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신체를 접촉하지 않는 ‘비접촉 성범죄’ 수법이 점차 교묘해지고 있지만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높아진 것과 달리 이를 처벌할 법적 장치는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 (사진=이미지투데이) |
|
31일 대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통해 최근 2년간 이른바 ‘바바리맨’, ‘정액 테러’, ‘딥페이크’ 등 논란이 된 비접촉 성범죄와 관련한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처벌은 선고유예, 벌금, 징역형의 집행유예 수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장소에서 성기노출이나 자위 같은 성적행위를 하는 일명 ‘바바리맨’ 사건은 자주 보도된다. 최근에도 서울 중랑구 지하철 7호선 중화역 인근의 한 도로에서 하의를 벗고 음란행위를 한 2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러한 바바리맨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지만, 실제 처벌 수위는 현저히 낮았다.
수원지법 평택지원은 공연음란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작년 12월 벌금 90만원을 선고유예했다. 유죄는 인정되지만, 형의 선고를 미룬다는 의미다. 경찰공무원인 A씨는 경기 평택시에 있는 한 공원에서 30대 여성과 10대 여학생 2명이 반대쪽에서 걸어오자 성기와 엉덩이를 드러낸 상태로 마주 보고 다가가 공연히 음란한 행위를 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부는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또 체액을 이용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정액 테러’는 성범죄 성격이 다분하지만, 대상에 따라 성범죄로 처벌할 근거가 갈린다. 사람에게 하면 강제추행 혐의가 인정되지만, 물건에 하면 재물손괴 적용에 그친다. 서울북부지법은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작년 5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7급 공무원인 B씨는 서울 강북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피해 여성 직원 소유의 텀블러에 6개월간 6회에 걸쳐 정액을 넣거나 텀블러에 담긴 물 안에 성기를 넣은 혐의를 받았다.
특정 인물의 얼굴 등을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특정 영상에 합성하는 ‘딥페이크’는 작년 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시행으로 형량이 최대 5년 이하의 징역으로 강화됐지만, 처벌 수위는 여전하다. 서울북부지법은 성폭력범죄특별법 위반(허위영상물편집·반포) 혐의로 기소된 C씨에게 작년 11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피해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에 게시된 사진을 내려받아 텔레그램을 통해 알게 된 이에게 음란물 사진에 피해자의 얼굴을 합성할 것을 부탁한 뒤 합성된 영상물을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부는 “편집물이 전시된 시간이 길지 않다”고 판시했다.
전문가들은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조세희 법무법인 율화 대표변호사는 “성범죄는 접촉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점점 교묘해지는 비접촉 성범죄 처벌 수위는 다를 수 있어 현재 마련된 법규정 내에서 적용할 수 있는 혐의를 찾는 게 최선”이라며 “접촉 없는, 불쾌감을 유발하는 성행위가 늘어난다면 접촉에 준하는 피해가 있다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선희 변호사(전 법무·검찰 개혁위원)도 “스토킹 범죄는 스토킹의 형태를 규정하기 어렵다고 해서 끌다가 20년 만에 법이 만들어지지 않았나”며 “법이 항상 현실을 뒤늦게 따라가기에 이런 특수한 형태의 범죄들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