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식 심장토크]심장에 미로를 만들어라

박진식 세종병원 그룹 이사장
  • 등록 2020-11-01 오전 7:55:04

    수정 2020-11-01 오전 7:55:04

[박진식 세종병원 그룹 이사장]‘Maze Runner‘라는 영화가 2014년 개봉하면서 역대급 인기를 끌었고, 최근 개봉한 후속편들도 전작 못지 않은 흥행 성공을 거둔 덕분에 미로를 뜻하는 ’Maze‘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매일 매일 변화하는 미로 속에 기억이 삭제된 채로 이유도 모른 채 감금된 청소년들이 힘을 합쳐 탈출을 시도하는 공상 과학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민호가 한국계 미국인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민호의 역할은 미로의 구조와 변화 규칙을 파악하는 것이다. 하루 중 미로를 안전하게 탐험할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뜬 이후부터 해지기 전 까지로 제한되어있어 미로속에서 최대한 열심히 달려야 조금이라도 더 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러너(Runner)‘라고 불린다.

박진식 세종병원 그룹 이사장
미로는 모르는사람이 들어가면 나올 수 없고, 길을 아는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인데, 불필요하게 심장을 흐르는 전기로 길을 잃고 활동을 멈추도록 유도하는 미로도 있다.

심방세동이나 심방조동과 같은 부정맥은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작된 전기 흐름이 주변과 상호작용 때문에 지속되는 회귀성( reentrant) 부정맥이다. 한쪽 전기 활동이 끝날 때 쯤 다른 쪽으로 전파되었던 전기 활동이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 전파됨으로써 비정상적인 심장내 전기활동이 유지되는 것을 회귀성 부정맥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전기자극의 회귀를 억제하고, 회귀과정에서 주변으로 전파되는 것을 차단해 주기 위해 회귀로와 그 주변에 전기가 건너갈 수 없는 장애물을 만들어주면 부정맥이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회귀가 가능한 다양한 경로와 주변 전파를 막기위해서는 여러 곳에 장애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여러개의 장애물들이 심장 내 전기 전도 경로를 미로 처럼 만든다고 해서 ’미로 수술(Maze Operation)‘이라고 명명됐다.

전기는 정상적인 심장 세포들 간에는 쉽게 확산이 되지만, 비정상적인 흉터 조직을 통해 확산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심방의 여러 곳을 일부러 자르고 다시 봉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흉터를 활용해 부정맥을 억제하는 치료법 개발을 시도했다. 처음 수술법은 오랜 기간의 동물 실험을 통해서 개발됐으나, 수술 기법이 어렵고 수술 후 출혈 등의 합병증이 많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후 심장을 절개하고 봉합하는 것을 최소화 하기 위한 여러가지 새로운 방법들이 연구되었고, 최근에는 심장을 직접 절개 하지 않고 저온으로 흉터를 만드는 냉동 절제법과 고주파 자극을 통해 흉터를 만드는 전극 절제술이 개발돼 더 안전하고 빠른 치료가 가능해 졌다. 또한, 수술적 치료가 아닌 혈관을 통한 전극 절제술만으로 같은 효과를 내는 치료 방법도 개발돼 적용 대상 환자가 차차 늘어가고 있다.

심방세동은 60대 이후에 급격히 증가해 80년대 들어서면서 10명에 한 명 꼴로 가지게 되는 흔한 병이다. 부정맥으로 인한 심부전증과 심장의 변형 뿐만 아니라 뇌졸중의 위험까지 있어 적극적인 치료를 요하는 병인 만큼, 치료를 위한 많은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치료법들이 개발되기 까지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잠 못드는 고민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의 의사들은 환자분들께 덜 아프고 덜 불편한 방법으로, 더 효과적인 치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생각하니, 새삼 선구자들의 노력과 성과가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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