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가 단기간 급등한 가운데 강원도 레고랜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채무불이행까지 더해지면서 단기자금시장이 급속도로 경색되자 금융당국이 시장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가동을 비롯해 은행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정상화 6개월 유예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의 유동성 지원, 저신용 회사채 매입과 같은 좀 더 포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20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단기자금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하루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 평균 체결금리는 이날 3.17%를 기록했다. 지난달까지 2%대에 머물다 레고랜드 사태가 터진 이튿날 3.29%로 뛰었고, 이달 14일에는 3.4%까지 치솟았다. 3개월 만기 기업어음(CP) 금리도 19일 4.02%로 올 들어 처음으로 4%대에 진입한 데 이어 이날 4.10%로 더 상승했다.
단기자금시장은 텐드럼(발작) 상황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금리 급등으로 유동성이 메마르면서 저신용 회사채에서 시작된 돈맥경화는 우량 회사채로 번졌고, 이제는 단기자금시장으로까지 퍼진 것이다. 특히 금리상승과 부동산 경기 위축으로 부동산PF에 대한 우려가 컸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지급보증을 했던 PF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면서 신뢰가 무너진 게 결정적이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부동산 PF에서 시작된 불안이 최근 한두 주간은 기업어음(CP) 시장으로 번졌다”며 “3개월, 6개월의 짧은 만기 CP로 자금을 조달해온 곳의 자금줄이 막히기 시작했는데 11월 말 한국은행이 금리를 또 한 번 올리면 못 버티는 곳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현재 시장에서는 적정가격 탐색 기능이 실종됐다”며 “정부가 그 기능을 찾아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경우 민스키 모멘트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민스키 모멘트는 부채가 쌓이다 임계점을 지나면서 자산가치가 붕괴되고 경제위기가 발생하는 순간을 말한다.
은행 LCR 정상화 6개월 연장
단기자금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금융위원회도 대책마련에 나섰다. 우선 은행 LCR 비율 정상화 조치를 6개월 유예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사태 대응과정에서 은행의 통합 LCR을 기존 100%에서 85%로 인하하는 조치를 했다가 연말까지 정상화하기로 했지만, 이 시점을 늦추기로 한 것이다.
아울러 금융위는 “채안펀드 여유재원을 통해 신속히 매입을 재개하고 추가 캐피탈콜 실시도 즉각 준비하겠다”며 “증권사와 여전사 등의 유동성 상황을 면밀히 보면서 한국증권금융을 통한 유동성 지원 등을 적극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코로나19 펜데믹 때 시행했던 채권시장 안정책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은의 무제한 RP 매입, 비은행 금융기관 대출, 저신용등급 포함 회사채·CP 매입기구인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재가동 등을 모두 열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인플레와 사투‥팬데믹에 비해 정책여건 불리
다만 코로나19 때와는 달리 정책 시행이 녹록지 않은 상황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에는 전세계가 금융시장 안정과 경기부양을 위해 다 함께 돈을 풀었지만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채안펀드만 해도 2020년에는 우량회사채 시장 안정에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으나 지금은 채안펀드 주요 출자사인 은행의 자금사정상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은행들이 연말 LCR을 맞추기 위해 은행채를 대거 발행하면서 크레딧 시장에서 구축효과가 나타났는데, 채안펀드 조성을 위해 자금을 댈 경우 그 자금을 메우기 위해 또 은행채를 발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LCR 정상화 유예로 다소 여유는 생기겠지만 결국 돌려막기에 그칠 것이란 분석이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캐피탈콜에 응해야 할 금융회사의 자금 사정에 여유가 충분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며 “기존 시장 참여기관의 캐피탈콜 방식의 채안펀드 자금 조성은 자금이 이쪽 주머니에서 저쪽 주머니로 옮겨질 뿐 신규 자금 공급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은의 RP 매입범위 확장 정도가 효과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물가가 고공행진하는 가운데 채권시장안정 조치를 취하는 것은 또 다른 양적완화여서 선제적인 조치에 나서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한은이 RP 대상으로 국채 외에 은행채, 특수채를 받아주면 증권사들이 시장이 아닌 한은으로부터 직접 조달하는 거라 자금사정에 숨통이 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