛에 딱 맞는, 필자의 표현대로 "미스코리아와의 결혼"은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 책을 쓰면서 당시의 신한은행 전략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약간 망설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전략"이라기 보다는 신한은행의 "조직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M&A 과정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필자는 "8년전의 스토리, 그것도 인수후 2년뒤인 98년말에 280억원의 자본이득을 보고 팔아버린 은행의 이야기에 걱정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라고 적고 있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충분히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당시에 머린내셔널은행 매입과정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였던 라응찬 행장과 최영휘 이사(뉴욕 지점장) 등은 현재 신한지주회사의 회장과 부사장으로 이번 조흥은행 인수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75년 옛 상업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해 14년만에 신한은행으로 옮긴 필자가 "신한은행엔 무언가 있다"고 말하고, "기업문화나 기업의 경쟁력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하나의 사례로써 길잡이 역할을 기대하는 욕심을 갖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필자는 이 책에서 "94년말에 왔던 미국은행 매입 기회가 다시 오고 있다"고 정리했다. 95년 이후 미국 경제는 사상유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으나 작년부터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필자는 "은행 매입을 추진하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지금은 그 타이밍이 아니다"고 적고 있다. 경기침체로 주식시장은 폭락했으나 부동산 시장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불경기가 조금 더 진행되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소비심리가 얼어봍으면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은행의 부실대출금이 커지게 되는 바로 이 때가 미국은행 매수 타이밍"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 논쟁에서는 "회복"에 대한 희망섞인 분석이 다소 우세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 달 6일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를 열어 1.75%인 연방기금금리를 1.25%로 50bp 인하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달 5일 3.25%인 기준금리를 2.75%로 50bp를 내렸다.
미국 은행 인수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겪은 필자는 이 타이밍을 언제로 보고 있을까. 필자는 "그 시기는 어쩌면 내년 하반기나 내후년 상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예측하고 있다.
[저자 양신근 부장은]
-52년 : 남원 출생
-70년 2월 : 전주고등학교 졸업
-74년 2월 :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과 졸업
-76년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75년 4월 : 한국상업은행 입행
-85년 8월 : 상업은행 시카고 지점 대리
-89년 3월 : 신한은행 입행
-89년 4월 : 신한은행 뉴욕지점 과장
-93년 4월 : 신한은행 국제부 차장
-95년 6월 : 미 서부지역 은행 인수팀장
-96년 9월 : 머린내셔널 은행 Chief Operating Officer
-98년 3월 : 신한은행 런던지점장
-01년 2월 : 신한은행 국제부장
-01년 8월~ 현재 : 신한은행 자금부장
- (스케치)대선후보 토론회 마감.."3人3色"
- [edaily 김상욱기자]
ㅇ 한국인터넷신문협회와 하나포스닷컴이 주최,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대선후보 토론회가 15일 정몽준 후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는 기존 방송사들의 토론회와 달리 실시간으로 네티즌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토론회에 참석한 노무현, 정몽준, 권영길 후보는 대선을 위한 바쁜 일정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회창 후보가 바쁜 일정을 이유로 토론회 막판 불참의사를 통보해 온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회창 후보는 지난달 28일부터 31일까지 열린 한국기자협회 초청 대선토론회에도 불참했으며 합동토론도 거부한 바 있다.
반면 노무현 후보의 경우 당일 오전일정이 바빠 당초 2시간으로 예정됐던 토론회 시간을 30분 줄이고 시작시간도 앞당기면서까지 토론회 참여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정몽준 후보도 오늘 오후 토론회와 저녁에 모 방송에서 예정된 토론회, 그 이후에는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위한 국회회동 등으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토론회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 후보의 경우 오늘 토론회 준비 등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수행한 보좌관이 전했다.
권영길 후보도 이번 토론회 참여제의를 기꺼이 수용하고 토론회 첫날부터 평소 주장해온 진보주의적 정책들을 마음껏 피력했다.
한 네티즌은 "이번 대선토론으로 대선후보들의 면면을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며 "다만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각분야를 총체적으로 다루기엔 시간이 좀 짧아 아쉽다"고 밝혔다.
또 "이회창 후보가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이라며 "선거가 치뤄지기 전에 이같은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ㅇ 토론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몽준 후보는 오늘도 이른바 "정몽준 화법"으로 민감한 질문들을 비켜나갔다. 세간의 관심이 되고 있는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문제에 대해서도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 "최대한 노력하겠다"며 두리뭉실한 답변을 했다.
