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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황제에서 사업황제로 ...그렉 노먼
- [조선일보 제공] "나는 공격적인 골퍼였다. 그러나 사업은 보수적으로 한다. 돈은 천천히 버는 것이 좋다. 쉽게, 빨리 버는 돈은 좋지 않다." '백상어'라는 닉네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호주 출신 프로골퍼인 그렉 노먼(53)은 더 이상 골퍼가 아니었다. 그는 기자에게 'CEO'로 불러 달라고 했다. 그렉 노먼은 21일 본지와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프로 골퍼로 입문할 때부터 사업가의 길을 준비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10년 이상의 치밀한 준비 끝에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10년이 그렉 노먼이 사업가로 얼마나 성공하는지 중요한 시간이다. 이미 제가 설계한 골프 코스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신흥 시장(이머징 마켓), 특히 인도에서 사업 기회가 많다. 와인 비즈니스도 확장일로이다. 호주에서 시작해 미국에 진출했고, 이제는 남아프리카와 아르헨티나에 진출할 예정이다. 제 황금기는 2012년 이후부터다." 인터뷰 내내 그렉 노먼은 브랜드, 경쟁, 성장을 강조했다. 골프는 이제 그에겐 사업의 한 영역에 불과했다. 주식회사 그렉 노먼은 이미 한국에도 진출해 있다. 경기도 가평의 한화 '제이드 팰리스 골프클럽'이 그의 작품이고, 현재는 금호아시아나·태영·SBS와 손잡고 골프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 역시 그렉 노먼의 골프 웨어 '그렉 노먼 컬렉션'의 한국 시판에 맞춰 이뤄졌다. 그렉 노먼은 "한국시장은 골프 웨어 경쟁이 치열하지만 우리 컬렉션은 한국인의 체형과 스타일을 고려했기 때문에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에 뛰어든 계기는? "프로골퍼로 활동할 때 백상어란 별명을 얻었다. 백상어를 로고로 내세워 그렉 노먼 골프 웨어를 만들었는데 성공했다. 그 후 점차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됐다." ―처음부터 사업을 할 생각이었나. "골프선수로서는 수명이 한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사업을 생각했다. 10년 정도 준비한 후 실행했다. 생각보다는 빨랐지만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내 스스로가 브랜드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스타에서 기업경영인으로 변신에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조심스럽다." ―골프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군에 진출해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했다고 보면 된다. 골퍼로 활약할 때부터 패션에 신경을 썼다. 양복도 스타일 있는 것을 좋아한다. 와인과 쇠고기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주요 비즈니스는? "골프 코스 디자인은 모든 대륙에서 진행 중이다. 사업의 85%가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경기를 덜 타는 편이다. 요즘은 베트남, 아르헨티나, 러시아가 뜨고 있다. 골프 코스와 연계해서 주택 단지를 만들고 그 안에 레스토랑과 와인이 진출하는 등 모든 사업이 보완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시너지가 크다. 골프장과 주택단지를 연계해서 건설하면 프로젝트당 20억~40억 달러가 소요된다. 골프 코스 설계 사업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72개 정도가 진행 중인데 이만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지금까지 설계한 골프장 수는 64개다. 그렇다고 안주하지는 않는다. 계속 성장할 것이다. " ―사업에 실패한 적은? "골프와 비즈니스는 다를 바가 없다. 골프에서는 항상 실수가 있고, 실수를 통해 많이 배운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잔디사업에서 실패를 봤다. 문을 닫을까도 고민했고 지금은 라이선스로 사업을 돌렸다." ―다른 업체와의 경쟁을 즐기는 것 같다. "경쟁은 위대한 것이다. 골퍼였을 때도 전 세계 유명 골퍼들과 경쟁했고, 나 자신을 믿었다. 자신감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자동차 산업도 경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포드의 검은색 차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도요타와 현대가 참여했기 때문에 더 좋은 차가 나왔고 산업이 전체적으로 발전했다. 경쟁 없는 성공은 무의미하다." ―본인은 어떤 사업가라고 생각하나. "골퍼로서 나는 공격적이다. 백상어라는 별명이 그런 스타일을 잘 대변해준다. 그러나 사업에서는 그렇지 않다. 보수적이다. 치밀하게 조사하고 신중하게 뛰어든다." 이날 인터뷰에 그렉 노먼은 약혼녀 크리스 에버트를 동반했다.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손을 붙잡고 있었고, 말미에는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그렉 노먼은 중국을 못 가본 그녀에게 상하이 구경을 시켜줄 참이라고 했다. 그는 "테니스가 전 세계적으로 다시 각광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미국에서 테니스 아카데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에버트에게 사업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테니스 마니아라고 말하자, "영부인도 친다면 다음에는 부부끼리 복식을 치고 싶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렉 노먼은 "다음에 한국을 방문할 때는 부부 사업가로 인사드리겠다"며 인터뷰를 끝마쳤다. 그렉 노먼(Greg Norman)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골퍼로 '백상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55년 태어나 15세에 골프를 시작했고 21세에 프로에 데뷔했다. 현역 시절 PGA 20승을 비롯, 66번의 우승과 331주 연속 세계 랭킹 1위 기록을 보유했다. 전성기를 보여준 1990년대에는 골프 설계사로 이름을 날렸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골퍼와 사업가의 길을 병행해 왔다. 현재 'Great White Shark Enterprises'란 지주회사 아래 골프 코스 설계·골프의류·부동산개발·와인·외식사업 등 10여개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재산은 1억6000만 달러로 알려졌으며 지난해 호주의 100대 부자에 꼽히기도 했다. 1970~1980년대에 테니스의 여제로 불렸던 크리스 에버트(Christine Evert)와 연인 관계로, 지난해 말 약혼했으며 곧 결혼할 예정이다.
