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성의 저니맨④]인생을 바꿔 준 피묻은 한방

  • 등록 2010-01-07 오후 12:26:26

    수정 2010-01-07 오후 12:33:07

▲ 삼성 시절 최익성(오른쪽). 그의 출발은 사진처럼 주변인이었지만 점차 팀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야구의 격언 중에 매우 유명한 것 중 하나. "한 경기서 최소 3번의 찬스는 옵니다."

실제로 야구를 보다보면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경기를 열심히 쪼개 살펴보면 아무리 강한 상대와 붙어도 3번 정도는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인생과 매우 닮아 더 매력적이라는 야구. 때문에 인생에서도 3번의 기회는 찾아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막상 살다보면 선뜻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돈 없고 빽 없는 평범한 우리네 삶에서 '역전의 찬스'는 언감생심. 그저 버텨내기만해도 용하다 싶을 때가 더 많다.

'최익성의 저니맨'은 이제 잠시 성공을 이야기 하려 한다. '지독한 불운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그에게도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최익성의 인생에서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네 삶 속에서도 한번 기대해볼만 하지 않을까.


2군 첫해, 난 시즌 막판까지 2군 타격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루는 감독님이 물으셨다. "2군 타격왕 하면 소원이 뭐냐." 난 거침없이 대답했다. "1군에서 한 타석이라도 서 보는 것입니다."

타격왕이 확실시되던 어느날, 감독님 호출이 있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 "오늘 1군 가라." 난 정신이 없었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1군 경기 전 훈련이 끝난 뒤 나는 탈진 상태였다. 내겐 너무도 긴 하루였기 때문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삼성은 해태 이강철 선배의 역투에 막혀 0-10으로 지고 있었다. 8회였나 9회였나,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렸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구름을 걷는 듯 했다. 하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여전히 이강철 선배. 눈 감고 떠 보니 볼 카운트 2-0였다. 그리고 3구째 나름 대비하고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포수 파울 플라이.

어디선가 "뛰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덕아웃에 돌아온 뒤 코치님께 치고 달리지 않았다며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2군행 통보.

나중에 알고보니 김충 2군 감독님이 "2군에서 타격왕 하는 선수가 있는데 1군서 뛰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간청해 이뤄진 1군행이었다.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다. 다들 내 1군 경험은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단은 어쩔 수 없이 군에 입대해야 했다. 난 지금은 사라진 6개월 단기사병이었다. 홀어머니 모시고 산 덕(?)에 혜택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 역시 아버님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짧은 군 생활을 마치고 팀에 복귀한 나는 다시 2군에서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러가며 시즌이 끝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나면 2군 선수들에겐 인생이 걸린 기로에 서게 된다. 정리되는 선수들의 명단이 발표되는 날이다.

삼성은 95시즌이 끝난 뒤 미국으로 교육리그를 보냈는데 그 명단에서 빠진 선수는 해고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투수가 호명되고 이어서 포수. 내야수를 거쳐 외야수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명. "최익성". 내 인생이 늘 그렇듯, 난 맨 마지막에서야 선택을 받으며 선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평소 동경하던 미국 야구를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난 그렇게 치열한 45일을 보냈고 '교육리그 최고 유망주'라는 멋진 타이틀을 거머쥐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 한국에선 큰 변화가 있었다. 삼성에 백인천 감독님이 부임하신 것이었다. 1996년 첫 팀 미팅. 난 매우 익숙한 한 마디를 듣게 된다.

"난 여러분을 똑같이 평가하고 지켜보겠습니다. 이름이나 이전 성적은 중요치 않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선수가 경기에 나서게 될 것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엔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난 나만의 방식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객관적인 내 위치는 60명 중 50등 정도였다. 아무리 이름값을 따지지 않는다해도 그 차이는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백 감독님은 훈련이 끝나면 선수 한명을 지목해 선수들 앞에서 파이팅이나 구호를 이끌어내도록 시켰다. 이 순간만은 모든 선수에게 반말을 해야 했다. 난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 난 선수들 앞에서 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감독님께 물었다. "감독님, 제 이름 아십니까." 백 감독님은 약간 당황하신 듯 하더니 껄껄 웃기만 했다.

