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수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등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인공지능(AI), 사물 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그 중요성은 점차 더 커지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기초과학은 어렵고 낯설게만 느껴져 피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기초과학의 세계에 쉽고 재미있게 발을 들여 보자는 취지로 매주 연재 기사를 게재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전국 초·중·고등학생 대상 과학 교육 프로그램인 ‘다들배움’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과학커뮤니케이터들과 매주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중 재밌는 내용들을 간추려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나드 쉘비는 새로운 기억이 없다. 그는 자신의 몸에 문신까지 새기며 기억을 더듬는다. 사진=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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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연호 기자] “오블리비아테(Obliviate)”. 영화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에서 헤르미온느가 자신의 부모를 위험에서 보호할 목적으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다 없애는 데 사용하는 주문이다.
기억을 수정해서 다른 기억을 심거나 삭제하는 이 마법의 주문은 나쁜 기억을 모두 지우고 좋은 기억으로 바꿔주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쓰이기도 한다. 영화처럼 필요에 따라 기억을 편집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좋든 싫든 다양한 감정이 덧입혀진 수많은 기억들에 파묻혀 살아간다.
그렇다면 인간의 뇌에서 기억 그리고 감정을 관장하는 영역은 어느 부위일까. 먼저 대뇌 변연계에 존재하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amygdala)라는 부위가 있다. 이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 감정을 처리하는 기관이다.
과학자들은 이 편도체의 정확한 역할을 확인하기 위해 일반 생쥐와 편도체를 제거한 생쥐로 비교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정상 생쥐는 고양이 배설물과 털이 담긴 실험용 샬레를 피하는 반면 편도체를 제거한 생쥐는 샬레는 물론 뱀을 봐도 도망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결국 이 생쥐는 뱀에 잡아 먹히고 말았다. 편도체가 없어져 공포감까지 사라진 결과다. 사람도 편도체가 손상될 경우 지능은 정상이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 편도체와 해마. 노란색 부분이 편도체. 그림=안영언 과학커뮤니케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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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체와 연결된 해마(hippocampus)는 기억 그 중에서도 서술적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또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는 역할도 한다. 서술적 기억이란 어떤 에피소드나 상황에 대한 기억을 말하며 절차적 기억은 악기를 다루고 자전거를 타는 방법 등 한 번 몸에 익히면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기억을 가리킨다.
해마의 역할을 얘기할 때 줄곧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아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10분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 환자가 된 한 남자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 ‘메멘토(Memento)’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알려진 헨리 몰래슨(1926~2008)이다. 생전엔 ‘H.M.’이란 이니셜로만 알려진 그는 뇌과학계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고 인간의 뇌와 기억 연구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1930년대 초 미국 코네티컷에 살던 헨리란 소년은 자전거 사고로 뇌를 다쳤다. 이후 수시로 간질 발작을 일으키던 그는 1953년 외과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발작증세는 사라졌지만 불행히도 그는 장기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수술 중에 바로 해마를 다친 것이다. 헨리는 수술 받기 이전의 일들은 기억했지만 그 이후에 경험한 일들은 어제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해마는 뇌에서 기억 외에도 공간 지각 능력에도 관여한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 복잡한 런던 골목골목을 오차 없이 잘 찾아 다니는 택시운전사들의 뇌를 촬영했더니 해마가 일반인보다 훨씬 컸다. 여기에 더해 운전 경력이 오래될수록 해마의 크기가 더 컸다고 한다. 해마는 쓰면 쓸수록 커지고 반대로 안 쓰면 안 쓸수록 작아진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내비게이션에만 의존할 경우 해마 크기는 더 줄어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공포와 같은 감정은 기억과도 큰 연관성을 가진다.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은 편도체의 활성화로 극대화되고 편도체에 붙어 있는 해마는 향후 이 감정이 유발될 기억을 저장하기에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는 공포증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를 야기하기도 한다. 콩고 정글에서 살던 때 야생동물이 집안에 들어와 있는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동물 공포증이 생긴 것으로 알려진 콩고 왕자 ‘라비’가 개나 고양이 등의 동물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의 공포스러운 감정이 각인돼 해마에 강렬하게 저장돼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작은 개나 고양이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도움말=안영언 과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