- 李 "시간 내줘 고맙다"..부시 "친구로서 당연"
- [조선일보 제공]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 내외는 18일 오후 4시부터 19일 오후 1시(이하 현지시각)까지 21시간여 동안 캠프 데이비드에서 처음으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의를 다졌다.◆부시의 환대이 대통령 내외는 18일 오후 헬기를 타고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 골프 카트를 타고 미리 나와 있던 부시 대통령 내외의 환영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이 대통령을 대기하고 있던 골프 카트로 안내해 "운전하겠느냐"고 물었고, 이 대통령은 "해보죠"라며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부시 대통령이 기자들을 향해 웃으며 "이 대통령은 내가 운전하기를 꺼리는 모양"이라고 농담하자 이 대통령 역시 "부시가 나의 손님"이라고 농담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동하면서 이 대통령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훌륭한 운전사"라고 했다.이 대통령은 카트를 타고 1시간30분 동안 캠프 영내를 둘러보는 동안 부시 대통령에게 "내외가 바쁠 텐데 이틀씩이나 시간을 내줘 고맙다"고 했고, 부시 대통령은 "친구로서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수행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두 정상 내외는 이어 오후 6시30분부터 1시간 35분 동안 '로렐 캐빈'에서 로라 여사가 마련한 몬태나산(産) 소고기 스테이크로 저녁 식사를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와 에너지, 고령화 문제 등이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9일 한국 대선일이 이 대통령의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해 이번 회담을 앞두고 상당히 세밀한 부분까지 준비했음을 알게 했다. 만찬에는 미국측에서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 조슈아 볼턴 비서실장 등이, 한국측에서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김병국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등만 배석했다.이 대통령 내외는 만찬을 끝낸 뒤 부시 대통령 내외의 안내로 숙소인 버치 캐빈에 도착, 잠시 수행원들과 환담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버치 캐빈은 평소 부시 대통령의 부모가 묵는 곳이다. 이 대통령 내외 외에 캠프 데이비드의 다른 숙소에서 1박한 사람은 만찬 참석자 3명과 일부 수행원, 경호원 등뿐이다. 다른 공식 수행원들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차로 10분쯤 떨어진 모텔에서 묵었다.◆정상회담과 기자회견부시 대통령은 19일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된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의 제안에 자주 긍정적인 화답을 했다. 이 대통령이 "6자 회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것"이라고 하자, 부시 대통령은 "좋은 의견(That's good)"이라고 했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문제 등에 대해 "(한국이) 파병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한국이 미국의) 친구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리트머스(시험지)는 아니다"며 우리측을 배려했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그러나 두 정상은 때때로 뼈 있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기싸움'도 펼쳤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이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같이 대응하자"고 하자 이 대통령은 "놀랍고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듣기에 따라선 "의외다"는 뉘앙스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부시 대통령이 그동안 온난화 방지협약에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는 나쁜 협정"이라고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면서도 "그렇지만 중요한 과제니까…"라고 받아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두 정상은 회담을 끝낸 뒤 오전 11시17분쯤 헬기장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두 정상 모두 간편한 복장에 캐주얼화를 신었다. 이 대통령은 연단에 서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골프 카트를 타고 회견장에 먼저 도착해 있던 부시 대통령 부인 로라 여사에게 "굿 모닝, 로라"라고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두 정상은 30여분간 동시 통역으로 진행된 기자회견 동안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짓을 하는 등 상대 발언에 자주 공감을 표시했다. 이 대통령이 "주한 미군 수준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면서 부시 대통령에게 "그렇죠"라고 묻자 부시는 "우리가 문서에 명시했습니다"라고 화답하는 식이었다.
