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보호법탓에 1000억건 환자정보도 무용지물

[무용지물 환자정보②]
미국,유럽 개인의료정보 신약개발에 본격활용
한국,병원마다 확보 방대한 환자정보 산업 활용해야
미국, 유전자분석 서비스 이용자 1200만명 돌파
업계,개인 의료정보 활용없이 제약강국은 언감생심
  • 등록 2019-11-15 오전 6:00:00

    수정 2019-11-15 오전 6:00:00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이데일리 류성 기자] ‘환자 진료 데이터 170억건.’

세브란스병원을 운영하는 연세의료원이 확보하고 있는 천문학적 환자 데이터 규모다. 여기에 세브란스병원은 매일 방문환자 1만여명의 진료정보를 추가로 축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연세의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방대한 환자정보는 상업적으로 쓸수있는 길이 막혀있다. 개인정보를 수집한 목적외 이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현행 개인정보 보호법이 가로막고 있다.

심재용 연세의료원 연구개발자문센터 소장은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측면만 강조하다보니 환자 진료 데이터를 상업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환자정보의 익명성 보장을 전제로 신약개발등에 적극 활용할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바람직하고 이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제약, 의료계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확보하고 있는 세계 최고수준의 환자 정보를 신약개발 및 질병예방등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대부분 국내 병원급 의료기관은 세계적 IT인프라를 기반으로 전자의료정보(EMR)시스템을 운영하며 풍부한 환자의료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현재 국내 의료기관이 확보하고 있는 환자의료정보를 모두 합하면 1000억건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건강보험공단,심평원등 정부기관이 보유한 전국민 의료정보는 무려 6조건에 달한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개인 진료정보량이다.

특히 국내 병원들은 표준화된 양식으로 환자의료정보를 저장, 정보간 호환 및 비교가 가능해 상업적으로 활용하기에 용이하다는 게 업계 평가다. 반면 영국, 미국 등 선진국들은 한국처럼 환자정보가 표준화돼 있지않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방대한 환자의료정보는 무엇보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환자별 맞춤형 신약개발 및 질병 예방에 효과적으로 쓰일수 있다는게 제약업계의 설명이다. 예컨대 환자의료정보를 빅데이터로 분석하게 되면 같은 위암 치료제라도 어떤 환자에게는 효과가 있는 반면 다른 환자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원인을 찾아낼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위암 환자를 유형별로 분류해 각 환자별 유형에 맞는 맞춤형 위암치료제를 개발할수 있다.

최근 글로벌 제약업계에서 화두가 되고있는 맞춤형 정밀의학과 맥락을 같이한다. 실제 화이자, GSK등 글로벌 제약사들은 과거 임상시험에서 실패한 신약후보들이더라도 다시 환자정보 빅데이터를 활용해 특정 환자군에게 효과가 있는지를 재분석해 되살리고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병원마다 분산돼 있는 방대한 환자정보를 암호화해 클라우드 형태로 한곳에 통합, 누구나 사업에 활용할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 익명성만 보장된다면 환자정보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전면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 유럽 등에서는 환자정보를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것이 대세다. 특히 방대한 환자 데이터를 사용해 임상시험 기간을 대폭 단축하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있다. 예컨대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얼마 전 영국에서 병원 등 의료기관이 보유한 암환자 데이터를 유형별로 분석,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에 활용해 기존 8개월 걸리던 기간을 단 2주만에 끝내는 성과를 거뒀다.

최근 방한한 미셀 파텔 아스트라제네카 헬스 인포매틱스 총괄은 “영국정부는 제약 및 의료산업 발전을 위해 익명성이 보장된 환자정보 활용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있다”며 “특히 병원들이 확보하고 있는 환자정보의 호환을 위해 전자의료정보 시스템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개인정보보호법이 제약 및 의료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지난 2016년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 라인’을 내놓았다. 정부는 이 가이드라인에서 개인을 식별할수 있는 요소를 없애는 비식별 조치를 한 경우 개인정보가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비식별 조치를 하더라도 개인정보라는 반증이 나올 경우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어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비식별 조치를 취한 환자정보 빅데이터를 활용하더라도 개인정보 보호법등 관련 법령에 의해 처벌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기에 제약업계는 환자정보 활용에 대해 소극적일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인재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지난해말 대표발의한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안이 오는 19일 국회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이 개정안은 과학적 연구, 통계작성 등 목적으로 정보주체의 동의없이 가명정보를 활용할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제약,바이오 업계가 상당한 기대를 갖고있다.

개인정보 보호법이 개정돼 환자정보의 상업적 활용이 허용되면 가장 큰 성과가 예상되는 분야가 유전자 분석산업이다. 유전자 정보는 질병의 예방,관리 뿐 아니라 맞춤형 치료제 개발에 있어 필요한 핵심 정보로 손꼽힌다. 특히 유전자검사 비용이 10만원대까지 크게 낮아지면서 개인 유전자 정보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다양한 치료제 개발이 현실화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는 여전히 남의 얘기다. 개인 유전자정보 유출을 우려하는 정부가 소비자가 유전자검사기관에 의뢰해 받을수 있는 검사항목을 12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현재 유전자 분석이 허용된 항목도 체질량지수, 탈모, 콜레스테롤 등 질병과 무관한 분야다. 물론 이 유전자 정보의 상업적 활용마저 전면 금지돼 있다.

반면 미국은 유방암, 알츠하이머, 파킨슨병등을 포함, 다양한 질병에 대해 유전자 검사를 허용한다. 유전자 분석업체 23andMe는 이들 질병은 물론 100여가지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미 500여만명이 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황태순 테라젠이텍스(066700) 대표는 “유전자 산업의 미래는 빅데이터에서 찾을수 있다”며 “무엇보다 규제완화를 통해 개인의료 데이터의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 급선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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