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담겨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수천,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재는 우리 후손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죠. 문화재는 어렵고 고루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조선의 궁을 대표하는 경복궁 안에는 건청궁(乾淸宮)이 있습니다. ‘하늘이 맑다’라는 뜻의 전각인데요. 1895년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된 곳이에요.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후에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죠. 건청궁 건립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고종의 자립을 위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습니다.
건청궁은 화려한 경복궁에 비해 단청 없이 소박하게 지어졌어요.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사랑채, 안채 등으로 구성돼 있죠. 건청궁은 경복궁의 전각 중에서 가장 나중에 건립됐고,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사라진 전각이에요. 건청궁은 ‘빛과 그림자’가 있는 장소라고도 불리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경복궁 건청궁 전경(사진=경복궁관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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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림자’부터 살펴볼게요. 건청궁은 1895년10월 8일 새벽, 일본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무참하게 살해된 비극의 장소예요.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한 일본인들은 처소인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칼로 무참하게 죽였을 뿐 아니라 조선 궁인들을 집단으로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죠. 게다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2년간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어요. 건청궁이 간직한 우리 역사의 ‘그림자’입니다.
2005년 5월 9일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범인 48명 중 구니토모 히게아키의 손자 가와노 다쓰미 씨는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 조상의 범죄에 대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기도 했어요. 당시 가와노 씨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죠. 가와노 씨는 2012년 3월 사망하기 전까지 한국을 찾아 속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빛’은 말 그대로 ‘전기 발전’을 의미합니다.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설치된 장소였어요.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인데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87년에 건청궁에 전등이 설치됐어요. 당시 건청궁의 전등 설치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죠.
조선은 1882년(고종 19년)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요. 이듬해 9월 고종은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한 11명의 사절단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어요. 이들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전깃불이 뉴욕과 보스턴의 밤거리를 비추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돼요.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청으로 고종은 전기 도입을 서둘렀고, 마침내 건청궁에 전등이 가설됐어요.
경복궁은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예요. 아직 경복궁 권역을 둘러보지 못했다면 날씨가 좋은 주말에 건청궁을 찾아 이곳에 담긴 ‘빛과 그림자’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 건청궁 장안당(사진=경복궁관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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