- 캠프데이비드 1박2일..''마음 통하는 친구로''
- [조선일보 제공]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첫 만남은 18일 오후부터 19일 낮(현지시각)까지 캠프 데이비드(David) 별장에서 이뤄진다. 두 정상은 이곳에서 세 차례 긴밀한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18일 만찬은 두 정상 부부와 양측에서 각각 1~2명 등 모두 합해 6~7명 정도만 참석하는 사적인 만남이다. 정부 관계자는 "두 정상이 인생, 정치철학 등을 격의 없이 얘기하면서 개인적인 유대를 다질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아주 특별한 손님을 집안에 맞이하는 분위기가 될 듯하다"고 했다. 그는 "양국 대통령은 함께 산책하거나 주변 스포츠 시설을 둘러볼 것 같다"면서 "두 정상이 뭘 할지를 당일 그때그때 정할 것이기 때문에 의전 측면에서는 (미리 준비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19일 정상회담에서는 FTA와 동맹 등 양국 현안이 본격 논의되고, 이어지는 오찬에서는 양국의 범세계적 관심사가 테이블 위에 오르게 된다. 이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줄 선물로 각궁을 준비했고, 부시는 'MB' 문자를 새겨 넣은 '캠프 데이비드 가죽재킷'을 선물할 예정이다. 각궁은 대나무에 물소 뿔과 소 힘줄을 덧대고 뽕나무·참나무 등의 재료를 붙여 만드는 전통 활이다. 김윤옥 여사는 로라 여사에게 백자로 만든 부부 커피잔 세트를 주기로 했다. 이 대통령 부부는 다음 달 크로퍼드 목장에서 결혼하는 부시 대통령의 둘째 딸 제나에게 줄 '혼수 선물'로 나무기러기 한 쌍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 데려올 애완견 바니, 비즐리와도 친숙하게 지낼 '준비'를 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바니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 백악관 홍보 비디오의 주연으로 등장하고 있는 스타로 배구공, 골프공을 갖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비즐리는 탭댄스를 즐긴다"면서 "이 대통령은 바니와 비즐리를 보고 꺼낼 '멘트'까지 미리 준비했다"고 했다. 캠프 데이비드는 미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97km 떨어져 있다.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는 "캠프 데이비드로의 초청은 미국 대통령이 상대국에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라고 했다. 캠프 데이비드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 대통령 시절 '샹그릴라(Shangri-La)'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루스벨트는 여기에서 윈스턴 처칠(Churchill) 영국 총리와 2차 세계대전 종전 계획을 논의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통령이 손자 이름을 따서 캠프 데이비드로 바꿨다. 피칭 전용 골프 코스, 승마장, 볼링장, 수영장, 연습용 암벽등산 벽, 체육관 등이 갖춰져 있지만 정작 숙박시설은 소박하다고 한다.
- [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④]4커플 실제 궁합은? 최고는 '앤디와 솔비'
- ▲ 솔비와 앤디[이데일리 SPN 김은구기자] 4쌍의 커플 알렉스와 신애, 앤디와 솔비, 정형돈과 사오리, 크라운제이와 서인영.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간판 코너로 급부상한 ‘우리 결혼했어요’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에서 각각 짝을 이뤄 가상 신혼일기를 써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알렉스와 신애는 다정다감한 신혼, 앤디와 솔비는 귀여운 신혼의 모습을 보여주고, 정형돈과 사오리는 게으른 남편과 뭐든 남편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아내, 크라운제이와 서인영은 툭하면 싸우는 신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실제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한다면 궁합은 어떨까? 서울 창천동의 역술인 서정희씨에게 이들 각각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생년월일로만 이들 커플의 궁합을 풀어줄 것을 의뢰했다. ▲ 서인영과 크라운제이◇ 크라운제이와 서인영 :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NO! 여자는 인정이 많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강직하고 의리도 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하며 이기적인 면도 있다. 냉정하기도 하다. 남자는 포부가 크고 판단력은 냉철하며 타고난 재주도 있다. 그러나 조금 내성적이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궁합은 안보면 보고 싶지만 막상 만나면 그저 그런 사이다. 교제 초기에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좋아할 수 있지만 결혼은 안하는 게 좋다. 성격상 많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서로 미워하게 될 수도 있다. ▲ 신애와 알렉스◇ 알렉스와 신애 : 남편은 무수리, 아내는 왕 괜찮은 궁합이다. 무난하게 살 수 있다. 여자는 고집스러운 면도 있지만 인정이 많고 마음이 착하며 총명하다. 남자는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며 예민하지만 이해심이 있고 설득력도 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으면 왕과 무수리의 관계가 된다. 그런데 아내가 왕이고 남편이 무수리다. 남편이 아내에게 잘 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여자도 남자가 삐치면 풀어주려 하지만 남자가 여자의 기분을 더 잘 풀어줄 수 있다. 특히 여자가 이재에 밝고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 운인 만큼 결혼을 하면 부동산 관리는 아내가 하는 게 좋다. ▲ 사오리와 정형돈◇ 정형돈과 사오리 : 남편에게 아내는 복덩이 여자는 불같은 성격이 있지만 정이 많고 총명하며 지혜롭다. 또 만인에게 호감을 주는 기운을 갖고 있다. 남자는 천성이 맑고 자신보다 남을 더 돋보이게 하지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면도 있다. 또 불같은 성격에 말 실수로 인한 손해가 우려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밝은 성품 때문에 ‘알콩달콩’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난하게 살 수 있다. 특히 남자의 운줄을 여자가 잡고 있다. 결혼을 하면 남자가 어려움을 겪을 때 여자가 힘이 돼 주는 관계다. ▲ 솔비와 앤디◇ 앤디와 솔비 : 4커플 중 최고 궁합 남자는 생각이 건전하고 총명하며 재물복과 자식복이 있다. 그러나 바쁘게 살 팔자다 보니 결혼을 해도 가정보다는 밖의 일에 신경을 더 많이 쓸 수 있다. 여자(솔비의 생년월일은 프로필에 기재된 것)는 불같은 성격이 있지만 인정 많고 똑똑하며 포부와 야심도 있다. 말도 잘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커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궁합이다. 여자는 남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이벤트도 잘 마련할 수 있다. 위기가 닥쳐와도 힘을 합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다만 남편이 밖의 일에 신경 쓰도록 경제권 등 가권은 아내가 갖는 것이 좋다. ▶ 관련기사 ◀☞[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③]'귀여운' 솔비, '친근한' 신애...이미지도 바꿨다!☞[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②]사실과 허구 오가는 재미...'기준? 별들에게 물어봐'☞[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①]미혼은 '설렘', 기혼은 '추억'...'매력이 뭐길래?'☞크라운제이, 아내 서인영 '외조' 눈길...쥬얼리 후속곡 뮤비 출연☞'결혼했어요' 알렉스-신애 커플 잠정 하차...김현중 새 커플 준비 중
- [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①]미혼은 '설렘', 기혼은 '추억'...'매력이 뭐길래?'
