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은 어쩌다 '닛산 구세주'에서 탈주범으로 전락했나?

곤 “日정부·닛산 합작 쿠데타의 희생량”
“日탈출, 정의가 아닌 불의에서 도망친 것”
곤에 대한 평가 ‘극과 극’…경영능력엔 이견無
“은혜도 모른다” Vs “참을 만큼 참았다”
  • 등록 2020-01-11 오전 8:50:00

    수정 2020-01-11 오전 8:50:00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회장이 8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AFP 제공]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망하기 직전이었던 닛산을 되살리며 ‘구세주’로 칭송받던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이제는 희대의 탈출극을 벌인 탈주범으로 전락해 일본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배임·횡령·소득 축소 등의 혐의로 일본에서 재판을 받다가 레바논으로 도주한 곤 전 회장은 8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개최, 억울함을 호소하며 일본 사법체계와 닛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탈출한 것이 “정치적·사법적 박해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곤 “日정부·닛산 합작 쿠데타의 희생량”

곤 전 회장은 이날 “닛산에 대한 르노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나를 제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르노와 닛산의 합병을 추진한 것이 그가 체포된 계기라는 견해다.

르노는 15%의 지분을 가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경영이 좌우된다. 그리고 르노는 닛산 주식의 43.4%를 출자한 상태다. 이 지분에는 의결권이 있다. 닛산도 르노 주식의 15%를 보유하고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닛산은 사실상 프랑스 정부 소유가 되는 셈이다.

곤 전 회장이 ‘외부인’이라는 인식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곤 전 회장이 기자회견 내내 자신이 일본 정부와 닛산이 벌인 ‘쿠데타의 희생량’이라고 주장한 것과도 닿아 있다.

곤 전 회장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마치 테러리스트처럼 다뤄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검찰은 유죄를 전제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자백하지 않으면 가족을 추궁하겠다고 위협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며 “도쿄지방검찰청은 정치 검찰”이라고 꼬집었다.

곤 전 회장은 창문이 없는 작은 방에서 하루에 30분만 밖으로 나가는 게 허락됐으며 샤워 역시 일주일에 2번만 허락됐다고 전했다. 새해 연휴 기간에는 6일이나 사람과 만나지 못했으며 처방약을 요구했음에도 거부당했고 통역사를 만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는 설명이다. 아내나 가족들과의 접촉은 물론 금지된 상태였다.

또 곤 전 회장은 영어, 아랍어, 포르투칼어, 프랑스어를 할 수 있지만 일본어는 하지 못하는데, 그런데도 변호사를 배석하지 않은 채 길게는 하루에 8시간이나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곤 회장은 “나의 인권과 존엄성이 모두 부정당했다”고 비난했다.

일본에서 보석 상태였던 그가 어떻게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레바논으로 탈출했는가에 대해 곤 전 회장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신 그는 자신의 탈출에 대해 “일본에서 죽을까, 탈출할까의 문제였다. 정의가 아닌 불의에서 도망친 것”이라며 “인격 살해”를 피하고 “발언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강조했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지난해 3월 보석 결정 이후 석방되고 있는 모습. (사진=AFP)


‘닛산 구세주’에서 ‘희대의 루팡’으로 전락

르노와 닛산의 관계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빚이 21조원에 달하던 닛산은 지분 43.7%를 르노에 넘기며 구제받게 된다. 곤 전 회장은 곧바로 닛산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임명됐고, 대대적인 감원 및 공장 폐쇄 등 당시 일본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된다.

곤 전 회장은 당시 무려 2만명, 전체 임직원의 15% 이상을 한꺼번에 해고했다. 또 닛산이 추구하던 자동차는 배제시키고 ‘돈이 되는’ 차량만 팔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조정으로 서양에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평생직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당시 일본 사회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닛산은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곤 전 회장은 ‘닛산의 구세주’로 칭송받으며 2005년 닛산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르게 되고, 미쓰비시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성과를 올린다. 지난 2016년엔 매출을 르노의 두 배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몸집이 커진 만큼 곤 전 회장은 르노와 닛산이 합병할 때라고 판단, 관련 계획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닛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게 곤 전 회장의 설명이다.

일본 언론은 최근 곤 전 회장이 “법을 어기고 도주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괴도 루팡’이라고 묘사하는 한편, 그를 ‘차갑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곤 전 회장은 이에 대해 “연봉을 두 배 준다던 제러럴모터스(GM)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사익을 추구했다면 ‘미안하다, 개인적인 일이다’라며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선장은 배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반박했다.

또 탈출 과정에 대해서도 CNBC와의 인터뷰에서“단순할수록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고 밝혔다. 일본 수사당국에 의해 밝혀진 탈출 과정과 그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영능력이 다시 한 번 검증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곤 전 회장은 지난달 29일 연금중이던 가택에서 유유히 걸어 나와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이동, 미리 준비돼 있던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세관을 피하기 위해 그는 숨구멍이 뚫려 있는 악기 상자에 몸을 숨긴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AFP)


“은혜도 모른다” Vs “참을 만큼 참았다”

지금은 일본 정부와 언론의 여론몰이로 공공의 적(敵)이 된 곤 전 회장이지만, 2018년 11월 체포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과 NHK 등의 보도를 살펴보면 그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닛산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일부 전현직 임직원들은 곤 전 회장에 대해 “회사의 비효율을 없애고 사내 정치와 각종 연줄에서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렸다”는 칭찬을 쏟아내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르노와 일본 닛산, 미쓰비시자동차 등 세 회사의 복잡한 기업 구조와 각종 사업들, 내부적인 정치 관계 등까지 19년 간 매끄럽게 조율해 왔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다만 닛산을 하대하는 개인적 성향이나 1인 독재 경영 체제가 지속된데 따른 불만, 잦은 해외 체류 및 개인적 탐욕 등에 대한 의혹 등 부정적 견해도 많다. 대체로 “참을 만큼 참았다”는 인식으로 곤 전 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서방 국가들은 처음부터 시각을 달리 했다. 지난 2018년 11월 곤 전 회장이 일본에서 체포됐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종교재판’이라고 규정했다.

WSJ은 “한 때 기업 구세주로 불렸던 한 CEO가 공항에서 체포돼 기소도 없이 구금됐고, 변호사 출석도 없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금융 관련 불법행위로 유죄라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가운데 그는 바로 해임됐다”며 “이곳이 공산국인 중국인가? 아니다. 자본주의 일본이며, 곤 전 회장은 이곳에서 기괴한 종교재판을 견뎌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르 피가로 등 프랑스 언론들도 곤 전 회장이 체포됐을 때 “일본인은 배은망덕하다”, “닛산과 일본에 대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등의 보도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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