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 A아파트 경비원 송모(75·남)씨는 물 밀듯이 들어오는 택배 차량을 일일이 확인한 후에 숨 돌릴 틈 없이 곧장 분리수거장으로 향하며 한숨을 쉬었다. 경비원 한 명이 분리수거 일을 전담해 수시로 점검하러 가봐야 한다는 송씨는 “20년째 이 일을 하지만 여긴 식대도 안 주는데 눈치 보여 말도 못한다”며 “안 그래도 실수하면 문책당하기 일쑤인데 이제 이 일들이 합법화되면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오는 10월 21일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아파트 경비원들이 ‘합법적으로’ 늘어나는 업무 부담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정부는 경비원 처우를 개선하고 이들의 고용 안정을 위해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경비원들은 정작 현장과 동떨어진 조항 때문에 오히려 업무 부담이 늘고 해고 위험에 처했다는 입장이다. 개정안 시행이 초읽기에 들어가며 경비원의 업무 범위가 한층 확장된 가운데 이들의 열악한 업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현장 관리·감독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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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교통부는 지난 7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하고 경비원의 업무를 구체화했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북구 아파트에서 주민 갑질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고(故) 최희석씨 사례가 공분을 사면서 경비원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최씨에게 갑질을 한 주민 심모씨는 올해 8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겉보기에 업무 범위가 한정돼 근로조건이 나아진 것 같아도, 역설적으로 다른 업무들이 합법적으로 추가된 셈이라고 비판한다. 2019년 한국비정규직센터 조사(전국 15개 지역 경비노동자 3388명 대상)에 따르면 경비원들의 경비 업무는 전체의 30% 이하인 반면, 청소·조경·분리수거·택배·주차관리 등의 비중은 70%에 달했다.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한데 경비 외 업무가 사실상 합법화된 셈이라는 것.
정의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본부 조직차장은 “그동안 경비원들은 경비 업무 외 다른 업무를 하게 되더라도 해고될까 봐 문제 제기도 못하고 늘 고용 불안에 시달렸다”며 “이제는 그 업무들이 법적으로 인정되니까 매달 경비원들이 따로 받던 2만~3만원 상당의 분리수거 수당조차 못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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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도 오는 10월 아파트 경비원 등의 휴게시설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비한 ‘근로감독관 집무규정’ 개정을 앞두고 있지만 경비원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개정안이 시행돼도 소급적용이 안 되는 탓에 그간 감시·단속적 근로자에 포함된 기존 경비원들은 임금이 오르지도 않고, 정부에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해도 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등 아파트 입주민들의 눈치를 살펴야 해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경비원분들이 암암리에 하던 일들이 합법화된 거라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고령층의 경비원분들이 24시간 근무하는 전근대적인 업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올해 하반기에 아파트 단지 2~3곳을 선정해서 시범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의헌 전국아파트경비노동자사업단 단장은 “개정 공동주택법이 시행된다고 변하는 것은 전혀 없다”며 “수십년간 불법이었던 본업 외 업무들이 합법화된 것뿐”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 단장은 또 “엄격하게 규제한다고 해도 아파트에서 실제로 경비원들의 업무를 조정한다든지 변화는 지켜봐야 한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법이 현실에 잘 적용되고 있는지 계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