- ▲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에 가상 부부로 열연하고 있는 솔비-앤디,서인영-크라우제이,신애-알렉스,사오리-정형돈 커플(사진=MBC)[이데일리 SPN 김은구기자]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가 인기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3개 코너 중 가장 높은 시청률로 이 프로그램의 권토중래를 이끌고 있다. 한동안 인기 하락세를 거듭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우리 결혼했어요’를 앞세워 부활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는 3월16일 방송부터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정규 편성돼 지난 13일까지 5회가 방송됐다. TNS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이 코너의 시청률은 첫회 11.0%로 또 다른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들인 ‘간다투어’(10.7%)와 ‘경제야 놀자’(10.2%)의 시청률을 앞섰다. 2회째인 3월23일 방송에서는 16.1%를 기록한 ‘간다투어’ 코너의 16.1%보다 낮은 13.6%에 머물렀으나 이후 3월30일 12.9%, 4월6일 13.5%, 13일 14.2% 등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들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의 인터넷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도 온통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 관련 글들 뿐이다. 시청자들은 각각의 커플들에 대한 의견을 올리며 이 코너의 인기를 방증하고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는 스타웨딩버라이어티를 표방하고 있다. 연예인들이 각각 가상의 신혼부부로 짝을 이뤄 신혼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앤디와 솔비, 크라운제이와 서인영, 알렉스와 신애, 정형돈과 사오리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 코너의 인기 이유는 신혼집을 배경으로 그동안 전혀 볼 수 없었던 연예인들의 생활 밀착형(?) 모습을 본다는 것이다.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무대에서 연예인들의 모습은 꾸며진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결혼했어요’는 집을 배경으로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담다보니 공개되지 않은 연예인들의 실제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집에서 툭하면 빨래를 개고 아내를 위해 하트 춤을 추는 앤디, 김치를 담그는 솔비, 툭하면 삐치고 남편을 몰아붙이는 서인영, 소파에 눕기 위해 아내와 전쟁을 벌이는 정형돈의 모습 등등. 더구나 결혼식이 많은 봄철, 이들이 엮어가는 신혼일기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크라운제이와 서인영, 정형돈과 사오리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 알렉스와 신애, 앤디와 솔비의 풋풋하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에서 젊은 층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신혼생활을 상상하며 기대를 부풀리고 이미 결혼을 한 시청자들은 신혼시절의 행복을 떠올린다. 결혼 15년차라고 밝힌 한 시청자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 시청자 게시판에 “네 커플은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닮았다. 언제는 앤디네, 언제는 정형돈네, 언제는 알렉스네 같았던 내 과거가 오버랩 된다”며 “아마 제작진은 이 모두의 모습을 여러 가지 면에서 보여주며 우리의 삶과 비교하고 때로는 추억에 젖고 때로는 부러워하며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를 즐기라고 한 것 같다”고 적었다. ▶ 관련기사 ◀☞[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④]4커플 실제 궁합은? 최고는 '앤디와 솔비'☞[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③]'귀여운' 솔비, '친근한' 신애...이미지도 바꿨다!☞[떴다! 우리 결혼했어요②]사실과 허구 오가는 재미...'기준? 별들에게 물어봐'☞크라운제이, 아내 서인영 '외조' 눈길...쥬얼리 후속곡 뮤비 출연☞'결혼했어요' 알렉스-신애 커플 잠정 하차...김현중 새 커플 준비 중
- 정재형, "전자음악 택한 이유? 베이시스의 늙은 오빠로 남긴 싫었다"
- ▲ 6년만에 솔로 3집 '포 자클린'으로 돌아온 가수 정재형[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빠른 비트의 전자음악에 여유로운 보컬과 사소한 일상을 담은 소박한 가사, 이런 극과 극의 만남이 이번 앨범의 특징이죠” 그룹 베이시스 해체 이후 1999년 홀연 파리로 영화 음악과 작곡 등을 공부하기 유학을 떠난 가수 정재형(36). 그가 6년만에 ‘포 자클린’ (for Jacqueline)이란 솔로 3집을 들고 돌아왔다. 그것도 베이시스 시절 들려준 ‘내가 날 버린 이유’, ‘작별의식’ 같은 비장미 넘치는 발라드가 아닌 전자음악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정재형이 지난 2002년 발매한 솔로 2집 이후 음악 작업을 중단했던 것은 아니다. 정재형은 그 동안 영화 ‘오로라 공주’, ‘Mr. 로빈 꼬시기’ 등의 O.S.T 작업은 물론, 2005년에는 클래식 연주가와 앙상블을 구성해 클래식 앨범도 한장 냈다. 인터뷰를 위해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형은 그가 들고 온 새 음악만큼 세련되고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다. 검은 가죽 바지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나온 정재형은 원색의 머플러로 무채색의 무거움을 한번에 덜어낼 줄 아는 패셔니스타였고, 굵은 웨이브의 조금은 어수선한 단발머리는 파리지앵의 자연스러움이 한껏 묻어났다. 이제 서른 여섯,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자 되돌아 온 “아직은 좀 더 음악 작업에 열중하며 내 시간을 좀더 갖고 싶다”는 정재형의 말에는 데뷔 13년차 뮤지션이라고는 믿기 힘든 음악적 열정에 대한 날섬이 느껴지기도 했다. ▲ 6년만에 솔로 3집 앨범을 들고 돌아 온 가수 정재형 다음은 정재형과 새 앨범에 대해 나눈 일문 일답이다.▲3집 앨범 ‘포 자클린’(for Jacqueline)에서 본격적으로 일렉트로닉 앨범을 들고 나왔다. 