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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지하철로 뛰어든 여성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느낌이 아직 잊히지가 않아요.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7년이 지났지만 그 기억때문에 공포영화도 제대로 못 봐요.”
모든 국민이 월드컵의 열기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던 2002년 7월. 23년차 지하철 기관사인 강호원(53)씨는 끔찍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7호선 마들역에서 26세 여성이 지하철로 뛰어드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그때, 강씨는 “운전 중이던 나와 그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국내에서 지하철 투신사고는 한 달에 한번 이상 꼴로 벌어지고 있다. 그 만큼 이를 겪은 기관사들의 트라우마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는 올해부터 사고를 겪은 기관사의 정신건강을 책임지는 심리센터를 세워 상담을 진행하고 있지만 과거 사고의 아픔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문가들은 기관사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상담을 통해 치료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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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에서 60대 남성이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열차 투신 사고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지하철로 뛰어들어 사망한 승객은 17명이다. 연도별로 △2015년 47명 △2016년 35명 △2017년 33명이다. 사망자는 감소세지만 여전히 한 달에 한 명이 넘는 승객이 지하철 선로로 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 투신 사고를 세 번이나 겪은 21년 차 기관사 손모(47)씨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세 번 중 두 번의 사고는 승객의 목숨을 구할 순 있었지만 손씨에게는 사망사고와 다름없는 상처로 기억된다. 손씨는 “살리고 못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사람이 뛰어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엄청 큰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하는 억울함까지 있었다는 손씨는 “물론 ‘얼마나 힘들기에 지하철로 뛰어들까’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들로 인해 겪는 트라우마 때문인지 원망하는 마음도 있다”고 털어놨다. 손씨는 지금도 승객들이 스크린도어에 바짝 붙어 있으면 가슴이 뛴다.
특별휴가 3일뿐…작년이후 사고 겪은 기관사만 상담의무대상
강씨는 “사고 이후 쉬는 사흘 동안 멍하고 무덤덤했다”며 “오히려 2주가 지나니까 가슴이 떨리고 미칠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런 이유로 서울교통공사는 뒤늦게 올해부터 지하철 투신사고를 겪은 기관사에 대한 심리상담을 의무화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올해 사고를 겪은 기관사만 상담 대상이고, 과거 사고를 겪은 기관사는 심리 상담 의무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런 탓에 오래전 투신사고를 목격한 기관사들은 상담치료를 받은 경험이 많지 않다. 손씨도 “20년 동안 심리치료를 받아 본 적이 없다”며 “불안감 등을 경험하지만 심리 상담까지는 생각 못 해봤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기관사들의 불안정한 심리가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김태훈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 부위원장은 “기관사들이 불안장애·공황장애 등을 호소하면 당연히 지하철 운행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사고를 겪은 기관사 중에는 운전하다가 지하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는 이도 있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오래 전에 사고를 겪은 기관사를 포함한 기관사들의 체계적인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동귀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기관사들은 사고 이후 기존에 갖고 있던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현실적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진다”며 “눈앞에서 사람이 투신하는 걸 목격한 기관사들은 운행할 때마다 과거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다시 2차 트라우마를 겪으며 불안 증상을 강화하지 않도록 전문가와의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이 필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