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 남북한 모두 아수라, 악마들이 날뛴다

영화 '브이아이피' 리뷰
  • 등록 2017-08-28 오후 3:35:01

    수정 2017-08-28 오후 3:35:01

영화 ‘브이아이피’
[오동진 영화평론가] 박훈정의 장점은 그가 ‘쓰는’ 감독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국내 영화감독들은 일종의 ‘싱어 송 라이터’다. 직접 쓰고 연출한다. 하지만 박훈정처럼 전업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 유명 감독이 되는 일은 알고 보면 그리 많지는 않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부당거래’까지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신세계’가 데뷔작이었음에도 흥행 폭발성이 강했던 건 사실 이유가 있다. 박훈정의 작품은 영화로 보기 이전에 얘기로만 들어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로 읽을 때 이미 재미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때는 영화보다 얘기였을 때가 더 재미있을 수가 있다. ‘혈투’와 ‘대호’가 그랬다. 그래서 그 두 작품은 영화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 ‘브이아이피’는 어느 쪽일까.

‘브이아이피’는 그의 대표작 ‘신세계’의 계보를 잇는 수작이다. 지난 해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에 이어 ‘아수라 시리즈’ 반열에 새롭게 등극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브이아이피’는, 세상을 보는 그의 ‘회색주의(灰色主義)’가 다시 한번 끝간 데 없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세상은 정말 아수라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대한 가치 판단, 그걸 동의하느냐의 여부, 혹은 그런 얘기 자체에 대한 호오(好惡)는 별개의 문제다. 모든 건 단순히 그의 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면에서 ‘브이아이피’는 일관성이 두드러진다. 박훈정은 지속적으로 세상을 어둡고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악마다움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려고 한다. 그의 작품들(시나리오 작품들까지 포함해서)이 종종 논란에 휩싸이는 건 역설적으로 그의 영화가 ‘현실성’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영화 ‘브이아이피’
이번 영화 ‘브이아이피’는 ‘악마를 보았다’와 ‘신세계’를 합해서 만든 확장 버전으로 보이고 또 그렇게 읽힌다. 이 세상에 선(善)은 없다. 그에게 있어 정의는 결국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는 일일 뿐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처럼 모든 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세상은 악이 지배한다. 게다가 그 악은 시스템을 갖고 움직인다. 보통사람들이라면 도무지 움치고 뛸 재간이 없다. 그 기이하고 불편한 ‘자각’이야말로 이번 ‘브이아이피’를 포함한 그의 영화들이 만들어 내는 역설의 쾌감이다.

