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은 한국 프로야구 창설에 깊이 간여했던 주역이었다. 방송사로서 많은 중계를 통해 프로야구 인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당시 정부가 MBC에 내린 엄명이었다.
지금 보다는 덜하지만 당시에도 가장 많은 유망주나 스타 플레이오들은 서울에서 많이 배출됐다. 청룡은 선수 구성에 대한 걱정 없이 좋은 선수들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적인 신통치 않았다. 1983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지만 보너스에 대한 갈등 탓에 팀 워크가 무너지며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됐다. 당시만 해도 언제든 다시 우승에 도전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청룡은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팬심은 달랐다. 서울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다. 당시 서울에 살던 국민학생(당시엔 초등학교란 이름은 없었다)들은 각각 OB점퍼와 청룡점퍼를 입은 아이들로 나뉘었다.
OB는 6개구단 중 가장 먼저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다. 그리고 가장 메이저리그에 가까운 팬 서비스를 하는 팀이었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1986년 3위를 차지한 것이 83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늘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하기룡 이광은 김재박 김용수 정삼흠 등 정상급 선수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음에도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구조적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청룡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MBC 스포츠국 야구부에 속해 있었다. 프로 구단으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있어 타 팀보다도 훨씬 행보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내부적으로 알력도 심했다. 현장과 프런트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 들도 많았다. 특히 좋은 신인 선수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점에서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1988년엔 이용철이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두 번째 신인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청룡의 삶은 끝내 미생에 그쳤다. 한 번도 높게 승천하지 못한 채 89년 막을 내렸다.
그리고 1년 뒤, 1990년 청룡을 이어 받은 LG는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의 가슴에 눈물 비를 뿌렸다. 이렇다 할 전력 보강 없이도 이뤄낸 완벽한 우승. 그만큼 강할 수 있는 팀이 청룡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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