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훈 군 인권센터 소장은 7일 서울 마포구 군 인권센터에서 “지난 6월 18일 해군 강감찬함에서 선임병 등으로부터 구타, 폭언, 집단따돌림을 겪은 정모 일병이 휴가 중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이어 “함장, 부장 등 간부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도 피해자 보호, 구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실상 방치했다”며 “사망 이후 해군 3함대사령부 군사경찰이 사건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나, 6월 27일 자로 주요 수사 대상자들이 인사 조치 없이 청해부대 임무 수행을 위해 출항하여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은 관계로 소환 조사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군 인권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어학병으로 해군에 입대해 2월 1일 자로 강감찬함에 배속된 정 일병은 열흘이 지난 2월 11일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아버지 간호를 위해 청원휴가를 받았다.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시행령’ 제12조 1항 1호에 따라 2주간 휴가 뒤 25일 부대로 복귀한 정 일병은 코로나19로 인한 예방 차원의 격리 지침으로 3월 9일까지 격리됐다.
그러나 선임병들은 돌아온 정 일병을 곱게 보지 않았다고. 아버지 간호를 하고 온 사정을 잘 알면서도 “꿀을 빨고 있네.”, “신의 자식이다.”라는 말을 하며 대놓고 정 일병을 따돌리기 시작했고 정 일병이 승조원실(내무실)에 들어오면 다른 병사들이 우르르 나가버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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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소장은 “사망 이후 승조원실에서도 폭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정 일병으로부터 들었다는 진술도 나왔다”며 “정 일병은 3월 16일 밤 8시 30분경, 함장에게 카카오톡으로 선임병들의 폭행, 폭언을 신고했고 비밀을 유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함장은 피해자를 선임병들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지 않고, 승조원실을 이동하고 보직을 갑판병에서 CPO 당번병으로 변경하기만 했다. 보직이 바뀌긴 하였으나 함 내에서 가해자들과 마주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고 폭로했다.
또 센터에 따르면 정 일병은 과거 복용하다 중단한 공황장애 약을 다시 복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가해자들과 계속 한 배에서 지내다 자해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함장에게 구제를 요청해 면담을 진행했으나, 그 역시 가해자들과 대면해야 하는 자리였다.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제43조에 따라 다른 군인이 구타, 폭언, 가혹행위 및 집단 따돌림 등을 당했을 때 신고의 의무가 있으나 함장 등 지휘관이 이러한 의무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임 소장은 “불안함이 과중 된 정 일병은 입대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며 “3월 28일부터 구토, 과호흡 등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정 일병은 28일 저녁 8시경, 함장에게도 카톡으로 이와 같은 상황을 알렸다. 친구들과의 카톡 내용 등을 보면 약이 없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수 없다고 하였고, 스스로 미쳐가고 있는 중이라 정의하기도 하는 등 심리적 불안이 극대화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일련의 상황을 모두 인지하고, 심지어 자해 시도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함장은 정 일병을 하선 조치하지 않았다”며 “해군으로 복무하면 6개월 간 배를 타야 하는 규정이 있고, 중도에 하선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행정 절차 등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함장은 정 일병의 위험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선시키지 않고 정 일병을 방치했다. 3월 29일에 부장이 정 일병과 면담을 하긴 했으나 도움병사 C등급으로 지정하는데 그쳤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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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함장은 4월 6일이 되어서야 정 일병을 하선시켜 민간병원에 위탁진료를 보냈고, 정 일병은 정신과에 입원했다. 정 일병이 배에서 내린 뒤인 4월 8일, 강감찬함은 징계위원회가 아닌 ‘군기지도위원회’에 가해자들을 회부했다. 군기지도위원회는 군기훈련이나 벌점 등을 부여하는 곳이다.
이에 대해 임 소장은 “폭행, 폭언이 식별되어 경위서를 쓴 병사들을 하선시켜 수사하기는커녕, 군기지도위원회에 회부하고 마무리 지어 사건을 덮어버린 셈”이라고 지적했다.
임 소장은 “해군 3함대는 함 내 관계자들의 신상을 확보하기는커녕, 정 일병 사망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6월 27일 함장, 부장 등을 인사조치 없이 그대로 청해부대로 보내버렸다. 이로 인해 함장, 부장 등 주요 수사 대상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조사를 받지 않았다. 진술 오염의 가능성이 우려됨에도 군사경찰은 배가 돌아오면 함장, 부장 등을 조사할 예정이라며 태평한 소리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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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강감찬함에서는 지난 5월에도 대위가 만취해 병사의 뺨을 때리고 음료수 캔을 얼굴에 집어던지는 사건이 벌어진 바 있다. 이로 인해 상급부대 감찰 조사도 실시한 바 있다. 이때에도 정 일병 관련 사건은 쉬쉬하고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며 “배에서 악성 사고가 반복되고 있지만, 해군은 이러한 문제들을 제대로 식별하지도, 관리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매번 군에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 은폐하여 책임질 사람을 줄여보려는 군의 특성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달마다 같은 패턴으로 장병의 죽음을 대하는 군의 태도를 보며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누더기가 된 군사법원, 군 수사기관 개혁의 후과에 우려를 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끝으로 “반복되는 죽음 앞에 국방부의 셀프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해군은 즉시 정 일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의 신상을 확보하고, 강감찬함 함장, 부장 등을 소환하여 수사하라. 지지부진한 수사 역시 해군본부 검찰단으로 이첩하여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해군은 이날 군 인권센터 발표에 대해 “6월 18일 오전 휴가 중이던 병사가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며 “현재 사망원인 및 유가족이 제기한 병영 부조리 등에 대해 군 수사기관에서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