애기는 북한의 최고위급 관료의 아들들이 벌이는 카니벌리즘에 가까운 연쇄강간살인극에서 시작된다. 끔찍한 윤간 살인극이 이어진다. 그 주동자 악마가 바로 김광일(이종석)이다.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이 그의 뒤를 바짝 좇다가 오히려 이들의 급습을 받는다. 남한의 국정원 소속으로 민완 현장 요원인 박재혁(장동건)은 동료(박성웅)와 함께 중앙 무대인 ‘서울 본사’로 오기 위해 궁지에 몰린 김광일 일당을 기획 탈북 시킨다. 그들을 기획 귀순시킬 당시의 코드 네임이 바로 ‘브이아이피’다. 여기에는 미국 CIA 요원 폴(피터 스토메어)이 ‘백업’ 한다. 미국 측은 김광일이 아버지 김모술(장성택의 최측근)이 관리하는 북경의 비밀계좌 정보를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미친 놈들’이 여기서도 여자들을 납치해 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사냥개보다 더 끈질기고 사나운 성격의 국내 형사 채이도(김명민)가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곧 국정원과 국내 경찰, CIA, 북한 보안성 요원 간이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진다. 과연 누가 이 미친 살인마를 응징할 것인 가. 누가 하는 게 가장 옳은 것인 가. 근데 그럴 수는 과연 있는 것인 가. 김광일을 수사하고 체포하는 일은 점점 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2013년의 지점으로 못박고 ‘플래시 백’ 시킨다는 점이다. 왜 2013년인가. 2013년에는 김정은 정권 초기 실권자였던 장성택이 실각한 후 공개 체포되고 또 곧바로 처형됐던 때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북한 사회는 어마어마한 격류에 휩싸여 있었던 바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권력의 승계 과정이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때였다. 장성택 계보는 이 시기에 부침을 겪기를 반복하는데 김정일 정권 말기에 외곽으로 밀려났다가 김정은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초기에 화려하게 복귀한 후, 다시 2년만에 같은 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피의 숙청을 당하게 된다. 영화 ‘브이아이피’의 살인마 김광일이 북한 정권의 흐름, 그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 기둥이다.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속에서 국정원과 CIA가 움직이는 구조, 남북한 형사가 맞붙는 국면은 사실상 북한 정권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관계,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전형적인 국제 정치학이 개입된다. 국정원 요원 박재혁과 그의 상사 혹은 부하 직원들 모두, 국가의 이익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조직의 이기(利己),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생존만이 중요할 뿐이다. 채이도의 경찰 조직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들에게 애국이니, 사회 정의니 하는 거대담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브이아이피’의 스토리 텔링은 이들 조직간 암투가 실제로 그렇게 벌어지고 있겠구나 하는 짐작과 공감을 불러 일을 킬 만큼 매우 그럴듯하게 진행된다. 무엇보다 이들 조직에 대한 박훈정의 취재력은 남다른 데가 있다. 국정원, 경찰, 고위급과 실무팀의 용어, 이들이 쓰는 말투가 착착 귀에 감길 정도다. 영화는 문어체(文語體)가 아니라 구어체(口語體)로 만들어져야 한다. ‘브이아이피’의 이야기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갖게 하는 데는 그렇게 구어로 엮여지는 인물 간의 관계 설정과 그 현실감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을 극적으로 모사(模寫)할 때 동의를 얻는다. ‘브이아이피’가 영화 내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북한 사회 내부에서 지난 몇 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퇴폐적 부르주아 범죄 금기령’도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두텁게 만든다. 북한 국가 보위성은 2016년 문건 ‘620 상무 군중 정치사업 제강’을 발표했는데 북한 내에서 만연하고 있는 포르노와 마약 범죄, 강간, 윤간 범죄 등에 대한 주민 의식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브이아이피’의 설정이 남다른 점은 북한 사회를 권력 구조에 대한 관찰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내면’의 극심한 변화를 파악하려 했다는 데에서 찾아진다. 김광일 같은 살인마가 활개치고 있다는 것인데 북한을 극도의 통제 사회로 인식해 왔던 사람들에겐 충격적이다 못해 신선한 얘기일 수 있다. ‘브이아이피’는 바로 그 점을 건드린다.

영화 ‘브이아이피’.
박훈정의 작품답게 이야기가 촘촘하다 못해 씨줄 날줄로 완벽하게 엮여 있다는 것이야 말로 ‘브이아이피’의 최대 장점이다. 캐릭터를 지나치게 입체화 시키려는 과욕이 일정한 불만을 일으키지만(채이도는 왜 그렇게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까. 박재혁은 왜 그렇게 늘 피곤하고 지친 얼굴일까. 김광일은 왜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악마같을까. 보안성 요원 리대범은 남한에 잠입했음에도 저렇게 북한 사람 같으면 어쩌나 등등) 그 대신 조연들(박재혁의 국정원 상사, 채이도가 소속된 경찰서 서장 등)이 탄탄한 연기로 이들을 뒷받침 한다. 그 하모니가 좋다. ‘신세계’ 때의 장기가 그대로 살아난다.

‘브이아이피’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남북한 공히 정의가 종국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임을 보여준다. 그 통렬 함이 가슴 속을 뚫고 들어 온다. 그럼에도 그 찔리는 맛이 그리 나쁘지 않다. 변화와 개혁은 올바른 인식에서 오기 때문이다. 박훈정이 노리는 것 역시 바로 그 점일 것이다. 박훈정은 개인이나 개인들의 얘기(‘혈투’ ‘대호’)보다 집단의 얘기를 더 잘 그린다. 이번 ‘브이아이피’는 그런 그의 장점이 빼곡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영화는 장점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단점에 앞서. 물론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것은 순전히 관객들이 몫이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 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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