정재형을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팬들에겐 낯설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미니멀한 전자음악들에 빠져있다. 한국에서는 인디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렉트로닉 듀오 페퍼톤즈의 음악도 즐겨 듣고 있다. 이번 나의 전자음악이 낯선 분들도 있겠지만 지난 솔로 2집과 그간 작업한 영화음악들을 꾸준히 들어왔던 분이라며 나의 이런 음악적 변화를 조금씩 감지하고 계신 분들도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베이시스 때 했던 발라드 음악에 대한 미련은 없나? 그 향수를 바탕으로 좀 더 패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새 앨범에 과거의 나가 아닌 지금의 나를 담고 싶었다. 지금 나의 음악적 토대와 배경은 이미 베이시스 시절에 했던 음악과는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음반의 인기 등 상업적 목적을 위해 베이시스류의 발라드 음악을 들고 나오고 싶진 않았다. 과거의 늙은 오빠로 돌아오고 싶진 않았다랄까?(웃음) 새로운 형식의 음반으로 팬들 앞에 서고 싶었다. ▲이번 앨범은 파리에서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좀 경쾌하고 화려할 것 같은데 조금 우울한 면이 없지 않다. -한 달 정도의 관광을 목적으로 들른 사람에게 프랑스 파리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짧은 기간 동안 멋진 곳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고 돌아가니까. 하지만 난 유학생 신분으로 9년여를 파리에서 관광이 아닌 생활을 해야했다. 관광객들이 좋은 음식만 먹는다면 남 좀 더 저렴한 식단을 강구해야 했고.(웃음) 그래서 자연스레 작사를 할 때도 파리의 화려한 공간이 아닌 파리의 평범한 유학생으로 나의 사소한 일상에 포커스를 맞추게 됐다. ▲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다른 사람이 생각하 듯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화려함은 한 때였고 파리 고등 사범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했는데 너무 재능있는 친구들이 많아 내 재능에 회의가 들던 때가 많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 앨범 제목이 ‘포 자클린’이다. 7번 트랙에는 ‘자클린’이란 노래도 있고. 혹 파리에서 사귄 누군가를 위한 앨범은 아닌가? -자클린은 그냥 한국의 영희처럼 누군가를 지칭하는 일반 대명사다.(웃음) 자클린이란 노래는 내가 프랑스 중심가의 한 아파트에서 살 때 윗 층에 살던 한 여자를 ‘자클린’이라 비유해 쓴 곡이다. 그 아파트는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주로 살았던 곳인데 아파트가 오래돼 사람들이 복도를 지나다니는 소리가 다들릴 정도로 다른 집에서 뭐하는지가 다 들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내 윗층 여자는 새벽이 되도 잠을 잘 들지 못했고 언젠가 한번 그의 집에 올라가보기도 했는데 너무 외로워 보였다. 이는 파리에서의 조금은 우울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온 나의 궤적을 대변하기도 하기 때문에 자클린을 제목으로 넣었다. ▲ 그럼 지난 9년간 파리에서 사귄 이성은 없나? -없다고 할 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웃음). 사귄 적은 있다. 얼마 전 결별해 지금 사귀고 있는 친구는 없고. ▲ ‘지붕 위의 고양이’란 곡의 피처링을 모델 장윤주씨가 했는데? -장윤주와는 7~8년전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음악하는 사람들 술자리에 참석해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자기가 만든 데모 테이프도 있고 곡도 쓰고 작사도 하고. 이번 곡을 쓰면서 문득 윤주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같이 녹음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성사된 것이다. ▲ 대중음악 가수이기도 하지만 영화 음악을 하기도 했고, 클래식 음반을 내기도 했다. 각 음악 작업엔 어떤 다른 매력이 있나? -클래식은 몇 개월 동안 작업하는 논문 같은 것이라면 영화 음악은 영화를 보고 음악에 대한 감상문을 음표로 풀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요는 소설쓰는 느낌이랄까? ▲ 이렇게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 본인의 음악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이런 다양한 음악 장르의 활동으로 인해 오히려 한동안 힘들었던 적도 있다. 한동안 클래식 공부와 영화 음악을 하다보니 가요를 작곡할 수가 없었다. 코드를 짚으면 전혀 가요스럽지 않은 코드만 나오고. 그래서 솔로 앨범 준비를 시작한 한 동안은 공황 상태였다. 이런 고민들이 솔로 앨범이 늦게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 그럼 어떻게 그런 위기를 극복했나? -2004년인가? 엄정화의 8집 앨범 프로듀싱을 하면서 점점 대중음악에 대한 감이 돌아온 것 같았다. 여전히 솔로 앨범 콘셉트를 뭘로 잡아야하나 과연 솔로 앨범을 잘 낼수 있을까 고민은 계속됐지만 말이다. ▲ 요즘 김동률과 토이 등 90년대 오빠들이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당신도 어찌보면 이들과 동시대에 음악 활동을 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들의 인기는 90년대 음악을 향유했던 음악팬들의 진지한 음악들에 대한 갈증과 향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수 입장에서는 이들에게 솔직히 고마울 따름이다. 동률이와 토이가 좋은 음반을 내줘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랄까? 예전 솔로 2집을 냈을 땐 TV 출연도 안하고 마치 독립군처럼 혼자 싸우는 기분이었다. 또 최근에 클래식 (김)광진이형도 나와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때를 잘 맞춰 앨범을 낸 것 같다(웃음)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6월 중순 소극장 콘서트를 계획 중에 있다. ▶ 관련기사 ◀☞정재형, "12년지기 엄정화, 싸움 한번 한 적 없는 궁합 잘 맞는 친구"☞'이효리와 듀엣' 정재형, "그녀는 역시 프로...감탄"☞이하나, 정재형 뮤비 촬영 중 빗길 타박상...촬영강행 투혼 발휘☞이효리 '오프더레코드' 주제가 직접 불러...'색다른 음색, 효리 맞아?'
- 데뷔 40주년 맞은 조용필 '40년? 그거 숫자에 불과해요'