중공업 지분 신탁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신탁이 끝난줄 알았다"며 "알아보겠다"고 답변, 자신의 책임을 피해나갔다. 또 낙선이 되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꼭 대통령이 되겠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정몽준 후보는 오늘 토론회중 질문의 요지와 거리가 있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가령 벤처기업에 대한 정책을 묻는 질문에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잘 하는게 중요하다"라는 답변을, 교사 체벌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질문이 너무 막연하다"며 "교사들이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라고 묻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선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해서도 "판사까지 지낸 사람이 검찰조사를 못 믿는다"며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변호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판사도 되는데 왜 서로 못믿는지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ㅇ 이번 토론회는 각 대선주자들의 면면을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각 후보들은 토론회를 통해 자신의 평소 생각과 비전 등을 솔직하게 피력하는 등 후보들마다 각기 다른 색깔을 보였다. 다만 증시와 부동산가격 안정, 정치구조 개혁, 교육문제 등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입장차에도 불구,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첫날 토론회에 참석한 권영길 후보는 부유세권 부과,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 호주제 철폐, 교육제도 개혁 등에 대해 다소 진보적인 주장들을 펼쳤다.
특히 자녀의 동성동본 결혼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그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진정한 진보주의자가 되기 위해 동의했다"고 회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는 평소 스타일대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면 민감한 질문들에 대처해 나갔다. 토론회 전날 농민집회에서 달걀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정치인들은 한번씩 맞아줘야 한다", "달걀을 맞고 나면 일이 잘 풀리더라"며 순발력 있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때 누구를 찍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87년엔 김영삼 전 대통령, 그 이후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찍었다"고 답변, "비밀투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답변하지 않겠다"고 답변한 정몽준 후보와 차이를 보였다. 특히 교육문제에 있어서 "과거에 자녀교육을 위해 한달에 60만원씩 하는 과외를 한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이에비해 정몽준 후보는 민감한 질문들에 대해 대체적으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정 후보는 사회, 교육, 외교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전문가들과 상의해.."라며 구체적인 자신의 정책을 제시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 유니텔, 온-오프라인 통합 웨딩서비스 "메리안" 오픈
- [edaily] 유니텔(http://corp.unitel.co.kr)이 온-오프라인 통합 웨딩서비스 "메리안"(www.marrian.co.kr)을 오픈하고 웨딩시장에 진출한다고 27일 밝혔다.
유니텔은 웨드넷-마로니에 웨딩클럽과 함께 토털 웨딩상품을 제공하는 동숭동 메리안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다양한 웨딩정보 제공을 위한 사이트를 운영하게 된다.
유니텔은 온라인을 통해 ▲예비 신랑신부를 위한 다양한 웨딩상품 등 결혼정보 제공 ▲둘만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홈페이지 제작 ▲인터넷 결혼예식 생중계 서비스 ▲회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 및 정보제공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삼성동 아셈빌딩 8층에 오픈한 메리안 고객센터와 동숭동 직영매장을 통해 ▲메리안 직영매장과 제휴사 상품들에 대한 무료 컨설팅 ▲전문 결혼 도우미들의 결혼준비 상담 등 오프라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메리안 직영매장은 27일 대학로 동숭동 학전 블루(소극장) 1,2층에 새로 오픈하며 웨딩드레스, 사진, 폐백, 혼수, 예물에 이르는 토털쇼핑을 즐길 수 있다.
유니텔은 메리안 가입회원을 대상으로 "혼수품 공동구매" 및 "청첩장 만들어 주기"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한편, 올 가을시즌 결혼을 준비하는 회원에게는 "전문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 저가 구입"과 "부동산 컨설팅" 등의 행사도 펼칠 예정이다.
유니텔은 향후 일대일 100% 맞춤서비스 제공을 위해 금융, 주택, 재테크, 뷰티 등 다양한 상품 개발을 위한 관련 업체와의 공동 마케팅 진행과 전문 웨딩 매니저 교육 및 웨딩드레스 교육에 이르는 웨딩 아카데미 운영도 추진할 방침이다.
회원 가입신청 및 자세한 서비스 내용은 매리안 홈페이지(www.marrian.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⑨박성진 삼성투신 차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삼성투신운용의 스트레티지스트인 박성진 차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운명의 장난(?) 교수의 꿈이 증권사 채권맨으로>
-그럼 신영증권에 입사한 것은 어떤 계기에서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요. 제가 준비했던 학교가 인디애나 주립대였어요. 미국 내에서도 빅 10에 들어가고 무엇보다도 한국학자들 중 여기서 학위받은 분들이 많은 곳이죠.
