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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종오 김범준 기자] 금융위원회 고위 간부인 A씨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커피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 앱(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을 설치해 앱 안의 카드 잔액이 바닥나면 은행 계좌에서 5만원씩 자동 이체(충전)하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이 앱을 사용하면 점심 식사 뒤 금융위가 있는 정부 서울청사 맞은편 스타벅스 매장에서 줄 서지 않고 커피를 받고 커피 무료 구매 등이 가능한 포인트인 ‘별’까지 적립할 수 있어서다.
자녀 넷을 둔 40대 가장 박모씨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일본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PS)4’의 게임과 아이템을 온라인에서 구매하려고 선불카드를 사서 가상 지갑에 10만원을 충전했다. 박씨가 게임 구매에 쓰고 남은 돈은 여전히 게임회사의 지갑에 남아 있는 상태다. 금융회사도 아닌 일반 기업이 자체적으로 결제와 소액 예치 등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거대 소매·유통 기업이 직접 금융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요즘 시장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금융과 다른 산업이 융합하는 대표적인 빅블러 현상의 하나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회사가 아닌 기업이 직접 결제 서비스를 하면 충성도 높은 고객을 만들어 소비를 늘릴 수 있고 소비자도 더 많은 혜택이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유통 업계 공룡으로 성장한 인터넷 쇼핑몰인 ‘쿠팡’이 소비자 공략의 최전선에 내세운 것도 ‘로켓배송’과 자체 간편 결제 서비스인 ‘쿠페이’다. 쿠팡은 쿠페이에 돈을 충전해 상품 결제에 쓰면 결제액의 최대 5%를 적립해주는 현금성 이벤트를 벌여 가입자 1000만 명을 돌파한 상태다.
결제시장 뛰어든 유통회사…통신사는 대출 상품 선보여
금융시장에 뛰어드는 통신회사는 보유 정보를 활용해 금융 소비자의 혜택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례로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은 지방은행인 DGB대구은행, 핀테크(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금융 서비스) 기업인 핀크와 손잡고 지난 5월 말 적금 상품인 ‘티 하이 파이브’를 선보였다. 이 상품은 SK텔레콤 이용자에게 기본 금리 2%, 우대 금리 2%, 통신 요금 1% 캐시백(5만원 이상 요금제 이용자에 적용) 등 최고 연 5% 이자를 준다는 점을 앞세워 이달 15일 현재 신규 가입자 수가 6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은행이 지난 10일 출시한 모바일 신용 대출 상품인 ‘우리 비상금 대출’도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와 협업한 사례다. 이 상품은 통신사 가입자의 통신 요금 납부 내역, 연체 기록 등을 바탕으로 신용평가회사가 산정한 신용등급을 적용해 최저 연 3.84% 금리로 최대 300만원을 빌려주는 것이 특징이다.
금융권에서 통신 이용 정보를 활용한 신용등급만으로 대출해주는 상품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기존 은행 등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회초년생, 주부 등 ‘씬파일러’(금융 이력 부족자)를 위한 상품”이라며 “전체 1~10등급 중 8등급까지 대출해주는 특징 덕분에 하루 평균 1000건 정도 대출 신청이 들어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보험시장 도전장 내민 핀테크…금융 빅블러 ‘속도’
보험 시장은 IT 기술을 앞세운 신생 기업과 기존 금융사가 맞붙는 빅블러 현상의 최대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 보험사 또는 대형 법인 보험 대리점(GA) 소속 설계사가 지인 등 인맥을 활용해 각종 특약이 들어간 값비싼 보험 상품을 주로 팔던 기존 보험 시장의 영업·판매 관행에 IT·핀테크 업체들이 도전장을 내밀어서다.
실제로 카카오 자회사인 카카오페이는 최근 인슈어테크(보험+기술) 분야 벤처 기업인 ‘인바이유’를 인수하고 본격적인 보험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금융 서비스 앱인 토스와 뱅크샐러드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 레이니스트도 자체 GA를 설립해 여행자 보험 등 보험료가 저렴한 미니 보험 위주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물론 은행 등 기존 금융회사도 생존을 위한 변화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은행이 은행 업무만 하는 등 이전의 전업주의를 버리고 겸업 서비스 제공을 강화하는 것도 변화에 적응하려는 취지다. 우리은행의 경우 은행이 가진 데이터를 외부에 개방하고 이를 토대로 핀테크 업체가 개발한 서비스를 우리은행의 앱인 ‘위비뱅크’에서 제공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은행이 소비자가 모이는 플랫폼을 제공하고 신생 기업이 그 안에 입점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카드 업계 1위인 신한카드는 최근 신용카드 가맹점 정보를 활용한 자영업자(개인 사업자) 전문 신용평가 사업에 뛰어들었다. 간편 결제 업체의 대거 진출로 경쟁이 심해진 기존 결제 시장 밖에서 새 먹거리를 찾겠다는 목적에서다.
금융업과 금융이 아닌 다른 산업, 그리고 금융권 내 경계가 희미해지는 빅블러 현상은 앞으로 가속화할 전망이다.
금융위는 기존 금융 규제를 풀어 카카오페이 같은 간편 결제 서비스 업체에도 월 50만원 한도의 후불 결제를 허용할 방침이다. 앞으로 ‘○○페이’를 사용해 신용카드와 같은 외상 결제를 할 수 있는 셈이다. 신한카드는 금융위 승인을 받아 카드 이용자의 은행 계좌에 돈이 없어도 신용카드만 있으면 경조사비 등을 송금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기술력을 앞세운 페이 업체가 기존 카드사가 주름잡아온 시장에 새로 뛰어들고, 카드사는 은행의 이체 기능을 가진는 ‘영역 파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은행·보험·카드 등 지금의 금융회사 인허가 제도도 기능별로 쪼개 소규모 핀테크 기업 등의 출현을 촉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기술력과 편리한 서비스를 앞세운 신생 기업의 등장으로 금융권 ‘경계 지우기’ 현상이 한층 빨라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