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M&A]사라진 초심…빅토리아 시크릿 '날개없는 추락'

빅토리아 시크릿 사모펀드 지분매각 무산 위기
누구나 찾는 매장 전략…글로벌 브랜드 발돋움
이머커스 급성장·코로나19에 '날개없는 추락'
획일적 아름다움 고집…다양성 잃은 점 치명적
  • 등록 2020-04-25 오전 9:00:00

    수정 2020-04-25 오전 9:00:00

[이데일리 김성훈 기자] 21세기 가장 ‘아이코닉’(iconic·상징적인)한 패션브랜드 중 하나로 꼽히던 빅토리아 시크릿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한때 ‘여성 언더웨어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 속에 연간 9조원 넘는 매출을 뿜어내던 글로벌 브랜드가 이제는 사모펀드에 지분을 넘기려다 퇴짜 맞는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인데요.

미국 뉴욕에 자리한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이 코로나19 여파로 문이 굳게 닫혀있다. (사진=AFP)
지난 22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시커모어 파트너스는 미국 델라웨어주(州) 연방법원에 빅토리아 시크릿 인수 철회를 허용해 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앞서 시커모어는 지난 2월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회사인 L브랜드로부터 5억2500만달러(6300억원)에 빅토리아 시크릿 지분 55%를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와 함께 57년간 회사를 이끈 레슬리 웩스너(82) 최고경영자(CEO)도 퇴진을 결정했는데요. 계약을 맺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인수하지 않겠다고 돌아선 셈입니다.

시커모어는 빅토리아 시크릿 측이 지분 계약을 맺은 이후 미국 내 1600여개 매장을 닫고 직원들에게 무급 휴가를 적용한 점이 계약을 위반했다며 계약 파기가 합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렵사리 매각 절차를 끝낸 L브랜즈 측은 “계약 파기는 효력이 없다”며 “거래를 끝내기 위해 모든 법적인 수단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법원의 결정이 남아 있지만 시장 전망은 밝지 않습니다. 원매자 쪽이 계약 위반을 근거로 매입이 힘들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두 기업 간 거래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계약 사항이 대폭 수정되거나 급기야 기존 계약이 뒤집어지면 L브랜드는 약 25억달러의 매장 임차료를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는 상황입니다.
영국 런던에 자리한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 (사진=AFP)
불과 5년 전만 해도 빅토리아 시크릿의 미래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2015년 연간 매출 76억7000만 달러(약 9조2700억원)로 정점을 찍으면서 사실상 글로벌 언데웨어 시장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1977년 창업자인 로이 레이먼드가 아내에게 속옷을 사 주기 위해 속옷 가게에 갔다가 느낀 부끄러움에 착안해 창립한 회사입니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펼친 전략은 ‘남성들이여 부끄러워 말고 (아내와 연연의) 속옷 쇼핑을 거들자’입니다. 드나듦에 거부감이 없도록 구성한 와이드한 매장 정문이 포인트인 대형 매장, 고객들이 찾기 전에 먼저 직원들이 다가가지 않는 ‘무관심’ 전략이 먹히면서 매장 수를 거침없이 늘려나갔습니다.

1995년에는 이른바 ‘엔젤’로 불리는 모델들을 전면에 내세운 패션쇼를 론칭하며 독보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모델이 된 미란다 커와 지젤 번천, 지지 하디드 등을 메인 모델로 발탁하면서 전 세계에서 1000만명이 시청하는 패션쇼 이벤트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던 빅토리아 시크릿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이커머스 시장의 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클릭 몇 번으로 다양한 브랜드를 거리낌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자 대형 오프라인 매장이 주축이던 빅토리아 시크릿에 굳이 방문해야 할 이유가 줄었기 때문인데요.

같은 기간 1020 소비자를 중심으로 획일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반감과 편안함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퍼지면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올해는 전 세계에 몰아닥친 코로나19 여파에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이전의 영광과는 더더욱 멀어지는 모습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움직이는 트렌드에 대응하지 못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소비자를 얕잡아본 빅토리아 시크릿 내부의 문제입니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수석 마케팅 담당자 에드 라첵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 기용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런 모델들은 판타지의 본보기가 아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후 사태 심각성을 판단한 빅토리아 시크릿이 “앞으로 패션쇼에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캐스팅하겠다”고 밝혔지만 싸늘해진 반응에 패션쇼 시청자 수가 3분의1 수준(330만 명)으로 급감하자 결국 지난해 공식 패션쇼를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급기야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일한 직원들이 겪은 성차별과 직장 내 따돌림 등에 대한 폭로가 연이어 터지면서 회사 이미지가 곤두박질쳤습니다. 남녀노소 편하게 찾는 매장을 만들자던 초심이 어느덧 ‘섹시함’과 ‘차별’로 얼룩진 회사로 변질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M&A 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임을 고려해도 빅토리아 시크릿이 처한 상황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5년 사이 급변한 글로벌 트렌드에 자신들이 구축한 방식이 옳다며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맺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만난 한 사모펀드 대표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안주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고 한 말이 문득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추후 빅토리아 시크릿을 인수하게 될 원매자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조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2월 14일 미국 뉴욕에 자리한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 앞에 한 시민이 시위를 펼치고 있다. (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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