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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들은 20kg이 넘는 장비들을 들고 현장에서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뛰어야 했다. 소방관들은 진화 작업 5분여 만에 불길을 잡고 집주인 및 세입자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내 아들이 안에 있다”는 집주인 선모 씨의 말 한마디에 소방관 3명이 불길 속으로 진입했으나 아들 최 씨가 발견되지 않아 1차 수색은 종료됐다. 그런데 선 씨는 재차 “사람이 안에 있는데 왜 구하지 않느냐”고 소방관들을 다그쳤고 이미 시뻘건 화마로 뒤덮인 건물로 소방관 10명이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비옷)을 입은 채 재차 진입했다. 그런데 철근 기둥도 없이 벽돌과 블록으로 지었다가 다시 2층으로 증축한 34년 된 빨간 벽돌집은 소방수를 흡수하면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오전 4시 11분 ‘꽝’하는 소리와 함께였다. 소방관 10명이 무너진 건물 속에 매몰됐으며, 인근에 있던 소방관 3명도 날아간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오전 7시 57분 매몰된 마지막 소방관이 들것에 실려 나온 데 이어 9시 28불 집주인 아들 최 씨가 불길이 치솟기 전 이미 현장을 빠져나갔다는 소식과 함께 구조 수색 작업은 끝났다. 그러나 6명의 소방관은 끝내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 중 한 소방관은 결혼을 일주일 앞둔 예비 신랑으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결국 대한민국 소방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현주건조물방화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 씨는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정신 질환으로 세 차례 입원 치료를 받은 이력 탓에 심신 미약이 인정된 형량이었다.
애꿎은 소방관들의 순직에 온 나라가 추모 분위기에 휩싸였다. 순직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졌고 합동 분향소에는 사흘 간 3만 명에 가까운 시민과 공무원들이 조문했다. 이와 함께 열악한 소방관들의 처우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들의 처우 개선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24시간 맞교대 격일 근무가 3교대로 바뀌었고, 화재 당시 소방관들이 방화복이 없어 방화복 대신 방수복인 비옷을 입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국은 소방서에 방수복 대신 방화복을 교체 지급했다. 또 이 사건 발생 후 불과 사흘 뒤인 3월 7일 부산시 연산동에서 빌딩 화재로 소방관 1명이 추가로 순직하자 의무소방대 창설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