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시대]내 아이가 혼자 남게 된다면…

자녀를 위한 안전장치 '미성년자 신탁'
  • 등록 2020-09-26 오전 8:17:08

    수정 2020-09-26 오전 8:18:52

[배정식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 센터장] 상속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고령층의 관심사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 했던가. 장례식장에 가보면 병으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지는 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8년 한 해 사망자는 29만8천명이고, 한참 일할 나이인 35-39세가 3천2백명, 40대는 1만2천5백명, 50-54세가 1만1천2백명에 달한다. 특히 40대 젊은 가장의 사망은 가정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는 사별과 함께 이혼 등으로 홀로 아이를 양육하던 보호자마저 사망이나 질병이 생긴다면 어린 자녀의 삶에는 치명적 결과를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정식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 센터장ㅁ
부모의 빈자리를 느낄 새도 없이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도 우리 주위에는 있다. 그들을 함께 보듬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역할인데, 갑작스런 사고와 질병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미성년자들을 위해 우리는 충분한 사회적 안전장치를 갖고 있을까?

이 물음에 충분하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남겨진 부모의 재산이 주위 어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 느끼는 충격과 고통은 더욱 크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사고 등으로 그 가정에 남겨진 소중한 보험금부터 구조금 또는 상속재산 등이 온전히 지켜져 아이가 성장하는 토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사회에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혼자 남게 된다면… 부모의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주고 싶다

리빙트러스트 센터에서 주관하는 신탁컨설턴트 교육과정에 참여했던 한 직원으로부터 얼마 전 상속상담 요청을 받았다. 고객은 6세의 미성년자 딸을 둔 40대 초반 직장인 남성 장한기 씨로, 맡기고 싶은 것은 현재 거주 중인 용인에 있는 주택 1채였다. 여러 해 신탁 상담을 하다 보면, 고객의 연령이나 가족현황만 들으면 어떤 문제일지 대략 추정이 되는데, 매우 다급한 상황일 듯 하여 신속히 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짐작대로 젊은 아빠는 안깝게도 불치병 선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고객은 몇 해전 이혼했고, 전처와 사이에서 태어난 6세의 딸이 있다. 자신이 건축 일을 하다 보니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직접 지었는데 만약 자신이 사망하더라도 그 집만은 어린 딸에게 남겨주고 싶다고 한다. 즉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집이 팔리지 않게 온전히 지켜주고 싶다는 것이 상담의 핵심 내용이었다.

6세의 어린 딸을 홀로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인 만큼, 안타까운 상황을 접하면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도록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적합한 방안을 찾으려고 고심한다. 현금 등 재산 상태를 확인해서 상속세를 계산하고, 장한기 씨는 이혼한 상황이기에 사망 후 친권자 문제까지 진단해서 대비해야 한다. 유언대용신탁의 경우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기 때문에 부동산관리 및 처분에 대한 솔루션, 세금 솔루션, 예금 활용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기본이다. 장한기 씨는 자신의 정리된 생각을 말했다.

첫째, 현재 남겨진 현금은 딸을 키워주고 있는 자신의 부모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보유한 현금은 자신의 딸을 키우는 데 쓰면 딱 맞는 정도인데 만약 일부가 남는다 하더라도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으로 기꺼이 드린다는 것이다. 둘째, 가장 민감한 사안인 친권자 문제도 대비해 두었다. 이혼한 전 부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기에, 유언장에 후견인을 조부모로 지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만은 딸이 30세가 될 때까지 온전히 지켜주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장한기씨가 신탁을 하려는 가장 큰 목적이었다.

자신의 남동생이 미혼이고 몇 차례 사업 실패로 부모님은 늘 작은아들의 생활이 불안정한 것을 염려한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부모님이 남동생을 위해서 노후자금을 지원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집을 담보로 대출하거나 처분할 수도 있다는 있어, 장한기 씨는 딸의 안정적인 주거를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려고 한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딸의 미래를 지켜주고자 하는 부모의 깊은 고민과 심정이 전해졌다.

