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이들의 애끓는 슬픔을 어루만지려는 노력 대신 ‘2차 가해’가 난무하면서 생존자가 목숨을 버리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이대로면 또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없을 것이란 경고가 나오고 있다.
|
‘이태원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이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있다. 지난 12일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10대 고등학생 A군이 서울 마포구의 한 숙박업소에서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A군은 참사 현장에서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을 잃고,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다. 그는 트라우마 치료를 받아왔지만, “놀러 가서 죽은 것 아니냐”는 취지의 모욕적 댓글과 도넘은 2차 가해에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들도 고통을 토하고 있다. 고(故) 이지한씨의 모친 조미은씨는 “매번 환청에 시달려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 하고, 지한이 아빠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며 “지한이 누나는 자기가 대신 죽었어야 한다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참사에서 목숨을 건진 이도,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모두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제대로 보듬지 못해서다.
희생자와 생존자, 유족을 향한 ‘2차 가해’는 우리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번졌다. 초기엔 이태원 참사에 관한 기사에서 ‘익명성’에 숨어 분출하다가 이젠 정치인들까지 공공연하게 벌이고 있다. 전날 이태원역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지자 보수단체인 신자유연대는 유튜브 방송을 하며 “자기들 잘못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이용 말라”고 막말을 했다. ‘친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를 겨냥해 “세월호와 같은 길을 가서는 안된다”, “시민단체가 조직적으로 결합해서 정부를 압박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당 김미나 경남 창원시의원은 SNS에 “시체 팔이 족속들, 자식 팔아 장사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나라 구하다 죽었느냐”고 희생자와 유족을 싸잡아 모욕했다.
뒷수습 사실상 ‘방치’…“재난 대하는 태도 바꿔야”
참사 후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책 마련 등을 통한 갈등 봉합과 회복, 통합은 오히려 멀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국정 총책임자인 윤 대통령부터 유족들을 위로하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참사 희생자들에게 사과를 한 적도 없고, 유족들과 공식 면담을 한 적도 없다. 야당과 유족 등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파면 요구는 거부하면서 “경찰 수사를 지켜봐야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특수본 수사 중 띄워진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개점휴업 상태다. 당초 계획했던 국정조사 45일 기간 중 20일을 제대로 된 회의 한 번 않고 허송세월했다. 태생 자체가 내년도예산안 처리를 위한 협상에서 출발한 까닭에 특히 여당이 국정조사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여당은 야당의 이상민 장관 해임안 처리에 반발, 국조위원들이 총사퇴했다.
일각에선 가장 최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 후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갈등이 증폭돼 재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태원참사 희생자를 힐난하는 이들이 ‘세월호 시즌2’라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란 것이다.
장동원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총괄팀장은 “세월호 때처럼 이태원 참사 후에도 정치인들이 국민이나 피해자를 보듬기보다는 2차 가해를 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며 “사회적 재난 참사에서 정부의 역할은 유가족, 피해자를 무조건 보듬고 명확한 대책을 내놓는 일”이라고 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정부와 정치권이 재난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고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공격과 방어에만 매몰돼 있다”며 “이렇게 미봉책으로 넘어가면 몇 년 후 유사한 참사가 또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