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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송지훈 기자] 올 시즌 FC서울에 K리그 우승트로피를 안긴 넬로 빙가다 감독이 결국 팀과 결별수순을 밟는 모양입니다. 포스트시즌 종료 직후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빙가다 감독이 14일에 소리소문도 없이 한국땅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팬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 또한 동영상으로 처리했습니다. '승장'의 뒷모습치고는 참 쓸쓸합니다.
기실 빙가다 감독이 서울에 머문 1년간 이룬 업적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지난 2006년 이후 4년 만에 컵대회 우승을 이끌며 시동을 걸더니 시즌 막바지에는 'K리그 우승'으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이른바 '더블'을 달성한 것이죠. 정규리그를 1위로 마치며 내년 시즌 AFC챔피언스리그 출전권도 일찌감치 확보했습니다.
지난 2004년 안양에서 서울로 연고를 옮기며 '제2의 창단'을 선언한 서울에게 K리그 챔피언트로피는 늘 '가깝고도 먼 당신'이었습니다. 꾸준히 리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면서도 정작 포스트시즌에서는 죽을 쑤는 패턴이 매 시즌 반복됐기 때문이죠. 빙가다는 FC서울 출범 이후 6년, 안양LG시절까지 포함해 10년간 이어져 온 '무승의 한'을 풀어낸 '서울의 은인(恩人)'이었습니다.
때문에 서울이 빙가다 감독과의 재계약에 뜸을 들인다는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 적지 않은 수의 서울 팬들이 구단 측의 처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서울의 골수팬'을 자처한 어떤 분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를 내치는 팀이 어디 있느냐'는 요지의 이메일을 제게 보내셨더군요. 서울이 빙가다 감독과 하루 빨리 재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어떤 형태로든 압력을 가해달라는 뜻이었겠죠. 관련해 '우승을 이끈 빙가다 감독이 엄청난 수준의 연봉 인상을 요구하면서 구단과 사령탑의 사이가 틀어진 것 아니냐'라는 관측도 나왔습니다.
물론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죠. 하지만 사령탑의 거취와 관련한 서울의 고민은 기실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단과 빙가다 감독 간의 이상기류를 제가 처음 감지한 건 한창 시즌이 진행되고 있던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서울이 한창 홈 연승 행진을 이어가면서 신바람을 낼 때였죠. 서울의 구단 고위 관계자와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 분이 제게 묻더군요.
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제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질문이 조금 바뀌어 다시 날아들었습니다.
"빙가다 감독의 축구가 FC서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새 질문에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부연을 들려주며 빙가다 감독의 전술적 색채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서울이 전임 사령탑 세뇰 귀네슈 감독의 향기에 여전히 심취해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귀네슈 전 감독은 3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FC서울에 '공격 혼'을 불어넣은 인물로 회자됩니다. 이전에 지휘봉을 잡은 바 있는 조광래-이장수 감독이 나란히 선수비-후역습을 기반으로 한 축구를 선보인 것과 달리 귀네슈 감독은 시종일관 '공격 앞으로'를 외쳐 K리그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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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모으기 위한 귀네슈 감독의 노력 또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귀네슈 감독은 더 많은 팬들이 경기장에 와서 성원을 보내주면 선수들이 더욱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팬 관련 행사에 선수단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켰습니다. 이전까지 'K리그에서 가장 뻣뻣한 구단'으로 손꼽혔던 서울은 귀네슈호 출범 이후 팬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는 팀으로 변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흥행'에 대한 서울의 목표치 또한 꾸준히 상향 조정됐습니다. 올 시즌 서울은 50만 관중 시대를 열었고, 정규리그서 경기당 3만2,576명의 팬들을 유치했습니다. 공히 K리그 최초이자 최다기록입니다. 하지만 서울 구단 관계자들은 "아직 멀었다"고 입을 모읍니다. 정규리그서 매 경기 5만 명이 관중석을 찾는 팀을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라고 하더군요.
결과적으로 빙가다 감독은 전임 감독 재임기간 중 한껏 높아진 서울의 눈높이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해 낙마한 셈이 됐습니다. 우승 트로피조차도 '결격사유'를 무마시키지 못한 셈이니 서울이 제법 단호한 기준을 마련한 모양입니다.
중 국의 고서 삼국지연의에는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쫓아낸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킨 사마의가 제갈량을 본 떠 만든 나무인형을 보고 혼비백산해 말머리를 돌려 도망친 사건이지요. 귀네슈 감독의 후광에 가려져 우승을 이뤄내고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한국땅을 떠난 빙가다 감독의 처지는 어찌보면 사마의와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이 새 사령탑으로 어떤 인물을 맞이할 지, 새 감독은 우승 이력까지 추가하며 더욱 높아진 서울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