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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스로도 경영에서 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고희에 접어들던 지난 2016년 직접 펴낸 책 ‘인문학이 경영 안으로 들어왔다’에서 “수년 내 경영자에서 물러나 나무를 심으며 자연과 벗 삼아 살아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회장’으로서의 마지막은 그의 바람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린 건 ‘막말·여성 비하’라는 의도치 않은 논란을 남긴 동영상 한편이었다.
윤 회장이 직원 700여명에게 보여준 동영상은 주로 일본의 무역보복에 따른 문재인 정부의 대응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아베가 문재인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나 대단한 지도자”라는 등 ‘막말’이 포함돼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여자들은 단돈 7달러에 몸을 팔고 있고 우리나라도 그 꼴이 날 것”이라는 극단적인 여성 비하까지 더해진 것으로 알려져 공분을 샀다.
그러나 정부비난, 여성비하 어떤 것도 윤 회장 본인이 전달하려했던 ‘진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국콜마 고위관계자는 “미·중 무역전쟁에 이은 한·일 경제전쟁. 글로벌 시장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감정적인 대응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차원에서 예시로 문제의 동영상을 틀었던 것이지 동영상의 내용에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며 “최근 반일 감정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현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고,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기술력이 필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달을 가리키려던 손가락이 문제가 된 셈이다. 윤 회장은 지난 9일 입장문을 통해 “위기 대응을 위해 대외적 환경과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특정 유튜브 영상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사과했지만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한국콜마 불매 운동이 퍼지면서 주가는 52주 신저가를 경신할 정도로 곤두박질쳤다. 관계사, 임직원들의 불안감도 커졌다. 이는 윤 회장이 한국콜마의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11일 서울 내곡동 신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저의 잘못된 행동으로 피해를 입게 된 고객사, 저희 제품을 신뢰하고 사랑해 주셨던 소비자·국민 여러분께 거듭 사죄드린다”며 “특히 여성분들께 진심을 다해 사과의 말씀 올린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저 개인의 부족함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모든 책임을 지고 이 시간 이후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가 있기 전까지 윤 회장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흙수저 신화, K뷰티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받아왔다.
수학여행을 포기할 정도로 가난했고, 지방대 출신이라는 학력 콤플렉스도 평생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1970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했지만 해외파견의 기회가 명문대생에게 집중되는 현실에 실력을 키워 자신만의 회사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한다.
1974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제약업계에 발을 들인 그는 최연소 부사장에 오를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990년 일본콜마와 51대 49의 지분으로 한국콜마를 창업했다.
사업 초반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제약 동종업계가 아닌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화장품사업을 시작했다. 1993년에는 화장품 업계 최초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도 도입해 큰 성과를 거뒀다.
어린 시절 역사학자를 꿈꿨을 정도로 역사에도 조예가 깊다.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한 그는 역사적 인물로부터 현대의 경영과 관련한 영감을 얻고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이순신 장군에게서는 판옥선을 개조해 거북선을 만든 연구개발(R&D) 능력을 배웠다. 이순신 장군의 자를 딴 서울여해재단을 설립해 이순신 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배우고 전파하기 위해서다.
세종대왕으로부터는 인재의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는 리더십을, 삼우당 문익점에게서는 애민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혁신을 배웠다. 문익점 선생과 이순신의 조력자 정걸 장군에 대해서는 직접 책도 출간했다.
윤 회장이 물러남에 따라 한국콜마홀딩스는 김병묵 대표이사가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이밖에 주요 계열사들 역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될 것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한국콜마에 아들인 윤상현 총괄사장과 딸 윤여원 전무가 근무하고 있는 만큼 향후 경영권 변화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윤 총괄사장은 한국콜마홀딩스와 한국콜마의 지분을 각각 18.67%, 0.08%를, 윤 전무는 0.06%, 0.13%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