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 먼 페이퍼리스]②종이 중독증‥관행만 바꿔도 윈윈

페이퍼리스 왜 필요한가
15분 이상 걸리는 종이통장 발급
디지털 창구에선 7분밖에 안 걸려
  • 등록 2019-07-04 오전 6:00:00

    수정 2019-07-04 오전 9:32:47

[그래픽=문승용 기자]


[이데일리 장순원 김범준 기자] 은행권에서 페이퍼리스 정책을 가장 먼저 도입한 신한은행 디지털창구에서 태블릿PC를 통해 입출금통장과 체크카드를 발급받으려면 총 7분 정도가 걸린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중요사항은 따로 팝업창이 떠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면서 5번의 서명을 하는 시간이다. 같은 업무를 종이서류로 진행하면 총 28번의 서명이 필요하고 시간도 15분 넘게 걸린다. 은행 입장에서는 업무시간과 서류 관리 부담을 확 줄일 수 있고 고객 입장에서도 반복적이거나 불필요한 서류작성 부담도 줄이고 불완전판매 위험도 낮출 수 있어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금융회사-고객 윈윈 페이퍼리스‥기대보다 더딘 속도

금융권이 페이퍼리스 환경을 구축하는 것은 이처럼 디지털뱅킹 시대를 맞아 업무 효율을 높이면서도 관리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디지털 창구를 통해 예금과 대출관련 종이서류를 전자문서로 대신해도 연간 최소 200억~400억원의 관련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게 은행권의 추산이다. 신한은행의 경우 디지털 창구를 만드는데 약 76억원을 투자했는데 올해 비용 절감효과만 380억원 수준이다. 카드업계 역시 발행이 의무화한 종이영수증을 전자영수증으로 대체하면 연간 1000억원 가량의 직간접적 비용절감 효과가 생길 것으로 본다. 이런 비용을 아끼면 신규인력 채용이나 소비자 혜택 강화 쪽으로 돌리면 금융권과 소비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윈윈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페이퍼리스가 생각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상징적인 모습이 은행권 종이통장 발급률이다. 종이통장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게 현실이지만 은행 신규 계좌 10개 중 8개는 종이통장을 발급한다. 대출 역시 전자서류로 작성 가능하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증빙용으로 약관이나 대출 서류를 받아간다고 한다. 한 시중은행은 디지털 전용 창구에서 작성되는 문서 가운데 65%를 종이서류가 차지할 정도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금융권이나 소비자 모두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한 거래습관이 탓이 크다. 은행을 찾는 고객의 대부분은 신규 예·적금 가입이나 고액 대출처럼 대면 거래를 원하는 경우가 많고 연령대로 보면 주로 40대 이상이 대부분인데 모두 종이통장이나 서류에 익숙한 연령층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법률적으로는 종이나 전자문서가 효력이 같고 종이통장을 발행받으면 입출금 과정에서 통장이 반드시 필요한데다 잃어버리면 약 2000원의 재발급비용을 물어야 해도 관성처럼 종이통장을 발급받는 게 현실”이라며 “모바일 거래에 익숙한 젊은 층도 은행에 왔을 때는 통장을 발급받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금융권의 소극적 태도도 한몫한다. 현재 종이통장은 원칙은 미발행이나 “통장을 발행해 드릴까요” 정도로 고객의 의사를 확인해 고객이 원하면 발급하는 방식이다. 대출서류나 약관 등도 마찬가지다. 고객이 원하면 별도의 비용 없이 제공하고 있다. 고객 입장에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종이서류를 챙겨도 부담이 없는 구조다. 금융감독원은 내년 9월부터 60세 이상 노인 등 예외를 빼고 최소한 통장 발행 원가는 소비자에게 청구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짜로 받던 통장을 소비자들의 반발이 거세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금감원 관계자는 “올해 하반기 실태조사를 해봐야 입장을 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직원들도 종이서류에 익숙하다. 디지털 창구화가 본격 도입한지 얼마 안된데다 실물로 근거를 남기려는 보수적 특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디지털을 아무리 강조해도 창구 직원 가운데 상당 부분은 종이로 서류작성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며 “불완전판매 소지를 없애려 ‘형광팬’ 등으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는 식의 근거를 남기려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고 말했다.

숨은 규제도 걸림돌‥금융권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숨은 규제도 페이퍼리스의 걸림돌이다. 겉으로 봐서는 전자문서법이나 전자서명법이 제정되면서 큰 틀의 규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사회변화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낡은 규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험업계에서는 작년 10월부터 모든 보험계약에 태블릿PC를 비롯한 모바일 기기로 전자서명하는 방식이 허용됐다. 종전까지는 다른 사람이 사망할 때 보험금을 받는 경우 보험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르다면 타인의 동의를 꼭 서면으로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조항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보험업계에서는 10건 중 6~7건이 태블릿PC로 계약되는 상황에서 상법의 해당 조항이 변화된 사회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개정을 요구했으나 법무부 검토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사업자 간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린 분야에서는 당국이 뒤로 물러나있는 경우도 많다. 은행권에서도 온라인 대환대출을 도입하기 위해 전자방식 위임장의 효력 여부에 대해 질의했으나 아직 금융위의 해석을 받지못해 시작도 못한 게 대표적 사례다.

신용카드업계에서 사실상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종이영수증 대신 전자영수증을 도입하자고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작년 영세자영업자 카드 수수료를 대폭 인하한 뒤에야 업계의 의견을 반영해 이제 겨우 제도 개선에 착수한 상황이다.

금융권에서는 페이퍼리스 환경을 구축하려면 보다 금융권의 적극적인 노력과 그림자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대기 금융연구원 은행·보험연구실장은 “종이 통장만해도 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서 원가 정도의 수수료를 청구했다면 발급량이 훨씬 감소했을 것”이라며 “페이퍼리스 속도가 더딘 것은 덩치가 커진 은행이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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