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10월의 마지막 주 런던의 통치자는 여왕이 아니었다. 편의점과 신문 가판대의 잡지 표지는 물론, 이 도시의 명물인 2층버스 광고판 역시 푸른 눈의 금발 스파이가 지배하고 있었다. 대니얼 크레이그(Craig·40). 007시리즈의 22번째 작품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한국 개봉 11월 5일)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다.
28일 런던 도체스터호텔에서 세계 각국의 기자들과 함께 그를 만났다. 크레이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에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따랐다. 오른손은 팔걸이 붕대로 고정시킨 채였다. 대역 없이 격투 장면을 촬영하다가 부상을 당해 어깨 수술을 받았다는 것. "1~2주일 뒤면 (붕대를) 벗을 수 있다"며 미소를 지었지만, (녹는) 나사 7개를 어깨에 박아 넣을 만큼 큰 수술이었다고 한다. 그는 버스터 키튼(Keaton)이나 찰리 채플린(Chaplin) 등 무성영화 시대의 영웅들을 호명하면서 "CG(컴퓨터그래픽)나 대역에 의지하지 않고 주인공이 직접 자기 몸으로 부딪칠 때 연기는 현실감을 획득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퀀텀 오브 솔러스'는 크레이그가 숀 코너리,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은 제6대 본드로 낙점된 뒤 찍은 두 번째 007영화. '카지노 로얄'(2006)의 속편이다. 총제작비의 네 배인 무려 6억달러(약 9000억원)의 흥행 수입을 기록한 '카지노 로얄'의 대성공 덕분에 지금은 쑥 들어갔지만, 처음 007로 선정되었을 당시에는 전 세계 '안티'들의 융단 폭격을 받았다. "너무 젊고(1962년 007시리즈 탄생 이후 태어난 첫 본드), 너무 튀는 머리 색(6명의 본드 중 유일한 금발)인데다 심지어 악당처럼 생겼다"는 비난이었다. 이제는 한결 여유를 되찾은 이 금발의 젊은 본드는 "그때 내 소원은 '제발 영화를 보고 나서 비판해 달라'는 것이었다"면서 "지금에서야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악플이 무서워) 인터넷이나 타블로이드 신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번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007은 미녀들과 침대에 올라가지 않는다. 바람둥이 본드를 사랑했던 관객이라면 실망하겠지만,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배신한 사랑에 눈물 흘리고 상처받는 가련한 영혼이다. 그는 "살인 면허를 가진 수퍼 히어로가 아니라 본드도 우리와 똑같이 피 흘리는 영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전의 선배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007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면서 불안한 내면과 억눌린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실력파 연기자 대니얼 크레이그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연극으로 데뷔한 뒤 '로드 투 퍼디션'(2002) '실비아'(2003) '뮌헨'(2005)으로 연기력을 검증받은 실력파 영국 배우. 007이라는 초대형 브랜드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 그는 "개인적으로 지난 2년간 나는 변했다. 확실히 삶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됐다. 하지만 애초에 제임스 본드 역에 도전한 이유가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른 시각을 갖기 위해서였다. 걱정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다"고 웃으며 말했다. 푸른 눈의 스파이가 이번에는 좀 더 익숙한 동작으로 다시 물을 유리잔에 따랐다.
▲ 고뇌하는 스파이의 내면 그려 '퀀텀 오브 솔러스'는
'퀀텀 오브 솔러스'는 최근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유행이 된 흥행 문법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컴퓨터그래픽을 최소화하고 아날로그 액션으로 승부할 것, 그리고 작가주의 감독을 기용해 캐릭터의 입체감과 드라마의 밀도를 최대한 높일 것. 영화는 전작 '카지노 로얄'(2006)의 정확히 한 시간 뒤부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인 베스퍼가 자신을 배신한 뒤 죽었다고 의심하는 007은 불안한 내면을 지닌 슬픈 스파이. 볼리비아 천연자원을 탐내는 비밀 조직의 우두머리 도미니크 그린(매튜 아말릭)을 쫓다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아름다운 여전사 카밀(올가 쿠릴렌코)을 돕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