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70년전 오늘…'리더의 오판'이 전세를 뒤집었다

지상 강의 : ‘워-스트래티지’ 1강 한국전쟁
개인의 목적 달성, 국가의 이익 위해 전략적 사유 필요
韓美 수뇌부, 전략적 사유 실패로 기습 남침 허용
전세를 뒤집은 김일성과 맥아더의 오판
  • 등록 2020-06-25 오전 5:15:00

    수정 2020-06-25 오전 5:15:00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지난 22일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워-스트래티지’ 한국전쟁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노진환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지난 2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도하 합의’가 진행됐다. 미국 언론들은 18년 동안 진행된 이 전쟁을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아프가니스탄을 민주화 국가로 재탄생시킨다는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독일은 전차 부대를 이끌고 전격전을 감행, 막강한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를 순식간에 점령한다. 당시 프랑스에 주둔한 연합군의 전차 수는 독일보다 20배 많았다. 다만 독일은 보병의 보조 전력으로 여기던 전차만으로 부대를 재편하는 혁신적인 전략으로 기동력과 화력을 집중해 프랑스 파리 입성이란 목적을 달성한다.

독일의 군인이자 군사평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정치·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했다. 전쟁에 임하는 국가들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나 계획을 수립한다. 바로 ‘전략’이다. 전략을 뜻하는 영어단어 ‘스트래티지(strategy)’는 고대 그리스어 ‘스트라테지아(Strategia·장군의 기술)’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경영, 입시 등 일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립하는 여러 계획으로 의미를 확장해 쓰고 있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총리를 역임한 조르주 클레망소는 전쟁은 너무 중요해 군인들에게만 맡겨놓아선 안 된다고 했다”라면서 “국가 대사인 전쟁에 국민이 관심을 기울이면 논의의 수준이 올라간단 의미”라고 설명했다.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든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든 각 사안을 전략적으로 사유하며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의 소련제 T-34 전차.


북한의 남침, 과연 기습이었나

최 교수는 올해로 발발 70주년을 맞이한 한국전쟁으로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강연의 포문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만들어진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로 67개국이 참전한 대규모 국제전이자 군인, 민간인을 합해 500만명이 사망한 비극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분단된 한국과 북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최장기간 휴전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쯤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남침해 발발한 전쟁이다. “선전포고가 없었기에 ‘기습 남침’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미 한국도, 미국도 북한의 남침 움직임을 읽고 있었단 점에서 불의의 습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이미 1949년부터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북진의 뜻을 공공연하게 내비쳤고 38선상에서는 양측 간 총격전이 오가는 상황이었다. 이 가운데 북한은 착실히 전쟁 준비를 했다. 소련으로부터 탱크와 전투기를 공수했고 중국군 소속 한인사단 3만 7000명이 북한군에 합류했다.

1950년 4월 존 조셉 무초 주한 미국대사는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우려를 표명했다. 6월 미국 군사고문단과 중앙정보국(CIA)은 지속적으로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경고했고 우리나라 육군본부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를 내려 남침에 대비했다.

6월 위기설이 팽배해져 갔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 수뇌부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봤다. 미국 정부는 남침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 보고를 무시했고 외려 우리나라의 북진을 막기 위해 방어용 대포를 제외한 공격 무기를 뺐다. 육본 정보국은 전쟁 발발 전날 전면 공격이 임박했다고 보고했지만 우리 군 수뇌부는 정찰 강화를 지시할 뿐 경계수위를 높이지 않았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수뇌부들은 북진을 외칠 뿐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한 대비 태세도 구축하지 못했다”라면서 “당시 우리나라, 미국 수뇌부는 전략적 사유에서 실패하며 막을 수 있던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짚었다.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전투 중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전쟁 초기 중국 참전 막은 스탈린…왜