- ▲ 고교 시절 외국 음악의 영향으로 기타를 처음 잡은 조용필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 련시켜 최고의 뮤지션 자리에 오른 그는“최고의 비 결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연습, 연습뿐이다”라고 말했다.[조선일보 제공] 폭우 속 수만 관객 붙드는 마력의 소유자 90년대 초, 25억원 짜리 밤무대도 거절 고3 때 '비틀즈'에 빠져 가출… 음악 독학"내 모든 것은 관객의 힘…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어""2003년 35주년 기념 공연, 인생에서 승리한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지"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58)을 지난 4일 서울 역삼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금요일 오후 강남은 자동차 지옥이다. 그 지옥을 빠져나와 식당에 도착하니 환갑을 눈앞에 둔 가왕(歌王)이 먼저 도착해 숯불에 등심을 굽고 있었다. 조용필은 3시간 공연을 히트곡으로만 채울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가수다. 국내 최초로 음반 판매량도 1000만 장을 넘겼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채운 4만5000여 관객을 폭우 속에 꼼짝 못하게 가둬둘 수 있는 마력(魔力)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기자는 2002년부터 조용필과 알고 지내왔다. 조용필 역시 기자를 동생처럼 대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인터뷰를 '공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공식 인터뷰니 그간 물어보지 못한 것을 물어볼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뭐가 있어?" ―데뷔 40주년 인터뷰니까 그동안 못 듣고 못 쓴 얘기를 좀 해주시죠. "물어보세요, 뭐든지. 허허허." 긴장을 만들어보려는 수작을 그는 허허실실 넘겼다. ―이런저런 '신화'가 많습니다. 예전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엄청난 개런티를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한 적도 있다면서요. "아, 그거? 90년대 초쯤인가, 30회 출연에 25억원 주겠다고 했지. 그때 한 이틀 갈등을 했던 게 사실이에요. 액수가 워낙 크니까. 그렇지만 당시 밤무대는 물론이고 방송도 일절 않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어. 공연만 하겠다고 결심한 뒤 밤무대에 서는 건 나를 배신하는 거지." 한 회 출연에 서너 곡 부르고 내려오는 나이트클럽 무대는 당시로선 많은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90년대 초 개런티로 25억원이면 요즘 시세로 50억원을 훨씬 넘는다는 게 음악계 사람들의 말이다. 그 당시 조용필은 전국 체육관 공연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적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도시에 가면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히트곡도 많고 인기도 있는데 왜 객석이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고 했다. 그런 불면(不眠)을 뚫고 온 거액의 밤무대 스카우트 제의를 그는 냅다 차버린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조용필은 자신을 최고의 음악인으로 여긴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나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자부심은 천재적인 자신의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용필은 악보를 한 번 보면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든 한 번 들으면 바로 악보를 그리는 재능이 있다. 공연기획사 서울기획 이태현 사장의 증언이다.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였어요. 그때 외국 가수가 NHK에 출연하려면 일본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관례였지요. PD가 일본 노래 악보와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왔는데 조용필씨가 노래를 딱 한 번 듣더니 '이건 필요 없다'며 테이프를 돌려주는 거예요. 그때 일본인 PD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놀람과 과연 한 번 듣고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죠. 물론 그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불렀습니다." ―초견(初見)에 악보를 읽지 못하고, 초청(初聽)에 악보를 쓰지 못하면 뮤지션으로 인정하지 않으시죠? "그런 건 아니야. 세계적으로 훌륭한 뮤지션 중엔 악보를 전혀 읽지 못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그들이 악보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면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경동고 3학년이던 1968년 조용필은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우쳤다. 음악에 대한 조용필의 자부심이 워낙 강하다 보니 주변에서 '금기 질문' 중 하나로 꼽는 게 있다. 조용필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비교하는 투의 질문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의외의 대답을 했다. ―신중현씨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말 훌륭한 음악이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왔을 때, 이게 컨트리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오고 있잖아. 신중현씨가 작곡한 김추자와 펄시스터즈 노래들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음악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왜 신중현씨와 관련된 질문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나요. "싫어한 적 없어요. 다만 나와는 음악 색깔과 정서가 달라. 물론 근본적으로는 같지. 추상적인 감정을, 사랑과 기쁨, 슬픔을 음악으로 만들어 내고 뿌리가 록 음악에 있다는 것이 같아요." 그의 40주년 기념 공연(문의 1544-1555)은 5월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다. 