제 석사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원서를 넣었더니 그 쪽에서 “좋다. 너는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게 왠 떡이냐 싶었죠. 돈도 없는데 미국에서 다시 석사부터 시작하려면 좀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까.
의기양양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더니 아까 그 여자 면접관이 “your job responsibility is not enough guarantee to come back. Your financial status is not enough guarantee to finish your coursework” 이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죠. 그때가 12월이었어요. 1월에 미국으로 가서 2월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수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이미 결혼을 해서 기혼자용 기숙사에 제 피 같은 돈 100불을 예치금으로 송금까지 한 상황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했죠. 그런데 전혀 안 통해요.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경을 불러서 끌어낼 태세에요.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한 남자의 꿈과 인생이 일개 미 대사관 직원의 손에서 박살이 난 겁니다.
인디애나 주립대에 전화를 했습니다. 창피해서 비자가 리젝트됐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다음 달에는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괜찮다. 2년 안으로만 다시 하면 된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나면 토플과 GRE를 새로 시험 봐서 최신 성적을 보내주면 또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낙담한 마음을 조금은 지울 수 있었죠. 그 때 병도 좀 앓았는데 가장이니 어떡합니까. 먹고는 살아아죠. 신문을 탁 펼치고 구인광고를 막 뒤졌어요.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니 12월에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 딱 두 군데였어요. 신영증권이랑 디지털조선. 처음에는 당연히 디지털조선에 가고 싶었습니다. 대기업공채는 이미 가을에 끝났고 신영증권은 회사 자체에 일이 있어서 12월로 늦춰졌다고 하더군요. 신영증권의 일정이 먼저 시작됐는데 모집분야에 연구/조사 분야가 있었어요. 일단 두 곳에 모두 원서를 넣었죠.
-증권이 무엇인지는 아는 상태에서 입사를 결정한 것은 아닐텐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유학준비를 하면서 잠깐 토플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그 학원 바로 옆에 동서증권이 있었어요. 학원에서는 초급반 영어랑 주부회화를 담당했습니다. 아침에만 좀 바쁘고 오후에는 내리 놀아요. 그리고 학생들 수업끝나고 직장인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에 연이어 수업이 계속되는 거죠. 학원강사가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 건강도 많이 망쳐요.
낮에 시간 많겠다 바로 옆에 증권회사 있겠다. 그래서 순진한 집사람을 꾀서 주식을 하겠다고 졸랐어요. 당시 집사람이 피아노 레슨을 20개나 해서 2000만원을 모았거든요.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이 돈을 불려서 유학가자는 결심을 하고 증권계좌를 만들었더니 처음에는 잘 되더라구요. 금방 2500만원으로 돈이 불어났거든요. 저는 주식의 ‘주’자도 몰랐고 기업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어요.
들어본 회사라고는 아버님이 다니셨던 동아건설이 고작이었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사태 때문에 동아건설주가 무척 쌌어요. 그래서 “음 저건 낙폭과대주야” 라고 매입했죠. 하하. 그리고 당시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LG계열사 주식도 샀고요. 그런데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폭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웃음)
그 후 손절할 때가 왔는데도 그걸 못했어요. 개미투자자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죠. ‘손절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오를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류의 생각들. 되긴 뭐가 됩니까. 유학 갈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돈은 줄어드는 지경이 됐어요. 대충 정리를 해보니까 1500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 남았더군요. 속으로는 “그래도 선방했다. 이게 다 내가 블루칩과 낙폭과대주를 산 덕택이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유학이 취소되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내가 왜 주식투자에 실패했는지 증권회사에 들어가서 몸소 알아봐야겠다는 오기죠. 전 그 당시만해도 증권회사 직원들은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딴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데 그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디지털조선은 어떻게 됐냐구요? 제가 학부는 놀아서 학점이 나쁜데 대학원은 all A였어요. 대학원 all A지, 토플 점수 우수하지…나름대로는 서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디조에 원서를 보냈어요. 그런데 서류에서 떨어졌습니다.(웃음) 그래서 지금도 조선일보는 감정이 좋지 않아요.
<우연의 연속, 채권분석가가 되기까지>
-신영증권에 들어자마자 바로 채권부로 갔습니까?
▲연수를 받고 신입사원들에게 지원부서를 적으라더군요. 1순위는 무조건 조사부 적었죠. 한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국제부. 폼 나잖아요. 3순위. 주식부. 왜 주식을 하다가 망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발령을 하는데 인사부장이 “박성진 채권부” 하고 부르는 겁니다.
