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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못 받은 임금을 지급하라”며 국내 한 연구기관 퇴직자 A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근거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1991년 한 공공 기술연구소(B연구소)에 입사해 2014년 9월 퇴사했다. 연구소는 2008년 노동조합과 만 55세 이상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임금피크제 도입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새 인사제도에 합의해 시행에 들어갔다.
기존 업무를 그대로 이어갔던 A씨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월급이 성과 평가에 따라 최저 93만원에서 최고 283만원까지 줄었다. A씨는 2014년 “회사가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으므로 무효”라며 미지급 임금 소송을 제기했다. 고령자고용법은 임금 등 법이 정한 분야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근로자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B연구소는 이에 대해 “임금피크제 도입에 따른 임금 삭감의 반대급부로 상시적 명예퇴직제도를 도입했다. 또 노조의 동의를 얻었으므로 문제 없다”고 맞섰다.
대법원도 이 같은 하급심 판결이 맞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효력과 관련해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들이 입는 불이익의 정도 △임금 삭감에 대한 대상 조치의 도입 여부 및 그 적정성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임금피크제 효력은 이 같은 판단기준에 따라 개별 사안별로 달리 판단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계 “대법원 판결 아쉬워…고용불안·노사갈등 우려”
재계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쉽다는 성토가 나온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자체를 무효로 본 것은 아니지만, 이번 판결 자체가 기업의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다. 고령자의 고용 불안 해소와 청년 구직자의 일자리 기회 창출을 위한 임금피크제의 본래 취지가 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이번 사례와 같은 임금소송이 줄지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 입장에선 노조가 법원 기준을 근거로 향후 임금피크제 재논의나 폐지를 요구할 수 있어 갈등이 생길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급속한 고령화에 대응해 고용 안정을 위해 노사 간 합의 하에 도입된 임금피크제가 연령에 따른 차별로 위법하다고 판단한 이번 판결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키고 고용 불안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근로자 고용안정을 도모하면서 기업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기업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는데 이번 판결은 이러한 법 개정 취지를 무색하게 하면서 산업현장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역시 “연령차별을 금지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법’은 ‘특정 연령집단의 고용유지와 촉진을 위한 조치’는 연령차별로 보지 않고 있다”며 “법은 2016년 1월부터 60세 정년을 의무화하면서 그 대안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하도록 사용자에게 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임금피크제는 임금체계 개편의 일환으로 널리 활용돼 왔다”고 지적했다. 경총은 “향후 판결들이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 신중하게 내려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계 역시 이번 판결에 반발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정부 권고에 따라 제도를 도입한 기업 현장 혼란과 임금 소송 남발로 인한 노사 간 갈등이 격화할 것”이라며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경기 불황과 거세지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임금피크제 관련 혼선이 기업의 추가적인 임금 부담과 생산성 저하를 야기하지 않도록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업계는 이번 판결 이후 상황을 예의 주시한다는 입장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개별 사례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당장 임금피크제 운영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며 “하지만 유사한 소송의 판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