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은 그를 '위풍당당'이라고 불렀다. 그저 커다란 덩치에서 뿜어져나오는 포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삶이, 또 야구가 그랬다. 부러지는 것이 두려워 굽히려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자신의 삶과 야구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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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 하나 볼넷 하나
양준혁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믿어온 대로 자기 야구를 했다. 그의 철학대로 끝까지 집중하고 노력했다.
'한 경기에 안타 하나 볼넷 하나.' 얼핏 맥없어 보이는 이 한마디가 양준혁의 처음과 끝을 지탱하게 만든 소신이었다.
그의 소신을 비웃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가치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영양가가 없다는 비난이 대표적인 예다.
양준혁은 굽히지 않았다. 볼넷은 팀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디딤돌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운 뒤에도 "난 홈런 타자가 아니다. 기분 좋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내겐 최다 사사구 기록도 그에 못지 않게 자랑스럽다"고 말한 이유다.
실제로 안타를 상대팀 보다 많이 치고도 지는 경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볼넷을 더 많이 얻은 경기서는 좀처럼 지지 않는다.
한국 야구는 그가 2000안타를 처음 넘어선 뒤에야 그의 소신을 인정했다. 그러기까지 양준혁이 겪어야 했던 상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 하지만 양준혁은 끝까지 자기 야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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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의 힘
양준혁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영양가 다음으로 많이 썼던 카드는 '이기적인 선수'라는 것이었다. 개인 기록을 팀 승리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양준혁은 욕심이 앞서면 더 큰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선수였다. 개인이 팀을 앞섰다면 그의 볼넷과 타점 기록은 지금처럼 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10여년 전 양준혁이 세상의 몰이해가 답답하다며 자신이 정리한 기록을 보여준 적이 있다. 당시 양준혁은 타격감이 떨어져 몇경기 째 안타를 때려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정리한 종이엔 대부분 '무사 3루서 희생 플라이' 혹은 '1,3루서 땅볼로 타점' 등이 적혀 있었다.
세상은 그런 그에게 "그럴 때 홈런을 쳤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하지만 양준혁은 "매 타석 그런 타구를 칠 수는 없다. 오히려 욕심이 앞서면 점수조차 내지 못한다. 안 좋을 땐 어떻게라도 주자를 불러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맞섰다. 그의 반론이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불과 몇 년 전 부터다.
양준혁은 그렇게 자신을 빠르게 인정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야구를 펼쳐 보였다. 그만큼 힘들었지만 그만큼 믿음도 단단했다.
양준혁은 자신의 프로야구 인생에서 김응룡 전 감독(현 삼성 사장)과 김성근 SK 감독을 잊지 못할 지도자로 꼽는다.
흥미로운 것은 두 지도자와 함께 뛸 때도 그는 늘 위기와 맞닿아 있었다는 점이다. 페이스가 좋지 못하면 여지없이 스타팅 라인업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더 멀리 또 오래 뛸 수 있었다고 했다.
양준혁은 "그땐 내가 날 봐도 영 아니었다. 그러니 게임에 못나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인정할 수 있으니 벤치에 앉아서도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력을 인정하고 더 노력할 수 있었다. 그때 괜한 고집을 부렸다면 지금처럼 오래 야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들은 날 진정으로 인정해 주었다. 나도 나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세상 가장 화려한 잡초
양준혁은 스스로를 '잡초 야구인'이라고 부른다.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기록이라 불리는 그이지만 그만큼 평탄하지 않은 야구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양준혁의 당당한 소신은 자연스럽게 불화를 불렀다. 때론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그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었다.
선수협 사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푸른 피가 흐른다고 믿었던 친정 삼성에서 박대를 받을 때도, 마지막 팀이 되리라 여겼던 LG를 떠나야 했을 때도 늘 선수협에 앞장섰다는 꼬리표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렇게 하나의 상징성을 갖게 됐다. 그 주홍글씨는 그를 찍어 누르는 좋은 방편이 됐다. 양준혁을 잡으면 팀 분위기를 다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참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했었다. 그는 자신의 기술에 집중했던 장인(匠人)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또 다른 무언가를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전반기 마감을 앞둔 어느날 그가 슬쩍 물어왔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었을까요." 돌이켜보니 마지막을 준비하던 차에 스스로를 정리하다 의문이 생겼었던 듯 하다.
선뜻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한번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거든요. 늘 이기기 위해 노력했구요. 야구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반발하거나 반항하지도 않았잖아요. 열심히 하는 거 말고 뭐가 더 필요했을까요."
기자는 아직 그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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