북한군은 7월 5일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이어 대전 전투에서도 미군과 맞닥뜨리면서 다급해졌다.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한반도를 점령하려던 전제가 틀어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즉각 스탈린에게 중국군 파병을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고, 중국의 마오쩌둥 역시 4개 사단 병력을 파견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스탈린이 북한의 요청을 묵살했단 사실이다. 이에 북한이 독자적으로 중국에 지원군을 요청하겠다고 보고하자 스탈린은 독자적으로 싸울 것을 주문했다. 당시 김일성의 요청으로 중국군 4개 사단이 파견됐다면 낙동강 전선은 버티기 어려웠다. 스탈린의 결정이 대한민국의 존속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스탈린의 결정에 김일성의 오판이 더해지며 전세는 역전됐다. 1950년 8월 마오쩌둥은 북한에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 준비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다. 9월 저우언라이가 다시금 전략적 후퇴를 요청했지만 김일성은 단칼에 거절한다.

1950년 9월 15일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며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는 맥아더(가운데).
사실 맥아더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가정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매우 낮게 봤다. 그러나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면서 상륙 당시 저항이 거세지 않았고 연합군은 단 하루 만에 인천을 수복했다.

스탈린이 전쟁 초기 중국의 참전을 막은 이유에 대해 학자들의 설명은 엇갈린다. 우선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란 의견이다.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면 중국의 동맹인 소련 역시 미군과 맞서야 하고, 이렇게 되면 세계대전으로 전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았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의 장기화를 바랐다는 시각도 있다. 소련 입장에선 중국이 뒤늦게 한국전쟁에 참전해 미국과 싸우면 전쟁이 길어지고 미국과 중국의 전력을 동시에 약화시킬 수 있는 데다, 미국이 유럽에 쏟는 관심이 줄어들어 비교적 쉽게 동유럽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었다. 또 농업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의 소련에 대한 의존도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란 계산도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


크리스마스 대공세 실패… 2년간의 휴전협정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작전 성공 보름만인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섰고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한 뒤 지속적으로 북으로 진군했다.

사실 연합군의 목적은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 한국을 수복하는 것이지 북진이 아니었다. 중국도 38도선을 넘어 연합군이 진군한다면 북한에 대한 침략 행위로 보고 참전할 것이라 경고했다.

실제로 10월 25일 중국군 일부가 전선에서 목격됐다. 연합군은 진군을 멈췄고 중국군도 군사 활동을 중지했다. 충돌 없는 대치가 지속되자 영국은 연합군은 북위 40도선까지만 진군하고 이북은 한국군에게 맡기자는 완충지대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북진을 멈추자는 의견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의 대규모 참전 가능성을 부인했다. 중국군의 수가 많지 않고 설사 참전하더라도 연합군의 공군 전력으로 제압이 가능하다고 봤다. 확전을 막기 위해 압록강을 넘지 않던 전투기들도 월경추격권을 발동해 만주와 한반도를 넘나드는 소련 전투기들을 추격했다. 연합군은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결정하고 11월 24일 본격적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진군은 대참패로 끝난다. 연합군 3만명과 중국군 10만명이 맞붙은 장진호 전투가 대표적이다. 장진호는 길이 험해 매복하기가 좋은 지형이었던 데다 연합군에 붙잡힌 포로가 대군이 매복해 있다고 실토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진군을 감행했다가 미군은 포위 섬멸 당하고 만다. 결국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37도선까지 후퇴했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1951년 7월부터 양 진영은 휴전협상에 돌입했다. 양측 사이의 군사분계선은 휴전협정을 맺는 순간으로 정했고 다양한 의제들이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그러나 전쟁 포로 처분에 관해서만큼은 양측이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포로들이 자유롭게 돌아갈 곳을 정하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지만 공산진영은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강제 송환원칙’을 고수했다.

휴전협정이 진행된 2년 동안 조금이라도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과 북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화 ‘고지전’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결국 자발적 송환원칙이 채택되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자발적 송환을 강조한 트루먼의 신념에 따라 휴전협정이 2년 동안 이어진 결과 미군 포로를 포함한 12만 4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미국의 정치학자 기드온 로즈는 자신의 저서 ‘어떻게 전쟁은 끝나는가’에서 미국은 전략적 사유의 부재로 전쟁에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에 대비했더라면,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에서 군대를 물렸더라면, 맥아더 장군이 영국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면서 “각국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리더의 전략적 사유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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