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황후인 명성황후가 묻혀 있다. 2005년 5월 이곳을 찾은 일본인 무리가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 조상이 1895년 10월8일 저지른 야만스러운 행위를 사죄하는 자리였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2005년 5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서 명성황후 시해범 중 한 명인 구니모토 시게 아키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오른쪽)씨가 고종의 손자 이충길씨에게 사죄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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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지였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섭정을 펴온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개방 압박이 더 거세졌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했다. 일본 해군의 운요호가 강화도를 무력으로 침략한 데에 조선군이 반격한 것이 계기였다.
조약은 이르기까지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했으므로 과정이 불법이었고, 내용조차 조선에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힘없는 조선은 무력하게 불평등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물꼬로 미국(1882년), 영국·독일(1883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유리할 게 없는 조약이었다.
각국은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서로 이권으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내분했고 열강은 갖은 빌미를 잡아 개입 명분을 마련했다. 조선군이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자 조선 왕조가 외세의 힘을 빌리려고 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파병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경복궁을 불법으로 점거했다. 내친김에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갑오개혁(1894년)을 계기로 조정에 친일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의 영향력이 세질수록 고종은 러시아와 협력했다.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 관계는 최악이었다. 영토분쟁이 발단이었다.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가 1891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인에게 피습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의 왕이 친러 성향을 보이자 일본은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고종이 1895년 훈련대를 해산하기로 일본에 통보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훈련대는 일본군이 제안해 창설한 왕실 근위대였다. 내부 구성원은 친일 인사로 꾸려졌다. 일본은 훈련대 해산 명령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협력해 갑오개혁을 방해할 때부터 일본에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계획한다. 조선의 친러 노선 핵심인물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이로써 득세할 친일 세력을 안고서 조선을 강점하려는 계략이었다. 1895년 10월8일, 주 조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군인과 경관, 폭력배를 동원해 경복궁을 침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창설한 친일 군사 조직 훈련대가 협력했다. 그리고는 명성황후와 궁녀를 포함한 궁인을 대거 살해했다. 을미사변이다.
일본은 을미사변에 정부 개입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와 알력 다툼 과정에서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로 덮어씌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걸 사실을 받아들일 이는 없었다. 이후 전국 민심이 폭발하고 의병이 일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은 야만 국가로 낙인찍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 가담자를 전부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다.
| 2015년 한국을 찾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 (사진=한국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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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던 춘생문 사건과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터지자 돌변했다. 미국과 러시아도 조선 내정에 간섭했기에 일본도 가능하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을미사변 가담자를 석방했다. 죄가 없다는 것이다.
을미사변이 터지고 110년이 흐른 2005년, 앞서에서처럼 이 사건 가담자 후손이 홍릉을 찾아서 사죄했다. 2015년 을미사변 120주기에도 마찬가지로 한국을 찾아와 사죄했다. 잘못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