그 다음 주말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가 시작된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난 2003년 폭우 속에서 벌어진 35주년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건 정말 처음 하는 얘기야. 공연 마지막에 트랙을 한 바퀴 돌았잖아.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승리했다. 내 인생에서 승리했다.' 그 감동은 아무도 몰라. 내가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이었어요. 평양 공연도 아니고 그날이 최고였어." 이 말을 할 즈음 조용필은 소주를 몇 잔 넘긴 상태였다. 기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질문을 해야 했다. 바로 그의 첫 결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1984년 3월 박지숙씨와 느닷없이 결혼을 했으나 3년 뒤 이혼했다. ―박지숙씨와의 결혼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죠? "그건 나중에 내 회고록에 써야 할 내용이야." ―결혼식에 하객도 없고 기자만 잔뜩 있었잖아요. 뭔가 사연이 많은 것 같은데요. "나는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갔었어." ―그럼 '이런 결혼식은 안 한다'고 했어야 할 것 같은데…. 표정이 약간 굳어진 조용필이 말했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어." ▲ 지난 9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연습실에서 조용필이 혼자 기타를 조율하고 있다. 수만 명씩 모이는 화려한 무대에 서려면 이렇게 고독한 연습을 한 달 이상 해야한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당시 조용필 나이 서른넷. 연말 방송사 가수왕을 모조리 휩쓸고 6집 '눈물의 파티'를 새로 내놨을 때다. 그 인기 주변엔 어김없이 스캔들로 먹고사는 연예 주간지들이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과 그의 일본 진출은 거의 비슷한 시기 이뤄졌다. 그는 이혼 후에 한동안 혼자 살다가 소개로 만난 재미교포 안진현씨와 94년 3월 재혼했다. 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안씨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용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2003년 1월 조용필은 다시 한번 아내와 이별했다. 심장병을 앓던 안씨가 갑자기 숨진 것이다. 안씨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 화성에 묻혀 있다. ―요즘도 꿈에서 부인을 보시나요. "요즘엔 안 나타나요. 마누라 가고 나서 한 2년 반쯤은 꿈에 자주 나타났어. 이제 그 사람도 안심이 되나 봐." ―선산엔 자주 가십니까. "요새는 좀 뜸해. 한 달에 한 두 번쯤 가요.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갔지. 주변에서 너무 자주 가지 말라고 해서…." 2년 전쯤 "조용필이 한 방송인과 사귄다더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조용필은 "내가 결혼한다는데?" 하며 웃었고, 그 방송인은 사석에서 불쾌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다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받아들이던데요.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인하고 밥도 같이 먹으러 다니고 그러고 싶어. 중매 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럼 결혼할 생각이 있긴 하세요. "아니지. (하늘에 있는) 마누라한테 혼나. 이제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조용필은 안씨가 저 세상으로 간 후 "앞으로 심장재단을 만들고 죽을 때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5월 공연은 작년 12월 28·29일 체조경기장 공연 후 5개월 만이다. 당시 공연을 마친 조용필은 지인 몇 명과 집 부근에서 뒤풀이를 했다. 피로에 알코올이 겹쳐 녹초가 된 그를 부축하고 집 앞에 당도한 시각이 새벽 2시40분. 골목에 서 있던 승용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여자 다섯 명이 뛰어나왔다. 팬들이었다. 이들은 "오빠, 왜 이렇게 술 많이 드셨어요", "건강하셔야 돼요" 하며 울먹였다. 사실 조용필의 팬은 없는 데가 없다. 집 전화번호를 바꾸면 전화국에 있는 팬이 번호를 알아내고 비행기를 타려면 항공사에 있는 팬 때문에 공항에 꽃다발을 든 팬들이 나타난다. 조용필 팬은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있다. 2004년엔 중3과 고1 학생들로 이뤄진 '광클(광적인 팬클럽)'이 생겼다. 이'어린 팬들' 덕에 조용필은 오랜만에 종이학 수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잊을 수 없는 팬 이야기 좀 해주시죠. "80년대 초 부산 공연을 갔을 때야. 공연 끝나고 호텔에 가서 씻으려고 속옷만 입고 욕실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서 여자애들이 와장창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한 열 명은 되겠더라고." ―어떻게 거기 있을 수 있죠? "몰라, 그건 나도. 하여튼 내 방에 들어와서 숨어있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겁이 나서 그랬겠지." 그는 "팬들이 밤늦게 집 앞에서 기다릴 때는 고맙기도 하지만 걱정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조용필은 "팬들에게 항상 감사한다. 팬이 멀어지면 나는 끝이다"라고 했다. 늘 팬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조용필의 사는 모습은 '외로움'을 연상시킨다. 결국 매일 그가 돌아오는 곳은 혼자 살고 있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방 다섯 개짜리 빌라다. 그곳에는 사람 대신 운동기구만 가득하다. 그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빨리 걷기 운동으로 땀을 빼며 하루를 시작한다. 조용필의 스태프를 제외하면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출퇴근하며 가사를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유일하다. 