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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임·횡령·소득 축소 등의 혐의로 일본에서 재판을 받다가 레바논으로 도주한 곤 전 회장은 8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개최, 억울함을 호소하며 일본 사법체계와 닛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탈출한 것이 “정치적·사법적 박해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곤 “日정부·닛산 합작 쿠데타의 희생량”
곤 전 회장은 이날 “닛산에 대한 르노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나를 제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르노와 닛산의 합병을 추진한 것이 그가 체포된 계기라는 견해다.
르노는 15%의 지분을 가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경영이 좌우된다. 그리고 르노는 닛산 주식의 43.4%를 출자한 상태다. 이 지분에는 의결권이 있다. 닛산도 르노 주식의 15%를 보유하고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닛산은 사실상 프랑스 정부 소유가 되는 셈이다.
곤 전 회장이 ‘외부인’이라는 인식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곤 전 회장이 기자회견 내내 자신이 일본 정부와 닛산이 벌인 ‘쿠데타의 희생량’이라고 주장한 것과도 닿아 있다.
곤 전 회장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마치 테러리스트처럼 다뤄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검찰은 유죄를 전제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자백하지 않으면 가족을 추궁하겠다고 위협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며 “도쿄지방검찰청은 정치 검찰”이라고 꼬집었다.
곤 전 회장은 창문이 없는 작은 방에서 하루에 30분만 밖으로 나가는 게 허락됐으며 샤워 역시 일주일에 2번만 허락됐다고 전했다. 새해 연휴 기간에는 6일이나 사람과 만나지 못했으며 처방약을 요구했음에도 거부당했고 통역사를 만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는 설명이다. 아내나 가족들과의 접촉은 물론 금지된 상태였다.
또 곤 전 회장은 영어, 아랍어, 포르투칼어, 프랑스어를 할 수 있지만 일본어는 하지 못하는데, 그런데도 변호사를 배석하지 않은 채 길게는 하루에 8시간이나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곤 회장은 “나의 인권과 존엄성이 모두 부정당했다”고 비난했다.
일본에서 보석 상태였던 그가 어떻게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레바논으로 탈출했는가에 대해 곤 전 회장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신 그는 자신의 탈출에 대해 “일본에서 죽을까, 탈출할까의 문제였다. 정의가 아닌 불의에서 도망친 것”이라며 “인격 살해”를 피하고 “발언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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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구세주’에서 ‘희대의 루팡’으로 전락
르노와 닛산의 관계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빚이 21조원에 달하던 닛산은 지분 43.7%를 르노에 넘기며 구제받게 된다. 곤 전 회장은 곧바로 닛산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임명됐고, 대대적인 감원 및 공장 폐쇄 등 당시 일본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된다.
곤 전 회장은 당시 무려 2만명, 전체 임직원의 15% 이상을 한꺼번에 해고했다. 또 닛산이 추구하던 자동차는 배제시키고 ‘돈이 되는’ 차량만 팔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조정으로 서양에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평생직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당시 일본 사회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닛산은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곤 전 회장은 ‘닛산의 구세주’로 칭송받으며 2005년 닛산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르게 되고, 미쓰비시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성과를 올린다. 지난 2016년엔 매출을 르노의 두 배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몸집이 커진 만큼 곤 전 회장은 르노와 닛산이 합병할 때라고 판단, 관련 계획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닛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게 곤 전 회장의 설명이다.
일본 언론은 최근 곤 전 회장이 “법을 어기고 도주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괴도 루팡’이라고 묘사하는 한편, 그를 ‘차갑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곤 전 회장은 이에 대해 “연봉을 두 배 준다던 제러럴모터스(GM)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사익을 추구했다면 ‘미안하다, 개인적인 일이다’라며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선장은 배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반박했다.
또 탈출 과정에 대해서도 CNBC와의 인터뷰에서“단순할수록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고 밝혔다. 일본 수사당국에 의해 밝혀진 탈출 과정과 그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영능력이 다시 한 번 검증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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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도 모른다” Vs “참을 만큼 참았다”
지금은 일본 정부와 언론의 여론몰이로 공공의 적(敵)이 된 곤 전 회장이지만, 2018년 11월 체포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과 NHK 등의 보도를 살펴보면 그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닛산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일부 전현직 임직원들은 곤 전 회장에 대해 “회사의 비효율을 없애고 사내 정치와 각종 연줄에서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렸다”는 칭찬을 쏟아내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르노와 일본 닛산, 미쓰비시자동차 등 세 회사의 복잡한 기업 구조와 각종 사업들, 내부적인 정치 관계 등까지 19년 간 매끄럽게 조율해 왔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다만 닛산을 하대하는 개인적 성향이나 1인 독재 경영 체제가 지속된데 따른 불만, 잦은 해외 체류 및 개인적 탐욕 등에 대한 의혹 등 부정적 견해도 많다. 대체로 “참을 만큼 참았다”는 인식으로 곤 전 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서방 국가들은 처음부터 시각을 달리 했다. 지난 2018년 11월 곤 전 회장이 일본에서 체포됐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종교재판’이라고 규정했다.
WSJ은 “한 때 기업 구세주로 불렸던 한 CEO가 공항에서 체포돼 기소도 없이 구금됐고, 변호사 출석도 없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금융 관련 불법행위로 유죄라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가운데 그는 바로 해임됐다”며 “이곳이 공산국인 중국인가? 아니다. 자본주의 일본이며, 곤 전 회장은 이곳에서 기괴한 종교재판을 견뎌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르 피가로 등 프랑스 언론들도 곤 전 회장이 체포됐을 때 “일본인은 배은망덕하다”, “닛산과 일본에 대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등의 보도를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