인상 팍 쓰면서 ‘도대체 채권부가 뭐하는데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사부장께 물었죠. 채권부가 뭐하는 곳이냐고.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아파트 분양하잖아. 거기서 채권받거든. 분양하고 나오는 사람들 앞에서 채권, 채권 하면서 소리지르고 가서 팔아. 너 명동이나 주택가에서 채권, 채권하면서 팔러다니는 사람들 본 적 없냐? 그거하는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토씨하나 다르지않게 전해드리는 거에요. 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황당했어요.(웃음) 채권이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데다 신입사원 교육 때 채권시간이 무지 재미없었거든요. 수학공식 막 쓰고 계산도 복잡하고.
채권부에 갔더니 지금 LG투신에 있는 최원녕 과장이 “네가 채권부냐?” 라고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선배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꽉 잡혀서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았죠. 하하.
-결국 전공이나 희망사항과는 전혀 상관없이 채권판에 들어왔군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수도결제죠뭐.(증권사가 채권매매 중개시 현물 채권과 대금을 교환, 결제해주는 것) 처음 증권사 채권부에 가면 하는 일이 그거 밖에 더 있겠습니까. 속된 말로 인생이 완전히 골로 가더라구요. 그전까지는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을 논하던 나름대로 먹물먹은 지식인이라고 제 딴에 자부했는데 말이죠. 하하.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냥 전공살려서 기자나 됐으면 폼이라도 날 거 아니겠어요. (웃음)
-수도는 얼마나 했습니까?
▲9개월 정도? 한 일년 가까이 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어요. 다행인 것은 저랑 한 조가 된 친구가 운전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그 친구가 막 뛰어다니는 일을 했죠(웃음) 제가 어떤 건물 앞에 차를 탁 세우면 그 친구는 미친 듯 뛰어올라가서 도장 찍어오고. 수도를 직접 해 봐야 채권의 비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어요. 길이 막힐 때는 원효대교를 뛰어서 여의도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어요. 그때 거래가 많았거든요. 선배들이 “야 이 자식아 빨리빨리 처리 못해? 느려터져 가지고선” 뭐 이렇게 혼이났죠. 저도 열이 받으면 “우리 회사에서 매매보고서 나보다 더 빨리 작성하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보다 더 빨리 하는 사람없으니까 늦는다고 갈구지 마” (웃음) 이렇게 맞받았죠.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기술적 분석이나 한번 해봐라”>
-채권의 기술적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그것도 제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신영증권 황 부장께서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이거 한번 해봐라”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셔서 하게 된 겁니다. 입사하고 3개월 후부터 수도업무랑 채권분석을 같이하기 시작했어요. 채권단가, 이론부터 알아나갔죠. 실제로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잘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잘 맞을 때까지 조정도 이리저리 해보고. 여하튼 재미있었습니다.
-채권관련 책은 몇 종류나 봤습니까.
▲기술적 분석에 관한 책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아요. 거기에 나오는 공식들을 보는거죠.
제가 좀 컴퓨터를 다루니까 그 공식들을 프로그램으로 짜고 그것을 또다시 엑셀에서 구현하는 작업들을 했어요. 조정과정을 몇 개월 거치니까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 거에요. 그때 당시에는 족집게처럼 들어맞는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그게 몇 년도인가요.
▲입사하던 해였으니까 96년이군요. 그런데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당시 시장은 지금처럼 시가평가(market to market) 시장도 아니었고 대부분 시장참가자들이 기관투자가다 보니까 현재에 비해 모멘텀이 훨씬 분명한 시장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것이 아니라 한 번 모멘텀이 생기면 관성에 의해서 일정 기간은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된 거죠. 단기 딜링을 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도 막 생겨났습니다. 아침회의에서 “금리 어떻게 될 것 같나?”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코멘트를 하고. 그러면서 “아 나는 이쪽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봐. 분석의 천재라니까” 라는 착각에 빠지게됐죠(웃음).