국가대표 축구팀 허정무 감독이 바로 위층에 사는 이웃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대형 TV가 있지만 조용필은 화면 없이 음악만 틀어주는 위성방송 음악채널을 듣거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본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드라마나 쇼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차 안에서는 미군방송(AFN)이나 KBS 1FM을 늘 켜놓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몇 안 되는 그의 도락(道樂)은 술과 담배, 싱글 실력의 골프다. 그 가운데 담배는 3년 전 끊었다. 조용필은 '앳킨스'라는 밴드로 데뷔해, '파이브 핑거스', '김 트리오', '조용필과 그림자'를 거쳐 오늘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꾸렸다. 일본 활동 때는 일본인 밴드 이름은 '조용필과 괜찮아요'였다. 18집의 정규앨범을 냈고, 94년에 이미 음반 총 판매량이 1000만장을 돌파했다. "밴드 이름을 '그림자'로 했다가 너무 어둡지 않나 해서 '위대한 탄생'이란 이름을 내가 지었어요. 주변에서 '별로'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아도 유명해지면 진짜 좋은 이름'이라고 주장했어. 무지하게 건방질 때였지. 하하." 그는 '건방지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자부심의 겸손한 표현이다. 작사가 양인자씨는 조용필 데뷔 초기인 70년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조용필씨를 봤는데, 밴드 멤버 한 명이 늦게 왔어요. 그때 용필씨가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쳤지요. '정신 차려!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이야!'" ―처음 가출할 때 40년이나 음악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절대로 생각 못했지. 우리는 비틀스 세대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건 해야 했을 뿐이지. 모든 게 관객의 힘이에요. 무대라는 게 관객과 음악을 공유하면서 즐거워하는 거잖아.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좋고 힘이 날 수가 없어." ―데뷔 40년을 맞는 감회가 있을 텐데요. "나는 현재진행형이에요. 한창 음악하고 있는 사람한테 왜 자꾸 40년을 물어봐. 40년은 숫자일 뿐이지." 관객 4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번 공연 티켓은 이미 2만장 가량 팔려나갔다고 한다. 기자가 조용필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10월이었다. 오후 7시30분 한 일식집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새벽 3시 그의 집에서 끝났다. 빈 맥주 캔이 40개쯤 됐다. 7시간30분 동안 조용필은 오로지 음악 이야기만 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기자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이후 수시로 "어디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한 잔 하자는 뜻이었다. 처음엔 "조용필이 부르는데 가봐야지"라고 했던 아내는 그 주기가 짧아지자 "조용필은 친구 없어?"라고 물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음악인들은 수십 년을 그와 알고 지냈으나 여전히 그를 어렵게 생각한다. 불 같은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필이 오십 줄에 들어선 후배 음악인에게 "네가 음악에 대해서 뭘 알아?" 라고 호통을 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런데도 혼쭐난 후배들은 며칠 뒤면 실실 웃으며 조용필 앞에 나타난다. 그 카리스마를 감당할 수 없을 뿐더러, 조용필과 함께 작업하면 자신들의 음악도 완벽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국민가수, 가왕, 라이브의 제왕…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많지만, 미당(未堂) 서정주가 칭한 '당대 최고의 명창'이 소박하고 명쾌하다. 30년을 한 세대로 치면, 그는 이미 한 세대를 10년이나 넘겨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이름보다 '조용필'로 부를 때 가장 정확하게 묘사된다. 조용필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더 물어볼 것 없느냐"고 빙그레 웃으며 잔을 건넸다. ■ 가수 조용필...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고3이던 68년 미8군 클럽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타악주자 김대환(2004년 작고)의 눈에 띄어 '김트리오' 멤버이자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 정규 1집을 내기까지 다양한 편집음반을 내놓았다. 첫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76년 발표했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 스타덤에 올랐고, 함께 실린 '단발머리'는 당시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전자음으로 충격을 줬다. 1981년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으며, 1983년부터 일본 NHK 방송에 출연하는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1990년대 초까지 일본과 미국을 돌며 라이브 무대에 섰고, 그 사이 '촛불'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숱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1993년 방송 출연 중단을 선언한 조용필은 대형 공연장 투어에 나섰다. 라스베이거스와 브로드웨이 쇼를 두루 섭렵하며 무대연출에 공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1999년 대중가수로는 처음 예술의전당 오페라홀에서 3일간 공연한 뒤, 2004년까지 매년 말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특히 2004년 공연은 11일간 연속 매진이었다. 2003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35주년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그는 2005년 전국 월드컵 스타디움 투어를 전석 매진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현재 40주년 기념공연과 19번째 새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