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에 산업계 "줄소송 등 혼란 우려"

26일 대법원 "임금피크제, 고령자고용법 위반…무효"
"개별 사안 달리 판단해야"…효력 기준 제시하기도
재계 "고용불안 심화와 일자리 감소 등 부작용 우려"
기업들 "유사 소송에 영향 있을까 걱정…예의주시하겠다"
  • 등록 2022-05-26 오후 8:21:54

    수정 2022-05-26 오후 9:24:54

[이데일리 손의연 한광범 기자]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는 성과연급제(임금피크제)가 고령자고용법상 차별 금지 규정을 위반해 무효라고 판단하면서 재계에서 줄소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별 사례를 기준으로 나온 판결이지만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내놓으면서 산업계 현장의 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직원의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한 것이므로 무효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6일 퇴직자 A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한 연구기관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사진=연합뉴스)
法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은 위법”…임금피크제 효력 기준 첫 제시

26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못 받은 임금을 지급하라”며 국내 한 연구기관 퇴직자 A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근거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1991년 한 공공 기술연구소(B연구소)에 입사해 2014년 9월 퇴사했다. 연구소는 2008년 노동조합과 만 55세 이상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임금피크제 도입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새 인사제도에 합의해 시행에 들어갔다.

기존 업무를 그대로 이어갔던 A씨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월급이 성과 평가에 따라 최저 93만원에서 최고 283만원까지 줄었다. A씨는 2014년 “회사가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으므로 무효”라며 미지급 임금 소송을 제기했다. 고령자고용법은 임금 등 법이 정한 분야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근로자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B연구소는 이에 대해 “임금피크제 도입에 따른 임금 삭감의 반대급부로 상시적 명예퇴직제도를 도입했다. 또 노조의 동의를 얻었으므로 문제 없다”고 맞섰다.

쟁점은 임금피크제 도입이 고령자고용법이 차별을 인정하는 근거인 ‘합리적 이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1·2심 모두 ‘B연구소가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합리적 이유 없이 고령자를 차별하는 만큼 고령자고용법 위반으로서 무효’라며 A씨의 손을 들어줬다. B연구소가 정년 보장 등의 반대급부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주된 판단 근거였다.

대법원도 이 같은 하급심 판결이 맞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효력과 관련해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들이 입는 불이익의 정도 △임금 삭감에 대한 대상 조치의 도입 여부 및 그 적정성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임금피크제 효력은 이 같은 판단기준에 따라 개별 사안별로 달리 판단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계 “대법원 판결 아쉬워…고용불안·노사갈등 우려”

재계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쉽다는 성토가 나온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자체를 무효로 본 것은 아니지만, 이번 판결 자체가 기업의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다. 고령자의 고용 불안 해소와 청년 구직자의 일자리 기회 창출을 위한 임금피크제의 본래 취지가 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이번 사례와 같은 임금소송이 줄지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 입장에선 노조가 법원 기준을 근거로 향후 임금피크제 재논의나 폐지를 요구할 수 있어 갈등이 생길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는 입장문을 통해 “임금피크제는 기존 연공급제(호봉제) 하에선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이를 무효화하면 청년 일자리, 중장년 고용불안 등 정년연장의 부작용이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더욱이 줄소송 사태와 인력경직성 심화로 기업 경영부담이 가중되고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 우려된다”며 “임금피크제를 의무화하는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급속한 고령화에 대응해 고용 안정을 위해 노사 간 합의 하에 도입된 임금피크제가 연령에 따른 차별로 위법하다고 판단한 이번 판결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키고 고용 불안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근로자 고용안정을 도모하면서 기업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기업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는데 이번 판결은 이러한 법 개정 취지를 무색하게 하면서 산업현장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역시 “연령차별을 금지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법’은 ‘특정 연령집단의 고용유지와 촉진을 위한 조치’는 연령차별로 보지 않고 있다”며 “법은 2016년 1월부터 60세 정년을 의무화하면서 그 대안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하도록 사용자에게 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임금피크제는 임금체계 개편의 일환으로 널리 활용돼 왔다”고 지적했다. 경총은 “향후 판결들이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 신중하게 내려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계 역시 이번 판결에 반발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정부 권고에 따라 제도를 도입한 기업 현장 혼란과 임금 소송 남발로 인한 노사 간 갈등이 격화할 것”이라며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경기 불황과 거세지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임금피크제 관련 혼선이 기업의 추가적인 임금 부담과 생산성 저하를 야기하지 않도록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업계는 이번 판결 이후 상황을 예의 주시한다는 입장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개별 사례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당장 임금피크제 운영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며 “하지만 유사한 소송의 판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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