난 외쳤다. "너희들, 감독님이 내 이름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 내 이름을 목청 높여 10번 부르고 끝낸다." 그날 삼성 훈련장에선 처음으로 "최익성"이란 이름이 멀리 울러 퍼져나갔다. 내가 조금이라도 감독님께 더 다가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지훈련 초반, 난 한차례 고비를 맞았다. 타격보다 더 엉성했던 내 캐치볼을 비웃는 선배의 농담 한마디에 흔들려 버렸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조바심이 날 약하게 만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철성 코치님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무사히 캠프를 마칠 수 있었다.

시범경기서는 잠시 2군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름만 보고 뽑는건가'싶어 또 한번 좌절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기회가 왔다. 1군 주전 선수의 부상이 생기자 내가 가장 먼저 1군에 불려올라갔다.

1군 합류 첫날, 난 선발 출장의 기회까지 얻었다. 상대는 당대 최강 좌투수 이상훈선배였다. 결과? 두타석 내리 삼진. 그리고 세번째 타석은 내야 플라이였다.

다행히 이후로도 기회를 제법 얻었다. 내 보직은 좌완 투수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한동안 난 이상훈 송진우 조규제 구대성 등 최강의 좌완 투수들과 맞서야 했다.

빙그레와 경기였다. 0-1로 뒤진 8회. 구대성 선배를 상대로 1안타에 묶인 상황. 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불같은 강속구에 움찔한 사이 볼 카운트 2-0. '또 이렇게 삼진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그 짧은 순간, 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보고 쳐도 못 치는거 눈 감고 쳐보자. 날 만만히 볼테니 정면승부 하겠지. 하나,두~울,셋 타이밍 맞혀 배트나 힘껏 휘둘러 보자.'

이것 저것 아무 생각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딱'. 공이 배트에 맞았다. 순간 손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 내가 구대성을 상대로 홈런을 친 것이었다. 그것도 프로야구 1군 첫 안타를 말이다.

기쁨도 잠시. 10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난 아무것도 아닌 성적표를 들고 다시 2군으로 내려왔다.

실망이 컸다. 솔직히 아프다는 핑계로 한동안 훈련도 게을리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1군 복귀 콜이 떨어졌다. 더 이상 기회를 놓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LG와 잠실 3연전이었다. 첫 경기서 대타로 나서 2루타. 2차전은 3만 관중이 들어찼다.

우리가 1-3으로 뒤진 9회초 2사 만루. 감독님 목소리가 들렸다. "대타 최익성" 마운드엔 내 데뷔전을 망쳐(?)버린 이상훈 버티고 있었다. 또 2스트라이크에 몰렸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계속 파울을 쳐내며 저항했다. 라인쪽으로 파울 타구를 날리고 1루로 달려나가는 순간, 왼쪽 장딴지에 경련이 생기며 그대로 끄러지고 말았다.

잠시 훈련을 게을리했던 탓일까. 짧은 순간, 후회를 했다. 하지만 그대로 쓰러져 있을 순 없었다. 트레이너가 달려와 나를 업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바늘로 찌르면 경련이 멈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달라"고 외쳤다.

긴급 처방 후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다. 좌측으로 날아가는 파울. 1루로 달려나가던 난 또 쓰러졌다. 이번엔 오른쪽 장딴지였다.

다시 트레이너에 업혀 덕아웃으로 돌아와야 했다. 난 감독님을 향해 외쳤다. "저 빼지 말아주세요. 칠 수 있습니다."

심판들까지 덕아웃으로 와서 빨리 선수를 교체하라고 했다. 그러나 감독님은 날 기다려줬다. 다시 바늘로 허벅지를 수차례 찌른 뒤 타석에 섰다.

그게 몇번째 공이었을까. 난 이상훈 선배의 공을 받아쳐 유격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트레이너 부축을 받으며 덕아웃에 들어온 난, 한동안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스쳐간 건지, 좋은 건지 나쁜건지도 몰랐다.

숙소에 돌아와서야 기쁨이 몰려왔다. 며칠 뒤 김용철 타격 코치님이 날 불렀다. "너 1번타자 칠 수 있겠냐. 감독님이 너 1번 타자로 쓰고 싶다신다. 1번 타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있어라."

다른 선수들은 이럴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난 세상을 모두 얻은 듯 했다. 그리고 곧바로 1번타자가 무엇인지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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