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겸의 일본in]시대착오적 금주령·등화관제에 日 시민들 뿔났다

고이케 도쿄도지사 "밤 8시 넘으면 불 꺼달라" 요청에
"코로나가 나방이냐" "전쟁 때 등화관제냐 뭐냐" 비난
자율에 맡긴 휴업, 사실상 강제화 분위기 조성 우려
태평양전쟁 당시 등화관제 강요했지만 10만명 사망
  • 등록 2021-05-10 오후 11:00:00

    수정 2021-05-10 오후 11:00:00

3차 긴급사태 발령이 결정된 지난달 23일 도쿄 시내에 불이 켜진 모습(사진=AFP)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술도 못 마시게 하더니 조명도 끄라고?”

일본 정부의 방역 헛발질을 향한 분노가 심상치 않다. 벌써 세 번째 긴급사태 선언까지 왔는데 방역지침은 점점 비과학적으로 흐른다는 불만이다. “술 마시지 말라”는 금주령에 이어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게 하라”는 21세기판 등화관제(燈火管制) 얘기다.

“8시 이후 거리에 불 끄자” 요청에 “코로나가 나방이냐” 비난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지난 23일 “오후 8시 이후에는 가로등 이외의 조명을 끄도록 음식점 등에 요청하겠다”고 했다. 상점의 간판과 조명을 꺼서 거리에 인파가 몰리는 일을 막겠다는 것인데, 당연히 반발은 거세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이냐”는 비아냥부터 거리가 깜깜해지기 전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전철에 북적이는 것은 어쩔 생각이냐는 반문도 나온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지난달 23일 “밤 8시 이후 상점의 간판과 조명을 꺼 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사진=AFP)
“코로나가 나방이냐”는 실소, 웃어 넘길수만은 없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거리 전체에 불을 끄면 지자체 휴업요청에 따르지 않는 점포를 적발하기 쉬워져서다. 지금까지는 휴업을 자율에 맡겨 왔지만, 등화관제를 시작하면 자영업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게 만들어 사실상 강제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다. 결국 정부의 방역 실패 책임을 국민에게 돌리려는 일종의 빌드업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휴업 동참하면 하루 지원금 2만엔, 휴업 감시 순찰대 인건비는 2억엔

도쿄도는 오는 31일까지로 연장된 3차 긴급사태 기간 동안 휴업 요청에 동참한 자영업자에게 하루 지원금 2만엔을 준다. 강제로 매장 영업을 중단한 독일의 경우 고정비의 최대 90%를 지급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코로나 대책을 줄곧 비판해 온 변호사 오오마에 오사무는 일본 주간지 겐다이 비즈니스에 “일본은 보상금을 넉넉하게 못 줘서 차마 영업 금지까지는 못 하고 자발적으로 휴업을 부탁하는 것”이라며 “거꾸로 말하면 ‘정부가 휴업을 강제하지 않기에 완전한 보상은 필요 없다’는 논리”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도쿄올림픽에 돈을 쏟아붓는 건 안 아끼면서, 휴업으로 허덕이는 자영업자에 대한 보상에 너무 인색하다”고도 덧붙였다.

지난 4일 도쿄 신주쿠역 인근 빌딩들에 불이 꺼진 모습(사진=AFP)
방역실패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하는 듯한 움직임은 도쿄뿐 아니라 오사카에서도 포착된다. 지난달 5일 오사카부의 요시무라 히로후미 지사는 2억엔을 들여 음식점 휴업을 감시하는 40~50명 규모의 순찰대를 꾸리겠다고 결정했다. 경제적인 보상이 아니라 감시와 압력으로 휴업을 사실상 강제화하겠다는 심산이다.

일본인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분개하고 있다. 요시무라 지사는 2019년 취임 후 공공의료나 보건행정을 축소해 왔는데, 이 때문에 현재 오사카 의료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3일 기준 오사카부의 코로나19 중증환자 병상 사용률은 99.7%에 이를 정도로 포화 상태다. 정책 오판에 대한 책임은 덮어놓고 시민 탓을 하듯 감시를 강화하겠다는 으름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분노다.

지난 1945년 3월 10일 새벽 야간용 레이더를 탑재한 미군 폭격기 B-29가 도쿄 대공습을 위해 일본 본토로 향하고 있다(사진=파테뉴스 유튜브)
21세기판 등화관제, 80년 전 실패한 전략 연상케 해

도쿄도의 등화관제 요청이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일본은 중일전쟁 직전인 1937년 제정한 방공법을 제정했는데, 국민들에게 공습이 일어나더라도 도망치지 말고 불(화재)을 끄라는 명령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개정한 방공법에선 “불(빛)을 꺼라”는 내용이 추가됐다. 야간에 적에게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모든 가정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를 어기면 최대 징역 1년형에 처했다.

하지만 불빛을 감춘다고 공습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40년대 미국 기술력은 이미 야간용 레이더를 탑재한 전투기를 개발하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결국 1945년 3월 10일 새벽 당시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폭격기 B-29 300여대가 도쿄 시내에 폭격을 퍼부은 도쿄 대공습이 벌어졌다. 하룻밤에만 사망자가 10만명을 넘었다. 기술력을 앞세운 미군 폭격 앞에 불빛을 가려 야간 공습을 피한다는 일본의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지난달 23일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3차 긴급사태를 발령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사진=AFP)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오후 8시가 넘으면 거리의 불을 끄겠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다.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일뿐더러 시민에게 감염 확산을 막을 책임이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대판 등화관제 요청에 일본인들이 국가가 시킨 대로 착실히 불을 껐지만 미군 폭격기 앞에 무참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 기억이 떠오른다는 건 우연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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