그 시절에는 어디 인터넷이 있습니까. 나오는 모든 금융데이타를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어요. 한국은행 데이터, 경기동향, 통계청 데이터를 수기로 입력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재미를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군요.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비자받을 때 흠 잡히지 않고 돈 모아서 곧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습니다.(웃음) 학원강사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증권회사라면 미국사람들도 job responsibility가 어쩌니 저쩌니 못할 거 아니겠어요. 2년간 괜찮다는데 금방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학위받는 일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유학 갈 형편도 안됐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학계만큼 정치적인 곳도 없잖아요.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없을 수는 없죠. 사람인데. 수도하면서 도장받으러 다니려고 내가 이때까지 공부했나. 이런 생각들. 그래서 대학때부터 다니던 교회에도 뜸하게 되고. 저는 토요일 교회모임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그 흔한 MT도 한번 안 간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을 모셨는데 생 양아치 같은 애들은 다 잘되고 나는 남들 다 가는 유학 한 번 못 가나’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위에서 뭐하라고 시키면 죽어라 하거든요.(웃음) 제가 바로 그랬어요. 마음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하라면 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자네를 유학 보내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을 시키시려고 일부러 여기 남게 하신 거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에 관한 재능을 주신거다. 네가 경제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하나님이 메꿔 주실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시더군요.
-조직 안에서 전문적으로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수도일이 끝나고 나서는 상품운용팀에 들어갔어요. 말이 상품운용이지 일반고객들을 상대로 채권을 파는 거였죠. 전자계산기도 무지 잘 써야했구요. 세금계산을 손으로 하는데 나중에는 손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손동작을 놀려야 했습니다.
-아니 엑셀이 있었을텐데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관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네요(웃음). 엑셀쓰자고 어른들에게 건의하면 무조건 손으로도 할 줄 알아야 된대요. 컴퓨터 없을 때는 네가 어떡할거냐는 거죠.
<”상상력과 재치” 시황으로 이름을 얻다>
-그럼 시황을 본격적으로 쓴 건 언제입니까.
▲브로커팀으로 옮기면서 시황을 쓰게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3개월 정도 전이었어요. 97년 9월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데일리 한편 조그만 귀퉁이에다가 제 이름으로 시황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평이 너무 좋은 거에요. (웃음)
-제 기억으로도 호평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네요. 기술적 분석과 관련된 코멘트도 최초로 나왔었죠 아마? 지금도 그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제작한 툴을 가지고 하니까 제 예측이 잘 맞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나름대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도 많이 넣었죠. 확인도 안 해보고 “이런 건 아닐까? 저런 건 아닐까?” 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때는 그게 장점이었죠. 지금은 단점이 됐지만(웃음)
제가 지금도 “너는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상상을 먼저 해. 그래서 안돼” 질책을 받아요. 그러면서 맨날 깨지거든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당시 데일리 말고 따로 리포트를 쓴 적은 없나요.
▲사실 저는 데일리를 쓸 만한 내공도 가지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배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채권계에 입문해서 뭔가 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정도겠죠. DB 만들고 상관관계 분석하는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첫번째 프리젠테이션은 어디서 했습니까.
▲정말 기억이 안나요. 한때 많이 불려다니긴 했는데 어디서 처음 했는지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자주 갔던 곳은 외환, 한미은행 등 은행권이었습니다.
-혼자 갔습니까.
▲아뇨. 담당부장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서 상담하고 이것저것 말해주고. 사실 맞았던 적보다 틀린 적이 훨씬 많았어요. 틀렸을 때의 그 창피함, 짜증남이라는 건 말로 못해요. 틀린 것만 가지고도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채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을 한다고 전해주는 정보가 채권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거죠. 시장도 좁고 돌아가는 메커니즘도 빤한 곳이 이 바닥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가서 이러저러 말을 하니까 “쟤는 채권수도도 해 본 녀석이고 말은 좀 통하네” 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건 절대 아네요. 전 지금도 투신, 은행권이 어떻게 채권을 사고 파는지 잘 몰라요. 많은 선배들은 제게 “네가 말은 참신하고 조리있게 했지만 실상 은행이나 보험이 그렇게 단순하게 자산운용을 하는 곳이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해줬죠.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뭡니까.
▲우리 시장이 좀 건조하다 보니..제가 장난기가 좀 심한 편이라 의도적으로 코믹하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내용의 본질은 놓치지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는데. 별루 기억에 남는 것이 없네요.
-시황제목을 무척 재미있게 달았던 걸로 기억됩니다만.
▲음 그런 건 있었어요. 외환위기 이후 IMF 고금리 정책을 계속 고수했잖아요. 그 후 분기마다 정책 내용을 바꾸게 됐는데 한번은 영문을 읽어보니까 이번엔 고금리 정책 완화기조로 간다 뭐 이렇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진짜 금리가 내렸습니다. 마침 금리가 하락하는 날 IMF 서울사무소장의 금리하락 멘트도 나갔죠. 그 시점에서 제가 뭐라고 코멘트를 했냐면 “IMF는 Immediate Money-market Fever 다“ 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해 준 거죠. 분석을 잘해서가 아니라.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