엄마의 간절함을 담은 치료보험금을 신탁으로 지키다

봄에 회사에서 받은 건강검진 결과에는 별 문제가 없었던 홍이숙 씨. 근래 일이 많아 좀 피곤하긴 했지만 이런 큰 병이 자신에게 찾아올 줄 몰랐다. 그녀는 급성질환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다. 문득 아들 걱정에 두려워졌다. ‘내가 회복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으면, 어린 아들은 어찌 살아갈까?’ 병원에서는 회복할 수 있으니 치료에 전념하라고 말하지만 치료비 명목으로 수령한 보험금을 비롯해 보유한 현금과 전세보증금 등이 아이의 교육을 위해 잘 관리될지 걱정이 앞선다. 만일 홍이숙 씨가 사망한다면 아이를 돌봐 줄 사람으로는 친아빠인 전남편과 자신의 언니가 있다.

사업자금 문제로 홍이숙 씨와 늘 갈등을 겪었던 전남편은 현재 재혼한 상태이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 친권자라는 권리를 주장하며 남겨진 재산을 자신의 사업자금으로 우선 사용하려 할 것이다. 홍이숙 씨는 전남편의 재혼 가정에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을지, 보험금마저 바닥나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 마음의 병이 생길 정도다. 자신의 언니인 아이 이모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다면 좋겠으나, 아이의 아빠가 살아 있는데 이모가 과연 후견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법률관계도 궁금하였다.

아이 아빠나 이모가 법적으로 친권자나 후견인으로서 아이를 양육하더라도 자신의 사망보험금이나 전세보증금이 전부 자녀의 교육과 생활을 위해 쓰이도록 하고 싶었다. 법률 조언을 통해 우선 홍이숙 씨는 자신의 언니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재산 관리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이에 주위의 법률 전문가는 신탁제도를 소개하였다. 계약 내용에 따라 재산을 관리하면서 미성년자가 성년이 되거나 또는 그 이상의 일정한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수탁자인 금융기관에서 재산을 지켜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신탁이라는 설명을 들은 홍이숙 씨는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후 신탁계약을 체결하였다.

홍이숙 씨의 치료보험금은 그 어떤 돈보다 의미 있고 사랑이 담긴 돈이기에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정성을 다해 관리하고 있다. 이 돈은 엄마에게 유고가 생기고 친권이나 후견인이 정해지더라도 엄마가 지정한 자녀 교육비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 후 아이가 25세가 되면 지급될 것이다. 이렇듯 미성년 대상의 신탁은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계약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병원비 목적의 지급관리를 추가하는 케어신탁과 유언대용신탁을 함께 활용할 수도 있다.

무책임한 부모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

미성년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탁이 활용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무책임한 부모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 가슴 아픈 사례도 있다. 어느 날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부터 학대 피해 아동을 위한 신탁 요청을 받았다. 엄마로부터는 구박을, 엄마의 남자친구로부터는 성적 학대로 심한 고통을 받은 경우였다. 성적 학대로 구속된 남자는 피해보상금으로 법원에 일정 금액을 공탁하였다.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공탁된 자금에 대한 관리를 고민하던 보호기관은 해결방안을 찾던 중 트러스트센터로 연락한 것이다. 신탁계약을 통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자금을 안전하게 운용하다가 성인이 된 후 지급하는 조건을 담아 신탁계약을 체결하였다.

공식적으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2012년 1만 943건에서 2016년 2만 9,671건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아동학대로 의심되는 사례도 같은 기간 6,403건에서 2만 5,878건으로 약 4배 증가했다. 학대 행위자는 대부분 부모이다. 친부모가 76%이고 계부·계모까지 포함하면 약 80.5%가 자녀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부모가 학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신탁이라고 하면 유언을 대신하는 유언대용신탁 또는 유언신탁을 떠올리고,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만 신탁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신탁은 스스로 재산을 관리가 어려운 미성년자들의 소중한 재산을 지켜주는 안전판이 되어준다.

◆배정식 센터장은…

1993년 하나은행에 입사해 현재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 센터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0년 금융권에서 처음으로 리빙트러스트를 연 뒤, 신탁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서울대 금융법무과정, 고려대 대학원(가족법), 건국대 부동산 대학원 등을 거쳐 호서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금융연수원 등에서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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