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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랭킹 70위의 개최국 러시아는 10위 스페인과 연장까지 120분 혈투를 치러 1-1 무승부를 이룬 뒤,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했다.
크로아티아도 16강전에서 덴마크와 전·후반과 연장까지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2로 이겨 20년 만에 8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승부차기는 ‘11m 러시안 룰렛’이라고 불리는가 하면 ‘신의 장난’ 또는 ‘악마의 놀이’라고도 한다. 120분간 치열하게 싸운 뒤 결국 키커와 골키퍼의 일대일 대결로 희비가 갈리는 것이 너무 잔인하고 공평하지 않다는 이유로 월드컵 마다 폐지 주장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승부차기로 지지만 않는다면 이보다 더 재밌는 볼거리도 없다.
승부차기는 이론상으로 보면 키커가 이기는 승부다. 골키퍼와 키커의 거리는 11m. 키커의 발을 떠난 공이 골라인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약 0.4초인 반면 골키퍼가 볼을 보고 몸을 날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0.6초다. 키커가 구석으로만 잘 차면 거의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월드컵에서 실제 승부차기 성공률은 70% 안팎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비슷하다. 러시아-스페인전에서 양 팀 9명의 키커 가운데 스페인 선수 2명이 실축했다. 크로아티아-덴마크전에선 양 팀 키커 10명 가운데 절반인 5명이 골을 넣지 못했다.
키커가 절대적으로 유리함에도 골을 넣지 못하는데는 심리적인 요인이 크다. 골문을 계속 지키는 골키퍼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여러차례 슈팅을 막을 기회가 있고 승부차기 특성상 막지 못하더라도 비난을 덜 받는다. 반면 키커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중압감 면에서 골키퍼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노르웨이의 스포츠심리학자인 가이르 요르데 박사도 “심리적 스트레스가 승부차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그 뒤로 기술, 육체적 피로 등을 꼽았다. 축구선수들이 승부차기 때 1번과 마지막 5번 키커를 가장 기피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감독은 가장 주장이나 최고 스타플레이어 등 가장 믿을만한 선수를 1번 또는 5번에 배치한다,
월드컵 승부차기에서 가장 강했던 나라는 ‘전차군단’ 독일이다. 역대 4번의 승부차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승률 100%를 자랑한다. 4차례 승부차기 18번의 킥 가운데 17번을 성공하는 경이적인 성공률을 기록했다.
반면 승부차기가 가장 두려운 나라는 잉글랜드다. 역대 월드컵에서 3번 승부차기를 펼쳐 모두 졌다. ‘승부차기 저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와의 악연을 끊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잉글랜드 대표팀은 러시아로 오기 전 선수들은 심리측정 테스트를 거쳤다. 지원자를 뽑던 과거와 달리 승부차기 순번도 1∼23번까지 미리 정했다.
심지어 잉글랜드는 선수들이 승부차기 때 다른 나라보다 서둘러 공을 찬다는 점을 분석해 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연습까지 했다. 심장을 강하게 단련하기 위해 승부차기와 비슷한 상황에서 골프 퍼트를 하는 훈련도 했다.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감독은 “승부차기는 운이나 우연이 아닌 압박감에서도 펼치는 선수 개인의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그 역시 유로 1996 당시 승부차기를 실축해 졌던 아픔이 있기 때문에 저주 탈출에 더욱 신경쓰는 모습이다.
승부차기는 골키퍼를 영웅으로 만드는 결정적 기회이기도 하다. 러시아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예프는 4년전 브라질 월드컵 한국전에서 이근호의 슈팅을 잡았다가 뒤로 빠뜨려 ‘기름손’이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 16강전에선 스페인의 승부차기를 두 차례나 막아내며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